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거나 가거나, 앉거나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어디에서 오는 바
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여래라 하기 때문이다.”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때로는 오고, 때로는 가고, 때로는 앉고, 때로는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래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
는 바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즉 오고 가는 특정한 장소나 형상이 없다는
뜻임) 비로소 여래라 이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여전히 여래의 진공 경계에 대해 설하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는
부처님께서 오고, 가고, 앉고, 눕는 모습이 보이지만 하나 만약 우리가 진공 경계에 안주해
있다면 여래께서 종래로 움직인 적이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공에는 움직일
수 있는 그 무엇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성을 증득한 사람에게는 말과 침묵,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환상과 같기에, ‘여래의 진
공’ 속은 무아·무인·무생멸·무변이(無變異)이며, 여여부동하고 오고 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여래란 어디에서 오는 바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
하여 여래라 하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제17
품에서 여래에 대해 내리신 정의를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일체법
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만법의 본질은 모두 여여부동하
며, 생멸 변이를 일으킨 적도 없고, 오고 감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한 것입니다.
이 세상 만법은 모두 여래의 본성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주가 빅뱅
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고 폭발 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행성이 형성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우주 만물은 모두 인연이 갖추어져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이 대폭발 또한 하나의 ‘연(緣)’인 셈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연기를 설하는 동시에 공성도
설합니다. 따라서 인류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생명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마땅히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만법 속에서 공성의 경계에 안주하여 여여부동하며,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상에 미혹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주 대폭발은 다만 환상에 불과하고, 우주는 또한 가상에 지나지 않
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견지에 안주하여 수행하고 증득해야만 인류는 비로소 생명 근원으로
의 회귀와 시공간에서의 방랑 종료에 힘입어 진정으로 마음이 편안해져서 생명의 궁극적 의
미는 근원으로의 회귀임을 알게 됩니다. 혹여 이 지점에 이르러 ‘여래의 진공 경계’에 서서
우주의 일체를 다시 본다면 우주의 일체는 모두 묘유(妙有)로 화하여 청정하고 오염 없는
근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시공간이 우리에게 선사하
는 모든 것을 온전히 즐길 수 있으며 모든 세상 또한 극락세계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