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후반부에 기록된 부처님과 수
보리의 문답을 통해, 제자들은 “진공 경계”에 안주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깨
달아야만 했습니다.
이에, 이 지점에서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반야’ 지혜의 요체 –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떠올리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부처님의 수제자 중 지혜제일인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모든 법이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
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데 이는 모든 법상이 공하기 때문이다.
둘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없다.
셋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눈·귀·코·혀·몸·뜻의 육근이 없다.
넷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색·성·향·미·촉·법의 육진이 없다.
다섯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안계(眼界)에서 의식계(意識界)에 이르기까지 십팔계가
없다.
여섯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무명(無明)이 없다. 또한 무명은 수행을 통해 그것이 다
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명은 본래 공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늙고 죽음이 없다. 또한 늙고 죽음이 수행을 통해 그것이
다해지는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는 본래 공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고집멸도’ 사성제가 없다.
아홉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없고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법도 없
다
열째,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이 이치를 깨닫게 되면, 대보살은 곧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되
어 번뇌·득실·두려움 역시 사라져 그 전도된 몽상에서 아주 완벽히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게
된다.
열한째, 모든 법의 공상을 증득하고, 만법을 활용할 때는 곧 색공불이(色空不二)인 것이
다.
열두째,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이 지혜로 무상정등정각을 얻으셨다.
열셋째, 그러므로 ‘모든 법은 무아’와 ‘자성은 공하다’는 반야 지혜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
고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이로써 온갖
괴로움을 없앨 수 있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열넷째,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한다. 주문은 이렇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어서 오라, 어서 오라, 어서 와서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깨달아 나와 함께 윤회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으로 가자.”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모두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설명한 경전으로써, 하나는 반야 지
혜의 요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반야 지혜의 총강(總綱)이라 부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
지혜를 진술하신 경전은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600여 권에 달하는데 이를 합쳐 대반야바
라밀다경이라고 부릅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그곳에서 정수만을 뽑아낸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이렇게 언급하게 된 이상 그럼 이제 반야심경의 전문(당나라 현장 법사
역)을 들어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
로움과 재앙에서 벗어났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
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
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
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
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도 없다.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느니라.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
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고 가장 밝은 주
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이에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반야심경 도입부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라고 하였는데 여기
서 말하는 이 ‘행(行)’은 단순히 좌복 위에 앉아 선정에 든 상태에서 행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반야 지혜에 따라 일체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보시와 인욕을 행하며 육도만행
(六度萬行)을 수행하여 이를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행했기에 보살은 아집을 파하고 관찰하
는 주체[能觀]와 관찰되는 대상[所觀], 비추는 주체[能照]와 비추어지는 대상[所照] 파하여
마침내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사리불에게 여래의 진공 경계를 설하셨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에 서서
보면 만법은 모두 허망하고 실체가 없으니 ‘색이 곧 공[色卽是空]’입니다. 모든 상의 본성이
공함을 깨닫고 나면 상을 보는 것이 곧 공성을 보는 것이기에 만법을 버린 후에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이 곧 색[空卽是色]’입니다. 여래의 과위 경계에서 만법을
일으켜 이를 쓰는 것이 곧 색과 공이 둘이 아닌 ‘색공불이[色空不二]’입니다.
수·상·행·식 또한 모두 이와 같아서, 이 속에도 여래의 원만한 색공불이의 본질이 담겨 있
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수행 증득하되 구하고자 하는 마음
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했을 때, 일체 상이 허망한 여래의 진공 경계에 진정으로 증입하
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부처·중생, 이 셋에 대해 차별이 없는 평등심을 얻어 그 인지
를 진정 원만히 이룰 수 있습니다.
이어서 반야심경에 있는 몇몇 개념에 대해서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관련 내용은 자귀가
(子歸家)의 “불법학습” 영상 자료(ziguijia.com)에서 발췌했습니다.
오온에 관해서입니다.
불교에서는 세계와 생명이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며,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오온이라 부릅니다.
색온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색’의 일시적인 조합입니다. 색의 조합은 생멸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의 성·주·괴·공과 생명의 생사윤회를 보게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색온은 내색(內色)과 외색(外色)으로 나뉘는데 내색은 눈·귀·코·혀·몸 오
근(五根)이고 외색은 색·성·향·미·촉 오경(五境)입니다.
