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법문을 다 듣고 난 후 어느 한 도반은, 부처님께서 “일체 상을 모두 허망한 것
으로 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열정도 재미도 없다고 하였습니
다. 이는 그 도반이 “일체가 허망하다.”는 상에 집착했음을 의미합니다.
우선,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신 대상은 불과를 구하고자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입니
다. 따라서 그 견지는 제자들이 집착을 내려놓고 여래의 지견도(知見道)에 안주하도록 인도
하는 데 그 목적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세세생생 생명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부단히 추구하고 붙잡고 연연하며 소유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끊임없이 자아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재건하며 긍정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몸과 마음 안팎의 일체가 모두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치를 알게 되면 제자들은 마치 팽이처럼 심신
내외의 경계에 이끌려 회전하던 상태에서 뚝 멈추게 됩니다. 몸과 마음 안팎의 일체가 모두
허망하다면 무엇을 그렇게 진지하게 여기고, 무엇을 구하며, 또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
까?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마음은 일체가 허망하다는 견지에 안주하게 됩니다.
이때, 안팎의 경계에 대해서 더는 붙잡거나 점유하거나 취사 선택하거나 분별하거나 갈구
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불법 수행에서 말하는 진정한 멈춤[止]입니다. 그러므로 ‘지
관(止觀)’의 ‘지’는 단지 번뇌만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무명에서 비롯된 망
심과 과거에 대한 미련 및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을 멈추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윤회하는
삶은 부처님의 공성 견지를 듣는 순간 거기에서 멈추게 됩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이 세계
에 대한 영원히 불만족 속에서 오던 원망과 갈구, 점유 그리고 사변적인 생각을 멈추게 됩
니다.
그러나 지[止,멈춤] 수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욕망과 습기가 아직 다하지 않아 감각이
여전하기에, 비록 정견이 있는 제자일지라도 여전히 유혹에 이끌려 언제든지 다시 윤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끊임없이 각성하고 관조하여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
는 마음을 멈춰 세워야 하며 추구하는 마음과 차지하려는 마음을 반복적으로 멈춰야 합니
다. 그리고 세세생생 윤회의 관성으로 말미암아 내외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부처님의 지
견에 안주하는 첫 경험을 하게 될 때, 어떤 이는 한동안 몸이 피곤하고 머리가 둔해지며 멍
해져서 일체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반드시 선정 수
행을 꾸준히 견지해야 하며, 될수록 좌복에 앉아서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머리가 처음으로 회전과 추구를 멈추기 시작했으나 수행자의 마음과 기
는 여전히 흩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수행 중 만약 혼침(昏沉)과 졸음이 수반된다
면, 이것은 곧 기맥이 너무 혼탁해서 생기는 현상으로 소식하고 채식하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등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요컨대, 부처님의 정지견을 가지고 선정 수행
을 병행하면 짧은 암흑기를 거쳐 광명이나 선열(禅悦)의 상태에 진입하게 됩니다. 이때 비
로소 수행자는 부처님의 ‘반야 지혜’에서 참된 즐거움을 맛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막 ‘반야 지혜’를 배우고 깨닫기 시작한 사람, 특히 다만 의식적인 차원에서 청
취자에 불과한 사람은 쉽게 공(空)에 치우친 암울 경계에 진입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행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체가 허망하다’는 환상 경계를 다시 세우는 것과 같아서 세상
만사에 관심을 잃고 삶의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며 색채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부
처님께서는 반야 지혜를 닦는 대승의 제자들을 위해 육바라밀, 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반야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반야를 제일 마지막에 배정해둔 것은 ‘반야 지혜’가 중요하지 않
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원만하고도 완전하게 깨닫고 증득하기 위해서는 앞선 보시·지계·인욕의 공덕의 토대가 있
어야 하고, 여기에 정진과 선정의 힘으로 망심을 멈추는 과정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
니다. 그래야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 공성을 듣고 진정한 출리심을 내어 마음속 집착
과 걸림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으며 ‘만물이 모두 허망하다’는 환상 경계나 무력한 공(空)
에 치우친 세계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하여간 모든 수행과정에서 수행자는 항상 부처의 과
위 견지 위에 서서 보살도를 수행해야 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일체 상을 허망하다고 보라”고 하신 뒤 바로 “일체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음
으로써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해야만 지혜와 자비로 충만하고 그 어떤 번뇌와 고통도 없으며
더는 시공간의 환상 경계에 속박되지 않는 진정한 자기 자신 즉 여래가 될 수 있음을 설하
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 지혜는 이 세상과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 아
니라 제자들에게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길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또 어느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통하여 큰
