그럼 이제 금강경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간단히 되짚어 보겠습니다. 부처님
께서 금강경을 설하시게 된 계기는 부처님의 대 제자인 수보리가 제기한 질문 즉 “갓 발
심하여 불과를 구하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부처님의 지견도(知見道)에 안주해야
하며 어떻게 내면의 번뇌와 망념을 항복시켜야 합니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설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몇 가지는 제자들
이 수행 증득에서 당장 직면하게 될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가장 집착하기 쉽고 그 지견
(知見)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기 쉬운 영역들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선 중생을 널리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발원하여 불과를 이루고자 염원할 때는 자신이 마땅히 생명의 근원으로 회
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에 서서 보면 우리의 ‘마음’은 우주 만물
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누군가가 불과를 이루고자 발원했다는 것은, 이와 더불어
우주의 일체 유정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자 발원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안과 밖은 하나
와 같으니까요. 그러므로 부처의 과위에 서서 본다면, 대승 보살이 발심하여 불과를 구하고
자 할 때는 마땅히 우선 삼계육도의 일체 유정 중생을 평등하게 제도하겠다고 원을 세워야
하며, 중생을 윤회에서 구제하기 위해 성불해야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 발심은 수행 증득의 한 방법으로 발심하는 순간부터 바로 아집을 파하는 것이 그 목적
입니다. 가령 우리의 마음속에 일체중생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면, 다음
과 같이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마음은 때로는 보살처럼 자비롭다가도 때로는 아수라처럼 분
노하고 화내고 질투합니다. 때로는 천인처럼 성스럽고 순결하며 완벽을 갈구하고, 때로는
축생처럼 몸과 마음이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저한도의 예의마저도 버린
채 제멋대로 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는 지옥의 중생 같고 음식물이나 감
정에 굶주릴 때는 아귀도의 중생 같으며 명예와 이익, 감정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려 고통스
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손을 떼지 못할 때는 인간 세상의 사람 같고 선정의 기쁨
속에서 빛으로 화하는 경계를 즐길 때는 색계의 천인 같으며 사공정(四空定)에 머물러 있을
때는 무색계의 천인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심식(心識)을 관찰해보면, 삼계육도 일체중생이 나타내는 모든 현상
이 마음속에 있음을 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윤회에서 해탈시켜 성불하게
하는 것은 바로 육도 중생의 마음을 제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부
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중생인 난생·태생·습생·화생과 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
두 제도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
우리의 심식에는 일체 유정 중생의 심식을 포함하고 있기에 우리가 성불한다는 것은 사실
일체중생을 모두 온전한 열반에 들게 하는 일입니다.
중생이 한량없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 현상 또한 끝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근원
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데, 어떻게 해야 수행 길에 안주하여 번뇌·망상·잡념이 없도록 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우리가 삼계육도의 모든 상에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안
주가 가능해져 고민이 가져다주는 장애 없이 순조롭게 회귀하여 우리의 자성여래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세생생의 습기와 욕망이 우리를 견인하여 우리로 하
여금 수많은 분별·인지·집착을 일으키게 합니다. ‘마음의 의식’ 속에 잠재된 육도 중생의 씨
앗들은 인연이 닿기만 하면 곧 싹트고 꽃피며 열매를 맺습니다.
불법에 갓 입문하여 수행 증득을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이런 ‘인연’에 무력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부동하라.”고 가르쳐주십니
다. 이 경우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 느낌 그리고 몸의 육근이 보고 들은 것, 육근
이 감지하고 분별하는 일체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우선 이러한 것들을 환상 경계로 간주해야 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어느 한 곳을 떠나려
할 때 그곳의 물건을 움켜쥐고 내려놓지 않는다면 결코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의 마음이 삼계육도를 떠나야 하므로 마음에는 그 무엇에도 미련
이나 집착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삼계육도의 일체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길 위의 풍경처럼
분명하게 인식하되, 마음속에서는 그것들을 환상으로 여겨 집착하거나 취사 선택하지 말아
야 하며,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마음은 부처님 견
지에 안주하여 근원으로 회귀할 수 없게 됩니다.
