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
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
리라.”
이 경문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중생은 신체적 모습에 근거하여 여래를 인지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의 여래는 자신의
자성 본체를 가리킵니다)”
혹은 이 문제를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중생은 허망하고도 제한성이 있는 눈·귀·코·혀·몸·뜻을 갖고 원만한 자성을 볼 수 있겠는
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중생의 신체적 모습은 다만 여러 인연이 모여서 형성
된 가상이므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므로, 본질적으로 중생에게는 원만하고 불변하
는 불생불멸의 몸의 형상이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생은 자신의 신체적 모습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집착하고 이
를 통해 ‘자성’을 찾는바, ‘자성’ 또한 당연히 일정한 신체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는 인간의 신체적 모습에 집착하면서 다른
궤도의 중생을 찾고 부처와 보살 혹은 외계인을 찾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습니
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우리의 눈·귀·코·혀·몸·뜻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정
의하고 인지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만약 이 점을 깨닫게 되면 모든 상에는 고정된 상이 없으며, 끊임없이 변하고 생멸하여
환영과 같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만물만상의 겉모습에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만물만상은 모두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모두 여여부동의 영원불변한 여
래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문의 진실한 뜻은 부처님께서 그대에게 모든 ‘상’에서 불성을 보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릇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견성(見性)하려고 모든 상을 버리고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이
눈·귀·코·혀·몸·뜻인 몸의 형상을 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몸의 형상을 버리고 이
몸의 형상 밖에서 자성이나 여래를 찾는다면 그건 그릇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몸의 형상
으로 여래를 보려는 것입니다. 혹은 모든 것을 부정하여 허공이나 허무가 바로 여래라고 인
지하는 것도 그릇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몸 형상의 허망함과 생멸 무상함을 보고
나서 자신의 ‘눈·귀·코·혀·몸·뜻’이 만들어낸 착각에 휘둘리지 않고 안팎으로 여여부동하여
그 어떤 상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자성으로 돌아가 자성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선 품에서 부처님께서 “마땅히 상에 집착하지 않고 발원해야 하고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라”라고 말씀하신 뒤, 이제 막 불과를 성취하고자 발심한 사람들에게 주의해야
할 또 다른 문제를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즉, 부처는 형체도 모습도 없기에 부처를 그 어떤
고정된 형상으로 보거나 혹은 성불을 세속적인 법을 배우듯 하여, 자신을 어떤 부처의 모습
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제자가 쉽게 범하는 잘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상은 진공의 시현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20근짜리
물건을 든다면 이 팔은 20근의 힘을 나타낸 것입니다. 허나 제가 이것을 내려놓는다면 20
근의 무게는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만약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
요? 만약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방금 나타났었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상 또한 이 힘과 같아서 인연이 갖추어지면 나타나지만 모든 상은 실재한
다거나 허망하다고 정의할 수 있는 진실한 자아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물질이 실제로 존
재한다고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는 “무릇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라고 말
씀하십니다. 언젠가 그대가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보게 될 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상이 사
라져 허공이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상 아님[非相]”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모두 고정된 상
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본질적으로 그대의 인지가 바뀌었기에 더는 상의 진가와 허실에
집착하지 않고, 더는 상의 생멸과 변화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여래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 그런 상들이 허무하게 되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저 자신의 수행 중 있었던 사례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번은 제가 한 말들이
한 친구의 자아와 이익을 건드려, 그 친구는 갑자기 격분하여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습니
다. 저는 서서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평소의 수행 덕분에 일정한 지력(止力)과 선정의
힘 그리고 자비심을 갖추었기에 그 순간 저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로 평판하지도 않았
고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드럽고 평등한 마음으로 그의 분노를 마주할 뿐, 자신이
인욕을 수행한다거나 겉으로는 말이 없으나 속으로는 은근히 배척하거나 저항하거나 하찮게
여기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서서 집중하여 그가 큰 소리로 포효하는
것을 듣고 있는데 저는 갑자기 한 경계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는 온몸이 불덩이로 변해서 공
중에서 타고 있었고, 저 자신은 공중으로 솟아올라 거대한 연꽃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금강경에서 언급한 “일체 상이 상 아님[諸相非相]”이라는 이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상은 정해진 상이 없고, 모든 상을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기만 한다면 모두 그 속에서 ‘공성’의 경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말한 수행
경계가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계는 허망한 것인지라 ‘나’, ‘그’, ‘분노’, ‘불
꽃’, ‘연꽃’ 또한 모두 허망하여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모든 경계에서 ‘상에
집착하지 않을 때’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사람마다 ‘자성여래’를 깨닫는 독특한 통로와 방식
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화 향기를 맡고 ‘자성여래’를 보고, 어떤 이는 자다가 베개가
바닥에 떨어져 ‘자성여래’를 보고, 어떤 이는 물을 긷다가 물통 밑굽이 빠지는 순간 ‘자성여
래’를 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어떤 일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대로라고 집착하지만 않는
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분노에서, 칭찬에서, 선정의 고요함에서 그리고 행주좌와와 어
묵동정(語默動靜)에서 ‘자성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이 모두 허망하고 고
정된 상이 없으며 본질에서는 모두 진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
게 이르신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
리라”는 그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