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 講義금강경 강의

  • 1 –
  • 2014년
    양녕(楊寧)
    목차
    머리말
    경전제목
    제1품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제2품 선현기청분(善現啟請分)
    제3품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4품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5품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6품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7품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제8품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제9품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10품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1품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제12품 존중정교분(尊重正教分)
    제13품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14품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5품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제16품 능정업장분(能淨業
    障分)
    제17품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제18품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제19품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제20품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제21품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2품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3품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제24품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제25품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제26품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 2 –
    제27품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제28품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29품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제30품 일합상리분(一合相理分)
    제31품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제32품 응화비진분(應化非真分)
    회고
    에필로그

  • 머리말

  • 曾经,每当我看到一些心地正直善良的人遭受人世间的苦难时,就觉得是天使不小心掉进了
    地狱。我思考过,当天使在地狱里,他该怎样才能坚守他的纯净和善行却不被邪恶以及苦难伤
    害?他该怎样想、怎样做,才能保持住内心原有的宁静与喜悦,而不是厌离这个世界或堕落崩
    溃?
    오래전 저는 마음이 정직하고 착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것을 볼 때마다 천사
    가 실수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천사가
    지옥에 기거하는 경우라면 그는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순수함과 선행을 굳게 지키면서도 사
    악함과 고난으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해야만 마음속에
    원래부터 그렇게 간직하고 있던 그 평온과 기쁨을 유지하여 이 세상이 싫어서 떠나거나 혹
    은 타락하여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지?
    在未修证佛法前,我还听说在佛教中有一种大菩萨,他们是从生死轮回中已趋向解脱的觉
    者,他们已有能力永居极乐之所,但他们为了救度仍轮回在苦难中的众生乘愿再来,甚至进入欲
    界最苦难的三恶道。他们虽有着坚定的出三界的信念、正见与智慧,但在这个世界修证未圆满
    前,仍会与沉迷不醒的众生一起体验欲望、以及共业带来的磨难与伤害。但不管自身多么辛苦、
    艰难,他们一定会把利益别人、救众生从轮回中解脱放在第一位。
    불법을 수행하여 증득하기 전, 저는 불교에 ‘대보살’이라 불리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의 방향으로 이미 깨달음을 얻은 분들이기
    에 극락세계에 영원히 머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난 속에서 윤회하는 중생
    을 제도하기 위해 서원을 세워 다시 여기에 되돌아왔고 심지어 욕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삼악도에 들어가기도 한답니다. 또 그분들은 비록 삼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굳건한 신념과
    정견 그리고 지혜가 있으나 이 세상에서 수행 증득이 원만해지기 전에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중생과 함께 욕망을 경험하고 공업(共業)이 가져다주는 시련과 상처를 같이 겪긴 하
    나,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타인을 이롭게 하고 중생을 윤회에서 제도
    하여 해탈시키는 일을 반드시 최우선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 3 –
    我曾经认为,当一个人自己的身心还处在痛苦煎熬之中,却要念念发愿去救度、利益别人,
    这样的人生简直就是一种不切实际的苦难历程。这些菩萨是怎样看待自己的觉受与痛苦,是怎样
    寻找到内心的平衡点?是什么能令他们对自己的欲望置若罔闻,用什么来抵抗人世间的种种诱惑
    烦恼,从而在完成自己的使命后还能圆证佛果?这些疑惑一直等我遇到了《金刚经》,读到“破一
    切相,行一切善法,即得无上正等正觉”的空性正见,就像一把利剑猛利地从我着相的疑惑与烦恼
    中劈下,像一道耀眼的闪电瞬间划破我心中三恶道的黑暗。下面就让我们一起来闻听,二千六百
    多年前,佛陀的大弟子阿难尊者复述的关于《金刚经》的故事。
    저는 예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남을 제도하고 이
    롭게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삶은 그저 비현실적인 고난의 여정이라 여겼습니다.
    ‘과연 이런 보살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감수와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기에 내면의 평정을
    찾을 수 있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에는 도외시할 수 있게 하였으
    며, 무엇에 의지하여 인간 세상의 각종 유혹과 번뇌를 이겨내어 마침내 자신의 사명을 완성
    한 뒤에 불과를 원만하게 증득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들은 제가 금강경을 만나 “일체 상을 깨뜨리고 일체 선법을 행하면 곧 무상정
    득정각을 얻는다”라는 공성 정견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풀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날카로운
    검이 상에 집착하던 저의 의혹과 번뇌를 단번에 내려치는 것 같았으며, 번쩍하는 번갯불이
    순식간에 제 마음속에 있는 삼악도의 어둠을 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2,600여 년 전, 부처님의 큰 제자인 아난존자가 들려주는 금강경 이야기
    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경전제목
    《金刚经》在中国流传到现在的大约有六个译本,我们现在学习选用了“鸠摩罗什”法师的译
    本。鸠摩罗什在中国佛教史上被称为四大译经师之首,而且在佛教的传说中,有“七佛之师”的美
    誉。每一位佛出世他都来帮忙译经,令大乘经典广为流布。关于“鸠摩罗什”大师的传说很多,有
    兴趣的朋友可自己在网上流览,我们在此不多介绍。
    금강경은 중국에서 현재까지 약 여섯 종류의 번역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가 이제 선
    택해서 공부할 번역본은 구마라집대사의 번역본입니다. 중국 불교사에서 4대 역경사(譯經
    師) 중 으뜸으로 일컬어지는 구마라집대사는 불교 전설에서 ‘일곱 부처의 스승’이라는 명예
    로운 칭호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오실 때마다 오셔서 경전 번역
    을 도와 대승 경전이 널리 유포되도록 했다고 합니다. 구마라집대사에 관한 전설이 아주 많
    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인터넷을 직접 검색해보도록 하고 여기서는 더 자세히 소개하지 않
    겠습니다.
    《金刚经》——全名《金刚般若波罗蜜经》。金刚,大家都知道是地球上最坚硬的矿物质之
    一,它可以摧毁、切割其他很坚硬的物体而自己不受损坏。在此来比喻《金刚经》中的智慧可以
    摧毁一切烦恼、不正见。另外, 唐代大译师玄奘法师的译本把《金刚经》的全名译为《能断金刚
    般若波罗蜜经》,就是说这个智慧比金刚还厉害,能断金刚。
  • 4 –
    금강경의 정식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금강석은 모두 알다시피 지구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금강석은 다른 단단한 물체를 파괴하고 절단하되
    자체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금강석의 이런 속성을 들어 금강경의 지혜는 모든 번뇌와 삿
    된 견해를 부수어 버릴 수 있음을 비유하였습니다. 이에 더하여 당나라 대 역경사인 현장법
    사의 번역본은 금강경의 전체 명칭을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으로
    번역했는바, 이는 이 지혜가 금강석보다 더 강력해서 금강석마저도 절단할 수 있다는 뜻으
    로 풀이됩니다.
    那么是什么智慧呢?即“般若波罗蜜”。“般若波罗蜜”是梵文的音译,即译经师无法在中国的汉
    文词汇中找到恰当的用词可以完全涵盖梵文表达的意思,便直接按它的发音记录下来,现在佛教
    界大概将“般若波罗蜜”理解为从生死轮回的此岸到解脱彼岸的智慧,有时略称“般若智慧”。这种智
    慧专指佛菩萨的智慧,它不仅是一种对宇宙最高真理的领悟,而且是一种从轮回中解脱的能力。
    所以大家不要将这种智慧与世俗的聪明才智相混淆。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지혜일까요?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산스크리트어 음역인 ‘반야
    바라밀’은 역경사들이 중국어 어휘 중에서 이 산스크리트어의 뜻을 완벽하게 담아낼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서 산스크리트어 발음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현재 불교계에서는 대
    략 ‘반야바라밀’을 생사윤회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에 이르는 지혜로 이해하며, 때로
    는 ‘반야지혜’라고 약칭하기도 합니다. 이런 지혜는 전문적으로 불보살의 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우주의 최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일 뿐만 아니라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지혜를 세속의 총명함이나 총기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经,经的意思就是:佛说的道理记录下来就称为经。所以,《金刚经》全名的意思可理解为:
    有一种智慧,像金刚一样无坚不摧,可以令人从生死轮回的此岸到达解脱的彼岸。
    경(經), 경이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금강경 정
    식 명칭의 뜻은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는 금강처럼 단단하여 모든
    것을 부술 수 있기에 사람들을 생사윤회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한다.”
    我们下面学习的《金刚经》全文划分为三十二品,按历史记载,鸠摩罗什大师最初的译本并
    未划分章节,这个分法是梁武帝时期的昭明太子划分的。因为这个划分还有一点点争议,有人认
    为《金刚经》佛在说法时一气呵成,不应该分章节、段落,有的认为分开章节更容易记忆、学
    习。仁者见仁,智者见智。个人认为,不管是否划分段落,对真正了解佛说法本意的人都不会是
    问题。下面我们来闻听第一品。
    우리가 이어서 공부할 금강경 전문은 32품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역사적 기재에 의하
    면 구마라집 대사의 최초 번역본은 장과 절을 나누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 이 구분법은
    양무제 시기의 소명태자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구분법에 대하여 약간의 논쟁이 있기는
    합니다.
  • 5 –
    어떤 이들은 금강경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장이나 단락
    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장이나 단락으로 나누면 기억하고 배우기에
    더 쉽다고 합니다. 이는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단락 구
    분 여부가 부처님 설법의 본의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제1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제1품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所有的佛经开篇都是“如是我闻”。据佛教历史记载,佛在世时,他的开示并未形成经典文
    字,弟子们学习都是靠耳闻心记。在他涅槃后,弟子们聚集在一起准备整理佛的所有开示。因为
    阿难尊者曾是佛的侍者,长随佛左右,在弟子中称多闻第一,有记忆超群、过目不忘的本领,故
    由阿难尊者背诵、复述佛当年的讲经情景,其他弟子记录并表决通过,这样就有了我们现在看到
    的经典。因为几乎每部经典都是阿难复述,故佛教经典形成了一个统一的格式,即开篇都是“如是
    我闻”。意思就是:我听到的是这样的。接下来,这一品介绍佛说法的时间、地点和参加法会的
    人。几乎所有的佛经都有统一的时间,即“一时”,意思是:有那么一个时候。
    모든 불경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됩니다. 불교 역사의 기록에 의하
    면, 부처님 생전에는 설법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아 제자들이 모두 귀로 듣고 마음으로 기억
    하는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의 모든 설
    법을 정리하였습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시자로서 오랫동안 부처님을 옆에서 모셨고 또
    한 제자들 사이에서 다문제일(多聞第一)로 통하는 바 뛰어난 기억력으로 한번 보면 잊지 않
    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당시 설법하시던 정경을 기억해내어
    다시 진술하면, 다른 제자들이 이를 기록하고 검증하여 표결에 부쳐 통과시킨 것이 바로 지
    금 우리가 보는 경전입니다. 거의 모든 경전은 모두 아난이 다시 진술한 것이기에 불교 경전은 하나의 통일된 형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작마다 첫 구절이 모두 “여시아문”인데 이는 “내가 들은 것
    은 이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이 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시간과 장소, 그리
    고 법회 참석자들을 소개합니다. 거의 모든 불경에는 통일된 시간 표현인 ‘일시(一時)’가 나
    오는데, 이는 그러한 어떤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如是我闻,一时,佛在舍卫国祗树给孤独园,与大比丘众千二百五十人俱。尔时,世尊食
    时,著衣持鉢,入舍卫大城乞食。于其城中,次第乞已,还至本处。饭食讫,收衣鉢,洗足
    已,敷座而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큰 비구 1,250인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식사 때가 되자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시고 사위대성
    으로 들어가시어 걸식하셨다. 그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시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
    오셨다. 식사를 마치시고 가사와 발우를 거두신 후 발을 씻으시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
    다.
  • 6 –
    那为什么佛讲经不说某年某月某日呢?有两种说法:第一种,在佛法中认为时空是虚妄不实
    的,是相对于三界六道众生的心识存在的假相。即使从假有的角度来谈,因佛法是普度六道众生
    的,而在同一个时候六道众生认知、体验的时空是不一样的,即使是同一道的人类,我们现在的
    时间与其他国家都有时差,所以佛说法不说某年某月某日,只说有那么一个时候;还有一种说法
    呢,是从历史的角度谈,即印度是一个不讲时间观念的国家。不过,这些争议没有太多的意义,
    我们还是看下面的经文。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경을 설하실 때 왜 특정 년 월 일로 언급하지 않으셨을까요? 두 가
    지 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불법에서는 시공간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는, 삼계육도 중생의
    심식(心識)에 따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가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설령 있다고 가정해
    서 이야기해도, 불법은 육도 중생을 널리 제도하기 위한 것인데, 같은 시간이라도 육도 중
    생이 인지하고 체험하는 시공간은 서로 다릅니다. 심지어 같은 인간 세상이라고 해도 현재
    우리 시간과 다른 나라는 시차가 존재하므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특정 시간 대신 ‘어
    느 한때’라고만 하셨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한 견해는, 역사적 측면에서 인도는 시간관념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
    문에 특정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별로 큰 의미가 없으
    니 계속해서 아래 경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佛说这部经的地点在舍卫国的祗树给孤独园,这个名字有点拗口,是由两个人的名字组成
    的:“祗陀”和“给孤独”。传说祗陀是舍卫国的一位太子,给孤独长者呢,是舍卫国的一位大富翁。
    给孤独长者想为佛建一处道场,让佛长住说法,经过考察,看中了祗陀太子的一处园林。祗陀太
    子并不缺钱,当然不会无缘无故卖自己喜欢的园林。但太子开玩笑说,你如果用金币铺满我的园
    林,我就以这个价卖给你,没想到给孤独长者真的这样做了。当一车一车的金子运来园林中时,
    祗陀太子非常惊讶,他很想知道这个释迦牟尼佛究竟有怎样的魅力,可以使给孤独长者为他倾家
    荡产这样做?但当他了解到佛的智慧后,马上捐出了园林,并对给孤独长者说:园林中的精舍你
    来建,算你捐给佛的,园中的树木算我捐的。所以,这个道场建成后,就起名祗树给孤独园,意
    思就是祗陀太子捐了树,给孤独长者捐了精舍。这就是佛讲《金刚经》的地点。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설하신 장소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祗樹給孤獨園)입니다. 발음하
    기 좀 힘든 이 명칭은 사실 ‘기타’와 ‘급고독’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기타는 사위국의 태자였고 급고독 장자는 사위국의 큰 부자였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오래 머무시면서 설법할 수 있는 도량을 지어드리고 싶었던 급고독 장자는 여러
    곳을 살펴본 끝에 기타 태자의 원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돈이 부족하지 않았던 기타 태자
    는 당연히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원림을 팔려 하지 않았습니다.
    태자는 농담 삼아 만약 자신의 원림 바닥을 모두 금화로 깐다면 그 가격에 장자에게 팔겠
    다고 했고 의외로 급고독 장자는 진짜로 그렇게 했습니다. 금화를 한가득 실은 수레들이 원
    림에 들어오는 것을 본 기타 태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연 어떤
    매력이 있기에 급고독 장자가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를 알게 된 후, 태자는 즉시 그 원림을 기증하고는 급고독 장자에게 말했습니
    다.
  • 7 –
    “원림 안의 정사는 그대가 지어 부처님께 기부하는 것으로 하고 원림 안의 숲은 내가 기
    부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리하여 이 도량이 완공된 후 기수급고독원이라 명명했습니다. 그 뜻인즉 기타 태자는
    나무를 기부하고 급고독 장자는 정사를 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
    금강경을 강설하신 곳입니다.
    参加这次法会的人物,经中说有千二百五十人俱。佛在世的时候有一千二百五十位弟子,属
    于常随众。就是说佛在哪,就追随在佛周围修行,极少有人不在讲经现场的时候。俱的意思是这
    次他们都在。接下来,在《金刚经》的开篇,记述了佛陀在人道僧团的一个生活片段。当时正好
    到了吃饭的时间,世尊也要出去化斋。经中这样描述:快到中午时,世尊穿好他的袈裟,端着
    鉢,缓步从道场进入舍卫大城。在城中,按次第乞食七家,再端着鉢返回道场,吃完饭,将袈裟
    和鉢收拾好。因出去乞食时,脚上沾了一些泥巴,世尊洗了脚,然后将自己的座垫铺设整理好,
    便端坐其上准备静坐休息。
    경전에 따르면, 이번 법회에 1,250명이 함께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1,25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상수중(常隨衆)’이라 하여, 부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
    든지 따라다니며 수행했기에 부처님께서 경전을 설법하는 장소에 부재했던 경우가 거의 없
    었습니다. ‘함께 했다[俱]’는 것은 이번에도 그들이 모두 참석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금강경의 서두에 인간 세상 승단에서의 부처님 생활 단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 공양 시간이 되어서 세존께서도 탁발하러 나가셔야 했습니다. 경전은 이렇게 묘사했습
    니다.
    “점심때가 되자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드시고 도량을 나와 천천히 걸어서
    사위성으로 들어가셨다. 성안에서 차례로 일곱 집을 다니며 탁발을 마치신 후, 발우를 들고
    다시 도량으로 돌아오셔서 식사를 마치시고 나서 가사와 발우를 거두셨다. 탁발하러 다니실
    때 발에 묻었던 진흙을 씻으시고 자신의 좌복을 펴서 정리하신 후 단정하게 그 위에 정좌하
    여 휴식을 취하고자 하셨다.”
    当时佛教僧团都是日中一食、过午不食的,而且吃饭要自己出去托鉢化斋。化斋时要不分贫
    富贵贱,依次化七家,七家过后不管是否化到食物,也不再为食物奔波,而是返回道场继续修
    证。当然化到斋饭的同修会分一点食物给未化到斋的同行道友。
    그 당시 불교 승단은 모두 일중일식(日中一食)인지라 점심이 지나면 식사하지 않았습니
    다. 그리고 식사하려면 직접 발우를 들고 나가 탁발하여 공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탁발할
    때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일곱 집을 돌고, 그 일곱 집을 다닌 후에는 음식을 얻
    었든 얻지 못했든 음식을 위해 더는 분주하게 다니지 않고 도량으로 돌아와 수행을 계속해
    야 했습니다. 물론 공양을 받아 온 도반들이 공양을 받아오지 못한 도반들에게 음식을 조금
    씩 나눠주었습니다.
    大家在前段时间刚刚学习过《法华经》,在《法华经》中,佛要讲法前先放瑞相,即由眉间
    放白毫相光,照东方无量国土。而很多大乘经典的开篇,佛都放光,惊天动地。有的是为了降伏
    魔众,不要在讲经时来捣乱,有的是为了吸引龙天护法、六道众生的关注,有些众生看到佛光就
  • 8 –
    会来听法或来护持。当然也有其他我们无法彻知的因缘。
    여러분이 얼마 전에 공부한 법화경에서 언급했다시피,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 전에 먼
    저 상서로운 상을 보이시는데, 미간의 백호에서 빛을 내어 동방의 한량없는 국토를 비추십
    니다. 그리고 많은 대승 경전은 그 시작 부분에서 부처님이 빛을 내어 천지를 진동시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마구니들을 굴복시켜 설법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고, 어떤 경우는 용천호법과 육도 중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중생은 불광을
    보고 법을 들으러 오거나 호법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다른 인연
    들도 있을 것입니다.
    但《金刚经》在佛法的传播长河中地位举足轻重,尤其是中国禅宗形成后,六祖慧能因闻听
    《金刚经》中“无所住生其心”为缘起而出家,成为禅宗散枝开叶的一代宗师。随禅宗的广泛传播
    与影响力的日益增强,《金刚经》也随着六祖慧能大师的开悟故事而变得家喻户晓。而且《金刚
    经》篇幅适中,只有五千多字,是很多印经积功德者以及刚开始学习佛法的首选经典。
    금강경은 불법 전파의 긴 세월 속에서 지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선종이 형성된 이후, 금강경의 “응당 머무는 데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구절
    을 듣고 출가한 육조 혜능은 선종이 널리 퍼져 번성하는데 이바지한 일대 종사가 되었습니
    다. 선종의 광범위한 전파와 날로 늘어나는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금강경 또한 육조 혜능
    대사의 깨달음 이야기와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금강경은 오천여 자로
    분량이 적당하여, 경전을 인쇄하여 공덕을 쌓고자 하는 이와 불법 공부를 갓 시작한 이들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경전이기도 합니다.
    在佛学的修证中如此重要,在佛教未来发展中充满价值的一部经典,佛却示现了最平凡的一
    个人,没有一点神奇之相。自己穿衣,自己托鉢、乞食,甚至外出脚上还沾上了路上的污水、泥
    巴或者牛粪,回来上座前还要洗脚,然后还要自己整理、铺设座垫。这是在人间的佛陀,与你和
    我没有什么不同。那,这么重要的经典,佛究竟为什么没有在开篇示现神通,惊动三界六道呢?