경문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성불하는데 있어 가장 크게 집착하게 되는 네 가지 상
즉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생을 깨뜨리는 데 주력하고 계십니다. ‘아상’은 ‘자아’에 대한 인식
으로서 부단히 생멸하고 변화하는 ‘몸과 마음’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나’
라는 껍데기는 우리 모두가 집착하는 걸림돌입니다. 자아가 느끼는 감각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에게 영향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탐·진·치·만·의를 일으키게 하여 우리를 이 인간 세상
에 묶어둡니다.
‘인상’은 바로 타인에 대한 분별과 인식을 가리키는바 예를 들면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등으로 그로 인해 온갖 견해와 취사 선택 그리고 느낌이 일어나 갖가지 번뇌와 부자연스
러움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제어하려
고 합니다.
‘중생상’은 바로 우리가 인식하는 삼계육도의 유정 중생에 대한 관념입니다. 우리는 이런
중생들이 각기 다른 모습과 습성이 있다고 여김으로써 그들의 차별상에 휘둘려 일체의 유정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다수 사람의 중생상은 사실 광대한 시
공간에 대한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축생도를 제외한 다른 궤도의 중생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다만 우리 습기의 씨앗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습기와
욕망에 미혹되고 끌려가는 것 자체가 곧 삼계육도의 일체 유정 중생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
것입니다.
‘수자상’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그 누구나 모두 생명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
하며 불로장생을 꿈꿉니다. 이는 만물의 생멸상에 집착하는 인간의 이러한 성향은 고정된
시공간 관념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생사상(生死相)에 집착하는 사람은 설령 부
처의 열반 경계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단순히 더 이상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 상태
로만 여기는 데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선남자 선여인이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발심하였으나 안주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회귀를 방해하는 근본적인 네 가지 상 즉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먼저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여기고, 이러한 것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기에 속세에서 보살은 자신을 제도하고 남을 이롭게 하지만 사실 실로 제도할 ‘나’도
없고, 제도할 ‘중생’도 없다고 여기는 이런 견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둘째, 부처님께서는 대승 보살의 출리(出离)인 상에 머물지 않으면서 일체를 보시해야 하
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는 대승 보살이 수행에서 ‘자아’를 타파하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보살이 성불하려
면 우선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이 바로 출리심(出離心)으로서 이는 심신 안팎의 일체를 버
리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곧 삼계육도를 떠날 수 있습니다. 만약 여전히 삼계육도의 일
체에 미련이 남아있다면 어떻게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삼계
육도에서 방랑해야겠지요. 어떤 식으로 버리고 떠나야 할까요? 보시하고 떠날 때 일체를 모
두 꿈과 같고 환상과 같아서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음을 인지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상에 머물지 않는 버리고 떠남’입니다.
보살이 ‘자아는 실재한다’거나 ‘보시하는 모든 것이 실재한다’고 여기기만 하면 그 보시는
다만 인간 세상의 선한 업에 지나지 않아, 다만 선한 과보를 얻는 것에 그칠 뿐 불과를 이
룰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보살이 보시하면서 헌신과 상실 그리고 희생, 봉사를 느껴
이 수행 길에서의 정진을 아주 힘들어하는 등 번뇌와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면 여래의 지견
도(知見道)에 안주하여 순조롭게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기가 몹시 어렵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보살의 ‘출리심(出離心)’이란 삼계육도의 일체가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보시
를 닦고 이를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진정한 떠남[出離]입니다. 이런 보시의
공덕이야말로 허공을 채우고 법계에 두루 퍼져 중생을 윤회라는 환상 경계로부터 깨어나게
합니다. 실제 수행 증득 과정에서 가령 어느 수행자가 심신 안팎 일체가 모두 허망하여 실
체 없음을 깨닫게 되면 버리고 떠나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대부분 수행자는 우선 이러한 견지가 있고 난 뒤에 천천히 보시를 닦게 됩니다. 베
풀지 않던 데로부터 베풀게 되고, 여기에 진일보하여 베풀면서도 그 보답과 이해를 바라지
않는 데로까지 나아가면서 공덕이 점차 원만해지게 됩니다. 탐욕과 득실심이 끝내 다했을
때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우리가 느꼈던 모든
아름다움·가치·작용·의미 등은 사실 상에 집착한 우리 마음이 그것들에 부여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에 머물지 않는 버리고 떠남’은 보살의 수행 방법입니다. 보살은 이렇
게 부처님의 정지견에 기반하여, 버리고 떠나므로 인해 오는 ‘득실심’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공덕이 점차 원만해져 삼계육도의 환상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게 됩니다.
