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겠구
나.”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보
아서는 안 됩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형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이 어떠한가?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그대 말대로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32상이 있으니
전륜성왕도 곧 여래겠구나.”
수보리가 또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깨달아 32상으로 여래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게송을 읊습니다.
“만약 형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
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이 품에서의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은 아주 미묘하므로 반드시 그들이 어떤 견지에서 교
류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수보리가 왜 부처님의 질문에 그릇
되게 답을 했을까 하는 의혹이 들게 됩니다.
경전의 앞부분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미 수보리와 여래 몸의 형상 문제에 관해 몇 차례 탐
구하신 적이 계십니다. 예를 들면 제5품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
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모든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
라.”
제13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32상이 곧
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32상이라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경문에서 볼 수 있다시피, 수보리가 앞에서 한 대답은 모두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특정된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품
에서는 왜 부처님께서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는
가?”라고 물으시자 수보리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라
고 대답했을까요? 왜냐하면 이 경우는, 부처님께서 여래의 진공 경계에 서서 그와 제일의제
(第一義諦)를 교류하고 계시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21품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언급한 중생의 존재를 부정하시면서 중생은 가
명이라고 설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제22품에서 제24품에 이르기까지는, 수보리가 문제를 제
기하자 부처님께서 ‘무상정등정각’은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 평등심과 무소득심(無所得
心)임을 설하셨고, 제25품에서는 범부의 존재를 다시 부정하시면서 범부는 단지 가명일 뿐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상술한 이 몇 품의 질의응답에서 부처님의 의중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더는
상에 집착하지 않게 된 후 여전히 남아있는 범부와 중생의 지견을 떨쳐버리고 이제 ‘법을
듣는 자’의 견지에서 여래의 진공 경계에 들어가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듣
는 주체[能聞]와 들리는 대상[所聞], 보는 주체[能觀]와 보이는 대상[所觀]이 있을 수 없는
경계입니다. 그러나 수보리는 이를 한순간에 깨닫지 못했고 또한 여래의 진공 경계에 안주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수보리는 ‘진공이 묘유를 낳는다[眞空生妙有]’는 이치, 즉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일체의
상을 시현할 수 있으나 그 일체가 사실 상이 없다는 데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견지
에서 우리는 그 어떤 상으로도 여래를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어떤 상을 보든 곧 공성을 보
는 것이고 여래를 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 이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보리는 32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답했던 것입니다. 수보리의 이 대답은 ‘색공불이(色空不二)’라
는 상에 집착하는 제자들이 듣기에는 틀린 말이 아니겠지만, 여래에게 고정된 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중생에게 있어서는 그 대답이 다소 편파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 품을 앞부분에 배정해서 토론했다고 가정하면, 이 구절 뒤에 아마도
“32상은 곧 상이 아니므로 이름하여 32상이라 한다.”가 추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수보리는 이같이 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와 부처님께서 공성을 탐구하는 시각
이 이미 색공불이의 관점으로 전환 되었으므로 본성(性)과 상(相)은 하나와 같기 때문입니
다. 따라서 제자들도 더는 의식 차원에 머물러 참과 거짓, 본성과 상으로 나눠서 진리를 깨
닫는 단계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당하의 ‘본성과 상’에 머물지 말고 꿰뚫어 나
가야 할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앞선 몇 품에서 여래의 진공 경계는 무
념·무심·무일체상(無一切相)이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하시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여래가 법을
설하고,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며, 여래가 아(我)가 있다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은
모두 여래의 이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습니다.
수보리는 공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내면 깊은 곳에서 온갖 상을 겹겹이 타
파해 왔으나, 그의 관심은 시종일관 눈앞에 계신 부처님께 놓여 있었습니다. 여래의 경계를
논함에도 그것을 자신의 것이 아닌 부처님의 경계로만 여겼기에 자신은 아직 부처님과 동등
한 위치에 안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성에 대한 그의 답변 속에는 여전
히 ‘나’와 ‘부처’, 그리고 ‘문답’이라는 분별이 남아있으며, 수보리와 부처님은 여전히 별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 과위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은 비록 부처님의 견지를 이해하여 깨달음을 얻었
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언행이 어떤 관점에 서 있는지 늘 살피고 비추어 보아야 합
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쉽게 미세한 집착들이 생겨 공성의 궤도를 이탈하기 쉽습니다.
오직 그 과위에 온전히 안주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증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또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가령 이때 수보리가 이미 여래의 진공 경계에 안주하고 있다면 그는 즉각 부처님께서 하
신 말씀의 진의를 알아듣고 “수보리란 존재가 근본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갖고 이를 보겠
습니까? 여래 또한 32상이 부재하므로 이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모두 공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보리가 부재하므로 눈앞의 여래도 역시 부재하고, 무아·무인이므로 여래의 32
상 역시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분명히 공성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있었으나 잠시 여래
의 진공 경계에 안주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답변은 여전히 아상과 부처상에 머물
러 있으면서 ‘내가 보고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 여래는 이
시점에서 사실 하나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렇게 부처님께서는 즉시 그의 대답을 부정하
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겠구나.”