    其实原因很简单,因为《金刚经》破一切相!而佛所有的示现只为令众生解脱,佛弟子们破相时
    不需要佛示现神变。
    금강경은 불법의 수행과 깨달음에서 이토록 중요하고, 불교의 미래발전에 큰 의미가 있
    는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가장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시며 신비
    로운 모습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옷을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직접 탁발
    하시며 심지어 외출하실 때는 발에 길 위의 오물이나 진흙 또는 소똥까지 묻히시고 돌아와
    서는 정좌하기 전에 발을 씻으신 후 직접 좌복을 정리하여 펴십니다. 이는 속세의 부처님
    모습으로서,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왜 첫 시작부터 신통력을 시현하시어 삼
    계육도를 놀라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사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금강경은 모든 상
    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모든 시현은 오직 중생의 해탈을 위한 것인데, 불제자들의 상을 깨뜨릴 때는 부처님의 신통 변화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9 –
    为什么呢?因为发心求取佛果的众生最容易着的就是法力无边的佛相,即使是阿罗汉弟子们
    也着佛的功德之相,即三十二相八十随形好。我们觉得自己不是佛,是因为头脑中有佛法力无边
    的种种奇思妙想,阿罗汉弟子们无法安住空性是因为觉得自己功德不圆满,头脑中有一个更圆满
    的佛相。佛在《金刚经》中说:“是法平等,无有高下,即阿耨多罗三藐三菩提”。只要你着佛相
    和众生相,你就失去了平等心,你如果无法从佛的平凡中见到自性如来,同样你也无法从佛的神
    变中见性。
    왜 그럴까요? 불과를 얻고자 발심한 중생의 경우, 가장 쉽게 집착하는 것이 바로 법력이
    무변한 부처님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아라한 제자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공덕상 즉 32
    상 80종호에 집착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머릿속에 부처님
    의 가없는 법력에 대한 각종 기이한 생각과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한
    제자들이 공성에 안주하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의 공덕이 원만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머릿속
    에는 더 원만한 부처님의 모습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라 이름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부처상과 중생상에 집착하는 순간 평등심을
    잃게 되고, 만약 부처님의 평범함 속에서 자성여래를 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신통 변화에서도 공성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下面解释几点大家未来在学习《金刚经》中易迷惑的问题。先解释一下什么是“相”,因为在未
    来的《金刚经》学习中,“着相”与“破相”是常常出现的概念。“相”是什么呢?《金刚经》中的“相” 包含了万物的相貌、形态、体验、定义、知见、资讯、时空等等。比如:我说苹果这个词,吃过
    苹果的同修就会在头脑中马上有苹果的图像,口中有苹果的滋味,还有不同类苹果的个体分别,
    而且心中还有喜欢、不喜欢、想不想吃的分别取舍。你即会带着苹果的所有资讯来听闻我说的“苹
    果”这两个字,这叫着“文字相”。因人类对“相”的认知一般建立在三维角度,建立在有局限性的
    眼、耳、鼻、舌、身、意的基础上,是有缺陷的世界观和生命观。所以,对这些“相”的肯定与执
    着会阻碍人类认识宇宙真相,使人类自在的心被困在三维时空中,并因认知上的无明而现生老病
    死、生灭无常的苦厄。
    이제 앞으로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여러분이 쉽게 혼동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을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무엇을 ‘상’이라 하는지 해석하고자 합니다. 금강경을 공부할 때
    ‘상에 집착한다’와 ‘상을 깨뜨린다’는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상’이란 무엇일까
    요?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은 만물의 모양·형태·체험·정의·지견(知見)·정보·시공간 등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사과’라는 이 단어를 말하면 사과를 먹어본 도반은 머릿속에 즉시 사과
    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입안에는 사과의 맛이 느껴지며 종류가 다른 사과에 대한 개별적인
    구분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먹을까 말까 하는
    분별과 취사 선택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과의 모든 정보를 전제로 제가 말하는 ‘사
    과’라는 이 단어를 듣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문자상’에 집착한다고 합니다.
    ‘상’에 대한 인간의 인지는 일반적으로 3차원을 기반으로 구축되었습니다. 한계가 있는
    눈·귀·코·혀·몸·뜻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결함이 있는 세계관이자 생명관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에 대한 긍정과 집착은 인류가 우주의 진실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며 인류의 본래 자
  • 10 –
    유로운 마음을 3차원 시공간에 가두며 인지적인 무명으로 인해 생로병사와 생멸무상(生滅
    無常)의 고난과 재액을 겪게 합니다.
    在下面的《金刚经》经文中,佛破的“相”有: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佛相、罗汉
    相、菩萨相、功德相、法相、断灭相、智慧相、果位相等。佛谈到这些相是因为弟子们在修行路
    上最容易执着这些相,执着其实有而去学习、修证佛法。这样不仅无法回归如来真空境界,而且
    使菩萨道变成人间善业、善报,也使修行者在菩萨道上走得非常艰难。
    이어지는 금강경 경문에서 부처님이 깨뜨리신 ‘상’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생·부처상·아
    라한상·보살상·공덕상·법상·단멸상·지혜상·과위상 등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상을 언급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수행의 길에서 가장 쉽게 이런 상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실재
    한다고 집착하면서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면 여래의 진공 경계에 회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살도를 속세의 선업(善業)과 선한 과보로 변질시키며 수행자가 보살도의 길을 걷는 것을
    아주 힘들게 만듭니다.
    第二点,刚开始读《金刚经》容易迷惑于经中的一些句型,比如:“是什么,非什么,是名什
    么”。因佛在破一个相时,一般会假借另一个名相来破。如用针挑刺,针是假借的名相,目的是挑
    刺。但佛又怕你刺挑出来了,又着针的相。故对针的阐述变成“针非针,是名为针”。而且因佛要
    阐述一切相本来虚妄,即刺也变成“刺非刺,是名为刺。”鸠摩罗什大师在翻译中用这种句型来表
    示所有名相、文字皆是暂时假立,目的是对治你心中的执着、认知。
    두 번째로는, 금강경을 처음 접할 경우, 경전에 나오는 문장구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A는 A가 아니므로 비로소 A이다”와 같은 문장입니다.
    부처님께서 상을 깨뜨리실 때 일반적으로 다른 이름을 빌려와서 깨뜨리십니다. 예를 들어
    바늘로 가시를 빼낸다면, 바늘은 가시를 빼내기 위해 빌린 이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가
    시는 빼냈는데 또 바늘의 상에 집착할까 봐 걱정하십니다. 그래서 바늘에 대하여 “바늘은
    바늘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바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모든 상이 본래 허망함을 설명하셔야 하기에, 가시 또한 “가시는 가시가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가시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마라집대사가 번역에서 이런 문장 유형
    을 사용한 것은 모든 이름과 문자는 모두 임시방편으로 세운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그
    목적은 여러분 마음속의 집착과 인지를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第三点是对佛的称呼。经文中出现了“佛”、“世尊”、“如来”三种称呼。本来这三种称呼表达的
    意思没有什么不同,但为什么会同时出现在经文中呢?在经文中“佛”的称呼一般是指佛在讲经中
    面对弟子们的这个身相。因弟子们要听佛说法,首先要面对佛相。那如果佛要阐述那个无形无
    相、色空不二的道的本体,便用另一个名相“如来”来称呼。我在讲解时又把他翻译成了“自性”、
    “如来”、“真空境界”等,也是希望闻听者能不着“佛”、“如来”这些文字相。而“世尊”的称呼是须菩
    提对佛的尊称。在佛学中,把佛分为“报身佛”、“化身佛”、“法身佛”来理解。“报身佛”是指修证佛
    法成就者,在人间功德圆满、法力无边的身相。“化身佛”是佛在各世界随缘度众生的身相。比
    如,在人间释迦牟尼佛示现了离情去欲的阿罗汉相。而佛的“法身”,指每个人具有的无形无相的
    自性。
  • 11 –
    세 번째는 부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경전에는 ‘부처’, ‘세존’, ‘여래’라는 세 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이 세 가지 호칭은 그 의미에 있어서 서로 별다른 점이 없는데 경전에는 왜 동
    시에 나타날까요?
    경전에서 ‘부처’라는 호칭은 보통 설법하실 때 제자들을 마주하고 계신 부처님의 그 육신
    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부처
    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는 색공불이인 도(道)의
    본체를 설명하실 때는 ‘여래’라는 다른 명칭을 사용하십니다. 제가 해석할 때는 그것을 또
    ‘자성’, ‘여래’, ‘진공 경계’ 등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또한 듣는 이가 ‘부처’, ‘여래’라는 문자
    상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리고 ‘세존’이라는 호칭은 수보리가 부처님을 부르는 존칭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보신불’·‘화신불’·‘법신불’로 나눠서 이해합니다. ‘보신불’은 불법을 수행하여 성취한 분으로
    서 속세에서 공덕이 원만하고 법력이 무궁무진한 육신의 모습을 말합니다. ‘화신불’은 부처
    님께서 여러 세계에서 인연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내신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 세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정을 떠나 욕구를 제거한 아라한 상을 시현하셨습니
    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신은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는 자성(自性)
    을 가리킵니다.
    但我在经文中并未启用这些名相来讲解,因为佛在讲色空不二的般若智慧,我不希望大家在
    对佛的认知上存在有性相之分。因为化身、报身、法身只是为了弟子们学习、理解的方便,而对
    证入果位境界的人,这三个就是一。“见相即见空性”,没有办法抛开你眼前的相去另外见到一个
    空性,只能从不着相中得见,但这些概念大家要了解。
    그러나 제가 경문을 해석할 때 이러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색공불이
    의 반야 지혜를 설하셨는데, 저는 여러분이 부처님을 인식할 때 본성과 상(相)의 분별을 두
    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화신·보신·법신은 제자들의 공부와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
    일 뿐, 과위의 경계를 증득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 셋은 결국 하나입니다. “상을 보는 것이
    바로 공성을 보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눈앞의 상을 제쳐두고 따로 공성을 볼 수는 없습니
    다. 오직 상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만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들을 여러
    분은 알아두셔야 합니다. 제2품 선현기청분(善現啟請分)
    时,长老须菩提在大众中即从座起,偏袒右肩,右膝着地,合掌恭敬而白佛言:“希有!
    世尊!如来善护念诸菩萨,善付嘱诸菩萨。世尊!善男子、善女人,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
    心,云何应住,云何降伏其心?”佛言:“善哉,善哉。须菩提!如汝所说,如来善护念诸菩
    萨,善付嘱诸菩萨。汝今谛听!当为汝说:善男子、善女人,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心,应如
    是住,如是降伏其心。”“唯然,世尊!愿乐欲闻。”
  • 12 –
    第二品介绍了佛说《金刚经》的缘起,即什么原因佛说法?缘起于须菩提开始问佛的一个问
    题。当时,长老须菩提看到佛上座了,便从大众中站起来,偏袒右肩。偏袒右肩是当时僧团的着
    装方式,就是右臂露在衣服的外面。须菩提偏袒右肩,右膝着地,单腿向佛跪下来,双手合十对
    佛说:“希有的世尊,如来一向善于开示种种法门,令所有的菩萨能护持正念不失。”经文中有“善
    护念善付嘱诸菩萨”,“善护念”的意思即护持正念,令心清净;“善付嘱”的意思即开示、叮咛或提
    醒。须菩提在赞叹了世尊以后,说:“现在我有一个问题,希望世尊帮我开示。如果善男子、善女
    人,当他们发心想求取佛果,他们应如何修行,才能令心安住?如何降伏内心的杂乱与烦恼?”
    제2품은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법하신 인연에 대한 소개입니다. 즉 무슨 이유로 부처
    님께서 설법하셨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그 연기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한 질문에서 시작됩
    니다. 당시 장로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자리를 펴고 앉으신 것을 보고, 대중 가운데서 일어
    나서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습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은 당
    시 승단의 착의 방식으로, 즉 오른쪽 팔을 옷 밖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오른쪽 어
    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쪽 다리로 부처님께 꿇어앉아 합장하며 말씀드렸
    습니다.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언제나 여러 법문을 잘 설하시어 모든 보살이 정념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경전에 ‘선호념선부촉제보살(善護念善付囑諸菩薩)’이란 문장이 있는데 ‘선호념’은 정념을
    지켜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는 뜻이며, ‘선부촉’은 설법하거나 당부하거나 일깨워준다는 뜻입
    니다.
    수보리가 세존을 찬탄한 후 말했습니다.
    “지금 저에게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세존께서 저를 위해 설법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불과를 구하기 위해 발원하였다면, 그들은 어떻게 수행해야만 마음을 편안
    히 머물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마음속의 혼란과 고민을 항복시킬 수 있습니까?”
    须菩提是佛的十大弟子之一,后世称他为“解空第一”,即是说,他对佛解说的空性智慧领悟
    得比较透彻。此时,他代善男子、善女人提出了这个问题。当然,这些发心的人也包括佛的阿罗
    汉弟子们。对刚开始修学佛法、发心求证佛果的人,他最大的烦恼即是心不安,心摇摆不定,抵
    抗不了五欲之乐的诱惑,身心常被种种觉受和境界转。而对有定力的阿罗汉来讲,烦恼是来自于
    그때, 대중 가운데 있던 장로 수보리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는 공경히 부처님께 여쭈었다.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하시고, 모든 보살을 잘 부촉
    하여 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
    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이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수보리여! 그대의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하고, 모든 보살을 잘 부촉한다.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 선여인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응당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며, 이와 같이 마
    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합니다.”
  • 13 –
    对这个世界和人身的厌离。成就无上正等正觉要行菩萨道,那怎样才能安住在这个世界,用柔软
    慈和的心广行菩萨道,用种种善巧方便度脱众生?罗汉们虽可以靠定力不被世俗虚妄的娱乐诱
    惑,也不被境转,但以寂灭为乐的心态要生出慈悲心,积极入世也比较困难。但慈悲和智慧是“空
    性”的一体两面,没有慈悲心的空性不是佛的“真空”境界。
    수보리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 일인으로, 후세에서는 그를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부르
    는데, 그것은 그가 부처님께서 해설하신 공성 지혜에 대한 깨달음이 비교적 깊었기 때문입
    니다. 그때 그는 선남자 선여인을 대신하여 이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물론, 발원한 이 사람
    중에는 부처님의 아라한 제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법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여 불과를
    증득하고자 발심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큰 번뇌는 바로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오욕
    락의 유혹을 저항하지 못해 몸과 마음은 늘 온갖 감각과 경계에 휘둘리는 것입니다. 반면, 선정의 힘이 있는 아라한을 놓고 볼 때, 번뇌는 이 세상과 육신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됩
    니다.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려면 보살도를 행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이 세계에 안주
    하면서 부드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살도를 널리 행하고, 여러 가지 선교 방편으로 중생
    을 제도할 수 있을까요? 아라한은 비록 선정의 힘으로 이 세속의 허망한 오락에 유혹되지
    않고 경계에 휘둘리지 않지만, 적멸을 낙으로 여기는 마음가짐에서 자비심을 내어 적극적으
    로 세속에 뛰어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비와 지혜는 공성의 양면과 같아서, 자비심이
    없는 공성은 부처님의 ‘진공(真空)’ 경계가 아닙니다.
    佛陀赞叹说:“好啊,须菩提,你说得很对。我是常叮嘱你们要求取无上正等正觉的菩提心,
    而且要常常护持自己的正念、清净心不失。现在你听好了,善男子、善女人,如果发心求取无上
    正等正觉的佛果,应如是住,如是降伏其心。”在这儿,如是的意思即:应该像这样安住,像这样
    降伏自己内心的烦恼和杂乱。佛陀说,你应该像这样安住,像这样降伏自己内心的烦恼跟杂乱。
    부처님께서는 감탄하며 말씀하셨습니다.
    “훌륭하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이 옳다. 나는 늘 너희들에게 무상정등정각의 보리심을 구
    하고, 늘 자신의 올바른 마음과 청정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잘 보호하라고 당부해왔다. 이
    제 잘 들어라. 선남자 선여인이 만약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냈다면 마
    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如是]’라는 말은 응당 ‘이와 같이 안주해야 하고 이와 같이 자기 마
    음의 번뇌와 혼란을 항복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대는 마땅히 이와 같이
    안주하고 이와 같이 마음의 번뇌와 혼란을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说到这儿,佛应该是停了下来,如果你是一位非常清净的佛弟子,从《金刚经》一开篇,佛
    平静地做的一系列事情到现在,佛坐在座垫上示现的样子,你或许已看到了一位佛“无所住”的境
    界和状态:心中了无罣碍,非常清净,该做什么就做什么。如是的意思:就是这样,这样就可以
    了。你问问题时,心安住了,当下安住就是了,还用怎样的降伏呢?显然,有的弟子还不能从这
    种无言的教授中受益,须菩提说:“唯然世尊愿乐欲闻”,“唯然”的意思是答应了一声,相当于“ 哦”,或者沉思停顿了一下。又说:“世尊,我正非常欢喜地准备听您的开示。”在以下的开示中,
    佛谈到了修学的方法与应具有的正确见地。
  • 14 –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부처님께서는 잠시 멈추셨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매우 청정한
    부처님의 제자라면, 금강경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차분하게 보여주신 일
    련의 행동들과 좌복 위에 앉아 계시는 모습에서, 이미 부처님의 ‘머무는 데가 없는’ 경계와
    상태를 보았을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고 매우 청정하며 해야 할 일을 할 뿐인
    상태 말입니다.
    여시(如是)의 뜻은 바로 ‘이와 같이, 이렇게 하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질문할 때 마음이
    이미 편안하게 머물렀다면, 바로 그 시각 즉 당하에 안주하면 그만이지 무엇을 더 항복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 어떤 제자들은 아직 이 무언의 가르침에서 혜택을 받지 못
    했기에 수보리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
    습니다[唯然]”는 한 마디 대답했다는 뜻으로 “네”에 해당하거나 혹은 생각에 빠져 잠시 멈
    췄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그는 “세존이시여, 저는 아주 즐겁게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준비
    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지는 설법에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 방법과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올바른 견지(見地)
    를 말씀하십니다. 제3품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在讲这一品前,我们先解释几个概念。经中佛提到:卵生、胎生、湿生、化生、有色、无
    色、有想、无想、非有想、非无想,这是佛对三界一切众生各种生命形态的分类。
    卵生、胎生、湿生、化生,是欲界生命的四种形态:“卵生”就是从卵中孵化出来的生命,如
    鸡、鸭等;“胎生”就是住母胎孕育而成的生命,比如人就是胎生;“湿生”是以潮湿因缘而生的生
    命,如地缝中或水中的有些小虫;“化生”是靠业力凭空化生,在欲界的天界生命就是化生的。
    “有色”指色界生命,只有色身,无情欲;“无色”是指无色界的生命,只有意识,无情欲和色
    身;“有想”、“无想”、“非有想”、“非无想”是对无色界生命更细致的分类。“有想”是指有思维活
    动。“无想”是指思维活动已经停止,但也不像木石。非有想非无想,是指思维活动虽停止,不再
    有思想,但可能随时会想的一种生命状态,就是说有一种想的动势。
    佛经中说,三界这些生命形态虽然存在形式千差万别,但却有共同的现象:都在生灭轮回
    佛告须菩提:“诸菩萨摩诃萨应如是降伏其心!所有一切众生之类:若卵生、若胎生、若
    湿生、若化生;若有色、若无色;若有想、若无想、若非有想非无想,我皆令入无余涅槃而灭
    度之。如是灭度无量无数无边众生,实无众生得灭度者。何以故?须菩提!若菩萨有我相、人
    相、众生相、寿者相,即非菩萨。”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모든 중생의 종류, 즉 난생·태생·습생·화생과 유색·무색과 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
    에 들게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였으나 실로 제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에게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다
    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 15 –
    中,不能自由解脱。而他们也有共同一样的本性:本性都是佛,一切具足,不生不灭。
    이 품을 강의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개념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전에서 부처님께
    서 언급하신 난생·태생·습생·화생·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은 부처님께서 삼계 모든
    중생의 다양한 생명 형태에 대하여 나누신 분류입니다.