셋째, 부처님께서는 불과 성취를 발심한 그 누군가가 부처상에 집착해서는 자성여래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수행자는 의식 속에서 ‘여래’를 어느 특정된 형상으로 고정해 두고 그 모습으로 변모
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여래는 시공간에서 각양각색의 형상을 시현하기는 하나 그
모든 형상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인연에 따라 시현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발심하여 성불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모든 중생에게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불성을 보아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여래가 시공간에서 시
현한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이라면 천계의, 신통력과 신변
이 있는 중생들의 경우 직접 부처님의 모습으로 변모하면 그만이지 더 수행할 필요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불의 길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처의 고정된 상이 있다면, 여래의 경계도 알 수 없고 불과도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자아상과 중생상은 물론 부처상에
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곧 여러분과 중생의 본래 모습은 모두 여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 초기에는 마음이 평등하지 못해 온갖 차별상이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중생상이 생겨
자신을 범부 중생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속에 하나의 경계로서 이루고자 하는
부처상이 생기고 이로 인해 원만한 불과라는 것은 범부상에서 부처상으로 변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모든 상이 허망하다고 중생들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자아의 범부상과 중생상이 있어서는 안 되며 물론
이루고자 하는 부처상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성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모든 상을 떠나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여래를 볼 수 있
습니다.
넷째, 부처님께서는 그 누군가가 발심하여 불과를 성취하려고 한다면 불법상(佛法相)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비법상(非法相)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위해 설법하십니다. 일례로 병과 약의 경우처럼, 병이 다르면
약도 다른 법이고, 병이 나으면 약도 역시 버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부처상이 없고 아
상이 없다면, 설법하는 자도 법을 듣는 자도 없기에 법상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법을 얻었다’거나 ‘어떤 특정한 법은 불법이다’라는 지견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일체를 부정하신 것으로 이해하여 일체가 허망하기에 불법도 허망하므로 불법
공부도, 수행과 증득도, 공덕도 필요 없이 우주 만상과 윤회의 환상 경계에서 깨어날 수 있
다거나 의지하여 배울 만한 법이 없다고 여기는 것 또한 비법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불법상’에 집착하면서 불법을 배운다면 의식 속에 허다한 불교적인 개념과 문자만 늘어
날 뿐만 아니라 분별하는 지견이 가중되어 여래의 과위 경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께서 법상에 집착해서도, 비법상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고 설하시며 다음과 같이 일러주셨습
니다.
“만약 중생의 머릿속에 ‘상을 깨뜨려야 한다’는 지견만 가득 차 있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
고 바로 집착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이는 곧 법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혹은 집착을 내려놓은
뒤, 다시 자신이 배운 그 법만이 진정한 불법이며 자신이 불법을 얻었다고 집착한다면, 이
또한 법에 대한 집착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는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등에 짊어
지고 뭍에 오르는 격이라, 여전히 부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모르는 것이다.”