자유자재를 얻으라고 하셨는데, 불법을 배우고 나니 오히려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고
요. 우리의 삶은 이미 아주 고달픈데 부처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갖가지 욕망을 절제하고 여
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항상 남을 위한 마음을 지니라고 하고, 여기에 더해 곳곳에서 우리
의 습기와 욕망을 억누르고 그것을 파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인간은 바로 이런 습기와
욕망의 충족을 통해 자극과 즐거움을 얻는데 이러한 것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인간성에 반하
는 것이 아니냐고요.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생로병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에게서 작디작은 애욕과
즐거움을 빼앗으려 하시겠습니까? 다만 부처님께서는 여러분의 욕망과 습기가 여러분을 세
세생생 공업(共業)의 바다에서 방향 없는 부평초처럼 떠돌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뿐
입니다. 이 세상의 홍수·지진·해일·온역·전쟁, 그리고 우주의 그 어떠한 변화라도 모두 아주
쉽게 여러분을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욕망과 습기는 여러분더러 수많은
개별적인 업을 짓게 합니다. 이러한 업에 따라 세세생생 서로 다른 ‘자아’로 윤회를 거듭하
게 되는데 이런 ‘자아’는 부단히 생멸·변이·득실의 상태 속에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
도의 고통을 받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고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세상
의 양면성을 볼 줄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해에서 누리게 되는 잠깐의 즐
거움과 자극은 근본적으로 미련을 가질 가치도 없고 설령 우리의 즐거움과 자극이 한 평생
지속한다고 하더라도, 선한 과보가 다하면 결국 지옥으로 가는 과보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
니다. 삼악도(지옥·축생·아귀)에서 겪는 고통은 실로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지옥·
아귀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니 축생도를 보세요). 세세생생 이어온 생명의 큰 흐름에서 체
험하게 되는 그 고통과 피눈물이 어찌 인간 세상이나 천계가 가져다주었던 약간의 즐거움으
로 인해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정보의 형식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 잔류하여 인연이
성숙하면 언제든지 과보로 나타나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가 아직 삼악도에서 윤회하고 있지
않은데도 삼악도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이미 찾아오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고해에서 건져내어 생멸 윤회의 환상 경계에서 깨어나게 하려 하십
니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신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
다. 즉 중생에게 본래 있는 부처의 지혜를 열기 위해서, 중생에게 여래의 지견을 설법해주
기 위해서, 중생들이 여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도에 안주
하여 심신의 큰 자유자재를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인간의 욕망, 습기가 못마땅하여 그것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이 세
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신 것은 제자들이 계율의 속박 속에서
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고, 같은 도리로 인간 세상의 윤리 도덕을 논하러 오신 것도 아니
며, 온갖 죄악 중에서 음욕이 가장 으뜸임을 말씀하시러 오신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정을 멀리하고 욕구를 제거해야 함을 설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에게 시공간의 환상 경계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알
려주시어 궁극적으로는 중생이 공덕으로 화현한 세계에서든 아니면 공업(共業)으로 화현한
세계에서든 모두 심신의 크나큰 자유자재를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중생은 생명의 근원으로 되돌아가서 만물과 자아의 실상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자기 멋대로 하고 너무나 이기적이며 소유욕과 정복욕 등 온갖 욕
망이 너무 강합니다. 따라서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자아의 욕망 때문에 인간은 시공간 환
상 경계의 명예·이익·정 등 일체 좋아하는 것을 탐하여 끌려다니며 번뇌와 고통을 일으키고
또한 온갖 삿된 견해를 낳아 자신의 본 모습인 청정하고 깨끗하며 불생불멸인 그 위치로 돌
아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제정하여 습기를 예속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법의 성품은 공하다고 하셨습니다. 시공간에서의 환상 경계라는 것이 그
수량에 있어서 인간의 망심과 잡념만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기에 이를 하나하나 제거
한다면 한량없는 세월이 걸려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의
환심(幻心)은 여전히 환(幻)에 의지하여 없애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근거로 비로
소 불법이 있고, 경(經)·율(律)·논(論)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중생의 환심을 다스리고
인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 지혜를 설하시면 수행자는 잠깐 부처님의 견지
에 안주하여 속세의 구하고자 하는 마음, 얻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탐욕을 내려놓을 수 있
습니다. 제자들은 그 ‘마음’을 반드시 부처의 과위 견지에 안주시킨 후 일체 선법을 꾸준히
행해야만 비로소 이른 시일 내에 모든 아집을 깨뜨리고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부처님께서는 환상 경계에 집착하는 중생에게 ‘연기성공(緣起性空)’의 반