    난생·태생·습생·화생은 욕계 생명의 네 가지 형태입니다. ‘난생’은 알에서 부화한 생명으
    로, 닭이나 오리 같은 것들입니다. ‘태생’은 모태에서 태어난 생명으로, 인간이 바로 태생입
    니다. ‘습생’은 습한 인연으로 태어난 생명으로, 땅속의 틈새나 혹은 수중의 작은 벌레 등입
    니다. ‘화생’은 업력에 의해 홀연히 태어난 생명으로, 욕계의 천상계 생명이 바로 화생입니
    다. ‘유색’은 색계 생명을 가리키는데 오직 색신(色身)만 있고 정욕은 없습니다. ‘무색’은 무색
    계의 생명을 가리키는데 오직 의식만 있고 정욕과 색신이 없습니다. ‘유상’·‘무상’·‘비유상’·
    ‘비무상’은 무색계 생명에 대한 더 세분된 분류입니다. ‘유상’은 사유 활동이 있음을 가리키
    고, ‘무상’은 사유 활동은 이미 정지되었으나 나무나 돌과는 같지 않은 것입니다. ‘비유상’·
    ‘비무상’은 사유 활동이 정지되어 더 이상 생각은 없지만 언제든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생
    명 상태, 즉 생각하려고 하는 추세가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불경에서는 삼계의 이러한 생명체가 비록 존재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지만 그들에게는 모
    두 공통된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생멸하는 윤회 속에 있어 자유로이 해탈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똑같은 본성이 있으니, 그 본성은 다름 아닌 부
    처이며 모든 것을 원만히 갖추고 있고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经中还提到了两个概念:一个是“涅槃”。“涅槃”是梵文的音译。在佛法中,将证入不生不灭的
    解脱境界称“涅槃”。“涅槃”分为“有余涅槃”和“无余涅槃”,一般将阿罗汉的涅槃境界称“有余涅
    槃”,因为四果阿罗汉虽然能暂时住在定中不进入生死轮回很长时间,但因缘具足,仍会出定,重
    入轮回,所以解脱不究竟,称“有余涅槃”。佛的涅槃境界彻底从轮回中解脱,生命完全从生灭染
    污的假相中解脱出来,获得不生不灭的永恒的大自在,所以这种涅槃叫“无余涅槃”。
    경전에서는 또한 두 가지 개념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열반’입니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어의 음역입니다. 불법에서는 불생불멸의 해탈 경계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무여열
    반’과 ‘유여열반’으로 나누는데 일반적으로 아라한의 열반 경계를 ‘유여열반’이라고 합니다. 사과 아라한은 비록 일시적으로 선정에 머물러 오랜 시간 동안 생사윤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지만, 인연이 구족되면 여전히 선정에서 나와 다시 윤회에 들어가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
    탈은 아니어서 ‘유여열반’이라 부릅니다. 반면 부처님의 열반 경계는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
    나 생명이 생멸로 오염된 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불생불멸의 영원한 대 자유를 얻은 것이
    므로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 즉 ‘무여열반’이라 합니다.
    经中还提到了,“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
    那什么是“我相”呢?每个人都有一个“自我”的定义,如眼、耳、鼻、舌、身意组成,而且与别
    人不同。我们的心识虽投胎在人道,但每个人都具备六道的意识形态。比如:我们瞋恨、嫉妒
    时,心就在阿修罗道;渴求圣洁、纯净时心就在天人道;当我们体验极端的苦难时,心在地狱
    道。但是如果你把自己定义在任何一道都是错的。真相是——你是佛,可以自在无碍地示现种种
  • 16 –
    相。但因为自己的执着和不懂真理,我们便被自己所造的种种业力牵引,陷在不同的生命意识状
    态中,无法自拔。人对自我、身心内外的定义、认知、体验、觉受、取舍,都是“我相”。人认为
    “自我”实有,其实“自我”是虚妄的。
    경전에서는 또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상’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모두 ‘나’에 대한 자체의 정의가 있습니다. 예
    를 들면 눈·귀·코·혀·몸·뜻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사람의 그것과 구별됩니다. 우리의 심식(心
    識)은 비록 인간 세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긴 했으나 사람마다 모두 육도(六道)의 의식형태
    를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내고 원망하고 질투할 때 우리의 마음은 아수라에 있고, 거룩하고
    고결한 것을 추구할 때 마음은 천인에 있으며, 우리가 극심한 고난을 겪을 때 마음은 지옥
    에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을 어느 한 특정적인 궤도에 국한해 정의를 내리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진실은 바로 ‘우리는 부처이며 자유자재로 온갖 상을 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착과 진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지은 여러 가지
    업력에 끌려서, 서로 다른 생명의 의식 상태에 갇혀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아와 심신 안팎에 대한 정의·인지·체험·느낌 그리고 취하고 버리는 선택 이 모든
    것이 바로 ‘아상’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실재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이 ‘나’는 허망한 것입니
    다.
    那什么是“人相”呢?就是人对他人的身心内外的一切定义、认知、体验等。认为实有那样的
    一个人存在,从而生出喜好、厌恶、取舍或占有的情绪。“众生相”,经中说三界六道有种种不同
    相貌和意识形态的众生,都处在生灭轮回中经历苦厄,不能回归本有的佛性。“寿者相”,“寿”是从
    生到死的时间。但人们都喜欢长生不老,不愿死亡,这即“寿者相”。其实着“寿者相”,也是着万法
    的生灭相。
    그럼 ‘인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타인의 심신 안팎에 대해 내리는 모든 정의·인
    지·체험 등을 말합니다. 그러한 타인이 실재한다고 여겨, 그로 인해 좋아하고 싫어하거나 취
    하고 버리거나 혹은 소유하려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중생상’에 대해 경전에서는, 삼계육도에 서로 다른 모습과 의식형태를 가진 중생들이 존
    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생멸하는 윤회속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본래의 불성으로 회
    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자상’에서 ‘수(壽)’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시간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불로장생을 바라며 죽음을 원치 않는데, 이것이 바로 ‘수자상’입니다. 사실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은 만법의 생멸상(生滅相)에 집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这一品的大意是:佛陀告诉须菩提,所有的大菩萨要成就无上正等正觉的佛果,首先要生起
    大慈悲心,发愿普度三界众生。不管是卵生的、胎生的、湿生的、化生的、有色、无色、有想、
    无想、非有想、非无想,都要发愿度脱他们,令他们进入佛不生不灭的涅槃境界,从生死轮回中
    解脱。但是,即使像这样度脱了无量无边的众生,菩萨在见地上要这样认为:并无一位众生是通
    过我的救度成佛了。佛说,为什么这样说呢?佛告诉须菩提,一位真正行菩萨道的菩萨,就不能
    有我、你、他实有的分别,也不能有众生的种种差异相,不能有万法的生灭相,希求长生不老
  • 17 –
    이 품의 대략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대보살이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를 성취하려면 우선 큰 자비심을 내서 삼계의 중생을
    두루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난생·태생·습생·화생·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
    무상이든 막론하고 그들을 제도하여 그들을 생멸이 없는 부처님의 열반 경지에 진입시켜 생
    사윤회에서 해탈시키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설령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해탈
    시켰다 하더라도 보살의 견지에서는 ‘나의 제도에 의해 부처가 된 중생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진정 보살도를 행하는 보
    살이라면 나, 너, 그 이 삼자에 대한 실제적인 분별이 없어야 하고, 중생의 여러 가지 차별
    상도 없어야 하며, 만법의 생멸상이 있음으로 인해 장생불로를 희구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为什么佛一开始就谈普度众生的问题?因为当一个人发心成佛时,应知道自己是要回归生命
    的源头。而站在生命的源头看,我们的心包含宇宙一切,每个人的心都是宇宙一切有情的全息缩
    影。故当一个人发愿成就佛果的同时,也意味着是在发愿要普度宇宙一切有情众生。由此,弘扬
    佛法、普度众生便成为每位大菩萨的使命。所以我们也应知道一位菩萨在人间的使命不是做慈善
    事业,而是令众生明了生命的真相、度众生出轮回苦海,勿以善小而不为只是每位菩萨成道必具
    备的品质。但当菩萨发心普度众生时,首先不应有好恶选择,喜欢的就度,不喜欢的就不度,应
    有度尽三界的愿力和平等心。并且不能有你、我、他、众生实有的认知,否则菩萨的苦难和烦恼
    就来临了。在根本的见地上你一定要明白,你与众生本性都是佛,众生自性本来不生不灭,本来
    就涅槃寂静,并不是有个你能令他拥有这样的本质。菩萨对众生,如梦中的药对病,梦醒后药与
    病都是虚妄不实的。真空中没有菩萨,也无众生。如菩萨的见地明确,那么在度众生时就不会去
    希求回报和理解,也不会被众生表现出来的种种状态迷惑,从而心生烦恼,无法安住在如如不动
    的境界上。
    왜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문제를 논하셨을까요? 누군가 성불하고
    자 발심하였다면, 자신은 생명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응당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에 서서 보면,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일체를 포함하고 있기에 매 사
    람의 마음은 우주 일체 유정(有情) 생명체의 홀로그램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불과를 성
    취하겠다고 발원한 것은 동시에 우주의 모든 유정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발원한 것을 의미하
    기도 합니다. 따라서 불법을 널리 펴고 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것은 모든 보살의 사명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속세에서 보살의 사명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 생
    명의 진실을 알게 하고 중생을 윤회의 고해에서 제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아주
    작은 선일지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보살이 도를
    이루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품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살이 중생을 두루 제도하고자 발심하였을 때, 호불호 선택이 작동하여 좋아하는
    사람은 제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제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삼계의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원력과 평등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 나, 그 그리고 모든 중생이 실제
    로 존재한다는 인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러면 보살에게 고난과 번뇌가 닥쳐올 것입
  • 18 –
    니다. 근본적인 견지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과 중생의 본성은 모두 부처이고
    중생의 자성은 원래 생멸하지 않으며, 본래 고요한 열반이기에 여러분이 그들로 하여금 이
    런 본질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살이 중생을 대하는 것은 마치 꿈속의 약과 질병 같은 것이어서, 꿈에서 깨어나면 약과
    질병은 모두 허망한 것이 됩니다. 진정한 공 즉 진공(真空)에는 보살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
    다. 가령 보살의 견지가 명확하다면, 중생을 제도할 때 보답이나 이해를 희구하지 않을 것
    이며, 중생이 보여주는 온갖 상태에 미혹되어 마음에 번뇌를 일으켜 여여부동의 경계에 안
    주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曾经当我刚读《金刚经》时,读完这一品时,我抬头思维想:这是佛要我们发愿普度众生。
    那个时候正好对面墙上有一只苍蝇,我想苍蝇是卵生的,佛说,我应发愿度这只卵生的苍蝇入无
    余涅槃而灭度之。我盯着苍蝇,心想:如果我此时发愿度这只苍蝇成道,天啊,那需要多久啊!
    我马上就绝望了。忽然我明白了,我着了苍蝇的相。如果现在我心中有自我与苍蝇实有的相,那
    我不仅永远无法度苍蝇入涅槃,而且我自己也会被这个愿力带入苦海溺死。如果着众生相,我将
    生生世世被这个愿力带入六道轮回的苦难之中,众生平等,都有与佛一样圆满的空性。苍蝇与我
    都只是真空的示现,当我拥有这样的见地时,墙上的苍蝇虽仍是一只听不懂人话的虫子,但我的
    心却安住了,不再为这个发愿担心、忐忑不安了。
    오래전 제가 처음 금강경을 읽을 때, 이 품을 다 읽고 나서 고개를 들고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중생을 두루 제도하라는 서원을 세우라고 하신 것인데….’ 그때 마침 맞은편 벽에 파리 한 마리가 있었고, 저는 속으로 ‘파리는 난생인데 부처님 말
    씀대로라면, 나는 이 난생인 파리를 무여열반으로 제도하게끔 발원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리를 빤히 쳐다보던 저는 ‘만약 지금 내가 이 파리를 깨닫게 하겠다고 발원
    한다면, 맙소사, 얼마나 오래 걸릴까!’라는 생각에 곧바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문
    득 제가 파리의 상(相)에 집착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지금 제 마음속에 저와 파리가 실재한다는 상이 있다면 저는 영원히 그 파리를 열반
    으로 제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 자신도 이 원력에 휘둘려 고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익사할 것입니다. 중생상에 집착한다면 저는 세세생생 이 원력에 이끌려 육도윤회의 고난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중생은 평등하며 모두 부처와 같은 원만한 공성을 지니고 있기에
    파리와 저는 모두 진공이 모습을 나타낸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자 벽에 붙어 있는 파리는
    비록 여전히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벌레이긴 하나 저의 마음은 안주하게 되었고 더 이
    상 이 서원 때문에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所以读了这一品,我们应该懂的事实是——每位众生本质上只能做佛,做不了其他东西。
    我、人、众生、寿者只是我们头脑的分别,菩萨应不着相发愿才能从诸相的困缚中解脱。否则,
    普度众生这个愿力只能让你踏上苦难的历程,你也无法真正从在人间普度众生的有为法中获得无
    上正等正觉。
    따라서 이 품을 읽고 난 후 우리가 응당 알아야 할 사실은, 모든 중생은 본질적으로 오직
    부처가 될 수밖에 없으며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我), 인(人), 중생(衆生),
  • 19 –
    수자(壽者)는 다만 우리 머릿속의 분별일 뿐이므로 보살은 마땅히 상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발원해야만 모든 상의 굴레에서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을 널리 제도하겠
    다는 이 원력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고난의 여정을 걷게 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 또한 인간
    세상에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유위법(有爲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무상정등정각을 얻
    을 수 없습니다. 제4품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在这一品中,佛接着对须菩提说:菩萨在修证佛法时,应无所住地施舍一切。在舍时,心不
    应住在色、声、香、味、触、法上,要不住于任何相来行布施。佛说的“色、声、香、味、触、
    法”叫“外六尘”,是相对于人的“眼、耳、鼻、舌、身、意”建立的。如眼观色、耳闻声、鼻嗅香、
    口尝味、身体有触觉,头脑有概念、认知和定义,即指法。众生要想成就佛果,当然对此世界的
    万事万物不能留恋,要能舍离。菩萨要能内舍六根、外舍六尘,但心却不能着相而舍,否则就有
    得失的苦恼。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이 불법을 수행할 때 응당 머무는 데 없이 모든 것을 보시해야 한다. 보시할 때 마
    음은 응당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그 어떤 상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색·성·향·미·촉·법’을 외육진(外六塵)이라 하는데, 이는 인간의 ‘눈· 귀·코·혀·몸·뜻’을 상대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물체,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맛보는 맛, 몸으로 느끼는 감촉, 그리고 머릿속의 개념·인지·정의 등이 법에
    해당합니다.
    중생이 불과를 성취하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만사 만물에 연연하지 말고 버리고 떠나야
    “复次,须菩提!菩萨于法,应无所住,行于布施,所谓不住色布施,不住声香味触法布
    施。须菩提!菩萨应如是布施,不住于相。何以故?若菩萨不住相布施,其福德不可思量。须
    菩提!于意云何?东方虚空可思量不?”“不也,世尊!”“须菩提!南西北方四维上下虚空可思
    量不?”“不也,世尊!”“须菩提!菩萨无住相布施,福德亦复如是不可思量。须菩提!菩萨但
    应如所教住。”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는 데 없이 보시해야 한다. 이른바 색에 머
    물지 말고 보시해야 하며, 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
    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머
    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동방의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서·북방과 네 간방, 상하의 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머묾이 없이 보시하면, 그 복덕 또한 이와 같아 헤아릴 수 없
    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 20 –
    합니다. 보살이 안으로는 육근을 버리고 밖으로는 육진을 버려야 하되 마음이 상에 집착한
    상태에서 버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득실의 고뇌가 생기게 됩니다.
    比如,我过去喜欢画画,喜欢写诗,曾梦想当一位画家、诗人。当我修证佛法后,全部的时
    间、精力用来修禅定、读经典等,我认为我舍去了自己的爱好,是一种为了求道而牺牲了很多世
    间的名利、娱乐。如果像我这样的认知,菩萨就活得像烈士,因为有牺牲,这叫“住法布施”。
    예를 들어 저는 과거에 그림 그리기와 시 쓰기를 좋아하여 화가나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
    습니다. 불법을 수행하게 된 후 모든 시간과 정력을 선정 수련과 경전 읽는데 쏟아부어 저
    는 저 자신의 취미를 포기했다고 여겼습니다. 즉 도를 구하기 위해 속세의 많은 명예와 이
    익, 취미를 희생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저와 같은 이런 인지가 있다면 보살은 마치
    열사처럼 사는 셈이 됩니다. 희생이 있다고 여기니까요. 이를 일러 ‘법에 머물러 보시한다’ 라고 합니다.
    再比如,有的人非常喜欢吃肉,为了气脉清净或培养慈悲心而开始吃素食,这等于这个人为
    了修行舍离布施了肉食。如果他“住味布施”,他就会觉得他舍去了美味,那现在的素食在口中也
    开始味同嚼蜡。其实他认为的美味,在有些人眼中只不过是洒满了种种香料的动物腐尸,尤其在
    天人眼中恶臭不堪。如果这位行者了知“美味”不过是自我的觉受和认知,知道美味在本质上并非
    是他认为的那样,他就不会觉得布施了美食,吃素有多么的烦恼或了不起,这就是“不住味布
    施”。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고기를 아주 좋아하는데 기맥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나 혹은
    자비심을 키우기 위해 채식을 시작했다고 합시다. 이는 이 사람이 수행을 위해 육식을 보시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맛에 머물러 보시’한다면 그는 자신이 맛있는 음식을 포
    기했다고 느껴 먹고 있는 채식도 맛없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사실 그가 맛있다고 여기는 음
    식이 어떤 이들의 눈에는 각종 향신료를 가득 뿌린 동물시체에 불과합니다. 특히 천인이 보
    기에는 악취가 진동하여 견딜 수 없을 정도지요.
    만약 이 수행자가 이 ‘맛있는 음식’이 자아의 감각과 인지일 뿐이며, 맛있는 음식이 본질
    적으로 그가 인지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맛있는 음식을 보시하였다고
    여기지 않아 채식하는 것을 아주 큰 고민거리나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맛에 머물지 않는 보시’입니다.
    再比如,你喜欢一位女子,喜欢看她的外表、喜欢她的声音、喜欢闻她身上洒的香水、喜欢
    她光滑柔软的皮肤等等。如果有一天,你为了成道必须舍离这段情时,如果你认为你认知、体
    验、觉受到的一切真实不虚,那你就是“住色、声、香、味、法布施”。你一定会非常痛苦,你会
    觉得这是一种牺牲或失去。其实,你拥有的美女真的是这样吗?俗话说“情人眼中才出西施”,只
    因为你着相了,动了情欲,才会觉得这个女人寸步不能舍离。如果有一天你移情别恋,这个女人
    就在你眼中变得丑陋不堪,你巴不得她离你远一点。
    또 예를 들어, 그대가 한 여인을 좋아하여 그녀의 외모와 목소리, 그녀 몸에 뿌린 향수
    냄새, 그녀의 매끈매끈한 피부 등을 좋아한다고 합시다. 만약 어느 날, 성도를 위해서 반드
  • 21 –
    시 이 감정을 버려야 할 때, 만약 그대가 인지하고 느끼고 체험한 이 모든 것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그대는 바로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면서 보시하는 것’이 됩니
    다. 그대는 분명 아주 고통스러워 이것을 희생이나 상실로 느낄 것입니다.
    사실, 그대가 사모하고 있는 미녀가 진짜 그러할까요? 속담에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하듯, 그대가 다만 상에 집착하고 정욕이 동했기에 이 여인 옆을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하루 그대 마음이 변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이 여인은 그대
    눈에 추하게 비추어져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所以不管你认为舍离了你喜欢的东西,或者是讨厌的东西,都是“住相舍离”。真相是:并非
    你真的舍离放下了什么,你认知的那些相都是虚妄的。其实,在佛法中修布施、修舍离,最终的
    目的只是为了让你通过舍而能从这些人、事、物中解脱,不让三界六道的这一切困住你。如果你
    能了知一切相的虚妄,不住相舍离、布施,你的心就会在布施中安住,也才能把布施的功德汇归
    于空性。
    그러므로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버렸든 혹은 싫어하는 것을 버렸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상에 머문 상태에서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진실은 그대가 진정으로 그 무언가를 버
    리거나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그대가 인지한 그 상들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법에서 보시를 수행하고 버림을 수행하는 최종 목적은 ‘버림’을 통해 이러한 사람·일·사물
    로부터 해탈하여 삼계육도의 모든 것이 그대를 속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일체 상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상에 머물지 않고 버리고 떠나거나 보시한다면 그
    대의 마음은 보시에 안주할 수 있어 보시의 공덕은 공성으로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佛在这一品中还说,如果菩萨不住相布施,所得福德像四维上下的虚空不可思量。为什么修
    布施,功德会这么大呢?因为行者不住色、声、香、味、触、法布施,等于外舍六尘而无尘相,
    也等于内舍六根而无我相。在佛学中,六根与六尘结合,形成十八界。如果六根空、六尘空,那
    十八界空。这样,行者通过不住相布施已安住在了《心经》中说的,大菩萨的“无眼耳鼻舌身意,
    无色声香味触法,无眼界,乃至无意识界”的境界,证入人空、法空,基本上出离了三界六道,最
    后破法身执,即可进入佛的真空境界了。所以,功德当然很大,不可思议。
    부처님께서는 이 품에서 또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
    은 마치 사방과 상하의 허공만큼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보시를 수행하면 공
    덕이 이토록 클까요? 수행자가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밖으로는 육
    진을 버려 티끌 상[塵相]이 없는 것과 같고, 안으로는 육근을 버려 아상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육근과 육진이 결합하여 십팔계를 형성한다고 합니다. 만약 육근이 공하고 육
    진이 공하면 십팔계 또한 공합니다. 이러하면 수행자는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로 인해 이미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대보살의 경지, 즉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
    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는’ 경계에 안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공
    (人空)과 법공(法空)을 증득하여 기본적으로는 삼계육도를 벗어나게 되며 마지막에 법신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만 하면 곧 부처님의 진공 경계에 진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덕은
    당연히 아주 크고 불가사의합니다.