다섯째, 부처님께서는 그 누군가가 발심하여 불과를 성취하려면 경계 속에서 얻고자 하는
‘과위’가 있어서는 안 되며, 부처의 설법 역시 정해진 법이 있어 그것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누군가가 비록 부처상에 집착하지 않아 부처는 형체가 없다고 여기기는 하지만, 사실
문자상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형체가 없다’는 이것조차 하나의 상이 됩니다. 만약 그
누군가가 부처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가 더 나아가 무상정등정각의 과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불은 모든 ‘구하고자 하는 마음’, ‘얻고자 하는 마
음’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무상정등정각’은 얻을 수 있는 그 무엇
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이 어떠한 경계이든 아니면 원만한 증량이든 구하고자 하는 마음, 얻
고자 하는 마음만은 시종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지금, 이 순간에 여래의
진공 경계로 돌아갈 수 없으며 성불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평소에 그대들을 위해 갖가지 법문을 설하지만 ‘불법’이라 이름할 정해
진 법은 없다. 나의 설법은 무아·무인·무중생의 기반 위에서 행해지므로 가질 수도 없고 언
어로 다 표현할 수도 없다. 각 중생 각자의 집착에 따라 그때그때 근기에 대응하여 가르침
을 펼칠 뿐이다. 중생들의 집착이 서로 달라 설하게 되는 불법도 다르므로 근본적으로 얻거
나 가질 수 있는 고정된 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 한 사람만 이렇게 설법하는 것이 아
니라 다른 모든 성인들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제 막 성불하고자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이 가장 쉽게 틀릴 수 있는 부분
을 지적하신 후, 이 몇 가지에서 만약 부처님의 정지견이 없다면 모든 수행은 보살도를 행
하는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성불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현실 생활에서 대보살들은 범부 중생과 마찬가지로 세간의 일체 사업과 선행을 하고 있으
나, 이를 부처님 정지견의 지침 아래에 행하기 때문에 윤회의 고해에서 벗어나 불과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범부 중생의 경우, 만약 부처님 정지견의 인도 없이 이를 행한다면
그 무엇을 하든 설령 그것이 자선사업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번뇌와 허망함의 고해에 빠지
게 되어 그가 얻게 되는 최상의 결과 역시 기껏해야 인간 세상과 천계의 선한 과보 수준에
그치게 됩니다.
여섯째, 부처님께서는 눈앞에서 법을 듣는 제자들의 수행상태에 근거하여 더욱 적절한 방
식으로 설법하셨습니다.
금강경 서두에서 부처님의 이번 설법을 경청한 큰 비구들이 1,250인에 달했다고 언급
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초과에서 사과 아라한에 이르는 깨달음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아직 그 경계에 이르지 못한 선남자 선여인들은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 정진하고 있었습니
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분별과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얻고
자 하는 마음의 작용 하에 과위 획득에만 집중할까 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초과에서
사과에 이르기까지 그 획득할 과위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지 일일이 질문하셨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아상·인상·중생상·불상·법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라한의 과위상 역시 있
을 수 없습니다. 수보리는 얻을 수 있는 과위가 따로 없다고 하나하나 답했습니다. 부처님
께서는 또 자신을 예로 들어 “옛날에 내가 연등불 처소에서 배울 때도 그 어떠한 법이나 과
위를 얻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문답은 제자들의 ‘얻고자 하는 마음’을 깨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일체 상이 허망
하기는 하지만 이 말이 중생에게는 너무 막연할 수 있기에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시 불상(佛
相), 불법상(佛法相), 아라한상(阿羅漢相) 등으로 구체화하여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상
은 바로 제자들이 얻고 싶어 하는 상일뿐만 아니라 경계 중 쉽게 집착하게 되는 상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상들은 범부 중생이 집착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과 다르지 않습
니다.
일상생활에서 부처님께서 아라한의 각 과위를 인정하셨지만, 그것은 단지 수행과정에서
특정 집착을 파하여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경계와 증량을 그들이 잠시 확보했다고 수긍하
시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임을 명기하고 마땅히 이러
한 지견 위에 서서 불법을 배우고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에서 겪는 모든 일 즉 그 무엇을
얻든 그 무엇을 내려놓든 한낱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을 경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증량은 꿈에서 더 빨리 깨어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의 과위를 말씀하신 후 보살의 공덕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
다.
