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모든 중생의 종류,
즉 난생·태생·습생·화생과 유색·무색과 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
에 들게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였으나 실로 제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
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품을 강의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개념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전에서 부처님께
서 언급하신 난생·태생·습생·화생·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은 부처님께서 삼계 모든
중생의 다양한 생명 형태에 대하여 나누신 분류입니다.
난생·태생·습생·화생은 욕계 생명의 네 가지 형태입니다. ‘난생’은 알에서 부화한 생명으
로, 닭이나 오리 같은 것들입니다. ‘태생’은 모태에서 태어난 생명으로, 인간이 바로 태생입
니다. ‘습생’은 습한 인연으로 태어난 생명으로, 땅속의 틈새나 혹은 수중의 작은 벌레 등입
니다. ‘화생’은 업력에 의해 홀연히 태어난 생명으로, 욕계의 천상계 생명이 바로 화생입니
다.
‘유색’은 색계 생명을 가리키는데 오직 색신(色身)만 있고 정욕은 없습니다. ‘무색’은 무색
계의 생명을 가리키는데 오직 의식만 있고 정욕과 색신이 없습니다. ‘유상’·‘무상’·‘비유상’·
‘비무상’은 무색계 생명에 대한 더 세분된 분류입니다. ‘유상’은 사유 활동이 있음을 가리키
고, ‘무상’은 사유 활동은 이미 정지되었으나 나무나 돌과는 같지 않은 것입니다. ‘비유상’·
‘비무상’은 사유 활동이 정지되어 더 이상 생각은 없지만 언제든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생
명 상태, 즉 생각하려고 하는 추세가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불경에서는 삼계의 이러한 생명체가 비록 존재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지만 그들에게는 모
두 공통된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생멸하는 윤회 속에 있어 자유로이 해탈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똑같은 본성이 있으니, 그 본성은 다름 아닌 부
처이며 모든 것을 원만히 갖추고 있고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경전에서는 또한 두 가지 개념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열반’입니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어의 음역입니다. 불법에서는 불생불멸의 해탈 경계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무여열
반’과 ‘유여열반’으로 나누는데 일반적으로 아라한의 열반 경계를 ‘유여열반’이라고 합니다.
사과 아라한은 비록 일시적으로 선정에 머물러 오랜 시간 동안 생사윤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지만, 인연이 구족되면 여전히 선정에서 나와 다시 윤회에 들어가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
탈은 아니어서 ‘유여열반’이라 부릅니다. 반면 부처님의 열반 경계는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
나 생명이 생멸로 오염된 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불생불멸의 영원한 대 자유를 얻은 것이
므로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 즉 ‘무여열반’이라 합니다.
경전에서는 또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상’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모두 ‘나’에 대한 자체의 정의가 있습니다. 예
를 들면 눈·귀·코·혀·몸·뜻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사람의 그것과 구별됩니다. 우리의 심식(心
識)은 비록 인간 세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긴 했으나 사람마다 모두 육도(六道)의 의식형태
를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내고 원망하고 질투할 때 우리의 마음은 아수라에 있고, 거룩하고
고결한 것을 추구할 때 마음은 천인에 있으며, 우리가 극심한 고난을 겪을 때 마음은 지옥
에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을 어느 한 특정적인 궤도에 국한해 정의를 내리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진실은 바로 ‘우리는 부처이며 자유자재로 온갖 상을 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착과 진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지은 여러 가지
업력에 끌려서, 서로 다른 생명의 의식 상태에 갇혀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아와 심신 안팎에 대한 정의·인지·체험·느낌 그리고 취하고 버리는 선택 이 모든
것이 바로 ‘아상’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실재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이 ‘나’는 허망한 것입니
다.