  • 22 –
  • 23 –
    在人间,纵观一位菩萨的修道过程,世间的五欲之乐无法尽情享受,名利没有时间去获取,
    而且还要不断地积功德、无所求地布施一切。如果对红尘万法,不能安住在“毕竟空”的见地上,
    那所有的“布施”和“舍离”都是付出、奉献和牺牲,菩萨就很久无法尝到解脱的喜悦,在菩萨道上走
    得会异常艰难。故无空性正见,不是菩萨的真正解脱道。所以佛说:“不应住于世界万法实有这样
    的角度去行布施,去出离。”
    인간 세상에서 한 보살의 수도과정을 둘러보면 세간의 오욕락을 만끽할 수 없고 명예와
    이익을 얻을 시간도 없는 데다가 부단히 공덕을 쌓고 바라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보시해야
    합니다. 만약 속세의 만법이 ‘필경 공하다[畢竟空]’고 하는 견지에 안주하지 못하면 모든
    ‘보시’와 ‘버리고 떠남[舍離]’은 단순히 봉사와 공헌, 희생이기에 보살은 오랜 세월 동안 해
    탈의 희열을 맛보지 못하고, 보살도에서 걷는 길이 몹시 힘겨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
    로 공성정견(空性正見)이 없는 보살도는 보살의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
    님께서는 세상 만법이 실재한다는 관점에 머물러서 보시하고 출리(出離)를 행해서는 안 된
    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当然,世俗之人出离时还贪恋红尘的一切,从而有得失的烦恼。而阿罗汉们正好相反,是厌
    离这世界的一切。阿罗汉认为六尘、一切娱乐都应舍弃,都是障道的。如阿罗汉认为钱是毒蛇,
    会令人贪婪。但是在菩萨道上,在舍去钱财时,阿罗汉必须明白钱“毕竟空”。它叫钱、叫毒蛇、
    叫贪婪,都是名相,厌恶、喜欢都是着相。众生如果着相去布施,所行的布施也是人间善业,只
    能得善报,不能出轮回。而菩萨的不住相布施才能布施后无所求,不求回报理解,不希求功德和
    果位,才能心不被境转,没有得失的烦恼,也才能尽快回归本来圆满、无得无失的自性真空。
    물론 속세의 인간이 벗어나려고 할 때, 세속의 모든 것을 여전히 탐착하고 있으므로 득실
    의 번뇌가 있을 것입니다. 반면, 아라한은 정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싫어서 떠나려고
    합니다. 아라한은 육진과 일체 오락은 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에 마땅히 모두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라한이 돈을 탐욕을 일으키게 하는 독사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
    다. 그러나 보살도에서 재물을 포기할 때 아라한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돈은
    필경 공하다[畢竟空]’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돈이라 부르든, 독사라 부르든, 탐욕이라 부르든 그것은 단지 명상(名相)일 뿐이며,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모두 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만약 상에 집착해서 보
    시한다면 그 모든 보시는 인간 세상의 선업이 되어 선한 과보만 얻게 될 뿐 윤회에서 해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에 머물지 않는 보살의 보시는 보시한 후에 바라는 것이 없고
    나아가 보답이나 이해를 바라지 않으며, 공덕과 과위를 희구하지 않으며, 또한 경계에 휘둘
    리지 않고 득실의 번뇌가 없으므로 본래 원만하고 득실이 없는 자성의 진공으로 조속히 회
    귀할 수 있습니다.
    佛谈完普度众生,就开始谈菩萨的出离。在佛法的整个修证中,很重视出离心。因为当一个
    人发心成就佛果时,首先应生起出离三界六道、出离轮回之心。但因刚发心众生有习气、欲望,
    所以舍离人世界喜欢、执着的一切时,心中都会有贪爱,粘连不舍。但如果仍贪恋三界六道的幻
    境,就会被困在这些时空中,无法回归生命的源头,无法成佛。所以大菩萨了知诸相虚妄,要能
    “不住相布施一切”,这是大菩萨出离心的基点,是菩萨的真正出离。
  • 24 –
    부처님께서 중생을 널리 제도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나서 보살의 떠남[出離]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불법의 전체 수행 과정에서 출리심(出離心)을 아주 중요시됩니다. 왜냐하
    면, 한 사람이 불과를 구하고자 발심하였을 때 먼저 삼계육도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윤
    회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갓 발심한 중생은 습기
    와 욕망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서 좋아하고 집착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가 되면 마
    음속에 탐이 나고 애착이 가서 그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만약 삼계육도의 환상 경계를 여전히 탐하고 미련이 있다면 이런 시공간에 갇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성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보살은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
    을 깨달아 ‘상에 머물지 않고 일체를 보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보살이 출리심의 기반이며
    보살의 진정한 출리(出離)입니다. 제5품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这段经文的大意是,佛陀问须菩提:“众生可以根据身体相貌来认知如来吗?(此处的如来是指
    自己的自性本体)”或者这个问题可以这样说:“众生可以通过虚妄的、有局限性的眼、耳、鼻、
    舌、身、意来见到圆满的自性吗?” 须菩提回答说:“不可以,世尊。因为佛说过,众生的身体相
    貌只是诸缘聚合后形成的假合,随缘生生灭灭,本质上众生并没有一个圆满不变、不生不灭的身
    相,所以说身相即非身相。”
    이 경문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중생은 신체적 모습에 근거하여 여래를 인지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의 여래는 자신의
    자성 본체를 가리킵니다)”
    혹은 이 문제를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중생은 허망하고도 제한성이 있는 눈·귀·코·혀·몸·뜻을 갖고 원만한 자성을 볼 수 있겠는
    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중생의 신체적 모습은 다만 여러 인연이 모여서 형성
    “须菩提!于意云何?可以身相见如来不?”“不也,世尊!不可以身相得见如来。何以
    故?如来所说身相,即非身相。”佛告须菩提:“凡所有相,皆是虚妄。若见诸相非相,即见如
    来。”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
    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
    리라.”
  • 25 –
    된 가상이므로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므로, 본질적으로 중생에게는 원만하고 불변하
    는 불생불멸의 몸의 형상이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在修证佛法中,众生执着自己的身体相貌实有,以此来寻找“自性”,认为“自性”也应具有一定
    身相的话,那就错了。比如现在我们就是执着人类的身体相貌去寻找其他道众生,寻找佛、菩萨
    或者外星人,所以我们见不到。佛告诉须菩提:我们的眼、耳、鼻、舌、身、意,所看、所听、
    所闻、所嗅、所感受、所定义、所认知、所体验的一切都是虚妄不实的。如果了悟这一点,就知
    道所有的相没有定相,都在不断变易生灭,如幻化,没有实体。我们就不会被万事万物的外相迷
    惑,其实万事万物都有同样的本性,都是如如不动、永恒不变的如来。所以这段经文的真实含义
    是佛要你在每个“相”中见性。
    불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생은 자신의 신체적 모습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집착하고 이
    를 통해 ‘자성’을 찾는바, ‘자성’ 또한 당연히 일정한 신체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는 인간의 신체적 모습에 집착하면서 다른
    궤도의 중생을 찾고 부처와 보살 혹은 외계인을 찾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습니
    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우리의 눈·귀·코·혀·몸·뜻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정
    의하고 인지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만약 이 점을 깨닫게 되면 모든 상에는 고정된 상이 없으며, 끊임없이 변하고 생멸하여
    환영과 같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만물만상의 겉모습에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만물만상은 모두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모두 여여부동의 영원불변한 여
    래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문의 진실한 뜻은 부처님께서 그대에게 모든 ‘상’에서 불성을 보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佛说:“凡所有相,皆是虚妄,若见诸相非相,即见如来”。要见性,不是要你抛弃所有的
    相,避开所有相,比如自己这个眼、耳、鼻、舌、身、意的身相。如果你抛弃这个身相,在身相
    之外去找一个自性或者如来,那就错了,这都是以身相得见如来。或否定一切,认知虚空、虚无
    就是如来,也错了。但如果你能看到自己身相的虚幻,生灭无常,不被自己的“眼、耳、鼻、舌、
    身、意”造成的错觉转,对内、对外如如不动,不执着任何相,那你就是回归到了自性,就是见到
    自性如来了。
    부처님께서는 “무릇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견성(見性)하려고 모든 상을 버리고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이
    눈·귀·코·혀·몸·뜻인 몸의 형상을 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몸의 형상을 버리고 이
    몸의 형상 밖에서 자성이나 여래를 찾는다면 그건 그릇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몸의 형상
    으로 여래를 보려는 것입니다. 혹은 모든 것을 부정하여 허공이나 허무가 바로 여래라고 인
    지하는 것도 그릇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몸 형상의 허망함과 생멸 무상함을 보고
    나서 자신의 ‘눈·귀·코·혀·몸·뜻’이 만들어낸 착각에 휘둘리지 않고 안팎으로 여여부동하여
    그 어떤 상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자성으로 돌아가 자성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 26 –
    这是佛在前几品讲完“应不着相发愿不住相布施”后,提醒刚发心要成就佛果的人要注意另一
    个问题:佛是无形无相的,不应把佛当成任何固定的形象而见,或者把成道当成世俗法去学习,
    努力把自己变成某个佛样子。这是很多弟子易犯的错误。
    이것은 앞선 품에서 부처님께서 “마땅히 상에 집착하지 않고 발원해야 하고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라”라고 말씀하신 뒤, 이제 막 불과를 성취하고자 발심한 사람들에게 주의해야
    할 또 다른 문제를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즉, 부처는 형체도 모습도 없기에 부처를 그 어떤
    고정된 형상으로 보거나 혹은 성불을 세속적인 법을 배우듯 하여, 자신을 어떤 부처의 모습
    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제자가 쉽게 범하는 잘못입니다.
    这世界的一切相,无不是真空的示现。比如,我现在举起二十斤重的物品,我的胳膊显示出
    二十斤的力量,但当我将胳膊放下来后,二十斤的重量是有还是没有?如果你说有,它在哪里?
    如果你说没有,它刚才示现了出来。这世界的一切相,也如这个力量,因缘具足就示现出来,但
    每一个相并没有一个真实的自我可定义为实有或虚幻。但对执着一切物质实有的人,佛说:“凡所
    有相都是虚妄的”。当有一天你看到诸相非相,佛并非是说诸相消失变成虚空,而是说“非相”。这
    个就是说,一切还在那里。但你明白一切没有定相,本质上你的认知变了,不再执着它的真、
    假、虚、实,不再被它的生、灭、变、易转了,就可以见到如来了,并不是那些相变得虚无、不
    见了。
    이 세상의 모든 상은 진공의 시현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20근짜리
    물건을 든다면 이 팔은 20근의 힘을 나타낸 것입니다. 허나 제가 이것을 내려놓는다면 20
    근의 무게는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만약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
    요? 만약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방금 나타났었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상 또한 이 힘과 같아서 인연이 갖추어지면 나타나지만 모든 상은 실재한
    다거나 허망하다고 정의할 수 있는 진실한 자아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물질이 실제로 존
    재한다고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는 “무릇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라고 말
    씀하십니다. 언젠가 그대가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보게 될 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상이 사
    라져 허공이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상 아님[非相]”이라고 말씀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모두 고정된 상
    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본질적으로 그대의 인지가 바뀌었기에 더는 상의 진가와 허실에
    집착하지 않고, 더는 상의 생멸과 변화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여래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 그런 상들이 허무하게 되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在这我说一个自己修证中的案例。有一次,我说的一些话触动了一位朋友的自我和利益,这
    位朋友突然暴怒,大声地责骂我。我静静地站在那儿听,因为平时的修证可能已拥有一些止力、
    定力和慈悲心,所以那一刻我没有去评判谁对谁错,也没有瞋恨,只是用柔软平等的心面对他的
    愤怒,也并未认为自己是在修忍辱或表面不说,心中暗暗排斥、抵抗、不屑。我就那样静静地站
    着,专注地倾听他的大声咆哮,忽然我进入了一种境界,我看到他整个人变成了一团火焰,在空
    中燃烧,而我却腾空而起,端坐在一个巨大的莲花上。那一刻,我更透地理解了《金刚经》中的
    “诸相非相”的道理。一切相都无定相,所有的相,只要你不执着、不分别,都可以从中领略“空性” 的境界。当然,我谈到的修证境界并不代表什么。境界是虚妄的,“我”、“他”、“愤怒”、“火光”、
  • 27 –
    “莲花”也都虚妄不实,重点是:在每一个境界中,你“不着相”时的醒来。
    여기서 저 자신의 수행 중 있었던 사례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번은 제가 한 말들이
    한 친구의 자아와 이익을 건드려, 그 친구는 갑자기 격분하여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습니
    다. 저는 서서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평소의 수행 덕분에 일정한 지력(止力)과 선정의
    힘 그리고 자비심을 갖추었기에 그 순간 저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로 평판하지도 않았
    고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드럽고 평등한 마음으로 그의 분노를 마주할 뿐, 자신이
    인욕을 수행한다거나 겉으로는 말이 없으나 속으로는 은근히 배척하거나 저항하거나 하찮게
    여기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서서 집중하여 그가 큰 소리로 포효하는
    것을 듣고 있는데 저는 갑자기 한 경계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는 온몸이 불덩이로 변해서 공
    중에서 타고 있었고, 저 자신은 공중으로 솟아올라 거대한 연꽃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금강경에서 언급한 “일체 상이 상 아님[諸相非相]”이라는 이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상은 정해진 상이 없고, 모든 상을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기만 한다면 모두 그 속에서 ‘공성’의 경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말한 수행
    경계가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계는 허망한 것인지라 ‘나’, ‘그’, ‘분노’, ‘불
    꽃’, ‘연꽃’ 또한 모두 허망하여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모든 경계에서 ‘상에
    집착하지 않을 때’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在修证中,每个人都有独特的领略“自性如来”的通道和方式:有人嗅到了梅花的香味,见到
    了“自性如来”;有人睡觉枕头掉地上,见到了“自性如来”;有人挑水,桶底脱落,见到了“自性如
    来”。如果你不执着一件事情就是你认为的那样,你同样可以从别人的愤怒中、赞赏中,在禅定寂
    静中,行住坐卧、吃喝拉撒睡中见到“自性如来”。因为所有的相都虚妄,都无定相,在本质上都
    是真空。这就是佛告诉须菩提的:“所有相皆是虚妄,若见诸相非相,即见如来”。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사람마다 ‘자성여래’를 깨닫는 독특한 통로와 방식
    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화 향기를 맡고 ‘자성여래’를 보고, 어떤 이는 자다가 베개가
    바닥에 떨어져 ‘자성여래’를 보고, 어떤 이는 물을 긷다가 물통 밑굽이 빠지는 순간 ‘자성여
    래’를 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어떤 일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대로라고 집착하지만 않는
    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분노에서, 칭찬에서, 선정의 고요함에서 그리고 행주좌와와 어
    묵동정(語默動靜)에서 ‘자성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이 모두 허망하고 고
    정된 상이 없으며 본질에서는 모두 진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
    게 이르신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
    리라”는 그 뜻입니다. 제6품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须菩提白佛言:“世尊!颇有众生,得闻如是言说章句,生实信不?”佛告须菩提:“莫作
    是说。如来灭后,后五百岁,有持戒修福者,于此章句能生信心,以此为实,当知是人不于一
    佛二佛三四五佛而种善根,已于无量千万佛所种诸善根,闻是章句,乃至一念生净信者,须菩
  • 28 –
    这一品的大意是:当佛在前边刚谈过了一位修行人要成就无上正等正觉的佛果,应不着相发
    愿,不住相布施,不执着身相见如来,并说一切相皆虚妄不实。行者应安住在这样的见地中行菩
    萨道,才能尽快突破时空、身心一切内外境的障碍,回归自性如来。此时,须菩提担心未来世佛
    涅槃后,如果有人闻听到这样的言说章句,是否会相信并按此修行?佛肯定地告诉须菩提,不用
    担心,在我涅槃后,即使佛法住世的最后五百年,也有一种人能对此言说章句生起信心,认为这
    样的说法真实不虚,以此作为成道的正见。
    이 품의 대체적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앞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를 성취하려면 마땅히 상에 집착하지 말
    고 서원을 세우며,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몸의 형상에 집착하여 여래를 보지 말아야
    하며, 모든 상은 모두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마땅히 이러한 견지에 안주하여 보살도를 행해야만 비로소 시공간과 심신의 모
    든 안팎 경계의 장벽을 조속히 돌파하고 자성여래로 회귀할 수 있습니다. 이때 수보리는 미
    래 세상에서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만약 누군가가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게 된다
    면, 과연 그걸 믿고 그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걱정하지 말라. 내가 열반한 뒤, 불법이 세상에 머무는 마지막
    오백 년일지라도 누군가는 이러한 말씀과 글귀에 믿음이 생겨나서 이러한 설법은 진실하여
    提!如来悉知悉见,是诸众生得如是无量福德。何以故?是诸众生无复我相、人相、众生相、 寿者相、无法相,亦无非法相。何以故?是诸众生若心取相,即为着我人众生寿者。若取法
    相,即着我人众生寿者。何以故?若取非法相,即着我人众生寿者,是故不应取法,不应取非
    法。以是义故,如来常说:‘汝等比丘,知我说法,如筏喻者;法尚应舍,何况非法。’”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많은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말라.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 후오백세에도 계율을 지키고 복덕을
    닦는 이는 이 글귀에 능히 믿음을 내어 이를 진실한 것이라 여길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서너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처소에서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나아가 일념이
    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이러한 중생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음을 다 알고 다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은 더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상도 없을 뿐만 아
    니라 비법상 또한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법상을 취해도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
    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비법상을 취해도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
    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고, 마땅히
    비법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는 항상 설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법이 뗏목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인 것이
    랴.’”
  • 29 –
    허망하지 않다고 여김으로써 이를 성불의 정견으로 삼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
    니다.
    那这种人是怎样的人呢?持戒、修福的人。佛说这些人已不是在一佛、二佛、三四五佛前广
    修功德,种下善根的人,已是在无量千万佛所种下善根。而且佛还预言,在未来世,如果有人能
    闻听到经文内容而一念清净,生起正信,这些人所得到的功德与前面广修福报、广种善根的人一
    样广大。为什么会这样说呢?佛说,因为这些众生虽未持戒修福、广修供养,但他们如果能一念
    清净,生起正信,他们已经破了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甚至也不着法相,不着非法相。
    所以在一念之间,功德很大。佛在此说的这些人,便包括我们现在正在学习《金刚经》的人。在
    两千六百多年前,佛陀提到了我们,并为我们做了预言,说我们的功德非常之大,因为我们不只
    相信,还在按此内容修证。所以证明了须菩提的担心是多余的。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계율을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
    서 이들은 이미 한 분, 두 분, 혹은 서너 다섯 분의 부처님 앞에서 널리 공덕을 닦고 선근
    은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천만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을 심은 사람들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부처님께서는 미래 세상에서 만약 누군가 경문의 내용을 듣고
    일념의 청정심으로 올바른 믿음을 낸다면, 이 사람이 얻는 공덕은 앞에서 언급했던 널리 복
    을 쌓고 선근을 심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광대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런 중생은 비록 계율을 지키고 복을 쌓으며
    널리 공양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일념의 청정심으로 올바른 믿음을 낸다면, 그들은 이미 아
    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파한 것이며, 심지어 법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비법상에도 집착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념의 공덕은 매우 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여기서 언급하신 이런 사람들은 지금 금강경을 공부하는 있는 우리도 포함
    됩니다. 2600여 년 전,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언급하며 예언하시기를, 우리의 공덕이 아주
    크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내용에 따라 수행하
    고 증득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의 걱정은 부질없음이 증명된 셈입니다.
    在这一品中,有几个概念我们要了解一下。原文是:“是诸众生,若心取相,即为着我、人、
    众生、寿者;若取法相,即着我、人、众生、寿者。何以故?若取非法相,即着我、人、众生、
    寿者,是故不应取法、不应取非法”。在此,佛连续提到了“若心取相”、“取法相、取非法相”,都
    是错误的。那么什么是“以心取相”呢?这里说的“以心取相”,当然涵盖了佛前面说的所有内容,即
    众生不应住相修行。比如不着相度众生,不住相布施,不住相见性等等。
    이 품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원문에는 “이러한 중생이 만약 마
    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법상을 취해도 곧 아
    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비법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아야
    하고, 마땅히 비법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마음
    에 상을 취하는 것”, “법상을 취하하는 것”, “비법상을 취하는 것”을 연이어 언급하시며 이것
    이 모두 그릇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상을 취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마음에 상을 취하는 것”
  • 30 –
    은 당연히 부처님이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내용, 즉 중생은 상에 머물러서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상에 집착하여 중생을 제도하거나, 상에 머물러 보시하
    거나, 상에 머물러 견성하려는 것 등을 말합니다.