갓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의 눈에는, 보살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선법을 행하고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정화하며 중생을 널리 제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모든 공덕을 쌓는 것이 자
신의 마음이나 타방의 모든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본래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세계의 만법은 평등하고 불국토는 본래 청정하기에 보살
행은 곧 행함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불하고자 발심한 사람은 보살행과 수미산만큼 거대한 보살의 공덕신상(功德身相)에 집
착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러면 여전히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기’에 여래의 과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일체 상에 집착함이 없이 일체 선법을 행’해야 합니다. 즉 ‘머
무는 데가 없이 그 마음을 내’야만 비로소 보살의 공덕이 공성으로 회귀하여 성불할 수 있
습니다.
현실에서 ‘보살상’이나 ‘공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보살도를 행할 필요가 없다거나
원만한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부처의 과위에서 바라보는 지견을
갖고 이를 실천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야만 비로소 이른 시일 내에 부처의
원만한 공덕과 품성 그리고 증량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사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여덟째,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발심하여 불과를 성취하려면 마땅히 작게는 한 티끌에
서 크게는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
다. 이러한 자세라야만 ‘머무는 데가 없는’ 경계에 서서 보살도를 행하되 사실 행함이 없고,
모든 마음을 내되 사실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머무는 곳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여래의 과
위로 회귀해야만 안심할 수 있어 번뇌와 망념이 없게 됩니다.
아홉째, 부처님께서 파하신 것은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의 공덕상 즉 32상 80종호입
니다. 이는 막 발심한 제자들이 쉽게 갈구하고 욕심내는 형상이기도 합니다.
비록 부처님께서는 일체 상이 허망하다고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이 공덕의 상을 마음속
에서 즉시 지우지 못하고 여전히 이를 구하고자, 얻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
다. 또한 이 몸의 형상이 보살이 누겁의 세월 동안 보살도를 행하고 보시와 인욕을 닦아 얻
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면 경외심이 생겨나 그것 또한 허망하다고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상 또한 허망하며 단지 가명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속 집착을 여기까지 깨뜨리시자, 해공제일(解空第一)인 수보리
의 모든 마음은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일체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이
름한다’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지금 이 말을 듣는 여러분도 마땅히 수보리가 말한 ‘일체
상을 여읜다’가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 상이 허망하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현실에서 일체 상을 내팽개치거나 부정하라는 뜻도 아니요, 일체 상의
진위와 허실에 대해 분별하고 논쟁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일체 상이 허망함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일체 상을 떠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머무는 데 없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것인즉 곧 행하되 행함이 없고 수행하되 수행함이 없으며 얻되 얻
음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발심하여 성불하려는 사람이 ‘일체 상이 허망함’을 안다면 자신의 도를 이루는데 방
해되는 모든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중생을 해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
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보살도에서 보시, 지계, 인욕을 행하는 것도 그리 힘들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자신이 과거에 인욕을 수행하시던 사례를 들어 위의 관점을 보충설명하
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과거 500세 동안 인욕선인으로 수행하였으며 또 어느 한
생에서는 ‘인욕을 수행’할 때 가리왕으로부터 몸이 절단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일체 상은
허망하다’는 견지에 안주하여 아상과 인상 및 참아야 할 일이라는 상도 없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 마침내 ‘인욕행’에서 공성을 보아 결국 원만하게 성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발심하여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를 구하려면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
발심’해야 한다. 모든 상은 허망하기에 일체 상을 떠나면 곧 구하는 바도 없고 얻는 바도
없게 되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출리심(出離心)이고 진정한 보살의 발심이다.”
