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그대가 ‘여래는 상을 원만하게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를 얻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여래는 상을 원만하게 갖추지 않았기 때문
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수보리여! 그대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자는 일체법이 단절되고 소멸된
다고 설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
음을 발한 자는 법에 대하여 단절되고 소멸된다는 상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한다고 해
도, 만약 또 어떤 보살이 있어 일체법이 무아임을 알아 인욕을 성취하게 된다면, 이 보
살의 공덕이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수보리여! 보살은 자신이 쌓은 복덕에 탐착하지 않아야 하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이다.”
이 품의 대체적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가 (지금) 혹시 ‘여래가 32가지 원만한 몸의 형상을 갖추지 않고서도 무
상정등정각을 증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만약 그대
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최고로 원만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일체 존재하는 현상을
전부 부정하고 없애버리는 단멸상(斷滅相)을 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최고로
원만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일체 존재하는 현상에 대해서 전부 부정하고 이를 버
린 후 단멸의 경계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앞선 품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대답을 부정하시며 32상으로 여래를 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수보리는 보는 주체[能觀]와 보이는 대상[所觀]이 없는 ‘여
래의 진공 경계’에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래의 견지에 대해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는 중생은 32상이 허망한 것이라면 굳이 청정행을 닦지 않아도, 공덕을 쌓지 않아도 성불
할 수 있으리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래의 32상 80종호는 공덕이 원만한 상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
습니다.
“그대들은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말라. 공덕이 없다면 그대들은 어쩌면 영원히 꿈에서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반야 지혜를 깨달은 부처님 제자라면 이 세상의 일체에 대해 단순히 부정하거나
내버리지 않습니다. 만약 의식 차원에서 부처님께서 만법이 허망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만법을 버린 채 적멸 속에 머물고자 한다면 이는 바로 부처님께
서 말씀하신 단멸견(斷滅見)일 뿐 부처님의 올바른 지견(知見)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관점을 증명하여 제자들이 이 관점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하고, 제자들이 수행 중 일체 ‘법무아(法無我)’를 깨닫기 위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고 즉시 한 예를 들어 방금 언급한 바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제28품입니다.
원문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한 보살이 있어 항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의 칠보를 가져다 보시한다고 하
자. 또 어떤 보살이 있어 일체법이 무아임을 깨닫고 수행하여 ‘인(忍)’을 통해 이를 성취해
낸다면 이 보살이 얻는 공덕은 앞의 보살의 공덕을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이 보살
이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자신이 행한 복덕을 탐하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
다고 설한 것이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예를 들어 어떤 보살이 있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칠보로 보시한다고 하
자. 또 어떤 보살이 있어 모든 법이 무아임을 깨닫고 인(忍)을 통해 이를 성취해 낸다면 이
보살이 얻는 공덕은 앞의 보살의 공덕을 뛰어넘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忍)’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떤 경계에서도 마음이 편
안히 머물며 여여부동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곧 ‘인’입니다. 예를 들어 육바라밀 중 인욕행
을 닦을 때 일체법이 공함을 알아 참아야 하는 대상도 없고, 참아야 하는 일도 없으며 나
자신 또한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때야 비로소 마음이 진정으로 인욕행에 안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인욕’은 그저 억지로 감내하는 것이거나 참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있고 상대가 있으며 참아야 할 일이 있다고 여기는 한 조만간에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설령 끝까지 견딘다고 하더라도 고난·희생·헌신을 겪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깨우쳐야만 비로소 화가 나지 않고 마음이 오랫동안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이 수행에 안주할 수 있어 불과를 원만히 증득할 수 있습니다. 인욕
행을 닦되 만법이 모두 공하다는 이치를 모르면 사실 모든 선행과 모든 인내는 그저 인간과
천인의 복에 그치고 맙니다.
어떤 제자들은 일체법이 공하고, 아(我)가 공하고, 인(人)이 공하며, 인욕하는 일도 공하
다고 하니, 참는 것이나 참지 않는 것이나 매한가지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
다면 왜 굳이 인욕해야 하는가? 인욕을 수행하지 않고 일이 지나간 후에 마음속에 걸림이
없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법이 모두 공할 때, 당신이 곧 중생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걸림이 없다고 해서
당신하고 따지던 중생이나 당신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중생의 마음에도 걸림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만약 수행자가 위에서와 같은 생각을 품는다면 이것인즉 부처님께서 앞
서 말씀하신 복덕을 닦지 않고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인욕도
공하고 복덕도 공하다면서 그저 일체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성이라
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단멸견(斷滅見)입니다.