    在此,我们再举几个日常生活中的事例来说明一下。比如,平时我们听到别人说你的坏话,
    你心里就瞋恨不已,这就是“以心取相”。如果以文解字,就是你把那句骂你的话取过来,放在自
    己的心里了。此时,你已经认为自我、他人、那句话都真实不虚,即使表面上不说什麽,心里肯
    定会糟糕透顶。其实,你可以不受那句话,干嘛把它如获至宝,装入心中三四天过不去呢?有人
    说,我要把它观空,所以他把那句话牢牢记住,然后坐在座垫上,将自己、骂他的人,以及那句
    伤害他的话在头脑中想像成一个肥皂泡,想像成一个虚空、一个梦。他会发现,即使是肥皂泡,
    即使是虚空,即使是一个梦,这些都仍然可以使他痛苦不堪。其实,真正的观空,是“不受”,令
    心如如不动安住在那儿,这才是观空的初步状态。
    여기서, 일상적인 사례를 몇 개 더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일례로, 평소에 다른 사람이
    나의 험담을 하는 것을 듣게 되면, 마음속으로 화가 나고 그 사람을 원망한다면 이것이 바
    로 ‘마음에 상을 취하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우리가 그 욕을 가져다가 우리
    의 마음속에 넣은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이미 자아와 타인 그리고 그 말이 모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며, 비록 겉으로는 아무 말을 안 해도 속은 분명 엉망진창이 되
    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 말에 영향받지 않으면 그만인데, 왜 그것을 보배라도 얻은 듯이 마
    음속에 담아두고 사나흘이 지나도록 괴로워하나요?
    어떤 이는 그것을 공(空)으로 관(觀)하겠다고 하면서 그 말을 단단히 기억한 뒤, 좌복 위
    에 앉아서 자신과 자신을 욕한 그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 말을 머릿속에서 비
    누 거품으로 상상하거나 허공이나 꿈으로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는 비록 비누 거품이라 해
    도, 허공이라 해도, 꿈이라 해도 이것들은 여전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발
    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관공(觀空)은 ‘받지 않음[不受]’이며, 마음을 여여부동하
    게 하여 그곳에 안주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관공의 초보적 상태입니다.
    比如曾经佛陀在世时,有一个人冲到正在静坐的佛陀面前骂了佛陀半天。当他的骂声停下来
    时,佛陀睁开眼睛平静地对他说:“我问你一个问题,如果有人送礼物给别人,别人不收,礼物应
    退还给谁呢?”那个人说:“当然退还给送礼的人。”佛接着说:“刚才那些话,我也不收,现退还给
    你。”再比如,有些人准备在未来做一些事,但是他在行住坐卧中老是在头脑中记挂着那件事,说
    我还没有做那件事呢。即使身体休息了,大脑也不休息,甚至睡梦中也惊醒过来说,那件事还没
    做完呢,这也是以心取相。不能在做事时精进做事,休息时全然放下。
    예를 들어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떤 사람이 조용히 좌선하고 계신 부처님 앞에 달
    려와 반나절이나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가 욕설을 멈추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눈을 뜨고
    차분하게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한 가지 문제를 물어보겠소.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그 사람이 받
    지 않으면 그 선물은 누구에게 돌아가겠소?”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연히 선물을 준 사람에게 돌아가야지요.”
  • 31 –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방금 그 말들을 나 또한 받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그대에게 돌려주겠소.”
    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미래에 어떤 일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앉으나 서나 늘
    머릿속에 자신이 아직 그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걱정합니다. 비록 몸은 쉬고 있지만, 머리는 쉬지 않고 심지어 자다가 놀라 깨어나 “그 일을 아직 다 못했어.”라고 말한다면 이
    것 또한 마음으로 상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는 일할 때도 온전히 일하지 못하고, 휴식할 때
    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再比如,现在网路的普及应用,大家每天在网路平臺上可以流览到许多的负面资讯。如果这
    些资讯正好对应了行者过往的人生阅历和经验,行者就会更加坚定这些负面资讯的真实性。日久
    天长,头脑中就会充满这些垃圾资讯,使人无缘无故地非常疲惫,甚至情绪低落、消沉。而且最
    糟糕的还不是这些,当人的头脑信息中负面资讯充满,又不注重累积善报的人,很快在他眼前、
    周围,看到、体验到的全是别人的缺点和丑陋的语言。他会变得非常暴躁、挑剔,然后又自责、
    烦恼,这样恶性循环,人际关系以及事业都因其受很大影响,更别谈修证了。
    또 예를 들어, 지금 인터넷의 보급으로 누구나 매일 온라인 플랫폼에서 허다한 부정적인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정보가 마침 수행자의 과거 삶의 경력과 경험에 맞아
    떨어진다면, 수행자는 이러한 부정적인 정보의 진실성을 더욱 확고히 믿게 될 것입니다. 시
    간이 지남에 따라 머릿속에는 이런 쓰레기 정보로 가득 차 그로 하여금 이유 없이 매우 피
    곤하게 하거나 심지어 정서를 침체시키고 우울하게 합니다.
    더 최악인 것은, 사람의 머릿속에 부정적인 정보가 가득 차고 선업을 쌓는 것을 중요시하
    지 않게 되면, 곧 그의 눈앞과 주위에 보이는 것, 체험하는 것이 온통 타인의 결점과 추한
    언어뿐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는 매우 짜증이 나서 트집이나 잡다가 결국에는 자
    책과 번뇌에 휩싸일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대인관계와 사업에 모두 큰 영향을
    주므로 수행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曾有一位平时心地很善良、正直的朋友,就是因为这些负面资讯在头脑中充塞太多,而且把
    未来的事总挂在心上,不能及时放下休息,所以脾气变得越来越差,与父母、家人关系弄得很
    僵。为了调整自己,她去学习儒家文化,认为自己不孝,不能做一个好女儿、好妻子。其实,她
    最该做的是尽快清除头脑的库存负担,否则她自己都累得快崩溃了,已无力去尽孝、尽责。如果
    她自己的状态调整过来了,那么不需要任何圣人的言论来教她怎么做,凭她的正直、善良,她一
    定会是一位孝顺的女儿、尽职的好妻子。这也是以心取相。如果现在我们懂得不应以心取相的道
    理,去面对自己看到的、听到的、体验到的,在心中如如不动、不取舍分别,即使是那些负面资
    讯也不会变成负面能量影响到我们的生活和修证。
    이전에 마음씨가 착하고 정직한 한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부정적인 정보가 머릿
    속에 너무 많이 들어차 있었고 또한 미래의 일을 늘 마음에 담아두어 이를 제때 내려놓고
    쉬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성격이 날이 갈수록 나빠져 부모와 가족과의 관계가 경직되었습
    니다.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그녀는 유교 문화를 공부하고는 자신이 불효하여 좋은 딸, 좋
    은 아내가 되지 못했다고 여겼습니다. 사실, 그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될수록 빨리
    머릿속에 있는 짐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너무 지친 그녀는 거의 붕괴
  • 32 –
    직전이어서 효도나 책임을 다할 힘조차 없게 됩니다. 만약 그녀 자신의 상태가 회복되었다
    면 성인의 그 어떤 가르침이 없어도 그녀의 정직함과 선량함으로 그녀는 분명 아주 효도하
    는 딸, 책임을 다하는 좋은 아내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마음으로 상을 취한’ 경우
    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마음에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고, 보고 듣고 체험하
    는 것들을 마주할 때 마음이 여여부동이라 취하거나 버리는 선택과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설령 그것이 부정적인 정보라고 해도 부정적인 에너지로 변해 우리의 삶과 수행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那什么是“著法相,非法相”呢?在佛的最高见地中,众生本性是佛。我们现在认为自己是凡
    夫众生是因为我们着了种种相,认为自我以及时空中的一切都是真实不虚的,而且心念被境界、
    认知、定义转,所以我们一直像在幻境中做梦。佛说:“众生幻心,还依幻灭”。所以佛说法是为
    了让我们放下执着、取舍,从幻梦中醒来。佛法也是虚妄的,只是我们放下执着暂时依止的工
    具。但有一些行者不理解佛说法的本怀,把佛法当成一门知识、一种理论,去执着、分别,认为
    有固定的法可学、可得,有一个佛可成,这即是着了“法相”。
    그렇다면 ‘법상, 비법상에 집착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부처님의 가장 높은 견지에서 본다면 중생의 본성은 모두 부처입니다. 우리가 지금 자신
    을 범부 중생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온갖 상에 집착하고, 자아와 시공간 속의 일체가
    모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고 여기는 데다가 마음이 경계·인지·개념에 휘둘리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우리는 늘 환영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환심(幻心)은 또한 환(幻)으로 멸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것은 우리가 집착과 취하고 버리는 선택을 내려놓고 환상의 꿈
    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불법 또한 허망한 것이며, 우리가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
    잠시 의지할 수 있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그 본의를 이해하지 못
    한 일부 수행자들은 불법을 하나의 지식이나 이론으로 여겨 집착하고 분별하며, 배워야 할
    고정된 법이 있고 얻어야 할 법이 있으며, 이루어야 할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법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其实这个现象更多地发生在现在末法时代的众生身上。在此,我举一个不太恰当的例子。比
    如,有一个人要去一个地方,不知道怎样走,问佛。佛告诉他向东走,并告诉他中间可能出现的
    岔路,怕他记不住清楚,又为他绘了路线图。这个人听到这番指导后,并未向东走,而是在原地
    打转,并激动地说:“这真是正确的见地啊,佛好伟大。佛怎么能知道这些见地,而我不知呢?我
    与佛有何不同呢?佛是怎样知道的?这么重要的指导,我应该背下来!”如果这个人一直在原地打
    转,在头脑中形成种种知见,认为自己得了法宝,却一直未向东走,那佛对他的指导是毫无意义
    的。而且,佛指导的方式也仅仅是针对他的,如果明天问路的是一只猴子或海中的大乌龟,佛指
    示的路可能就是山路或者海路。如果是一只鸟,那可能就在空中飞了。所以,佛法并无定法可
    学。佛所说的一切只不过是让你放下疑虑,道破盲区,听懂了马上放下执着,马上去行的。就像
    刚才那位众生,应该立刻向东而去,才不枉佛苦口婆心的指导。否则,那张地图就没有意义了。
    사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말법시대의 중생에게서 더 많이 발생합니다. 여기에서 혹시
  • 33 –
    부적절할 수도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한 장소에 가야 하는데
    길을 몰라서 부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에게 동쪽으로 가야 한다고 일러주시
    며 도중에 나타날 수 있는 갈림길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한편 그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친히 노선도까지 그려주셨습니다. 그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동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맴돌며 감격해서 말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올바른 견지로구나! 부처님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부처님은 이런
    견지를 아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나는 부처님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부처님은 이를 어떻
    게 아셨을까? 이렇게 중요한 가르침이니 달달 외워야겠다!”
    만약 이 사람이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며 머릿속에서는 온갖 지식과 지견만 형성하여 자신
    이 법보(法宝)를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동쪽으로는 한 걸음도 떼지 않는다면 부처님께
    서 그에게 주신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방식 또한
    오직 그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만약 내일 길을 묻는 이가 원숭이거나 혹은 바다의 거북
    이라면,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길은 산길이거나 혹은 바닷길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새라면
    공중으로 날아가라고 하셨겠지요.
    그러므로 불법에는 정해진 법이 있어서 배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단지 여러분이 의구심을 내려놓고 맹점을 깨달아 여기에 대해 알아듣자마자 집착
    을 버리고 곧바로 실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방금 그 중생처럼 마땅히 즉시 동쪽으로 가야
    만 부처님의 간곡한 가르침이 헛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도는 휴짓조각
    이나 다름없습니다.
    同样的道理,如果修学佛法的人把佛法当成理论研究、供奉,认为得到了无上真理,却没有
    放下一丁点的欲望、执着,没有行菩萨道,就是着了法相。如果这样修行,是没有办法成就最后
    的目标——无上正等正觉的。反之,如果有众生听到佛说:“众生本来是佛,佛法是虚妄的,一切
    相都虚妄不实”这样的言论,认为可以“无修”、“无证”,不再听闻佛理,而且不修福德、不惧因
    果,一切随顺自然,所做就是随缘,就可成就无上正等正觉,这即是着了“非法相”。众生的妄心
    迷梦,还需依止佛的正知正见,精进修行才可以醒过来。醒来后才知一切相虚妄,整个修证也是
    在梦中所行。
    같은 이치로,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불법을 이론 연구나 숭앙의 대상으로만 삼고 최고의
    진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욕망이나 집착은 조금이라도 내려놓지 않고 보살도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법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수행한다면 궁극적 목
    표인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어느 한 중생이 부처님께서 “중생은 본래 부처이다. 불법은 허망하며 모든 상은
    모두 허망하여 실체가 않다.”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수행할 필요도 없고 증득할 필요도 없
    다’고 여겨 더는 불법의 이치를 듣지 않고 복덕도 쌓지 않으며 인과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냥 모든 것을 인연에 맡기기만 하면 곧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바로 ‘비법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허망한 마음과 미혹된 꿈은 여전히 부처님의 정
    지견(正知見)에 의지해서 수행을 정진해야만 깨어날 수 있습니다. 깨어난 뒤에야 비로소 모
    든 상이 허망하고 모든 수행과정 또한 꿈속에서 행한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佛在这一品的最后,对他的阿罗汉弟子们说了一个比喻:把佛法比作渡河用的船,告诉弟子
  • 34 –
    们不应着法相。说:“过了河,船就应该舍去,不应该背船上岸。”如果连帮众生度过生死之河的
    佛法也应适时舍去,那所有的令你轮回、经历苦难的不正见,更应该马上舍去。
    부처님께서는 이 품의 마지막에 아라한 제자들에게 불법을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하면
    서 제자들에게 법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응당
    버려야지 뗏목을 등에 지고 뭍으로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중생을 도와서 생사의
    강을 건너게 한 불법마저도 때가 되면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그대를 윤회하게 하고 고난을
    겪게 하는 모든 삿된 견지는 더더욱 즉시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7품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在这一品中,佛开始反问须菩提。佛这次说法源自于须菩提提的问题,即:众生要发心求取
    无上正等正觉的佛果,应怎么样修,才能令心安住?没有烦恼、障碍,迅速成就?佛讲了几点,
    如:要不着相行愿,不住相布施、舍离,要不着身相见性,而且一切无定相,佛法也无定法,不
    要执着佛相和佛说的法。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반문하셨는데 이번 설법은 수보리의 질문에서 비롯되
    었습니다. 즉 중생이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를 구하고자 발심했다면 어떻게 수행해야만 마음
    을 안주시키고 번뇌와 장애가 없이 신속하게 성취할 수 있을지를 물었지요. 부처님께서는
    몇 가지 요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상에 집착하지 않고 서원을 행하고, 상에 머무
    르지 않고 보시하고 떠나며, 몸의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자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
    든 것은 정해진 상이 없으며, 불법 또한 정해진 법이 없기에 부처의 상과 부처의 설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弟子们听到这儿,应该在头脑中有一条获取佛果的正确途径了,但也许又增加了“有果位可
    得”、“有法可得”之心,还未马上放下一切,立刻顿悟性空之理。故现在佛突然反问须菩提,当然
    也是在问在场的众弟子:你们心中要成就佛果,但你们认为如来真有佛果可得吗?我刚才或平时
    真有定法可说吗?须菩提在大弟子中号称“解空第一”,他当然明白佛这样问的用意。马上说:从
    “须菩提!于意云何?如来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耶?如来有所说法耶?”须菩提言:“如
    我解佛所说义,无有定法名阿耨多罗三藐三菩提,亦无有定法,如来可说。何以故?如来所说
    法,皆不可取、不可说、非法、非非法。所以者何?一切贤圣,皆以无为法而有差别。”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여래가 설
    한 바의 법은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부르는 정해
    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수 있는 정해진 법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비법도 아니기 때문입
    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현은 다 무위의 법으로써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 35 –
    我对佛所说一切的理解,并无一个东西叫无上正等正觉的佛果,也并无一种定法叫佛法是如来每
    次要讲的。如来所说的一切道理、法门,都是对应大家的执着而做的方便开示,如医生因不同的
    病开不同的药。故佛法并无定法,众生也不应该执取哪一种法是佛法。最高真理本不可言说,众
    生不再着相,放下一切执着,回归本源就是。如来所有言说只是指引众生回归的航标,众生不应
    以为“有法可得”,也不应否定佛法,认为没有正知见的指导,不需要修证就能回归。
    제자들이 여기까지 듣고 나면 머릿속에 불과를 획득하는 올바른 경로가 그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얻을 수 있는 과위가 있다’, ‘얻을 수 있는 법이 있다’는 마음이 더해져, 즉시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공성의 이치를 당장 돈오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갑자기 수보리에게,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대들이 마음속으로 불과를 성취하려고 하는데, 여래에게 진짜 얻을 수 있는 불과가 있
    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방금 혹은 평소에 진짜로 정해진 법이 있어 이를 설한 것인가?”
    수보리는 큰 제자 중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는 만큼,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의도를 잘 알아차리고는 즉시 말했습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한 기반에서 말씀드리자면,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라 부를만한 실
    체가 없으며, 불법이라 불리는 정해진 법이 있어 여래께서 매번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이치와 법문은 모두 사람들의 집착에 대응하여 펴신 방편일 뿐입
    니다. 이는 의사가 환자의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에는 정
    해진 법이 없으며, 중생 또한 그 어느 법이 불법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최고의 진리
    는 본래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중생이 더 이상 상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집착을 내려놓
    으면 근원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여래의 모든 말씀은 다만 중생의 회귀를 인도하는 이정표
    일 뿐이므로 중생이 ‘획득할 수 있는 법이 있다’고 여겨서도 안 되고, 또한 불법을 부정하면
    서 올바른 지견의 가르침이 없이 수행과 증득을 하지 않고서도 회귀할 수 있다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佛在此反问须菩提及众弟子的问题,也是在反问我们现在正在听经的同学,在你的心中,现
    在是否想着:我再修几年,就有一个法力无边的佛果可得到?现在正在获取佛法,就像你通过学
    习会获取一个博士文凭,或可以学习后掌握一门叫“无上正等正觉”的理论、道理?不是这样的。
    为什么无佛果可得,如来无定法可说呢?因为众生本来都是佛,众生现在所有的执着、轮回、求
    道之路都是做梦。
    부처님께서는 이 지점에서 수보리와 여러 제자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이 또한 지금 경전을
    듣고 있는 우리 도반들에게도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지금 ‘내가 이제
    몇 년 더 수행하면 법력이 가없는 불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박사학위를 따듯이 공부
    를 통해 불법을 얻고 무상정등정각이라는 이론과 기술에 숙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얻을 불과가 존재하지 않고 여래께서 설할만한 정해진 법이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
    생의 지금 모든 집착과 윤회,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조차 실은 다 꿈일 뿐입니다.
    比如一个人躺在床上做梦,梦中他变成了猫、狗,或行了万里路,看了许多风景等。当他醒
  • 36 –
    来时,他仍然是原来的他,他并未变成另一个人或什么东西。众生成佛也是这样的。众生放下执
    着后,心不再取相,马上从梦中醒来,自然回归到本有的佛性,并不是从众生变成了一位佛,或
    者从凡夫修出了一个佛果,因此成了佛。所以说如来最后无所得,也并无一个辉煌的、至高无上
    的佛果等着众生摘取。如来也无所说,众生不要执着佛法,如来是真空,真空没有文字、语言,
    眼、耳、鼻、舌、身、意,所以如来无所说。而每一位众生放下分别执着,回到真空境界后,就
    能明白曾经所有的执着、分别,甚至行菩萨道,布施、发愿等,都只是众生执着时的错误认知。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침대에 누워서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그는 고양이나 강아지가 되기
    도 하고, 만 리 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풍경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깨어나면 그는 여전히
    원래의 그 사람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이나 그 어떤 무엇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성불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중생이 집착을 내려놓은 후, 마음에 더 이상 상을 취하지 않
    으면 곧 꿈에서 깨어나 자연히 본래의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중생에서 부처로 변하거
    나 혹은 범부에서 불과를 수련해내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래는 마지막에는 얻는 것이 없고, 또한 휘황찬란하고 지고무상한 불과가 있어
    여러분이 획득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래 또한 설한 바가 없으므
    로 중생도 불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래는 진정한 공(空)입니다. 진공에는 문자도
    언어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기에 여래는 설한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이 분
    별과 집착을 내려놓고 진공의 경계에 돌아가고 나면, 이전의 모든 집착과 분별 심지어 행한
    보살도와 보시 그리고 발원 등은 다만 중생이 집착할 때 가졌던 그릇된 인지임을 깨닫게 됩
    니다.
    比如一个人眼睛病了,在空中看到一朵花。他不断地问佛:“这朵花怎么生出来的?开花需多
    久啊?为什么是红色的?为什么与别的花不同?什么时候会凋谢?”佛像医生,如果他与你谈论花
    的问题只是为了你能信任他,安住在他身边,治疗你的眼睛。等你病好了,花即不见了,你也不
    再较真说花是真的假的。别人说假的时候,你据理力争,或者脑中反复思量到底是实是虚,是真
    是假,你曾经与医生、其他人探讨的所有关于那朵花的问题,大家也可以心照不宣,一笑置之
    了。
    이는 마치 눈병에 걸린 사람이 허공에서 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부처님
    께 “이 꽃은 어떻게 생겨났어요? 꽃이 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왜 빨간색이에요?