비록 일체 상이 허망하여 실로 제도할 중생이 없음을 알고 있을지라도 모든 보살은 발심
하여 일체중생의 이익을 위해 보시하고 인욕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는 수행의 방법이며 여
래 과위로의 회귀를 위한 ‘아집 파하기’에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중생
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중생을 이롭게 해야만 공덕이 원만
해져서 성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러 보시를 수행하면
아상, 구하고자 하는 마음, 인상 등이 모두 수행에서의 장애로 작용하여 이로 말미암아 사
람들의 마음은 어두운 곳에 들어있듯이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 작게는 미세
한 티끌 하나, 가볍기는 깃털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기고 거기에
집착하여 매달린다면 그 티끌이나 깃털은 여러분의 눈을 가려 여러분이 눈앞에 있는 전체를
볼 수 없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여러분의 심신 세계를 가득 채워 여러분은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중압감에 시달려 여래의 자유로운 경계로 회귀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
다.
부처님께서는 또 이러한 견지를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왜냐하면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단지 약간의 신통력과 신변의 술법을 구하거나
이번 생의 평안과 건강, 편안함과 즐거움 그리고 불로장생과 안락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
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일체 상은 허망하다’는 견지를 받아들여 모든 상을 떠나 보시·지계·
인욕 등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잠깐에 불과한 인간 세상에서의 영화와 부귀를 포기하라고 한
다면, 그들은 절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견·인견·중생
견·수자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안목에서 본다면 이번 생에 설령 천년을 산다
고 할지라도 그것은 찰나의 탄지(彈指)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위의 견지를 말씀하시면서 또한 제자들에게 만약 누군가가 내가 말한 모든 것
을 깨달아 수행에 정진한다면 그 공덕과 과보가 불가사의하다고 피력하셨습니다. 이렇게 행
한다면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고, 성불하여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으므로 그 공덕과 과보는
당연히 불가사의합니다.
이상은 기본적으로 부처님께서 제자들이 발심 초기에 견해상 범하기 쉬운 오류와 집착하
기 쉬운 상을 지적하신 부분이며, 현재 우리가 보는 판본의 제17품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입
니다.
금강경의 제17품 이후에, 우리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다시 질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
다. 즉 불과를 얻고자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부처의 지견도(知見道)에 안
주해야 하며, 어떻게 내심의 번뇌와 망념을 항복시켜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앞선 부분과는 다소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앞의 17품까지는 제자들
마음속에서 현재 집착하는 모든 상을 하나하나 깨뜨리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부터는 그 상
을 타파한 후 여래의 과위 경계를 논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
들에게 내면을 돌이켜 관조하여 흔들림 없이 모든 법이 무아라는 견지에 서도록 인도하십니
다. 그렇게 된다면 제자와 부처님은 이미 둘이 아니게 됩니다. 제자들이 마땅히 안주해야
할 이 경계를 가명으로 ‘여래의 진공 경계’이라 부르는데 지금부터는 부처님께서 이 경계를
어떻게 설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발심하는 이가 없습니다. 무아·무인·무중생인데 누가 발심하여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겠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연등부처님 처소에서의
수행을 예로 들어, 발심하는 이도 과위를 얻는 이도 없음을 깨달았기에 연등부처님께서 자
신을 위해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를 내리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여래란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
그러함[諸法如義]이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즉 만법은 모두 그러하고 모두 무아·무자성
이며 본성은 모두 여래임을 뜻합니다.
2.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보살이 없습니다. 보살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실체가 없으며,
수미산처럼 큰 공덕의 몸 형상도 없으며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그런 일도 실재하지 않
습니다.
3.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오안육신통이 있기는 하지만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으로 보
는 것은 모두 허망하며 그 눈들은 생겨난 곳이 없으며 보이는 것 또한 모두 자성이 공(空)
합니다.
4. 여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신이 있어 중생이 제도 될 인연에 따라 각각의 궤도에
서 시현하시지만,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시현하실 때, 여래도 모래를 모래라 하고 발우를 들고 탁발하는 등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
습니다.
5.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이 없고 시공간이 없으
며 “시공간”의 흐름이나 변화 또는 움직임도 없기에 무생(無生)만이 있을 뿐입니다.
6.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복덕이 없기에 보살도에서 쌓은 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원만하게 모든 곳에 두루 편재해 있습니다.