야 지혜를 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심신 밖의 세상에 대해 호기심으로
가득하여 늘 끊임없이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최초의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류 역사상 빅뱅 이론, 진화론,
창조론 등 무수히 많은 답이 있었지만, 누군가는 또 그럼 신은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묻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연기성공’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는 여래가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여래와 중생은 평등하며 중생 모두에게
는 여래의 본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제일인(第一因) 즉 첫 번째 인
연이 어디에서 왔는가는 논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 인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허공이나 허무도
아니기에 인간 세상의 그 어떤 언어·문자·명상(名相)으로도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따라
서 말하는 순간 틀리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멸하는데 그 본질은
모두 자성이 없으므로 만물의 본질은 모두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의 ‘연기설’은 현대 과학의 우주 기원론에 가장 근접하는 논단이지만, 부처님은 이 ‘연기성
공’설을 통해 제자들이 시공간과 시공간 속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구하고자 하
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 평등심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인간은
비로소 시공간 속에서 욕망이 심신에 대한 통제와 생사의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하여 큰 자
유자재를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일찍이 보았던 양자역학 실험 영상이 생각납니다. 실험 결과는 뜻밖에도 실험자의
응시와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볼 때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의 실험 결과는 서로 달랐는데, 어쩌면 서로 다른 마음(심식)을 가진 중생이 이를 지켜보는
상황이었다면 결과 또한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삼계육도의 각 궤도의 형성은 상응한 궤도에 머무는 중생의 마음과 관련이 있
으며, 모든 사람의 자아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법에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万法唯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바꾸면 그대의 세계 전부를
바꿀 수 있고, 만약 모든 사람이 ‘자아’를 바꾼다면 곧 우리가 함께 거주하고 인지하는 세상
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를 내려놓으면 곧 ‘무아’의 여래 경계를 이룰 수 있어 천
지와 더불어 빛나고 만법과 더불어 그 근원을 같이하며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영원하고 원
만한 생명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어떤 도반이 또 질문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계율만 엄격히 지키
면 곧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반야 지혜를 따로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선, 상술한 언급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여기에 대해서 찾아본 적이 있지
만, 그 어떤 불경에서도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합
니다. 개인적인 견해이기는 하지만, 설사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가정하더라도, 중
생이 오직 ‘계율’에만 의지하면 곧 성불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은 정말로 아닐 것입니다.
만약 스승님이 열반에 들면, 인간 세상의 제자들 처지에서는 그 마음과 행동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권유하고, 점검해주시는 스승님이 부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회귀
하는 길에 ‘계율’이 있어 이를 지켜준다면 그들이 자신의 느낌에 이끌려 칠정육욕의 환상
경계에 미련을 두어 발목이 잡히거나 도심(道心)을 잃거나 혹은 그로 인해 번뇌 장애가 끊
이지 않게 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율이 있으면 수행과 생활에서 외적인 여러
인연을 제지하거나 많은 선업과 악업이 성숙하여 방해하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며, 또한 수행
자가 수행 중에 쉽게 빗나가거나 산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계율은 불제자들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 역시 아집을 파하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반드시 먼저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깨달은 후에, 계율로 자신을 단속하며
(마치 스승이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처럼 방일하지 않음), 지계(持戒)에 정진해야만 스
승이 곁에서 감독하고 일깨워주지 않아도 비로소 순조롭게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가 있습니
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대승 보살을 위해 제정하신 수행 방법은 육바라밀다 즉 보시·지계·
인욕·정진·선정·반야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 것이지 오직 계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승 보살이 수행 증득하는 ‘육바라밀다’의 배열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
에 드신 후 말법 시대 중생들은 본보기가 될 훌륭한 스승을 찾기 어려운 데다가 인성의 ‘자
아’는 오히려 더 강해져 출리심, 이타심이 짧은 시간에 진정으로 일으키기가 어렵습니다. 불
법을 들으려고 해도 다만 부처님의 경전에서 배우고 경청해야만 하기에 현재 대부분 대승
제자들의 수학(修學) 순서는 기본적으로 반야·선정·정진·인욕·지계·보시로 재정렬된 실정입
니다.