수온(감각)은 외부 세계가 눈·귀·코·혀·몸에 작용하여 생기는 아픔과 가려움, 괴로움과 즐
거움, 근심과 기쁨, 좋음과 싫음 등의 감각을 가리키는바 다시 말해 사람의 심리 활동을 뜻
합니다.
상온(개념)은 외부 사물로부터 말미암아 생겨난 감각을 분석과 판단을 거쳐 얻은 지각과
표상인바 이는 일종의 이성적인 활동으로서 개념 도출의 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어 경적을
듣게 되면 마음속으로 저것이 자동차가 내는 소리임을 판단하여 이름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각 즉 상(想)입니다.
행온(행위)은 외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통해 나타내게 되는 행동 의지로서 심리 활동과
의지 활동에 해당합니다. 행온을 낳는 마음이 바로 업을 짓는 주요 에너지이고 원인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생각들이 우리의 몸·입·뜻을 부추겨서 업을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식온(분별)은 인간의 총체적 의식으로서 수·상·행 이 삼온(三蘊)이 한데 모여 경계에 대
한 지각분별이 형성된 것이기도 하고 인식의 기능과 결과를 말합니다.
육근 육진과 십팔계에 관해서입니다.
육근과 육진을 합쳐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릅니다. 육진은 색·성·향·미·촉·법을 가리키고
육근은 눈·귀·코·혀·몸·뜻을 가리킵니다. 육근을 내육처(六內處), 육진을 외육처(外六處)라
부르며 합쳐서 십이처라 합니다. 이 십이처란 곧 안처(眼處)·이처(耳處)·비처(鼻處)·설처(舌
處)·신처(身處)·의처(意處)·색처(色處)·성처(聲處)·향처(香處)·미처(味處)·촉처(觸處)·법처
(法處)를 말합니다.
십팔계는 십이처의 기반 위에 육식(六識)을 더한 것입니다. 육식은 곧 안식(眼識)·이식
(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입니다.
십팔계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안계(眼界)와 색계(色界)가 안식계(眼識界)를, 이계
(耳界)와 성계(聲界)가 이식계(耳識界)를, 비계(鼻界)와 향계(香界)가 비식계(鼻識界)를,
舌界(설계)와 미계(味界)가 설식계(舌識界)를, 신계(身界)와 촉계(觸界)가 신식계(身識界)
를, 의계(意界)와 식계(識界)가 의식계(意識界)를 형성합니다.
고집멸도(사성제)에 관해서 입니다.
사성제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합니다. 고(苦)·집(集)·멸(滅)·
도(道)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래는 고(苦)에 관해서입니다. 불법은 삼계의 생명체에게 삼계를 모두 고해라고 보며 그
들이 받는 고통을 세 유형 즉 고고(苦苦)·괴고(壞苦)·행고(行苦)로 분류합니다.
고고는 바로 생명체가 항상 굶주림과 추위,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고 가혹한 형벌과 고
문에 시달리는 등등의 괴로움에 처해 있어 거의 즐거울 때가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지옥, 아귀도의 중생들은 이런 고통을 가장 강하게 체험합니다. 이런 괴로움이 욕계
중생에게는 있으나 색계·무색계 중생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괴고는 생명체가 일체 사물의 무상한 변화에서 겪는 괴로움으로서, 예를 들어 사람이 병
에 걸리거나 늙어 가고, 가진 재산이나 애정을 잃고, 죽는 것 등등입니다. 이 괴로움은 욕
계·색계에는 모두 있으나 무색계에는 몸이 없기에 이런 괴로움이 없습니다.
행고는 생명체가 생명 및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나
결코 그것을 얻을 수 없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행고는 삼계 모두에 존재하지만, 욕계
중생은 이를 깊이 체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터득하지 못하기도 합니
다. 색계·무색계 중생은 비교적 깊이 체험합니다.
인간 세상에 있어서, 괴로움을 또 팔고(八苦)로 세분할 수 있는바 생고(生苦)·노고(老苦)·
병고(病苦)·사고(死苦)·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치
성고(五蘊熾盛苦)가 바로 그것입니다.
생고는 사람이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올 때 모두 괴로움을 받는다는 뜻인데 이 고통
을 아기들이 느끼지만 표현하지 못합니다. 말을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아기들은 이미 주태
(住胎)와 출태(出胎)의 고통을 잊어버린 상태가 됩니다.
