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밝은 스승에게 너무 높은 기대를 품지 말라. 우리 의식 속의 밝은 스승은 반드시 성스럽고 현명하며 자비로울 것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대부분의 밝은 스승은 다만 견지에 있어서만 제대로 이루었을 뿐, 습기와 욕망에 있어서는 철저하지 못하다. 이것은 생리적인 완전한 전환이 필요하지만, 그의 견지만으로도 그대를 수행에서 정도로 인도하여 빗나가지 않게 하기에 충분하다.
- 모든 밝은 스승이 중생의 근기를 잘 알고 그에 맞추어 설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당신이 현재 마주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해서 그를 부정하지 말라. 그의 설법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지를 보라.
- 밝은 스승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기를 바라지 말라. 출세법과 입세법을 모두 아주 원만하게 닦아 증득한 스승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출가 스님들은 세속적인 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서툴다. 밝은 스승에게도 원만해지는 과정이 있으며, 밝은 스승 역시 다른 사람의 이해와 관용이 필요하다.
- 만약 출세와 입세 모두 원만한 스승을 만나 그대의 수행과 증득을 지도받을 수 있다면, 그대는 정말 삼생의 행운을 지닌 것이다. 그대의 인연과 복보를 소중히 여기고 정진하여 수행하라. 그대의 안이비설신의로 밝은 스승의 행동거지를 분별하지 말라.
- 만약 우리가 수행과 증득 가운데서 언제나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고 잘못을 찾아낸다면, 우리 곁에는 선지식이 부족하지 않다.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습기와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이 그대를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는 것은 바로 서로 다른 각도에서 그대를 원만하게 해 주는 것이다. 만약 그대에게 온갖 질책을 다 수용할 수 있는 심량이 있다면, 중생 모두가 그대를 성취시킬 수 있다. 다만 그들은 습기와 집착을 사용하고, 밝은 스승은 지혜를 사용할 뿐이다.
- 밝은 스승이라고 해서 모두 자비롭고 신통을 지닌 것은 아니다.
자비심이 진실로 일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이미 자신의 본위에 안주하였을 때, 만약 자비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코 중생을 제도하여 법을 펴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중생의 탐·진·치·만·의가 너무 무겁고 집착이 너무 강하며, 원만하지 못한 밝은 스승에게는 또 그다지 많은 선교방편이 없다. 중생의 끝없는 욕망과 가혹한 요구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밝은 스승을 십자가에 올리게 만든다. 밝은 스승의 마음은 이미 평범함으로 돌아갔고, 평범함의 참뜻을 이미 깨달았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한 요구가 이미 극히 낮아져서, 하루 한 끼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 한 채의 초막이면 이미 그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 몸과 마음을 의탁하여 살아가기에 충분하다. 조용히 자신의 일생을 보낸다. 이것은 어쩌면 그의 “습기”에 가장 잘 맞는 한 가지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밝은 스승이라도 아직 원만하지 못하면, 그는 진정으로 무연대자·동체대비의 경지를 체험하지 못하고,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중생의 즐거움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형식상으로 진정한 부처님과 보살을 볼 수 없다. 원만한 스승일지라도 중생을 위하여 업장을 짊어지고, 생로병사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해탈하여 원만해진 뒤에는 진정으로 중생이 된다. 중생이 괴로우면 그도 괴롭고, 해탈과 미해탈을 더 이상 분별하지 않으며, 번뇌를 보리로 바꾸려 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는 진짜로 괴롭다. 다만 그러한 괴로움의 근원은 중생에게서 오는 것이지 자신의 욕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견지를 보지 않는다면, 그의 행동거지는 범부와 더욱 닮아 보인다. 다만 그는 즐거움을 누리든 괴로움을 겪든,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자재할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원만한 밝은 스승의 자비는 표현 방식이 가지가지여서, 중생은 그의 행위만으로 그가 자비로운지 자비롭지 않은지를 확정할 수 없다. 그의 자비는 때로 때리고 꾸짖고 죽이는 모습이며, 탐·진·치·만·의 가운데 어느 한 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원만한 스승에게 그것은 다만 하나의 표현 형식일 뿐, 습기와는 무관하다. 진정한 자비란 인과를 철저히 꿰뚫은 성상평등으로, 도에 맞는 행위라면 무엇이든 자비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가 인정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통은 다만 불법을 실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일 뿐이다. 신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밝은 스승인 것은 아니지만, 실증 가운데 성취가 있는 스승이라면 반드시 신통이 있다. 신통에 빠지거나 추구하지 말고, 신통이 있느냐 없느냐로 밝은 스승을 요구하지 말라. 견도·증도·득도는 수증의 세 과정이다. 견도에 이르러서야 견지가 진정으로 제대로 자리 잡으며, 이미 밝은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증도는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그 공성을 증득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신통이 나타난다. 득도는 진정으로 증득한 것을 원만하게 생활에 활용하고, 출세간이나 세간에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승이야말로 진정으로 원만한 밝은 스승이며, 그는 홍법에서 중생에게 더 많은 선교방편을 베풀 수 있고, 그의 마음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서로 통하며, 신구의의 가지력이 모두 매우 크다.
부처님의 법을 수행하는 우리 모두가 공덕과 복보를 많이 쌓아, 밝은 스승을 만났을 때 우리의 탐·진·치·만·의와 무명 때문에 역연이 도를 막아 밝은 스승과 어깨를 스치듯 지나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말법시대에는 밝은 스승과 훌륭한 제자가 모두 너무나 얻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