그러나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의 수행 없이 직접 반야 지혜를 배우기 시작할 경우, 부처
의 반야성공 이론이 의식적인 측면으로 너무 치우쳐 사변과 이해로 변질하거나, 심지어 인
간 세상의 철학과 변증법으로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모든 명칭과 언어는 모두 가
설에 지나지 않게 되어 중생을 생사윤회의 고해에서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부처님의 설법 본
뜻을 잃게 합니다.
이와 더불어 역사기록 이래 불법이 인간 세상에서 전파된 지 이미 2600년이 지났습니다.
윤회의 견지에서 보면, 말법 시대에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 중 많은 이들은 이미 정법 시대
와 상법 시대를 거쳤을지도 모릅니다. 원만에 이르지 못하여 다시 윤회한 불제자들은 기본
적으로 원래 배웠던 것을 복습하는 셈이라, 많은 사람의 수행과 증득은 모두 도약식입니다.
대승 제자들이 때로는 대·소·밀 삼승의 법문을 동시에 섭렵하고 수행하기도 하는데 이런 상
황에서 반야 정견의 가르침이 다른 그 어느 시대에서보다 특히 더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대승 제자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설령 출리심과 도를 이루고자 하는 굳
건한 마음이 있다고 해도, 다만 전생의 근기와 선정의 힘에만 의지해서 여래의 지혜를 깨닫
고자 하면, 비록 일시적인 ‘망아’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경계가 있거나 혹은 불법을 배울 때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고 법희로 충만하며 불가사의한 경계에 진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
나 공덕과 자량(資粮)을 쌓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고 계율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많
은 고난을 겪게 되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며 결국은 집착과 분별을 다 깨뜨릴 수 없어
원만한 해탈의 서광을 보는 것이 느려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출리심을 갖추지 못했고 아직도 시공간의 환상 경계 중 모든 것을 탐하는 중생이라
면, 상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반야성공 이치를 나름 터득하여 일체가 허망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는 더욱 거리낌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
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여래의 자비와 지혜가 합일된 원만하고 자유자재한 경계를
영원히 깨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가 즉유즉공(即有即空)의 경계를 안다고 할지라
도 자신의 아집을 다 깨뜨리고 성불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한 도반은 나에게 금강경을 배우고 나서 불법은 중생의 집착이라는 병을 치료하는
양약이고,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기에 정해진 법이 없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불법 또한 버려야 함을 알았는데, 그럼 부처님께서 왜 또 보살도를 위해 굳이 육바라밀을
중점적으로 설정하셨는지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실 때, 병에 따라 약을 주듯 근기에 따라서 가르침을 펴
시기에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다 같이 인간 세상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대
부분 비슷한 습기와 욕망, 집착이 있습니다. 허다한 제자들이 수행 중에 공통된 장애와 문
제에 부딪히게 되므로, ‘같은 종류의 약’을 복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대승 제
자들을 위해 세우신 육바라밀은 제자들이 보편적으로 불법을 수행할 때 직면하게 되는 문제
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약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귀납한 후 제자들에게 이런 문제의 해결과 돌파에 있어서 부처
님의 정지견에 의지해야만 아집을 깨뜨릴 수 있다고 일깨워주셨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법
문을 세우실 때, 인간 세상의 제자들이 보편적으로 행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셨는데 만약 너
무 어려워 대부분 이들이 이를 행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공통으로, 보편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법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인간 세상의 대승 제자들을 위
해 세우신 육바라밀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법문이기에 대승
제자들은 마땅히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아래에 육바라밀에 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자귀가(子歸家) 웹사이트 《불법
공부》섹션에는 ‘육바라밀’의 수행에 관한 상세한 해설이 있으니 관심 있는 도반은 홈페이
지(ziguijia.com)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도(六度)’는 ‘육바라밀다’라고도 합니다.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서 ‘저
언덕에 이르다’는 뜻으로 생사의 언덕에서 열반의 언덕에 다다름을 의미합니다. 한자 의역
으로는 건널 ‘도(度)’를 씁니다. 그러므로 ‘육도’는 대승 보살이 해탈로 향하는 여섯 가지 방
법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보시입니다.