노고는 사람이 노년에 들어선 후 흰머리가 나고 이가 빠지고 근육이 처지며 오관이 둔감
해지고 정신이 흐릿해지며 병에 자주 걸려, 점차 죽음으로 향하는 그 양상을 말하는 것입니
다.
병고는 사람 몸이 온갖 잔병에 시달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평생 한 번도 병에 걸린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고는 사람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때 죽음에 이르는 원인은 여
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그 어떤 원인으로 죽든 그것은 모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원증회고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멀리 떠나려고 하나 헤어지고 싶어도 헤어질 수 없고,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으므로 이
로 인해 초래된 고통을 가리킵니다.
애별리고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반드시 헤어져야 하고, 혹은 만날 수 없거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초래된 아픔을
가리킵니다.
구부득고는 사람이 각종 욕망의 부추김에 의해 그 무엇을 구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얻을
수 없으므로 인해 초래된 고통을 가리킵니다.
오온치성고: 오온은 색·수·상·행·식을 말하며 오온치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 고통이 모여서
생긴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나 인생에서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피할 수 없으며
원증회고·애별리고·구부득고는 사람에 따라서 그 체험의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이 오온치성고가 모여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불법 전수를 본격 시작했던 그 초기에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고제
(苦諦)입니다. 이렇게 고해를 알려줌으로써 다만 제자들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윤회
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도록 했던 것입니다.
다음은 집(集)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는 집제(集諦)입니다. 집제는 수많은 원인이 함께 모여서 형성된
중생들의 고통이라는 결과 즉 고과(苦果)를 만들어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원인
을 요약하면, 주요 원인은 주로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탐(貪)은 중생이 삼계를 향한 집착과 미련을 가리킵니다. 탐은 중생이 영원히 만족을 모
르게 합니다. 진은 중생이 삼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체에 대해 증오와 분별이 생겨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瞋)은 중생이 질투와 악의가 생기게 합니다. 치(癡)는 중생에게 원만
한 지혜가 부족한 것을 가리킵니다. 치는 중생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그릇되고 편협한 자
아 인식이 생기게 합니다.
중생은 탐·진·치 삼독의 작용으로 인해 온갖 업력을 쌓게 되며 또한 업의 이끌림에 의해
세세생생 삼계에서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인연이
구족된 후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윤회의 순환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
씀하신 ‘십이연기설(十二緣起)’입니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
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바로 그것입니다.
‘십이연기’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사람은 왜 늙고 죽게 되냐고 물으면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에게 태어남이 있으므로, 태어남이 있으면 곧 늙고 죽는 것이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태어날까요? 부처님께서는 ‘유(有)’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유’란 바로 업
력의 이끌림을 의미하는바 이것에 대해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왜 업력이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취(取)’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취란 중생이 색·성·
향·미·촉 이 오욕에 대해 집착하고 추구하며 얻으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런 추구와
획득은 갖가지 업을 짓게 합니다.
왜 사람은 이런 것에 집착하고 이를 추구할까요? ‘애(愛)’, 즉 ‘욕망’ 때문입니다.
왜 사람은 욕망이 생길까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감각기관과 심신으로 그것을 지각하
기 때문입니다.
왜 느낌이 생길까요? 경계와의 접촉 즉 촉경(觸境) 때문입니다.
무엇을 촉경(觸境)이라고 할까요? 사람은 육근, 즉 눈·귀·코·혀·몸·뜻으로 세계의 모든 것
을 마주하는데, 불법에서는 마주하는 그것을 육진 즉 색·성·향·미·촉·법으로 나눕니다. 또 이
로부터 생겨나는 분별 집착을 육입(六入)이라고 합니다.
왜 ‘육입(六入)’이 있을까요? ‘명색(名色)’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색’은 ‘자아’를 가리킵니
다. 범부 중생은 끊임없이 생멸하는 이 육체와 의식을 곧 ‘자아’라고 고집스레 여기고 있습
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이 ‘자아’가 다만 하나의 명상(名相)일 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
체가 없다고 여겨 ‘명색(名色)’ 혹은 ‘가아(假我)’라고 부릅니다.
왜 ‘가아’가 존재할까요? ‘식(識)’때문입니다. 이는 과거세의 업력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수
태(受胎)되는 일념이 생겨 중유신(中有身)에서 생유신(生有身)이 되는 것입니다.