    왜 다른 꽃과 달라요? 언제 시드나요?”라고 물었다고 합시다. 부처님은 의사처럼 그 사람과
    꽃에 관해 이야기하신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부처님을 신뢰하고 부처님 곁에 안주하게 하여
    그가 눈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눈병이 나아져 그 꽃이 보이지 않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그 꽃의 실재 여부를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짜라고 말할 때 그는 이치를 따져가며 논쟁하거나 혹은 머릿
    속에서 반복적으로 사실 여부와 진가를 고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대신 이전에 의사나 혹
    은 다른 사람과 토론했던 그 꽃에 관한 모든 문제를 온전히 속으로 이해하고 그저 웃어넘길
    것입니다.
    众生也本性是如来,本性是真空,之所以认为自己是众生,与佛不同,也如病眼看花,未见
    到真相。等众生放下执着,不着相时病就好了,众生相与佛相都如那朵花不见了。你与佛本来没
  • 37 –
    有什么不同,你本来就是。那时,所有要成佛、要行菩萨道的这些概念、行为,都像医生与病人
    谈关于花的问题,目的只有一个你安住在佛的见地中,从所有执着、取舍,堆积成的众生梦中醒
    来。所以,如来并无所说,如众生执着佛的语言、文字,是无法回归真空之境的。
    중생 또한 그 본성은 여래이고 진공입니다. 스스로 중생이라 여겨 부처님과 다르다고 분
    별하는 것은 마치 병든 눈으로 꽃을 보는 것과 같아 진실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중생이 집
    착을 내려놓고 상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병은 나아져 중생상과 불보살상이 모두 그 꽃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중생과 부처는 본래 차이가 없으며, 중생은 본래 부처입니다. 그때 모든 성불하겠다, 보살
    도를 행하겠다 하는 개념과 실천은 모두 의사가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그 꽃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목적은 오직 하나, 사람들이 부처의 견지에 안주하여 모든 집착과 취사
    선택이 쌓여 빚어진 중생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부처의 언
    어와 문자에 집착한다면 결코 진공의 경계로 이를 수 없기에, 여래께서는 설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在这一品中,当佛反问须菩提问题时,如果众生心性清净,可以看到佛一直安住在真空、无
    为的境界中开示,希望众生从迷梦中醒来,众生迷时,佛与佛法也是他梦境的一部分。所以,佛
    最后肯定了须菩提的回答,并说:这世界所有的圣贤其实都一样,他们在这个世界对众生说种种
    不同的法,显种种不同的相,其实在本质上他们都是一样的,都是立足在真空的境界中,示现出
    种种差别。原话是:“一切贤圣,皆以无为法而有差别”。在此处“无为法”并非是指相对“有为法”而
    建立的概念,指的是如来的万法本来不生不灭、清净无为的真空境界。
    이 품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반문하실 때의 맥락은 이러합니다. 만약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부처님이 항상 진공과 무위의 경계에 안주하여 설법하시면서 중생이 미혹된 꿈
    에서 깨어나시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중생이 미혹되었을 때는 부처와 불법
    역시 중생의 꿈 일부분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에 수보리의 대답을
    긍정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성현은 사실 같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중생에게 여러 가지 다른 법을
    설하고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지만, 사실 본질에서 그들은 모두 똑같으며 모두 진공
    경계에 입각하여 여러 가지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모든 성현은 다 무위의 법으로써 차이가 있다.”입니다. 여기에서
    ‘무위법’은 ‘유위법’을 상대해서 세운 개념이 아니라, 여래의 만법이 본래 그렇게 생멸이 없
    는, 청정 무위한 진공 경계임을 가리킵니다. 제8품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须菩提!于意云何?若人满三千大千世界七宝以用布施,是人所得福德,宁为多不?”须
    菩提言:“甚多,世尊!何以故?是福德即非福德性,是故如来说福德多。”“若复有人,于此
    经中受持,乃至四句偈等,为他人说,其福胜彼。何以故?须菩提!一切诸佛,及诸佛阿耨多
    罗三藐三菩提法,皆从此经出。须菩提!所谓佛法者,即非佛法。”
  • 38 –
    这一品的大意是佛问须菩提:“假如现在有一个人,拿满三千大千世界这样多的珍宝来做布
    施,他由此得到的福德、善报多不多呢?”须菩提回答说:“世尊,这个人的福德、善报非常多。
    我为什么这样认为呢?因为我认为这个人做的福德是世间有相福德,可以由此获得善报,所以如
    来才说得福德多。但如果此人能施者空、施物空、受者空这样布施,所得福德即如虚空一样不可
    思量,叫福德性。”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가령 지금 어떤 한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만큼 많은 귀한 보물을 갖고 보시를 한다면 그가
    이로 얻는 복덕과 선한 과보는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의 복덕과 선한 과보는 아주 많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이 사람이 행한 복덕은 세간의 상(相)이 있는 복덕이기에 이로부터 선한 과보를 얻을
    수 있으므로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이 보시하
    는 이도 공하고, 보시하는 물건도 공하고, 받는 이도 공하다고 생각하면서 보시했다면 그가
    얻는 복덕은 허공과 같이 헤아릴 수 없는데, 이를 복덕의 본성이라 합니다.”
    在此,须菩提认为住相布施所得福德才可以用“多少”算计。而不住相布施,福德也空,行者
    无所执着、无所求,所有福德即可契入自性实相,汇归空性。福德本性空,所以叫福德性,不可
    以用“多少”来说。
    여기에서 수보리는 상에 머물면서 행한 보시인 경우라야만 그 얻는 복덕을 ‘많고 적음’으
    로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는 복덕도 공하고 수행자가
    집착하는 바도 없고 바라는 바도 없으므로, 모든 복덕은 곧 자성의 실상으로 들어가 공성으
    로 회귀합니다. 복덕의 본성은 공(空)이기 때문에 이를 복덕성(福德性)이라 부릅니다. 따라
    서 ‘많고 적음’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因在《金刚经》的第四品中,佛曾谈到应不住相布施的正知见,所以须菩提在此如此解释,
    以此来说明自己对佛言说的领悟。但接下来的对话中如来并未对须菩提的“福德性”、“福德相”这两
    个概念作任何评论,因为在如来的境界中见相即见性,色空不二。只是因众生着相,如来说不应
    着相布施,但施者本空,所施一切也本空。众生即使有所住、有所执着,但在佛的境界中也是非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
    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진정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
    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
    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
    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이 경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불법이란 것
    은 곧 불법이 아니다.”
  • 39 –
    住,也无可住之人、无可住之物,万物本自清净。但须菩提这样讲也并没有错。
    금강경 제4품에서 부처님께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는 정지견을 말씀하셨습
    니다. 그러기에 수보리는 자신이 부처님 말씀을 이해했음을 보이기 위해 여기서 이렇게 설
    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에서 여래는 수보리의 ‘복덕성’, ‘복덕상’ 이 두 개념에
    대하여 그 어떠한 평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경계에서는 상을 보는 것이
    곧 본성을 보는 것[見相即見性] 즉 색공불이(色空不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생이 상에 집착하기에 여래께서는 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함을 말씀하셨지
    만 보시하는 자도 원래 공하고 보시하는 모든 것도 본래 공합니다. 중생이 설령 머무는 데
    가 있고 집착하는 바가 있더라도 부처의 경계에서는 여전히 머무는 데가 없고 머무는 사람
    도, 머무는 물건도 없이 만물은 본래 청정합니다. 그러나 수보리가 이렇게 말해도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佛陀接着说:“如果有人能够理解这本经文的意思,并依此修证,甚至只是将其中的四句偈颂为
    他人解说,那么他所得的福德超过前面那个人。为什么这么说?须菩提,十方三世一切诸佛以及
    诸佛成就无上正等正觉的法门,都从此经出。”在此,佛陀是在强调本经中的见地对修学人的重
    要。学习修证这部经不仅可获得世间法中的很大福德,而且所有的佛都是按此经中的一切见地、
    方法,去做、去修证,以此成就了无上正等正觉。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이 경문의 뜻을 이해하여 이를 따라 수행하고 증득하며 더 나아가 그중
    의 사구게라도 타인을 위해 해설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앞의 그 사람을 뛰어넘을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수보리여, 시방 삼세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가 성취한 무상정
    등정각의 법문이 모두 이 경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본 경전의 견지가 수행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계십니
    다. 왜냐하면 이 경전을 배우고 수행하면 비단 세간법에서 가장 큰 복덕을 얻을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이 또한 이 경전의 모든 견지와 방법에 따라서 행하고 수행 증득함으
    로써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当佛陀在强调了这本经的重要后,马上又重申前边说过的见地,提醒须菩提,其实也是在提
    醒还一会儿清醒一会儿迷糊的众弟子。原文是:“所谓佛法者,即非佛法。”意思是说:“我刚才说
    这部经非常重要。虽然这样说,但你们可不能着相,不能执着这就是佛法。”佛所有的说法几乎都
    是对机施教,即佛会看着弟子们心中的疑惑与盲区,层层递进、左右清扫,令弟子们随佛的层层
    开示,破层层知见、除层层执着。随所有相的破除,弟子们的心中像拿掉了层层滤镜,终于一点
    一点看清实相。而且,佛在《金刚经》中的开示就像是一个人,倒退着打扫弟子们的心地,层层
    清扫,而且边走边扫去了自己上一步留下的脚印。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후, 곧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견지를 다시 언
    급하시며 수보리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사실 이는 한동안은 깨어 있다가 한동안은 정신이 혼
    미해지는 여러 제자를 일깨워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원문은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다.”인데, 이는 “내가 방금, 이 경전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비록 이렇게
  • 40 –
    말했다고 해서 그대들이 상에 집착하여 이것이야말로 불법이라고 집착해서도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거의 모두 대기설법, 즉 상대방의 근기에 근거하여 법을 설하는 것
    인지라, 부처님께서는 제자들 마음속의 의혹과 맹점을 보시고 단계적으로 나아가면서 좌우
    를 청소하여, 제자들이 부처님의 설법에 따라 겹겹이 쌓인 지견을 깨뜨리고 겹겹이 쌓인 집
    착을 타파하게 하십니다. 모든 상이 깨어짐에 따라, 제자들의 마음은 겹겹의 필터를 벗겨낸
    것처럼 그들은 마침내 그 실상을 조금씩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하신 가르침은 마치 뒷걸음질 치며 제자들의 마음을 청소하는 것과 같습니다. 층층이 청소
    하며 나아가는 동시에 자신이 앞서 남긴 발자국까지 쓸어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到最后,在众生心田留下了真空境界。所以,佛在说完此经的功德与重要后,马上又重新扫
    去了刚才说法可能留在一些弟子心中的执着,重提不要执着法相,让弟子们重新安住在不着所有
    相的真空境界中。显然,弟子们心中的执着仍未破完,所以佛接下来仍在不断开示,清扫弟子们
    的心地。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중생의 마음속에 진공 경계가 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서는 이 경전의 공덕과 중요성을 모두 말씀하신 뒤 바로 전에 한 설법으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속에 남아있을지 모를 집착을 쓸어버리시고는, 곧 다시 법상에 집착하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하시어 제자들이 모든 상에 집착하지 않는 진공 경계에 다시 안주하게 하십니다. 제자
    들 마음속의 집착이 여전히 다 깨지지 않은 것은 확실하므로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끊임없이
    설법하여 제자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청소하십니다. 제9품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须菩提!于意云何?须陀洹能作是念:‘我得须陀洹果’不?”须菩提言:“不也,世尊!何
    以故?须陀洹名为入流,而无所入,不入色声香味触法,是名须陀洹。”“须菩提!于意云何?
    斯陀含能作是念:‘我得斯陀含果’不?”须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斯陀含名一往来,而
    实无往来,是名斯陀含。”“须菩提!于意云何?阿那含能作是念:‘我得阿那含果’不?”须菩提
    言:“不也,世尊!何以故?阿那含名为不来,而实无不来,是名阿那含。”“须菩提!于意云
    何?阿罗汉能作是念,‘我得阿罗汉道’不?”须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实无有法名阿
    罗汉。世尊!若阿罗汉作是念:‘我得阿罗汉道’,即着我人众生寿者。世尊!佛说我得无诤三
    昧,人中最为第一,是第一离欲阿罗汉。世尊!我不作是念:‘我是离欲阿罗汉’。世尊!我若
    作是念:‘我得阿罗汉道’,世尊即不说须菩提是乐阿兰那行者!以须菩提实无所行,而名须菩
    提是乐阿兰那行。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
    가? ”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하여 입류라고 하지만 실로는 들어간
    바가 없으니 색·성·향·미·촉·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수다원이라 하기
  • 41 –
    这一品的原文大意是佛陀问须菩提:“须菩提,你认为如何呢?须陀洹(指初果罗汉)能生起
    这样的念头,我得到了须陀洹果了吗?”须菩提回答说:“世尊,不可以。为什么呢?因为须陀洹
    的意思是入流,入流就是舍凡入圣,出入圣者之流。但圣者无相,所以实无所入,只是说能不被
    眼、耳、鼻、舌、身、意所建立的色、声、香、味、触、法等外境所转、所诱惑,对此不再执
    着、贪恋、放不下,名叫须陀洹。”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다원(초과아라한을 가리킴)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다원의 뜻은 입류(入流), 즉 범인의 영역을
    떠나 성자의 경계에 이른 것으로 성인의 부류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자는 상이 없으므로, 실제로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단지 눈·귀·코·혀·몸·뜻에 세운 색·성· 향·미·촉·법 등 외적인 경계에 흔들리거나 유혹되지 않아 이에 더는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않
    고 내려놓는 것을 일러 수다원이라 이름할 뿐입니다.”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
    가? ”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하여 일왕래라고 하지만 실로 왔다 감
    이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
    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하여 불래라고 하지만 실로 돌아오지
    않음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아나함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
    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아라한이라 이름할 수 있는 법이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곧 아상·인상·중생
    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중에서 제일이라 하셨는데, 이는
    욕심을 여읜 첫째가는 아라한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나는 욕심을 여읜 아라
    한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야
    말로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
    가 없으므로 비로소 수보리야말로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 42 –
    佛陀又说:“须菩提,你认为如何呢?斯陀含(指二果罗汉)人能够生起这样的念头,我得斯
    陀含果了吗?”须菩提说:“世尊,不可以。为什么呢?因为斯陀含的意思是往来,即还需要一住
    天上,一来人间受生。对本性来说,实无往来。往来只是一个虚妄的现象而已,故名是斯陀含。”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다함(이과아라한을 가리킴)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다함의 뜻은 왕래(往來), 즉 한 번은 천상에
    묵고 한번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서 삶을 받아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허나 본성을 놓
    고 볼 때 실제로 가고 옴이 없습니다. 왕래라는 것은 단지 허망한 현상일 뿐이므로 사다함
    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佛陀说:“须菩提,你认为怎样呢?阿那含(指三果罗汉)能否生起这样的念头,说我得阿那
    含果吗?”须菩提说:“不可以,世尊。阿那含名为不来,不来不是指不轮回,是指不再来人间受
    生。但对自性来说,本质上并无来去,故名阿那含。”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나함(삼과아라한을 가리킴)이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해서는 되겠는가?”
    수보리가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아나함을 이름하여 ‘불래(不來)’, 즉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는 윤회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인간 세상에 와서 태어나지 않
    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자성을 놓고 볼 때 그 본질은 실제로 오고 감이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아나함이라 이름합니다.”
    佛陀说:“须菩提,你认为怎样呢?阿罗汉能生起这样的念头,我得到了阿罗汉果位吗?”须
    菩提说:“不可以,世尊。为什么呢?其实并无有任何一个固定的形象样子叫阿罗汉。世尊,如果
    阿罗汉生起这样的念头,我得到了阿罗汉的果位,即是有我、人、众生、寿者相。世尊,佛说我
    证得了无诤三昧的境界,无诤三昧就是了悟自性本空,清净无烦恼的状态,是人中最为第一,是
    第一离欲阿罗汉。世尊,我不这样想,我是离欲(断除了一切欲望,清净无染)阿罗汉。世尊,
    如果生起这样的念头,我证得了阿罗汉果。世尊就不会说须菩提是一位乐于在山林中、寂静处静
    修,正在走向解脱轮回的人。正因为须菩提虽在山林寂居静修,但内心如如不动,不被身心内外
    一切境转,安住于万法本空的见地上,不执着在山林静修这回事儿,也不取过去、未来的任何
    相,所以世尊才说须菩提是乐于在山林中寂居静修,正在走向解脱轮回的人。”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해
    서는 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고정된 형
  • 43 –
    상과 모습이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과를 얻었다’ 는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삼매(無諍三昧)의 경계를 증득하여, 즉 자성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청정하고 번뇌가 없는 상태이기에 사람 중에서 가장 으뜸이며, 욕구를 여읜 첫째
    가는 아라한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저는 제가 욕망을 여읜(모든 욕망을
    끊어 청정하고 오염이 없는)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과를 얻었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가 숲속의 조용한 곳에서
    고요히 수행하기를 즐겨 윤회의 해탈을 향해 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수보리가 비록 숲속의 조용한 거처에서 고요히 수행하나 마음은 여여부동하여 심신 안팎의
    일체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만법이 본래 공하다는 견지에 안주해 있어 숲속에서 고요히 수
    행한다는 이 일에 집착하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의 그 어떤 상도 취하지 않으므로, 세존께
    서는 수보리야말로 숲속의 조용한 거처에서 고요히 수행을 즐겨 윤회에서 해탈을 향해 나아
    가는 사람이라 이르신 것입니다.”
    从第七品开始,如来开始反问须菩提,以此反问令弟子们反省到自己内心执着的疑惑与障
    碍。前面两品令弟子们放下对无上正等正觉果位有所得之心,放下对佛说法执着之心。在这一品
    接着反问须菩提,从初果到四果阿罗汉,有果位可得吗?须菩提一一回答,都无果位可得。每一
    个果位成就只不过是破除、放下了一些执着的境界,起个假名叫须陀洹、斯陀含、阿那含、阿罗
    汉。相信当佛说完这一品时,那些证得初果到四果的弟子们,有的即可放下有所成就之心,马上
    安住在自性本无染着、本无生灭、不来不去、本无动摇、本无清净烦恼,毕竟空的境界中。
    제7품부터 여래께서는 수보리에게 반문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반문을 통해 제자들로 하
    여금 자신들이 마음속으로 집착하는 의혹과 장애에 대해 반성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앞의
    두 품에서는 제자들이 무상정등정각 과위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부처님의 설법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이 품에서는 수보리에게 초과에서 사과 아라한에 이
    르기까지 얻을 수 있는 과위가 있느냐고 연속 반문하시자 수보리가 일일이 대답했습니다.
    “그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과위는 없습니다. 매 하나하나의 과위 성취는 다만 일부 집착하
    는 경계를 깨뜨리고 내려놓는 것이므로 이것을 사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이라는 가명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품을 다 말씀하셨을 때, 초과에서 사과까지 증득한 제자 중 어떤 이들은
    곧바로 성취한 바가 있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곧 본래 물듦이 없고, 본래 생멸이 없으며, 오
    고 감도 없고, 본래 동요가 없으며,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없는 필경공(畢竟空)의 경계인 자
    성에 안주했을 것입니다.
    另外,在这品中有四个名词解释一下,即:须陀洹、斯陀含、阿那含、阿罗汉,是佛弟子从
    初果到四果的梵文音译叫法,这是在佛弟子中,根据修禅定、证量、境界划分的四个等级。最后
    的阿罗汉称人中最为第一,可以在人间安住在无色界天人的生命状态中入定很久,长久地逃避轮
    回。但四个果位都是回归空性路上的风景和化城,还未彻底解脱,证入空性。
    아울러 이 품에 나오는 네 명사를 해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즉 사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
    한은 불제자들이 성취한 초과에서 사과까지의 산스크리트어 음역 명칭입니다. 이것은 불제
  • 44 –
    자들 사이에서 선정 수행과 증량(證量), 경계를 기준으로 하여 나눈 네 등급입니다. 마지막
    아라한을 사람 중 으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무색계 천인의 생명 상태에 오랫
    동안 입정하여 긴 세월 동안 윤회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 과위 모두 공성으
    로 회귀하는 길 위의 풍경과 화성(化城)일뿐 아직 완전한 해탈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공성으
    로 증입한 것은 아닙니다. 제10품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因为佛在《金刚经》中的开示几乎是连贯的、一气呵成,层层递进、层层清扫,破除弟子们
    的迷惑与执着,扫去了他们求道、成道路上的障碍。现在我们把佛的开示分段落来学,只是方便
    讲说、记忆,但在大家理解时,每学一品都应知道佛在前面大概讲了什么。现在我们来回顾一
    下,佛这次的开示缘于须菩提的问题,即刚发心求取佛果的人该怎样安心?怎样降伏内心的烦恼
    和障碍?佛通过开示不仅告诉弟子们怎样修证,而且在层层剖开所有烦恼以及心不安的原因。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은 일이관지로 단숨에 이루어져 층층이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층층이 청소하여 제자들의 미혹과 집착을 깨뜨림으로써 그들이 도를 구하고 도를 이루는 길
    위의 장애물을 제거해주십니다.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락으로 나누어 배우는 것
    은, 강의와 기억의 편의를 위해서일 뿐, 여러분이 이해할 때는 매 품을 배울 때 부처님께서
    佛告须菩提:“于意云何?如来昔在燃灯佛所,于法有所得不?”“不也,世尊!如来在燃
    灯佛所,于法实无所得。”“须菩提!于意云何?菩萨庄严佛土不?”“不也,世尊!何以故?庄
    严佛土者,即非庄严,是名庄严。”“是故须菩提!诸菩萨摩诃萨应如是生清净心,不应住色生
    心,不应住声香味触法生心,应无所住而生其心。须菩提!譬如有人,身如须弥山王,于意云
    何?是身为大不?”须菩提言:“甚大,世尊!何以故?佛说非身,是名大身。”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는
    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실로 아무런 법도 얻은 것
    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장엄하게 하는 것이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장엄하게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한
    다. 응당 색에 머물러 그 마음을 내지 말고, 또한 마땅히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그 마
    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응당 머무는 데가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수보리여! 비유컨
    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 하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이 크다고 하지 않
    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몸은 몸이 아니므로 비
    로소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45 –
    앞서 대략 무엇을 설하셨는지 그 맥락은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다시 한번 복습해 봅시다. 부처님의 이번 설법은 수보리의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
    다. 즉 불과를 구하고자 이제 막 발심한 초심자는 어떻게 해야 안심할 수 있는지, 어떻게
    내심의 번뇌와 장애를 항복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통해 제
    자들에게 어떻게 수행 증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번뇌와 마음이 불
    안한 원인을 겹겹이 파헤치고 계십니다.