보살이 성불하려면 우선 ‘자아’ 및 ‘삼계육도의 일체’를 포기하고 ‘출리심’을 내야 하는데
이 ‘버림’과 ‘출리심’이 바로 보살의 대 보시입니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대승 수행자의
보시가 반드시 자신의 몸과 목숨을 포기하고 인간 속세의 일체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 극단
적인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는 자신이 가진 일체를 사심 없이 도움이 필요한 중
생에게 내어주는 것으로서 설령 재물 같은 보시할 물건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노동과 재
능 더 나아가 미소, 한마디의 칭찬 등으로도 보시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어느 수행자나
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보시는 수행자의 ‘탐욕’과 ‘득실심(得失心)’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보살이 처음 삼계
육도와 윤회에서 벗어나겠다고 발심하였지만, 인간 세상에는 늘 그가 연연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보시할 때 수행자는 이해득실에 민감하여 반복적으로 갈등
하고 고민하며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심지어 몸으로 하는 봉사나 작은 도움조차도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비록 일체가 허망하다는 부처님의 정지견도 있고 윤회
를 벗어나려는 도심(道心)도 있으며, 삼륜체공으로 보시하고 싶지만 보시하는 모든 것이 여
전히 수행자의 ‘자아’를 강하게 건드릴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수행과 증득이 계속되어야만 베풂과 버림이 수행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적어져, 마침내 성불하여 여래의 경계에까지 이르게 되어야 자신의 일체를 버리고 보시해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고 득실의 갈등도 없으며, 보답이나 이해, 감사 등도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수행자의 공덕이 원만해져 ‘보시바라밀’로부터 부처님의 공성에 증입할 수 있
으며 삼계육도의 일체 상이 수행자에게 있어서 필경 공(空)하며 깨달음의 경계는 불가사의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지계입니다.
수행자가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심신 안팎의 일체가 허망하므로 상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욕망과 습기가 아직 남아있어 세상 모든 것이 수행자에게는 여전히
유혹의 대상입니다. 자신의 자제력과 인내력을 초과하는 유혹에 직면하였을 때라면 수행자
는 부처님의 견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곧 삼계육도의 모든 것에 미혹되어, 도심(道心)을
잃고 출리심을 내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수행자가 계를 받았다면 이때 파계에 대한 뉘우침
속에서 창피해하고, 참회하며, 반성하거나 혹은 유혹당하는 순간에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
이 생각나 파계를 원하지 않은 자세가 됨으로써 유혹에 대항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부처님과 과위를 증득한 대 아라한들이 제자들의 수계
의식에 참여하여 훗날 수행자의 지계(持戒)를 감독했습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수행자가
부처님과 계율을 엄정히 지켜 과위를 증득한 도반들 앞에서 계율이 정한 일체를 승낙하고
받아들였기에, 그 힘과 가피력은 수행자가 나중에 속세의 온갖 유혹을 저항하기에 충분하므
로 어떤 이는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계율만은 어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인욕입니다.
수행자가 발심하여 윤회에서 벗어나 성불하려고 할 때 처음에는 자신의 습기, 욕망과 정
면으로 대항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 비록 부처님의 정지견이 있긴 하지만 심신은 여전히 감
수가 있어, 예를 들면 보시나 지계를 행할 때 여전히 자신의 탐욕과 아쉬움,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했던 방종 등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때, 부처님 정지견의 안내하에 자신의 감수
를 극복하는 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수행자가 윤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여전히 세간의 각종 관계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대가 버리고 떠나려 하나 그대
와 인연이 있는 중생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들의 이익과 욕망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
를 들면 부모·아내·남편·자녀 등은 그대가 혈육의 정을 첫 자리에 놓고 그들의 인식과 관념
그리고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바랍니다. 만약 그대가 불법 수행으로 인해 그들이 바라는 바
에 잠시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분노하고, 상처받으며,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그대를
불효자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대가 그들과 함께 도박하거나 유흥을 즐기거나 혹은 먹고 마시고 놀기
를 바라는데 그대는 좌선하고 채식하며 마음을 맑게 하고 욕구를 줄인다고 하면, 어떤 친구
들은 당신이 의리가 없다고 하며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심지어 청고한 척한
다거나 위선적이라며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방과 중상모략마저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수행자는 인욕을 닦아 부처님의 지견으로 계속 수행하면서 자비심을 유지해야 합니
다.