또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수행할 때, 심신 내외 일체 경계의 유혹을 참고, 습기
와 욕망의 이끌림을 참아, 마음을 공성 정견에 편안하게 머물게 한 후 여여부동해야 합니
다. 여래의 경계를 원만하게 증득하기 전에 하는 것이나 안 하는 것이나 다 똑같다고 여겨
자신의 습기와 욕망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고 여기는 태도
는 보살도의 길이 아니며 불교를 배우는 자세도 아닙니다. 불제자들은 마땅히 일체 상이 허
망하다는 이치를 깨닫고서도, 동시에 일체 선법을 실천하여 일체 공덕을 원만하게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모든 아집과 습기, 욕망을 철저히 뿌리 뽑고 미혹의 꿈에서 깨어
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에 대한 설명이 이 대목에 이르게 되면, 이제 모든 것을 유(有)의 관점에서부터 논의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공즉시색(空即是色)의 도리입니다. 여래의 경계를 시공간 속에서
즉 일상 생활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평범하게도 그저 ‘받지도 탐하지도 않는 것’으로 나타납
니다.
여기서 ‘받지 않음[不受]’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왜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표
현으로 보살이 ‘인(忍)을 이루게 됨’을 해석했는지, 그래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는
수보리마저도 이에 대해 바로 반응하지 못했는지를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견입니다
만, 수보리는 시종일관 부처님 곁에서 수행하는 것 자체를 생의 최고 복덕으로 여겨 왔기
에, 그 밖에 또 받아야 할 출세간(出世間)이나 세간(世間)의 복덕이 따로 있다고는 종래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의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
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보살은 만법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심신의 욕망이 가져다주는
번뇌를 견뎌내고 각양각색의 미식·음악·가무·화려한 의복·사치스러운 향락 등 온갖 외부 환
상 경계의 유혹을 참으면서 공성 정견에 여여부동하게 안주하여 한적한 곳에서 수행에 전념
합니다. 세속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사람들이 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
다면 대보살은 정말로 세세생생 복덕을 쌓지 않은 것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고 누
릴 능력이 정말로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보살은 이 세상의 모든 유루복덕(有漏福德) 즉 번뇌가 있는 복
덕을 탐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이 세상의 유루복덕을 탐내지 않고 보살행을 널리 행
하면 공덕이 점차 원만해집니다. 이와 동시에 출세간의 공덕 또한 탐내지 않고 그 공덕 또
한 환상으로 여겨야만 비로소 인(忍)을 통해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는 대보살의 이런 행위를 일컬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리한 큰 복덕이 있는 수행자 여러분, 설령 여러분이 세상의 사치와 부
귀영화를 누릴 능력과 여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공성 정견에 여여부동하게 안주하
여 무상정등정각을 구해야 마땅하지 세간의 부귀영화에 안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
다. 마찬가지로, 수행 증득 과정에서 수행자가 선정의 기쁨, 빛으로 화한 몸, 신통력과 신변
(神變), 부처님의 32상 모두를 환상으로 여긴다면 이 또한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고 ‘탐하
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 말한,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으며 보살은 마땅히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법이 자성이 없음을 깨닫고, 온갖 유혹의 환상 경계에서도 마음을
안주시켜 여여부동하여, 이를 통해 성취를 이룬다면 그 복덕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칠보
로 보시한 보살의 복덕보다도 더 클 것이다.”
그리고 또 이어서 “그것은 이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은 자신이 쌓은 복덕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까닭으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
고 설한 것이다.”
제28품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제27품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제27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법이 공하기에 굳이 32가지 청정행을 닦을 필요가 없고, 원만한 공덕을 갖추
지 않아도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길까 봐 염려하셨습니다. 이런 견지는 부처님
께서 말씀하신 공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서 다만 만법에 대한 단순한 부정과 포기이지
부처님의 올바른 지견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한 보살이 일체법이 모두 공함을
알고 인욕을 성취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아주 크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점은, 이 품에 앞서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 중 복덕의 허
망함을 이미 수없이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19품에서는 바로 복덕은
자성이 없고 본질적으로 공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아울러 한마디를 추가하
셨습니다.
“이러한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도 탐하지도 않아 이미 복덕에 대한 집착을 파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알고 인욕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
게 수행하여 증득하면 얻는 그 복덕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칠보를 가져다 보시한 그
공덕을 뛰어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