    第一、二品中,是经文说法的缘起、时间和地点。第三、四、五品中,佛谈到了弟子们修证
    要不着相发愿,不住相布施一切,不应执着身相见性。然后在第六、第七、第八、第九品中,佛
    接着破除了弟子们对佛果、佛法、四果阿罗汉等相的执着和错误认知,令弟子们知道终无法可
    得,回归佛性只需放下分别、执着。佛的开示只是指航的灯或交流的方便,你听完佛说法,照着
    做就行了,不用执着所有名相。
    제1, 2품은 경문을 설법한 연기와 시간, 장소에 관한 것입니다. 제3, 4, 5품에서는 제자들
    이 수행 증득할 때 상에 집착하지 않고 서원을 세우고 상에 머물지 않고 모든 것을 보시하
    며 몸의 형상에 집착하여 자성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제6, 7, 8, 9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의 불과·불법·사과 아라한 등의 상에 대한 집착과
    그릇된 인지를 제거하여, 제자들이 결국 얻을 법이 없기에 불성으로 회귀하자면 오직 분별
    과 집착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다만 항로를
    지시하는 등대와 같거나 교류의 방편에 지나지 않으므로 설법을 듣고 나서 그대로 행하면
    될 뿐 모든 이름 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那佛在第十品,又开始破弟子们对哪一种相的执着呢?下面我们来接着听闻。佛陀仍反问须
    菩提:“你认为如何,如来过去在燃灯佛那里,曾得到过什么法吗?”须菩提回答说 :“世尊,我认
    为您在燃灯佛那里没有得到什么法。”在这一句中,佛是告诉弟子们:现在不是我释迦牟尼佛是如
    此来教授你们的,曾经我在我的老师燃灯佛处,于法也无所得,只是在那儿放下了我所有的执着
    和分别。这句话也同时呼应了前面佛说的:“一切贤圣,皆以无为法而有差别。”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제10품에서 제자들의 또 어떤 상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시작하
    셨을까요? 계속해서 들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여전히 반문하셨습니다. “그대 보기에는 어떠한가? 여래께서 옛날에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어떤 법을 얻은 적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생각하기에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그 어떤 법을 얻은 적
    이 없으십니다.”
    이 구절을 빌어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나 석가모니불이 이렇게 너희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과거 나의 스승님이신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도 내가 얻은 법이 없이 오직 거기서 나의 모든 집착과 분별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이 말씀은 또한 앞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 성현은 모두 무위의 법으로써 차이가
    있다.”라는 말과 호응합니다.
  • 46 –
    佛接着问须菩提:“须菩提,你认为如何,菩萨真的修一切善行来庄严佛土吗?”在此,庄严
    佛土可以有几种理解:第一:造寺、建塔、写经、布施、供养、广做善行,这些也叫庄严佛土;
    第二:自净其意。修证佛法,收摄内心不放逸、内心安住在佛的正知见中行菩萨道,也叫庄严自
    心佛土。比如大家在前面刚学过《法华经》,在《法华经》中,常不轻菩萨见所有人都恭敬施
    礼,普敬一切大众,庄严一切所见,这都叫庄严自心佛土。但在佛的般若智慧中,众生应离一切
    相,来看庄严佛土的善行与功德,这样才能尽快契入空性。万法的本性是如来,如来本不生不
    灭、不垢不净,一切圆满具足,何用庄严!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수보리에게 물으십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진짜로 모든 선행을 수행해서 불국토를 장엄하
    게 하는가?”
    여기에서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찰 짓기, 탑 세우기, 사경, 보시 그리고 공양 등 널리 선행을 베푸는 것이 불국토를 장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생각을 스스로 정화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수행 증득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방일하지 않고, 마음을 부처님의 정지견에 안주시키면서 보살도를 행하는
    것도 자기 마음의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앞에서 방금 배운
    법화경에서, 상불경보살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공경하게 예를 올리고, 일체 대중을 널
    리 공경하며, 보이는 모든 것을 장엄하게 하는 일, 이런 것들은 모두 자기 마음의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반야 지혜로 보면, 중생은 응당 일체 상을 떠나서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
    는 선행과 공덕을 보아야만 비로소 최대한 빨리 공성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법의 본성
    은 여래로서, 여래는 본래부터 생멸이 없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모든 것이 원만히
    갖추어져 있으니 무엇을 더 장엄하게 하겠습니까!
    故佛问须菩提:“菩萨真的在庄严佛土吗?”须菩提答:“不是这样,世尊。菩萨虽广修善行法
    门,庄严佛土,但安住在自性真空,无所行、无所得的角度,不执着庄严佛土这件事。只是随顺
    世俗的假名,叫庄严佛土罢了。”佛陀说:“须菩提,正因为这个道理,所以所有的大菩萨应当在
    一切行为中,应当这样生清净心:不应住色、声、香、味、触、法生心,应无所住生其心。”在
    此,佛陀说:“我们应无所住生其心。”那什么是“有所住生心”呢?众生心中有“我”,名六根;对
    境,名六尘;触境生起种种妄念、杂念,然后在这种妄想中烦恼、痛苦、生灭流转,这种妄想心
    即为有所住。菩萨应安住本心,如如不动、不取于相、不被境转,心常清净,明了心本空明寂
    静,随缘即应,过去不留,即为无所住生其心。佛陀接着说:“须菩提,比如说,有人的身体威武
    广大,像须弥山那样。你认为如何呢,这样的身体大不大?”须菩提回答:“真的很大,世尊。为
    什么呢?佛说的这个像须弥山那样大的身体并非实有,是由无数善行功德聚合而成,只是随顺世
    俗的说法,假名称他为大身。”
    그러한 연고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물으십니다. “보살은 진정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비록 선행 법문을 널리 닦아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
  • 47 –
    나 자성진공에 안주하여 행하는 바도 없고 얻는 바도 없다는 관점에서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이 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속의 가명에 따라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고 부
    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바로 이런 이치 때문에 모든 대보살은 일체 행위에서 응당 이런 청정한 마음
    을 내어야 한다. 즉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무는 데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응당 머무는 데가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머무는 데가 있어 마음을 낸다[有所住生心]”는 무엇일까요? 중생의
    마음에는 ‘나’란 존재가 있어 이름을 육근이라 하고 그 경계에 대해서는 육진이라 이름하는
    데 경계에 닿게 되면 온갖 망념과 잡념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망상 속에서 번뇌와 고통이
    생멸하면서 떠돌아다니는데 이런 망상심이 바로 머무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보살은 응당
    본심에 안주하여 여여부동하고, 상을 취하지 않고,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며, 마음은 늘 청정
    하여 마음이 본래 텅 비고 밝으며 고요함을 명료히 알고, 인연에 따라 대응하되 지나간 것
    은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니, 이것이 바로 ‘머무는 데 없이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몸은 위엄이 있고 거대해서 마치 수미산 같다면 그대
    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몸은 크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정말로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수미산만큼 크다는
    몸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선행과 공덕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다만 세
    속의 논조에 따라 가명으로 큰 몸이라고 칭할 뿐입니다.”
    在此,佛作了一个大身的比喻。因为菩萨在行菩萨道,功德圆满时就会在此世界示现出圆满
    的身相,如三十二相八十随形好,或者在定境中有像须弥山一样巨大的身体(须弥山在佛教中被
    认为是娑婆世界最高最大的山)。佛用这个功德圆满的身相来比喻,问须菩提这个身体大不大?
    须菩提说很大,世尊。但即是这样大的身体,在本质上也只是无数善行、福德聚合而成,随顺世
    俗起名大身,本质上是虚妄的。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큰 몸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보살이 보살도를 행하여 공덕이 원만해
    지면 이 세상에서 32상 80종호와 같은 원만한 몸의 모습을 시현하거나 혹은 선정의 경계에
    서 수미산처럼 거대한 몸을 갖게 됩니다(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사바세계에서 가장 높고 가장
    큰 산으로 여김). 부처님께서는 이런 공덕이 원만한 몸의 형상을 비유를 들어 수보리에게
    이 몸이 크지 않냐고 물으시자 수보리가 답했습니다. “정말 큽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이렇게 큰 몸이라 할지라도, 본질에서는 무수한 선행과
    복덕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기에 세속을 따라서 큰 몸이라 이름 붙였을 뿐 본질에서는 허망
    한 것입니다.”
    제11품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제12품 존중정교분(尊重正教分)
  • 48 –
    这两品的原文大意是佛陀问须菩提:“须菩提,假如恒河中所有的沙,每一粒沙又代表一条恒
    河,又有这么多条恒河,其中的沙是不是很多呢?”须菩提说:“太多了,世尊。您这样说,光恒
    河就多得不计其数,更何况河中的沙粒。”佛陀又说:“须菩提,假如有善男子、善女人拿像这些
    沙粒一样多的,能充满三千大千世界的七宝来做布施,他所得的福德多不多呢?”须菩提说:“很
    多,世尊。” 佛说:“我现在真实不虚地告诉你,如果有善男子、善女人能对此经信受奉行,甚至
    只是受持此经典的四句偈颂,向他人解说,他的福德就已经超过了前面的那个人。”
    이 두 품 원문의 대략적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십니다. “수보리여, 항하에 있는 모든 모래알 하나하나가 각각 하나의 항하를 나타내고, 그렇게 많
    은 항하가 있다면 그 속의 모래가 참으로 많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须菩提!如恒河中所有沙数,如是沙等恒河,于意云何?是诸恒河沙宁为多不?”须菩提
    言:“甚多,世尊!但诸恒河尚多无数,何况其沙。”“须菩提!我今实言告汝:若有善男子、 善女人,以七宝满尔所恒河沙数三千大千世界,以用布施,得福多不?”须菩提言:“甚多,世
    尊!”佛告须菩提:“若善男子、善女人,于此经中,乃至受持四句偈等,为他人说,而此福德
    胜前福德。” “수보리여! 항하에 있는 모든 모래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항하가 있다면 그대 생각
    은 어떠한가? 이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진정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항하들만 하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여! 내 이제 진실로 그대에게 이른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로 저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고 하면, 얻는 복이 많지 않겠
    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
    다면, 이 복덕이 저 복덕보다 더 클 것이다.”
    “复次,须菩提!随说是经,乃至四句偈等,当知此处,一切世间、天、人、阿修罗,皆应供
    养,如佛塔庙,何况有人尽能受持读诵。须菩提!当知是人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若是经典
    所在之处,即为有佛,若尊重弟子。”
    “또한 수보리여! 그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곳은 모든 세간의 천인·인간·아수라가 모두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와
    같은 곳이 된다는 것을. 하물며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 전체를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
    고 있음이랴. 수보리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가장 높고, 가장 희유한 법을 성
    취하게 되리라는 것을. 이 경전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과 존경받는 제자들이 계시는 곳
    이 된다.”
  • 49 –
    수보리가 말합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대로라면 항하의 수만 하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데, 하물며 그 강 속의 모래알 수량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그 모래알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칠보로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이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답합니다.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진실하게 그대에게 알려주도록 하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믿고 받아들여
    행하거나 혹은 그냥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설해
    준다면 그의 복덕은 앞서 말한 사람의 복덕을 이미 넘어섰다.”
    在此,我们解释一下什么叫“受持”。听懂了佛说的道理并照着做,不着相了,这叫“受”;而且
    能时时保任住这种不着相的境界叫“持”。所以,“受持”是听懂了去做,而且要坚持不断。因为佛经
    是从梵文译过来的,在梵文中常用偈颂来表达佛说法的观点。比如,我们前边学过的《法华
    经》,经中有一品“常不轻菩萨品”中,常不轻菩萨最后涅槃时,突然在空中听到威音王如来在空
    中说《法华经》的二十千万亿偈颂,以此我们来推测如来常用偈颂来说法。现在我们读的《金刚
    经》是汉文版,所以同修们很难在《金刚经》中找到确切的四句话就是佛说的四句偈。虽然在佛
    教史上关于四句偈究竟指什么存有争议,我个人认为:把这四句偈就理解为《金刚经》般若智慧
    中,佛表达的一个观点好了。比如“无所住生其心”或“不住相布施”等
    여기에서, ‘받아 지니다’ 즉 ‘수지(受持)’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
    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여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을 ‘수(受)’
    라고 하고,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경계를 늘 유지하는 것을 ‘지(持)’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받
    아 지니다’는 알아듣고 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끊임없이 지속시킴을 뜻합니다. 불경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해 온 것인데, 산스크리트어 경전에서는 흔히 게송을 이용
    하여 부처님께서 설법한 관점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앞서 배운 법화경의 「상불
    경보살품」을 보면, 상불경보살이 마지막에 열반에 들 때 갑자기 허공에서 위음왕여래가 설
    한 법화경의 20천만억 게송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여래께서 흔히 게
    송을 이용하여 설법하셨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금강경은 한문본이기에 도반들이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사구게가 정확히 어떤 네 구절인지 찾기는 어렵습니다. 불교사적으로 사구게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사구게는 금
    강경의 반야 지혜를 표현하신 부처님의 하나의 관점, 예를 들어 ‘머무는 데가 없이 마음을
    내다’ 혹은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 등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佛接着说:“再者,须菩提。如果有人向别人讲说这部经,乃至于只讲说其中的四句偈颂。应
    当知道,讲经之处一切众生,包括天人、人、阿修罗都应供养,就如同供养佛的塔庙。如果身体
    力行,读诵修行。须菩提,你应当知道这个人成就了世界上最高、最希有珍贵的法。如果这部经
    典所在之处,就有佛在那里,应当像弟子那样尊重此处。”
  • 50 –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수보리여, 만약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이 경을 설하되 설령 사구게 하나
    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경을 설하는 그곳은 천인·사람·아수라를 포함한 일체중
    생이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와 같은 곳이 될 것을. 하물며 몸소 실천하여 힘이 닿
    는 대로 독송하고 수행함에 있어서랴. 수보리여,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세
    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희유하면서도 진귀한 법을 성취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이 경전이
    있는 데가 곧 부처님께서 계시는 곳이며 존중받는 제자들이 계시는 곳이기에 존중해야 한
    다..”
    在许多经典中,大家都看到佛说:“如有人受持读诵,为他人讲说经典,会有很大的功德、福
    报。”有的朋友就说,也没看到讲经的人在此世上得到多大的福德。这一方面要看讲经之人是否只
    是人云亦云、照本宣读,有没有真的理解了佛说的话而照着去做。只有自己行持,并为他人解
    说,功德、福报才能很快地降临。还有另一层面,即你认为的福德之报是什么?众生心中有种种
    欲望,认为在此世界获得名利,满足自己一切欲望才是福德之报的呈现。但种种欲望的满足真的
    是快乐之源吗?你需要你的福德全呈现于此吗?而真正领悟《金刚经》的人,会离身心内外一切
    相,如如不动,不被境转,不被万法捆绑。如果不断行持,一切烦恼可尽,生死轮回可了,最终
    成佛。所得到的境界、功德,世俗众生根本无法想象。世俗短暂的有漏鸿福根本无法与此相提并
    论,只是些吃喝玩乐的游戏。故佛说:“领悟般若智慧是最大的福德”。在《法华经》中,小龙女
    为此智慧舍去价值三千大千世界的宝珠,如弃草芥。
    여러분은 많은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만약 누군가가 경전을 받아 지녀 독송하며, 다른 사
    람을 위해 강설한다면 아주 큰 공덕과 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왔습니
    다. 어떤 친구는 경을 설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주 큰 복덕을 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논점에 대해서는, 경전을 설하는 사람이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거
    나 경전에 쓰여있는 대로 읽기만 하였는지, 아니면 부처님께서 강설한 말씀을 진정으로 이
    해하고 그대로 행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직 스스로 꾸준히 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설해야만 공덕과 복이 비로소 신속하게 임할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측면에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복덕의 과보란 무엇입니까? 중생 마음에는 온갖
    욕망이 있어 이 세상에서 명예와 이익을 얻고, 자신의 모든 욕망을 채우는 것이 복덕의 과
    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온갖 욕망의 충족이 진정한 행복의 원천일까요? 여러분의 복덕은
    모두 그런 형태로 나타나야 합니까?
    금강경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심신 안팎의 모든 상을 떠나 여여부동하여 경계에 휘
    둘리지 않으며 만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만약 끊임없이 정진하고 실천한다면, 일체의 번
    뇌는 다하고, 생사윤회는 마무리되어 끝내는 성불할 것입니다. 이때 얻게 되는 경계와 공덕
    은 속세의 중생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속세에서 짧고 번뇌가 있는 큰 복은 이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이 짧고도 큰 복은 단지 먹고 마시고 노는 유희에 불과할 뿐입니다. 
    법화경을 보면, 어린 용녀는 이 지혜를 위해 삼천대천세계의 값어치가 있는 보주를 기꺼이
    보시합니다.
  • 51 –
    佛在第十二品中还说,如有人在讲说这部经,讲经之处,一切天人、人、阿修罗都应供养,
    如同供养佛的塔庙。经典所在之处即为有佛,应像弟子那样尊重。那么,我们该怎么做呢?有的
    人会拿一本白纸黑字印刷出来的书,放在桌案上每天礼拜,像拜佛那样。其实这样做也未尝不
    可,也许你可以通过这份虔诚心、恭敬心,领悟佛的般若智慧。有些在此世界做世俗学问的人认
    为这样做完全是迷信,你怎么可以拜佛像叩头、拜一本经领悟真理呢?这也是他们真的不懂佛在
    说什么。
    부처님께서 제12품에서 또 말씀하시길, 누군가 이 경전을 설한다면, 설하는 그곳은 모든
    천인·인간·아수라가 모두 기꺼이 공양하는, 부처님의 탑묘와 같은 곳이 될 것이며, 경전이
    있는 곳에 바로 부처님께서 계시고 존중받는 제자들이 같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
    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인쇄된 책을 책상에 놓고는 매일 부처님께 절하듯이
    예배합니다. 사실 이렇게 절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쩌면 그 경건
    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깨달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학문을 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완전히 미신이라고 여깁니다. 즉 어
    떻게 불상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경전에 절한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고 말입
    니다. 이 또한 그들이 진정 부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佛所有的经典都在讲“放下”,舍离所有的相与执着。大道至简,当你放下、舍离了执着后,
    自然就能契入宇宙实相,也即听懂了佛在说什么。所以,佛的智慧大部分人不是靠听闻、学习获
    得,而是靠信受奉行,“放下”获得。如果有的人在叩拜中放下了我慢,放下了贪、瞋、痴、慢、
    疑,内心变得柔软、平和、宽容,内心不再为这个世界的一点点小事而纠结。在此世界,他放下
    的越多,他越有机会契入佛说的实相,也越有机会明白《金刚经》。但是,如果你只是做了一个
    礼拜的动作,贪、瞋、痴、慢、疑更严重了,内心从来什么也没有放下,那这连迷信也算不上。
    当然,这只是对实在看不懂佛经的人设立的一个小法门。佛说的所有经典只有一个目的,是让你
    听懂而后马上去做。所以佛说法不断地比喻,层层地剖析。他本意并不是让你把他的话印刷成小
    册子,对着它礼拜的,或者只是像读顺口溜一样地读诵。
    부처님의 모든 경전은 ‘내려놓음’을, 모든 상과 집착 따위의 버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큰 진리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대가 내려놓고 집착을 버리면 자연히 우주의 실상으
    로 들어가게 되어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혜는 대부분 듣
    고 공부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신수봉행하여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것입니
    다.
    만약 누군가가 절을 하면서 아만심(我慢心)을 내려놓는 동시에 탐·진·치·만·의를 내려놓아
    마음이 부드럽고 평화롭고 너그러워지며 더는 이 세상의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
    다면, 이 세상에서 그가 내려놓는 것이 많을수록 그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에 들어갈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되어 금강경을 알아갈 기회도 더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
    가 절하는 동작만 할 뿐 탐·진·치·만·의가 더욱 심해져서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미신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만 불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세운 작은 방편일 뿐입니다.