네 번째 방법은 정진입니다.
대승 수행자는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도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성
불을 첫 자리에 놓고 부처님의 견지에 따라 생각마다 이를 자각하며 욕망과 습기 그리고 자
아의 집착이 가져오는 무명을 될수록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마음을 부처님의 지견도에 안
주시키고 꾸준히 수행을 견지하는 것이 진정한 정진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는 데
다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모든 불제자는 자신이 인간 세상에서 수행할 수 있
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또한 집착과 분별을 모두 깨고 무아의 열반 경계에 진입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바세계의 욕계에서 인간 세상은 불법을 수행하기 가장 좋은 곳입니다. 출리심을
일으키기가 가장 쉽고 수행할 여건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도에 윤회하면 너
무 즐거워서 거기를 벗어날 생각이 없고, 지옥과 아귀도는 너무 괴로운 곳이라 거기에서 벗
어날 힘이 없으며, 축생도는 또 너무 어리석어서 불법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수행할 조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 불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복이기에 마땅히
정진해야 합니다. 일단 사람의 몸을 잃게 되면 오랫동안 다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
다.
다섯 번째 방법은 선정입니다.
수행자가 부처님의 견지를 알았다고 해도 보살도의 전체 수행과정에서 부처님의 정지견을
다만 머리로만 이해할 뿐,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증득하지 못하여 삼계육도에서 해탈
하지 못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시각각 수행자에게 큰 유혹으로 다가오고, 심신 세
계는 함정으로 가득 차서 늘 자아의 느낌이나 지견에 갇혀 해탈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선정의 힘을 병행해야 합니다. 선정이 받쳐준다면 유혹과 느낌을 감당해내는 힘이
많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신통력도 얻을 수 있으며 아울러 ‘선정’을 통해 본유의 지혜까지
도 열 수가 있어 수행자는 더욱 쉽게 만법의 실상을 볼 수 있으며 반야 지혜를 더욱 투철하
고 원만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방법은 반야입니다.
즉 불과(佛果)의 견지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중생들이 부처 경계에 다다르는데 필요한 부
처님의 여러 가지 선교 방편의 가르침과 법문이 포함됩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모두
반야 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제자는 마땅히 부처의 과위 견지에 의지하여 자신
의 일상적인 수행을 지도해야만 ‘수행’이 윤회의 선업(善業) 수준에 국한되는 것을 피해 최
대한 이른 시일 내에 여래의 품성과 과위로 돌아갈 수 있고 해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
다.
또 어느 한 도반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불법 수행 중 반야 지혜를 이해하고 장악하
는 데 있어서 더 빠르지 않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과학자, 철학가 등은 부처의 반야 지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특
히 인터넷 시대에 그 전달되는 정보량이 많고, 전파 속도가 빨라 현대인들의 관상력(觀想
力)은 불법 전파에 있어서 그 어느 시기보다 강할 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불법을 듣고
사고할 수 있는 여건이 새롭게 조성된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건으로 말미암아 더 빨리
성불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이해가 여전히 의식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진정한 반야 지혜는 알아들은 후 자아의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
다.