왜 ‘식(識)’이 있을까요? 행(行)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무상(無常)함으로 인해 부단히 변
화하여 갖가지 망념을 연출하고, 각종 업을 지으며 갖가지 과보를 낳기 때문입니다.
왜 ‘행(行)’이 있을까요? 이런 무상한 변화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됩니다. ‘무명’이란 만
사 만물의 진실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지혜가 없음을 말합니다.
– 170 –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생사에서 해탈하려면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의 지혜
가 필요하다는 이치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소승의 벽지불과 연각불은 ‘십이인연법’에 대
한 사고를 통해 그중 어느 한 ‘인연[緣]’을 끊으면 ‘생사’ 윤회가 성립되지 않아 ‘열반의 해
탈 경계’를 획득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이는 궁극적인 견지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견지에서 보면, 모든 ‘인연’은 또한 가설에 지나지 않기에 ‘인연’도 역시 허망합니다. 그러므
로 벽지불, 연각불의 경우 ‘인연 또한 허망하기에 실로 끊을 인연이 없다’는 이 견지에 증입
하지 못하면 부처님의 진정한 열반의 경계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십이연기법은 사성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입니다.
다음은 멸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는 멸제(滅諦)입니다. 멸(滅)은 산스크리트어 ‘열반’의 의역입니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서 불이 꺼짐, 멈춤, 불을 불어서 끔을 의미하여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합니다. 탐·진·치를 불법에서는 삼독(三毒)의 불로 간주하는데 성자의 눈으로 보면
이 세계의 일체가 모두 삼독의 불에 타고 있어 찰나의 안식도 없는 상태입니다. 성자가 ‘자
아’ 및 ‘탐·진·치’ 등 근본적인 번뇌가 만들어 낸 ‘업의 근원’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청정한 적
멸의 경계와 윤회에서 해탈한 경계를 증득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소승 불법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방향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소승 수행자들이 증득한 아라한의 이러한 경계를 ‘유여열반’이라고 부
릅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의 경계는 선정의 힘에 의지하여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생사의
흐름을 차단할 수는 하지만, 아직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반의
경계는 사후에야만 획득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에도 바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도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성제의 네 번째 진리는 도제(道諦)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생로병사 등 갖가지 번
뇌와 고통에서 해탈하려면 마땅히 도를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도제입니
다. 부처님께서는 49년간 설법하시며 중생들의 서로 다른 근기에 따라 각종 수도(修道)와
증도(證道)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그중 소승불교에는 중요한 삼십칠보리도품(三十七菩提
道品)이 있고, 대승불교에는 보살도의 육바라밀다가 있는데 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
니다.
육바라밀다에 관한 내용입니다.
육바라밀다를 ‘육도’라고도 부릅니다.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어 음역으로서 ‘저 언덕에
이르다’, 즉 생사의 언덕에서 열반의 언덕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의역하면 도(度)가
되는데 건너다, 도달하다의 뜻입니다. ‘육도’는 대승 보살을 해탈로 향해 나아가게끔 인도하
는 여섯 가지 방법입니다. 육바라밀다는 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를 말합니다. 수행
자가 이 여섯 가지 방법으로 수행하면서 공성을 볼 수 있어야만 가히 해탈법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보시바라밀다는 보시를 통해 해탈문에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재물·노동·지식·미소 등)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보시법을 수행할 때는 목적이나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보시
한 후에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야 합니다. 불법에서는 ‘삼륜체공(三輪體空)’의 보시를 이야
기하는데 이는 보시하는 이, 받는 이, 보시한 모든 것이 모두 공한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
이 ‘삼륜체공’의 마음으로 하는 보시야말로 보시바라밀다로서 이렇게 해야만 해탈문으로 들
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인간 세상의 선행과 공덕을 쌓는 일에 지나지 않습
니다.
둘째, 지계바라밀다는 계율을 지킴으로써 해탈문에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대소승은 그
계율이 아주 많으나 대승의 재가 수행자에게는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
하라’라는 그 이상의 가르침은 더 없습니다. 국가의 법과 도덕 규범 및 준칙에 부합되고 중
생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그것은 바로 선이고 그 반대라면 악입니다.
