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는 데 없이 보시해야 한다. 이른바 색에 머
물지 말고 보시해야 하며, 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
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머
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동방의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서·북방과 네 간방, 상하의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머묾이 없이 보시하면, 그 복덕 또한 이와 같아 헤아릴 수 없
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이 불법을 수행할 때 응당 머무는 데 없이 모든 것을 보시해야 한다. 보시할 때 마
음은 응당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그 어떤 상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색·성·향·미·촉·법’을 외육진(外六塵)이라 하는데, 이는 인간의 ‘눈·
귀·코·혀·몸·뜻’을 상대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물체,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맛보는 맛, 몸으로 느끼는 감촉, 그리고 머릿속의 개념·인지·정의 등이 법에
해당합니다.
중생이 불과를 성취하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만사 만물에 연연하지 말고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보살이 안으로는 육근을 버리고 밖으로는 육진을 버려야 하되 마음이 상에 집착한
상태에서 버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득실의 고뇌가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과거에 그림 그리기와 시 쓰기를 좋아하여 화가나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
습니다. 불법을 수행하게 된 후 모든 시간과 정력을 선정 수련과 경전 읽는데 쏟아부어 저
는 저 자신의 취미를 포기했다고 여겼습니다. 즉 도를 구하기 위해 속세의 많은 명예와 이
익, 취미를 희생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저와 같은 이런 인지가 있다면 보살은 마치
열사처럼 사는 셈이 됩니다. 희생이 있다고 여기니까요. 이를 일러 ‘법에 머물러 보시한다’
라고 합니다.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고기를 아주 좋아하는데 기맥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나 혹은
자비심을 키우기 위해 채식을 시작했다고 합시다. 이는 이 사람이 수행을 위해 육식을 보시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맛에 머물러 보시’한다면 그는 자신이 맛있는 음식을 포
기했다고 느껴 먹고 있는 채식도 맛없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사실 그가 맛있다고 여기는 음
식이 어떤 이들의 눈에는 각종 향신료를 가득 뿌린 동물시체에 불과합니다. 특히 천인이 보
기에는 악취가 진동하여 견딜 수 없을 정도지요.
만약 이 수행자가 이 ‘맛있는 음식’이 자아의 감각과 인지일 뿐이며, 맛있는 음식이 본질
적으로 그가 인지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맛있는 음식을 보시하였다고
여기지 않아 채식하는 것을 아주 큰 고민거리나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맛에 머물지 않는 보시’입니다.
또 예를 들어, 그대가 한 여인을 좋아하여 그녀의 외모와 목소리, 그녀 몸에 뿌린 향수
냄새, 그녀의 매끈매끈한 피부 등을 좋아한다고 합시다. 만약 어느 날, 성도를 위해서 반드
시 이 감정을 버려야 할 때, 만약 그대가 인지하고 느끼고 체험한 이 모든 것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그대는 바로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면서 보시하는 것’이 됩니
다. 그대는 분명 아주 고통스러워 이것을 희생이나 상실로 느낄 것입니다.
사실, 그대가 사모하고 있는 미녀가 진짜 그러할까요? 속담에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하듯,
그대가 다만 상에 집착하고 정욕이 동했기에 이 여인 옆을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하루 그대 마음이 변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이 여인은 그대
눈에 추하게 비추어져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버렸든 혹은 싫어하는 것을 버렸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상에 머문 상태에서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진실은 그대가 진정으로 그 무언가를 버
리거나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그대가 인지한 그 상들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법에서 보시를 수행하고 버림을 수행하는 최종 목적은 ‘버림’을 통해 이러한 사람·일·사물
로부터 해탈하여 삼계육도의 모든 것이 그대를 속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일체 상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상에 머물지 않고 버리고 떠나거나 보시한다면 그
대의 마음은 보시에 안주할 수 있어 보시의 공덕은 공성으로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품에서 또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
은 마치 사방과 상하의 허공만큼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보시를 수행하면 공
덕이 이토록 클까요? 수행자가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밖으로는 육
진을 버려 티끌 상[塵相]이 없는 것과 같고, 안으로는 육근을 버려 아상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육근과 육진이 결합하여 십팔계를 형성한다고 합니다. 만약 육근이 공하고 육
진이 공하면 십팔계 또한 공합니다. 이러하면 수행자는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로 인해 이미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대보살의 경지, 즉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
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는’ 경계에 안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공
(人空)과 법공(法空)을 증득하여 기본적으로는 삼계육도를 벗어나게 되며 마지막에 법신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만 하면 곧 부처님의 진공 경계에 진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덕은
당연히 아주 크고 불가사의합니다.

세상에서 한 보살의 수도과정을 둘러보면 세간의 오욕락을 만끽할 수 없고 명예와
이익을 얻을 시간도 없는 데다가 부단히 공덕을 쌓고 바라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보시해야
합니다. 만약 속세의 만법이 ‘필경 공하다[畢竟空]’고 하는 견지에 안주하지 못하면 모든
‘보시’와 ‘버리고 떠남[舍離]’은 단순히 봉사와 공헌, 희생이기에 보살은 오랜 세월 동안 해
탈의 희열을 맛보지 못하고, 보살도에서 걷는 길이 몹시 힘겨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
로 공성정견(空性正見)이 없는 보살도는 보살의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
님께서는 세상 만법이 실재한다는 관점에 머물러서 보시하고 출리(出離)를 행해서는 안 된
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속세의 인간이 벗어나려고 할 때, 세속의 모든 것을 여전히 탐착하고 있으므로 득실
의 번뇌가 있을 것입니다. 반면, 아라한은 정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싫어서 떠나려고
합니다. 아라한은 육진과 일체 오락은 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에 마땅히 모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라한이 돈을 탐욕을 일으키게 하는 독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
다. 그러나 보살도에서 재물을 포기할 때 아라한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돈은
필경 공하다[畢竟空]’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돈이라 부르든, 독사라 부르든, 탐욕이라 부르든 그것은 단지 명상(名相)일 뿐이며,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모두 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만약 상에 집착해서 보
시한다면 그 모든 보시는 인간 세상의 선업이 되어 선한 과보만 얻게 될 뿐 윤회에서 해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에 머물지 않는 보살의 보시는 보시한 후에 바라는 것이 없고
나아가 보답이나 이해를 바라지 않으며, 공덕과 과위를 희구하지 않으며, 또한 경계에 휘둘
리지 않고 득실의 번뇌가 없으므로 본래 원만하고 득실이 없는 자성의 진공으로 조속히 회
귀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널리 제도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나서 보살의 떠남[出離]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불법의 전체 수행 과정에서 출리심(出離心)을 아주 중요시됩니다. 왜냐하
면, 한 사람이 불과를 구하고자 발심하였을 때 먼저 삼계육도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윤
회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갓 발심한 중생은 습기
와 욕망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서 좋아하고 집착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가 되면 마
음속에 탐이 나고 애착이 가서 그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만약 삼계육도의 환상 경계를 여전히 탐하고 미련이 있다면 이런 시공간에 갇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성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보살은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
을 깨달아 ‘상에 머물지 않고 일체를 보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보살이 출리심의 기반이며
보살의 진정한 출리(出離)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