이때, 이 세상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체면·존엄·오만·편견·우월감·질투 등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평소에 인간 세상에서 정직하고 착하고 후덕하며,
‘내가 옳다’는 지견이 별로 없으며, 기꺼이 사심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면 그가 박
사든, 초등학생이든 부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일단 깨달았다면 바로 자아에 대한 집
착을 내려놓기에 더 빨리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 중에는 거지나 기생, 사회 최하층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은 적 없는
사람도 있었고, 사리불이나 목건련 같은 학술 거장이나 왕족 등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
도 있었지만, 도를 이루는 일 앞에서는 그들 모두가 거의 다 평등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고 하여 수행자들이 인간 세상의 총명함과 재능, 지혜와 여러 가지 기예와 기능의 습득을
부정하면서 성불에는 세간의 다른 학문이 필요 없으므로 배울 필요가 없다거나 학교에 다니
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히 법문은 한량없으나 맹세코 배우겠다고 서원한
대승 보살은 세간의 학문을 많이 익힐수록 불법을 널리 알리고 중생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되어 더 많은 선교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든지 보시·인욕·지계·정진·선정 이 앞의 5가지 수행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
간 세상의 총명과 재능만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완전히 깨닫고 여기에 들어가려 한다면 이를
원만하게 성취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령 다시 온 대보살이라고 할지라도 말법 시대에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다의 수행을 거쳐 자아가 초래한 겹겹의 안개를 뚫어야만 비로소 자성여래
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설법을 유창하게 잘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처
님이 증득하신 경계를 옮기는 것일 뿐, 자신이 증득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당연히 여래
과위의 증량과 성품도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자성 즉 ‘생명의 근원’은 본래 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서로 다른 궤도의 중생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경계와 상(相)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근원은 모두 같기에 일체중생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그
근원으로 회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가장 핵심적인 내적 갈구이고, 생명이
지칠 줄 모르고 찾는 가장 원만한 존재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래의 경계에서 보면
만법은 본래부터 원래 자리를 떠난 적이 없어 오는 곳도, 가는 곳도 없기에 이를 여래라고
부릅니다.
한동안 저는 곤혹 속에서 생명의 궁극적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
다. 사람은 왜 사는가? 사색의 과정을 거쳐 제가 내린 결론은, 생명 자체에는 의미가 없으
며 생명의 모든 의미는 반드시 우리 스스로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은 곧 그에 걸맞은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
다.
그 후 불법을 배우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간들 가운데 인생을 누리
는 고정불변의 ‘사람’도 없고, 그가 누릴 고정불변의 세계 만법도 없으며, 그의 몸과 마음
그리고 몸과 마음 밖의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인과에 따라 인연의 모임과 흩어짐일 뿐, 그
속에는 진정한 주재자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알고 나면 우리는 곧 인연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모든 환상 경계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윤회가 끊이지 않는 시공간의 환상에서 깨어나서, 몸
과 마음이 더는 이런 환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게 될 때, 이를 이름하여 부처라고 부를
수 있고 진정으로 생명의 종착역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갔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의 생명은 여기에서 진정으로 멈춥니다. 불법에서는 이를 불생불
멸의 열반 경계에 들어섰다고 하고, 생사를 해탈한 저 언덕에 이르렀다고도 합니다.
불법을 알아들은 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제가 생명의 의미를 따로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찰나에도 멈추지 않고 생멸 변이하고 또한 제한성이 있는 눈·귀·코·혀·몸·
뜻을 자아로, 또한 이 육근에 의지하여 세워진 세계 만법(즉 불법에서 말하는 색·성·향·미·
촉·법인 육진)을 실재한다고 집착하였으며, 이런 근진(根塵)이 서로 교착하면서 자아의 세
계를 형성하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 본질적으로 허망함 위에 세
워진 환상 경계입니다. 저는 줄곧 이런 환영 속에서 살면서 늘 끊임없이 생멸 변이하는 이
환영 속에서 완벽하고 영원한 생명이 의지할 수 있는 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 했으니, 이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점을 명확히 알고 난 후, 비록 습기와 욕망이 남아있어 그 느낌이 여전하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허공에 있는 뜬구름과 같아서, 허공의 텅 빔과 고요함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
다. 이는 마치 아주 미세한 티끌이 두루 비추는 햇빛을 가릴 수 없는 것과 같은 도리입니
다. 여기에 덧붙여 말해본다면, 일체 가상과 환상 경계는 결국 수행 증득이 원만한 경계에
이르게 되면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불법의 지혜는 저로 하여금 모든 중생 생명의 궁극적 의미는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그
곳에 안주하여 중생 본래의 모습인 여래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오직 여기에
이르러야만 모든 중생은 생멸하고 변이하며 윤회하는 자신의 생명에 원만한 마침표를 찍는
것이며, 비로소 자신의 생명에 가장 높고,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됩니다.
마감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구마라집법사님께 감사드리며, 제 마음속의
스승님과 용천호법(龍天護法)께 감사드리며, 부모님과 중생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의 수행
증득과 설법의 모든 공덕을 법계의 모든 유정에게 회향합니다. 중생들이 평안하고 건강하며
행복하고 즐겁기를 기원합니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며, 불법이 오래 머물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