지계의 본질은 행위의 속박을 통하여 심성의 방종을 다잡음으로써 점차 탐·진·치 삼독을
씻어내는 일입니다. 만약 형식만 중요시하고 심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
계바라밀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오계 중 ‘불살생’ 의 목적은 수행자의 살생하려는 마음과 증오라는 독을 제거
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채식을 하고 방생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주변 사람과 일들에
대해 불만과 원망을 품고 늘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며 상대가 잘못되어 자기 마음이 후련
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이는 진한(嗔恨)의 독이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이므로 이미 ‘살
생계’를 어긴 것입니다.
혹은 모기를 때려죽이는 상황에서 벽이 모기 피로 범벅이 되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쾌감
이 올라온다면 이 역시 우리가 평소에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살심(殺心)’입니다. 모기를 잡
아 해충을 제거하는 데 초점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모기의 죽음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이런 것은 모두 ‘살생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계바라밀다’의 중점은 자신의 행위
를 통해 자기 내심의 불선(不善) 즉 마음속의 탐·진·치를 점검하여 즉시 이를 경계하고 고
쳐나가는 일입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곧 계율[摄心爲戒]’인 것
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승도(大乘道)가 해탈로 이끄는 참된 ‘지계바라밀다’입니다.
셋째, 인욕바라밀다는 인욕을 통해 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욕’은 일체 일과 일체 사람들에 대해서 무조건 참고 견디어 그 누가 괴롭혀도 반항하
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나 불공평한 대우,
열악한 처지에 처했을 때 마음속으로 울화나 원망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속으로
이미 크게 화나고 원망이 생겼다면 겉으로 어떻게 하든 이미 “인욕바라밀다’가 아닙니다.
‘인욕 바라밀다’에서의 ‘인(忍)’은 하나의 경계에 안주하여 그 공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환상 경계에서도 끊임없이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보아내어 육근이 가져다주는 분
별과 느낌에서 해탈하는 것입니다. 가끔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으나 그 속에 원한의 독이
없다면 그것은 곧 해탈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서 꾸짖
기는 하는데 이 상황에서 비록 분노는 있으나 증오하는 마음이 없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한 예를 들자면, 밀교의 여러 불상은 분노상을 하고 있으나 그들은 이미 ‘공성’으로 증입하
였기에 이 모든 분노 또한 ‘진공묘유’인지라 아주 큰 가피력을 갖고 있습니다.
넷째, 정진바라밀다는 정진을 통해 해탈문에 진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진’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법을 듣는 즉시 이전의 갖가지 불선
업(不善業)과 시간과 생명 투자로 도모했던 무익한 속세의 일을 내려놓고 정법을 배우려는
마음을 내는 것도 정진입니다. 불법을 닦음에 있어 참을 것은 참고 끊을 것은 끊으며, 심혈
을 기울여 매 순간 법을 수행하는 태도를 단정하게 하는 것도 정진입니다. 스승이 정해준
공부를 꾸준히 수행하고 증득하며, 자신에게서 그 어떤 해이해지고자 하는 구실도 찾지 않
는 것 등 모두가 ‘정진바라밀다’입니다.
다섯째, 선정 바라밀다는 선정을 통해 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선정 수행 중 약간의 선정력을 얻었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선정의 목적은 선정
을 통해 우리 본유의 지혜를 여는 데 있습니다. 천인은 선열과 적멸을 낙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선팔정(四禪八定)에만 영구히 머물러 있어서는 삼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
다. 오직 부처의 지혜만이 우리를 삼계 윤회에서 해탈하게 하여 궁극적인 대 자재를 얻게
할 수 있습니다.
선정의 방법은 아주 많은데 기본적으로는 세 단계 즉 정려(靜慮)·지관(止觀)·정혜(定慧)
로 나눕니다. 순차적으로 정진하여 선정의 힘에 의지하면 마음은 그 어떤 경계에도 안주할
수 있는데 마음이 안주하는 시간이 길수록 점차 인간의 느낌과 사물의 외적인 현상을 초월
하여 만사 만물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선정의 힘이 깊어질수록 이런 깨달음도 점점 분명해
지고 원만해져 이로 말미암아 해탈문에 진입하게 됩니다.
여섯째, 반야바라밀다는 반야를 통해 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지혜라는 뜻입니다. 이는 공성을 이해하는 지혜를 의미
하는 것이지 인간 세상의 총명과 재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공성 지혜를 깨
달아야만 그것에 의지해서 해탈문에 들어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