부처님께서는 한 가지 예를 들어 수보리의 앞선 대답을 부정하셨습니다. 불교 경전에는,
전륜성왕은 그 공덕이 아주 커서 그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몸도 태어날 때 이미 여래와 같은 32가지 공덕의 상을 갖추고 있으나 80종호는 없다는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대 말대로 그러하다면 전륜성왕 또한 여래겠구나.”
수보리는 즉각 부처님의 논조를 알아차리고는 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깨달아 32상으로 여래를 보아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진공의 쓰임입니다. 여래의 32상을 관(觀)하되, 마음속에는 실로 32상이 없으므로
여래는 상이 없는 것입니다.
이 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존은 게송을 읊습니다.
“만약 형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
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부처님은 이 게송을 여래 진공의 견지에서 읊은 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진정 여래의 참
모습을 알고 싶다면 부처님의 “공성” 지혜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선정 속
에서 온 하늘에 가득 찬 신선과 부처를 본다고 할지라도 진실로 여래를 본 것이라고 할 수
는 없습니다. 진정 여래를 보고 싶다면 자성을 깨닫고 여래의 진공 경계를 깨닫고 모든 사
람의 본질은 모두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게송를 보고 있자니 예전이 한 도반이 저에게 물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부처님께서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지 말고 형색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
는데 그럼 관세음보살님은 소리를 듣고 고통에서 구해주시는 바 천 곳에서 기도하면 그 천
곳에 나타나신다고 하셨고, 아미타불께서는 임종 시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그곳에 오셔서
맞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삿된 도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
이 아닙니까?”
금강경 중 부처님의 게송은 ‘여래의 진공 경계’에 임하여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고자 발
심한 모든 제자에게 이르신 것입니다. 만약 대승 불법을 수행하는 이의 마음속에 여전히 아
상·인상·중생상·불상·불법상 등이 남아있다면 성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과 관세
음보살의 경우는 시공간에서의 자비롭고 방편적인 공성의 시현으로서 고해에서 스스로 벗어
날 힘이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공 담론이요, 다른 하나는 묘용
(妙用)으로서 이는 두 측면입니다.
부처님께서 언급하신 여래의 진공 경계와 과위 경계는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려면 반드시
지녀야 할 견지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행위는 곧 중생의 꿈에 들어가서
중생 자신이 꿈속에서 고통과 고난을 느끼고 있는 등 스스로 해탈이 불가능한 중생을 도와
주고 인도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공부하면서 불교의 공성 정견을 갖추어
야 할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방편 역시 잘 활용함으로써 공성 정견의 지도 아래에 속세에
들어가 보살도를 실천하고 각종 선교 법문으로 중생을 인도하고 제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일부 수행자는 부처님의 이 게송을 인용하여, 자신이 증득한 경계나 혹은 신통력을 이
야기하는 그 누군가에 대해 이런 사람들이 삿된 도를 행하고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아예 주
화입마하였다고 공격하고 비방합니다. 사실 그 누군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든지 간에 우선은
그가 이런 신통 경계에 집착하는지 아니면 과시하는지 혹은 이를 통해 명예와 이득을 얻고
자 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단지 그 수행자가 자신의 의문점을 타인에게 묻거나 혹은 자신의 어
느 한 경계 중의 깨달음 등을 다른 이에게 알려주려고 이야기한 경우이며 또한 수행자의 견
지가 부처님의 공성 정견이라면 그가 삿된 도를 행하였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런 상황에
서 그를 비방한다면 이는 구업을 쌓는 일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제18품에서도 부처는 천안·혜안·법안·불안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당연히 천
안·혜안·법안·불안의 경계 또한 있을 겁니다. 사실 부처님께서 이런 경계를 논하시기는 하나
이는 부처님께서 일체 상이 허망함을 깨달은 전제 위에서 신통력과 끝없는 법력 그리고 한
량없는 불국토 세계의 상황을 말씀하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를 빌미로 부처님을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생은 실로 이런 상에 너무나 쉽게 집
착하게 되는데 때론 육안으로 본 것에는 집착하지 않으나 오히려 천안으로 본 경계에는 집
착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후세의 많은 스승이 제자에게 부처를 보면 부처를 베고, 마구니를 보면 마구니
를 베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제자들이 ‘여래의 진공 경계’에 온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수행 과정에서 스쳐 지나가는 현상에 집착할까 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자
가 일체 상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에게 부처의 형상이든 마구니의 형상이든 아
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이 나타나든 그것들이 모두 허망한 것임을 알기에 마음이 여여부동하
면 그만인데 그렇다면 벨 것 또한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설령 공(空)과 유(有)를 설하고
부처와 마구니를 논한다고 해도 이는 단지 중생을 제도하려는 방편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