그럼 ‘인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타인의 심신 안팎에 대해 내리는 모든 정의·인
지·체험 등을 말합니다. 그러한 타인이 실재한다고 여겨, 그로 인해 좋아하고 싫어하거나 취
하고 버리거나 혹은 소유하려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상’에 대해 경전에서는, 삼계육도에 서로 다른 모습과 의식형태를 가진 중생들이 존
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생멸하는 윤회속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본래의 불성으로 회
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자상’에서 ‘수(壽)’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시간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불로장생을 바라며 죽음을 원치 않는데, 이것이 바로 ‘수자상’입니다. 사실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은 만법의 생멸상(生滅相)에 집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품의 대략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대보살이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를 성취하려면 우선 큰 자비심을 내서 삼계의 중생을
두루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난생·태생·습생·화생·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
무상이든 막론하고 그들을 제도하여 그들을 생멸이 없는 부처님의 열반 경지에 진입시켜 생
사윤회에서 해탈시키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설령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해탈
시켰다 하더라도 보살의 견지에서는 ‘나의 제도에 의해 부처가 된 중생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진정 보살도를 행하는 보
살이라면 나, 너, 그 이 삼자에 대한 실제적인 분별이 없어야 하고, 중생의 여러 가지 차별
상도 없어야 하며, 만법의 생멸상이 있음으로 인해 장생불로를 희구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문제를 논하셨을까요? 누군가 성불하고
자 발심하였다면, 자신은 생명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응당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에 서서 보면,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일체를 포함하고 있기에 매 사
람의 마음은 우주 일체 유정(有情) 생명체의 홀로그램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불과를 성
취하겠다고 발원한 것은 동시에 우주의 모든 유정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발원한 것을 의미하
기도 합니다. 따라서 불법을 널리 펴고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것은 모든 보살의 사명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속세에서 보살의 사명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 생
명의 진실을 알게 하고 중생을 윤회의 고해에서 제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아주
작은 선일지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보살이 도를
이루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품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살이 중생을 두루 제도하고자 발심하였을 때, 호불호 선택이 작동하여 좋아하는
사람은 제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제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삼계의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원력과 평등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 나, 그 그리고 모든 중생이 실제
로 존재한다는 인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러면 보살에게 고난과 번뇌가 닥쳐올 것입
니다. 근본적인 견지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과 중생의 본성은 모두 부처이고
중생의 자성은 원래 생멸하지 않으며, 본래 고요한 열반이기에 여러분이 그들로 하여금 이
런 본질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살이 중생을 대하는 것은 마치 꿈속의 약과 질병 같은 것이어서, 꿈에서 깨어나면 약과
질병은 모두 허망한 것이 됩니다. 진정한 공 즉 진공(真空)에는 보살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
다. 가령 보살의 견지가 명확하다면, 중생을 제도할 때 보답이나 이해를 희구하지 않을 것
이며, 중생이 보여주는 온갖 상태에 미혹되어 마음에 번뇌를 일으켜 여여부동의 경계에 안
주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래전 제가 처음 금강경을 읽을 때, 이 품을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들고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중생을 두루 제도하라는 서원을 세우라고 하신 것인데….’
그때 마침 맞은편 벽에 파리 한 마리가 있었고, 저는 속으로 ‘파리는 난생인데 부처님 말
씀대로라면, 나는 이 난생인 파리를 무여열반으로 제도하게끔 발원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리를 빤히 쳐다보던 저는 ‘만약 지금 내가 이 파리를 깨닫게 하겠다고 발원
한다면, 맙소사, 얼마나 오래 걸릴까!’라는 생각에 곧바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문
득 제가 파리의 상(相)에 집착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지금 제 마음속에 저와 파리가 실재한다는 상이 있다면 저는 영원히 그 파리를 열반
으로 제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 자신도 이 원력에 휘둘려 고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익사할 것입니다. 중생상에 집착한다면 저는 세세생생 이 원력에 이끌려 육도윤회의 고난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중생은 평등하며 모두 부처와 같은 원만한 공성을 지니고 있기에
파리와 저는 모두 진공이 모습을 나타낸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자 벽에 붙어 있는 파리는
비록 여전히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벌레이긴 하나 저의 마음은 안주하게 되었고 더 이
상 이 서원 때문에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품을 읽고 난 후 우리가 응당 알아야 할 사실은, 모든 중생은 본질적으로 오직
부처가 될 수밖에 없으며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는 다만 우리 머릿속의 분별일 뿐이므로 보살은 마땅히 상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발원해야만 모든 상의 굴레에서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을 널리 제도하겠
다는 이 원력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고난의 여정을 걷게 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 또한 인간
세상에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유위법(有爲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무상정등정각을 얻
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