7.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32상 80종호가 없습니다.
8.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우주의 모든 상이 없으며 삼천대천세계도 없습니다.
9.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일념도 생기지 않고 설법하는 이도, 중생을 제도하는 이도 없
습니다.
10.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중생도 없고, 범부도 없습니다.
11.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12.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모든 법이 평등합니다(모든 법의 성품이 비어있기 때문입니
다).
13.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여래도 ‘나’가 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는 단지 가명일
뿐입니다.
14.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없습니다.
15.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우주 만법이 단멸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일체를 버
리거나 혹은 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16.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여래가 오지도 가지도 않고 생멸하지도 않습니다.
17.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연기가 없고 성품의 공함도 없습니다.
18.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그 어떠한 분별 지견도 없습니다.
19.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만법이 평등하고 법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금강경을 공양하고 수행 증득하며 널리 알릴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는 경전에서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첫째,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제23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
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즉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이란, 만법이 평
등함을 증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원만한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우주 만법을 평등한
마음과 평등한 눈·귀·코·혀·몸·뜻으로 대합니다.
둘째,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제23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수보리여! 이른바 선법이란
것은 곧 선법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선법이라 한다고 여래는 설하였다.” 즉 수행자는
속세에서 일체 상에 집착함이 없이 일체 선법을 수행하되 선한 법상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셋째, 어떻게 금강경을 공양하고 여래를 공양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제5품에서 “무릇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14품에서 수보리가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이를 곧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합니다.”라고
말하자 부처님께서 “그렇다, 그렇다.”고 화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도를 이루고자 발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삼계육도와 육근, 육진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자성여래를 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보살도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불법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출세간과 세간의 일체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되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할 때, 그것이 바로 자신의 자성여래를 공양하는 것이며,
금강경을 공양하는 길입니다.
넷째, 어떻게 금강경을 수행 증득하고 해설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제32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부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
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수행자가 좌복 위에 앉아 있든 아니면 일상생활 중이든 부처님께서 하신 “일체 상은 허망
하다”는 말씀을 믿는다면 몸과 마음 안팎의 모든 감각·체험·경계·분별·인지는 모두 허망한
것입니다. 이 경우에 마음은 생겨나는 곳도, 사라지는 곳도, 머무는 곳도 없게 됩니다. 이때
편안해진 마음을 ‘머무는 데가 없이 안주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법계대정(法界大定)’
이고 ‘여래공정(如来空定)’입니다.
다만 수행 초기에는 상에 집착하는 버릇 때문에 ‘허망함’ 자체를 하나의 경계나 하나의
상으로 규정하여 허공이나 허무에 안주하게 됩니다. 이 또한 여전히 상에 집착한 안주이기
에 이렇게 해서는 직접 공정(空定)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지(止)와 관(觀) 같
은 다른 법문을 통해 점진적으로 수행하여 이를 이루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우리
에게 금강경을 이렇게 해설하고 해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실질적인
증득을 통해서야만 일체 상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하게 부처의 견지에 안주하여 다른
사람에게 부처의 반야 지혜를 온전하게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다섯째, 금강경의 증량(證量) 경계를 공부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제31품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모든 법에서 마땅히 이
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 마음에 법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알아들었다고 하면 법상이 생겨
나지 않게 됩니다. 이 ‘법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곧 금강경의 증량(證量) 경계에 대
한 터득을 의미합니다. 수행자가 ‘법상이 생기지 않음’을 증득했다는 것은 그가 ‘무아’의 경
계에 진입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바로 ‘모든 법상(諸法相)’’에 속하기에, 모
든 법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므로 이 경
우라면 수행자는 ‘여래의 진공 경계’에 진입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덕에 대해 논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경문에서 여러 차례 만약 누군가가 반야 지혜를 믿고 받들어 행하거나 혹은
다만 그중의 관점 하나를 받아들여 수행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해준다면 단지 이것만으
로라도 그 공덕이 무량무변하다고 언급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