  • 52 –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경전의 목적은 단 하나, 즉 여러분이 이를 알아듣고 즉시 실천하
    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실 때 끊임없이 비유를 들면서 층층이
    분석해나가셨습니다. 그분의 본뜻은 여러분이 그분의 말씀을 작은 책자로 인쇄해 놓고 그
    책에 절을 하거나 혹은 뜻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독송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佛在每一次法会上说法的当下,在大众中都有持戒精严的弟子、心地清净的居士,闻法当下
    破掉执着,瞬间开悟。有的弟子甚至当场即闻,即开悟,即证果。还有弟子心性没有打扫干净,
    没有准备好,事后按佛的见地信受奉行,落实在日常的每一个起心动念、吃喝拉撒睡中,这样很
    快也能契入大菩萨的境界。我们也应当将佛说的话努力地去理解,然后去落实在日常的行为中,
    这是对经典真正的供养,真正的恭敬。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당시 법회에는, 대중 중 계율을 엄정하게 지키는 제자들과 마음이
    청정한 거사들이 있어, 법을 듣는 즉시 집착을 깨뜨리고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지어 그 자리에서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어 과위를 증득하기도 했습니다. 심성을 여
    태 깨끗하게 청소하지 못해 준비가 덜 된 제자라도 법회가 끝난 후에 부처님의 견지를 믿고
    받들어 행하여 일상의 모든 생각과 행주좌와에서 적용함으로써 아주 빨리 대보살의 경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을 힘써 이해한 후, 그것을 일상적
    인 행위에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이 경전에 대한 진정한 공양이고 진정한 공경입니다.
    佛还说,如有人能受持、读诵,按《金刚经》中所说的去修行,大家应当知道,这个人获得
    并成就了世上最高、最希有的法。读到这句话,我们想一想,现在造个核潜艇、原子弹等都是国
    家机密,普通人都无法知晓和获得制造的途径,即使你看不懂,也不会让你看。而佛毫不吝啬,
    将这个世界上最高、最希有的法就摆在众生面前,我们应当珍惜。
    부처님께서는 또, 만약 누군가가 받들고 지니고 독송하며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수행한
    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희유한 법을 획득하고 성취하였음을 응당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 같이 생각해봅시다. 비근한 예로, 핵잠수
    함이나 원자탄 등을 만드는 기술은 국가 기밀이라 일반인은 알 수도, 획득할 수도 없습니
    다. 설령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희유한 법을 중생에게 아낌없이 보여주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13품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尔 时, 须 菩 提 白 佛 言:“ 世 尊! 当 何 名 此 经, 我等云何奉持?”佛告须菩
    提:“是经名为《金刚般若波罗蜜》,以是名字,汝当奉持。所以者何?须菩提!佛说般若波罗
    蜜,即非般若波罗蜜,是名般若波罗蜜。须菩提!于意云何?如来有所说法不?”须菩提白佛
    言:“世尊!如来无所说。”“须菩提!于意云何?三千大千世界所有微尘是为多不?”须菩提
    言:“甚多,世尊!”“须菩提!诸微尘,如来说非微尘,是名微尘。如来说:世界,非世界,
  • 53 –
    这一品的大意是须菩提问佛陀说:“世尊,应当如何称呼这部经?我们应当如何奉受持行
    呢?”佛陀讲法到这里,须菩提认为前面的内容应该有个总结性的名称,方便大家记忆、理解、传
    诵,便问佛陀应该起一个什么样的名字可以涵盖前面内容所表达的一切?佛说:“这本经可以起名
    叫《金刚般若波罗蜜》,你们可以根据这一名称所表达的意义去信受奉行。”佛在此将他前面所开
    示的道理用金刚来做比喻,金刚是地球上最坚硬的矿物质,可用以摧毁、切割其他物质而自己不
    受损伤。佛用来比喻他开示的道理像金刚一样,无坚不摧,能摧毁你的烦恼、不正见,令你从轮
    回的此岸到解脱的彼岸。但佛马上接着说,并非真有这样一个智慧存在。原文是:“须菩提,你认
    为如来有所说法吗?”须菩提说:“世尊,如来无所说。”
    이 품의 대략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가 어떻게 이 경을 받들어 지녀
    야 합니까?”
    부처님의 설법이 여기까지 이르자, 수보리는 앞선 내용을 갈무리할 수 있는 명칭이 있어
    是名世界。须菩提!于意云何?可以三十二相见如来不?”“不也,世尊!不可以三十二相得见
    如来,何以故?如来说:三十二相,即是非相,是名三十二相。”“须菩提!若有善男子、善女
    人,以恒河沙等身命布施;若复有人,于此经中,乃至受持四句偈等,为他人说,其福甚
    多。”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
    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해라. 이 이름으로 그대는 마땅히 받들어 지
    녀야 한다. 그것은 수보리여!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
    소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지 않은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그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비로소 이름
    하여 티끌이라 하는 것이다. 여래는 세계가 곧 세계가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세계라
    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
    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삼십이상이 곧 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삼십이상이라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목숨을 보시했다고 하더라도,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이 복
    이 저 복보다 더 많을 것이다.”
  • 54 –
    야 대중이 기억하고 이해하며 전하는데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앞의 내용을 포괄할
    수 있는 이름을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전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해라. 이 이름이 표현하는 뜻에 따라서 믿
    고 받들어 행하라.”
    부처님께서는 앞서 설하신 이치를 금강석에 비유하셨습니다. 금강석은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질로서, 다른 물질은 파괴하거나 절단할 수 있되 그 자체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당신께서 설법하신 도리는 마치 금강석처럼 단단하므로 아무
    리 견고한 그 무엇이라도 모두 부술 수 있어, 그대의 번뇌와 삿된 견지를 깨뜨려 윤회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할 수 있다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
    서는 즉시 이어서 진정으로 그러한 지혜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은 아
    래와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는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在经典中,有很多提问都是一次次在反复,这显示着佛的慈悲,同时也是佛对弟子们的理
    解。在对佛法无相之理的领悟上,在未完全彻悟之前,很多人都是听懂一些道理后觉得自己似乎
    已经大梦初醒,但遇到另一个问题时,却又执着、迷失进去了。所以,佛力求在他提到的每一个
    概念、名相上,在他每次对一切的肯定中都提示弟子不要心外求法。比如,此处的“如来有所说法
    吗?”,这是怕弟子们着法相,第二次问须菩提同样的问题。第一次在第七品,如来在说完众生受
    持这部经,功德很大、不可思议后,说一切诸佛皆从此经出。如来怕弟子们执着佛说的法,认为
    有所得,而不去反观自己,如如不动,安住在空性的见地上,所以问须菩提“如来有所说法耶”?
    须菩提第一次的回答是:“无有定法如来可说”,这一次须菩提的回答是:“如来无所说”。须菩提的
    这两个回答也可以以两个角度来理解,“无有定法可说”是在有的层面上答,指并无一个固定的法
    叫佛法。只要能破众生执着,令众生从迷梦中醒来,从轮回中解脱的法都是佛法。如来随机施
    教,也无定法可讲。
    경전에서는 많은 질문이 거듭 반복되는데, 이는 부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동시에 제자들
    에 대한 부처님의 이해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불법의 무상(無相), 그 이치에 대한 깨달음은
    있으나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이 도리를 좀 알아듣고는 큰 꿈에서 깨
    어난 것 같다가도, 다른 문제에 맞닥뜨리면 다시 집착하고 길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부처
    님께서 언급하시는 모든 개념과 명칭, 그리고 긍정하시는 모든 것에서 제자들이 마음 밖에
    서 법을 구하지 않도록 힘써 일깨우십니다. 예를 들어, 이곳의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제자들이 법상에 집착할까 염
    려하여 두 번째로 수보리에게 묻는 같은 질문입니다. 첫 번째는 제7품에서 여래께서 중생이
    이 경전을 받아들여 지니면 공덕이 아주 커서 불가사의하다고 하신 뒤 “모든 부처님은 모두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여래께서는 제자들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에
    집착하여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고, 자신을 돌이켜보지 않은 채 공성의 견지에 여여부동하
    게 안주할까 봐 염려하여 수보리에게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수보
    리가 처음에는 “여래께서 설하실만한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번에는 “여래
  • 55 –
    께서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수보리의 이 두 대답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래께서 설하실만한 정
    해진 법이 없다”는 있음의 측면에서 대답한 것으로, 불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정된 법이
    없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중생의 집착을 깨뜨려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 윤회에서 해탈하게
    할 수 있는 법은 모두 불법입니다. 여래께서는 근기에 따라서 가르침을 펴시기에 가르칠 만
    한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第二次的回答是安住在如来本有的真空角度。如来的空性状态是我们每个人本来的自性,也
    是我们本来的样子。其他任何在时空中示现出来的相,都是因缘具足后假相的生生灭灭,其中并
    无一个真实的自我。佛法中把自我的这种假有比喻成就像梦一样,大家认梦为真,成为梦中主
    角,在梦中颠倒妄想,轮回生死。未觉悟者听佛说法也像在梦中与佛交流,就像是梦中你病了,
    佛开了一剂药给你,等你梦醒时就知道如来并未做什么。梦中事非真非假,梦中确实你吃过药,
    但醒来后你本来就没有病,病这件事变得虚妄不实,只是梦,那如来给药这件事也同样虚妄不
    实。故在此须菩提说“如来无所说”。如果我们不能懂得佛与须菩提是站在本性真空的角度来问
    答,就会疑惑,明明前面佛说了一大堆的道理,那么多言辞,却一再说如来无所说(此处的如来
    是指我们的无形无相的自性)。
    두 번째 대답은 여래 본래의 진공에 안주한 관점에서 답한 것입니다. 여래의 공성 상태
    는 우리 각자의 본래 자성이기도 하고 우리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공간에 나타난 각자
    다른 모든 상은 인연이 구족되어 나타난 가상의 생멸일 뿐, 그 속에는 진실한 자아가 존재
    하지 않습니다. 불법은 자아라는 이런 가짜 존재를 꿈에 비유합니다.
    사람들은 꿈을 진짜로 여겨 꿈속의 주인공이 되어 꿈속에서 전도된 망상을 하며 생사를
    윤회합니다. 깨닫지 못한 자가 불법을 듣는 것도 꿈속에서 부처님과 교류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치 꿈속에서 그대가 아프면 부처님이 약을 처방해주셨는데 꿈에서 깨고 보니
    여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꿈속의 일은 진짜도 가짜도 아
    닙니다. 꿈속에서 그대는 확실히 약을 먹은 적이 있으나 깨어나고 보니 그대는 원래 아프지
    않았기에 아팠다는 이 사실도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는 꿈이었으니, 여래가 약을 처방해준
    일 또한 허망하고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수보리는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우
    리가 부처님과 수보리가 본성진공의 관점에 서서 문답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혹
    이 생길 것입니다. ‘분명 앞에서 부처님께서 많은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왜 자꾸 여래는 설
    한 바가 없다고 하는 걸까?’하고 말입니다.
    接下来,佛接着开示弟子们。佛陀又问须菩提:“须菩提,你认为怎样呢?三千大千世界里所
    有的微尘其数目多吗?”须菩提回答说:“非常多,世尊。”佛说:“须菩提,这些微尘并无一个不变
    的真实的实体存在,如来只不过是给它们一个假名,叫它们为微尘罢了。如来说到世界,所有的
    世界也只是因缘具足而生,因缘具足而灭,并无一个真实的固定不变的世界,只是随顺世俗,假
    名称它们为世界罢了。”在佛法中常常提到微尘世界,比喻三千大千世界之多,万相之繁杂、无量
    无边。在此处,佛一直在前面讲弟子们眼前修证中易出现的执着与迷惑,比如怎样发心?怎样布
    施、忍辱?怎样看待阿罗汉的果位、菩萨的功德庄严?怎样正确看待佛法?如来有固定的形象吗
    等等。这些都是弟子们每天都必须面对的问题,在这些问题中应该持有佛的正知见,才能在修证
  • 56 –
    中越来越安心,尽快回归如来真空之境。
    이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설법하시어 또 수보리에게 물으십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이런 티끌들은 변하지 않는 진정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래는 그저 가
    명을 붙여 티끌이라 부를 뿐이다. 여래가 언급한 세계 또한 단지 인연이 갖추어지면 생겨나
    고 또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일 뿐, 진정으로 고정 불변하는 세계가 없다. 그리하여 세
    속에 순응하여 가명으로 그것들을 세계라고 부를 뿐이다.”
    불법에서 흔히 티끌 세계를 언급하여 삼천대천세계의 많음과 수만 가지 모습의 복잡함이
    무궁함을 비유합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앞에서 제자들이 눈앞의 수행 중에 빠
    지기 쉬운 집착과 미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발심하는가?”, “어떻게
    보시하고, 인욕해야 하는가?”, “아라한의 과위와 보살 공덕의 장엄함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불법을 어떻게 올바르게 볼 것인가?”, “여래는 고정된 형상이 있는가?” 등등을 말입니다. 이런 것은 제자들이 매일 직면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이런 문제에서 마땅히 부처님의 정지견
    을 가져야만 수행을 하는데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조속히 여래의 진공 경계로 돌아갈 수 있
    습니다.
    现在,佛从弟子们眼下关注的事情中,将弟子们的头脑拉向了如微尘众一样多的无量无边的
    世界,告诉弟子们,万事万物,包括整个三千大千世界的一切都是假名,在如来之境中都不过是
    心的妄念而已。妄心生起,微尘世界生起;妄心灭,微尘世界如梦。当弟子们的意识突然从眼前
    关注的事物,被佛的开示拉向无量无边的世界一切时,佛又将问题的焦点回来对准了佛三十二
    相、八十随形好的功德之身。也许这个功德之身在潜意识里是某些弟子们渴求示现的,是弟子们
    敬畏的,不敢在心中妄加揣度评论的,他的份量在有的弟子们心中比三千大千世界还重。原文
    是,佛继续问须菩提:“众生可以通过三十二相见如来吗?”须菩提说:“世尊,不能通过三十二相
    见如来。为什么?因为佛说如来有三十二种奇妙庄严的身相,也只是功德、因缘具足在时空的显
    现,并非如来实有任何相。只是随顺世俗交流的方便,称其为如来特有的三十二相。”
    이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장 관심을 두던 눈앞의 일들로부터 티끌처럼 많은 무량
    무변의 세계로 제자들의 시선을 돌려 수만 가지 일과 물건, 전반 삼천대천세계의 일체가 모
    두 가명이며 여래의 경계에서는 모두 마음의 망념 뿐임을 알려주십니다. 망심이 일어나면
    티끌 세계가 생기고, 망심이 꺼지면 티끌 세계는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의식이 갑자기 눈앞의 관심사에서 부처님의 설법에 따라 무량무변한 세계 일체
    로 확장되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문제의 초점을 여래의 32상 80종호 공덕의 몸으로
    맞추십니다. 이 공덕의 몸은 잠재의식 속에서 어떤 제자들이 갈구하는 모습이자 경외하는
    대상으로, 마음속으로 감히 추측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보다 더 큰 비중을 차
    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원문을 보면,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중생은 32상을 통해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합니다.
  • 57 –
    “세존이시여,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래의
    32가지 기묘하고 장엄한 몸의 형상 또한 공덕과 인연이 구족되어 시공간에 나타난 것일 뿐, 여래에게 실재하는 그 어떤 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속의 의사소통 방편
    을 따라 여래 특유의 32상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因为怕众生执着佛相见性,佛这也是第二次问同样的问题。第一次在第五品,佛问须菩提:
    “可以以身相见如来吗?”须菩提答:“不可以”。因为众生要从种种执着、分别中解脱,见到自性如
    来,头脑中不能将如来定义为任何相。如果认为如来有定相可见,即成佛就成为从一个相变成另
    一个相,这样我们是永远不能回归真空,也不能真正了解如来的境界。所以,对已经执着有的众
    生,如来讲“无相”,让你放下对身相的认真与执着。
    중생이 부처의 상에 집착하는 방식을 통해 견성(見性)하려고 할까 봐 그것이 걱정되어, 부처님께서는 두 번째로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첫 번째는 제5품에서 “몸의 형상으로 여래
    를 볼 수 있는가?”고 물으셨고, 수보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중생이 온갖 집착과 분별에서 해탈하여 자성여래를 보려면 머릿속에서 여래를 그 어떤 형
    상으로도 정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래에게 볼 수 있는 정해진 상이 있다고
    여긴다면, 성불은 하나의 상에서 다른 상으로 변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는 진공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가 없고 또한 여래의 경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있음’에 집착하는 중생에게 여래는 ‘무상(無相)’을 설하여 몸 형상에 대한
    진지함과 집착을 내려놓도록 촉구하십니다.
    上次如来说不应以身相见如来,是指众生不可以执着一个固定的色相见如来。比如说起释迦
    牟尼佛,有人头脑中会出现一个佛的图像,这没有什么问题,但如果执着如来就是那个样子就错
    了。如果这个知见不明确,那么行者在禅修中如果见到空中出现一尊佛像,也许会认为自己快成
    道了,见到了如来实相,或者在内心追求自己变成想象中的佛的样子。所以在这一品中,佛又重
    申了这个问题。那如果你不认为佛有一个像普通人一样固定的色身,那你是否又会认为佛有一个
    三十二相、八十随形好的身相呢?如果你在成道的路上想着自己要变成这样一个身相,想着如来
    是这样一个身相的话,你就永远无法回归如来真空之境了。因三十二相、八十随形好的身相也只
    是一个功德之相。诸相皆虚妄不实。三十二相、八十随形好,是一位菩萨在修道路上功德圆满
    后,在人道能显现出来的最圆满的身相。如释迦牟尼佛刚出生,身形、气脉就具备这样的特征。
    经典中还说转轮圣王也具备这样的大千世界三十二相,但没有八十随形好。但一位佛在各道时空
    中显现什么样的形象,会以众生的共业以及众生成道的需要来定。虽然三十二相、八十随形好只
    是如来化境,但功德未圆满之人很难化现这样身心圆满的形象出来。即使神通具足能变化出来,
    但佛的八十随形好的细行很难顾及周全,因为必须心性圆满才能成就。
    앞서서 여래께서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만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중생
    이 고정된 육신의 모습에 집착하여 여래를 보려고 해서는 안 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경우,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부처의 이미지가
    떠오를 텐데, 이것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래가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집착하게 되면 이는 그릇된 것입니다. 만약 상술한 바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
    에서 수행자가 선정 중 허공에서 부처의 형상을 보았다고 상정할 경우, 도를 거의 이루었다
  • 58 –
    거나 여래의 실상을 보았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상상 속의 부처님 모습으
    로 변화시켜 나가기를 추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 문제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
    처님에게 일반인과 같은 고정된 몸의 형상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32상
    80종호의 몸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여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도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
    신이 이런 몸의 형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여래가 이런 몸의 형상이라고 생각한
    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여래의 진공 경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32상 80종호의
    몸의 형상은 다만 공덕의 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은 다 허망할 뿐 실재하는 것
    은 아닙니다. 32상 80종호는 보살이 수행의 길에서 공덕이 원만해진 후, 인간 세상에서 시현할 수 있
    는 가장 원만한 몸의 형상입니다. 석가모니불이 금방 태어나셨을 때 몸의 형상과 기맥이 이
    런 특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전륜성왕도 이러한 대천세계의 32상은 갖추고 있
    으나 80종호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 부처님이 각 세계의 시공간에서 어떤 형상을 시
    현하실지는 중생의 공업(共業)과 중생 성도의 필요에 따라 정해집니다. 비록 32상 80종호
    가 여래의 화경(化境)이긴 하나 공덕이 아직 원만하지 못한 사람은 심신이 원만한 이런 형
    상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설령 신통력이 구족하여 변화해 낸다고 해도 부처님의 80종호
    와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반드시 심성이 원만해야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佛在这一品的最后说:“须菩提,假如有善男子、善女人,用像恒河沙粒那样多的身体性命来
    做布施,如果再有一个人能信受此经,并以此修行,甚至只是领悟经中的一个四句偈颂而随缘为
    他人解说,所得福德超越前者。”在所有时空中,众生最爱惜的莫过于自己的身体性命。俗话说,
    蝼蚁也爱惜生命,但修行佛法的善男子、善女人即使在无量劫,为了成道不惜布施自己的身体与
    性命,都比不上受持此经四句的福报。在此佛告诉我们,即使我们为法愿意舍去身体性命,但不
    了解佛法的无相之理,妄心妄念被境牵引、轮转不止,成道便遥遥无期。如果能在信受此经后,
    一念从诸相的迷失、诱惑中醒来,马上见性成佛,佛以此说明般若智慧对修行者的重要。
    부처님께서는 이 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알 수량과 같이 많은 몸과 목숨을 바쳐 보
    시했다고 하더라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믿고 받아들여 이를 따라 수행하고 심
    지어 단지 경전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깨달아 인연에 따라 이를 다른 사람에게 설하였다고
    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이 앞 사람의 그것을 뛰어넘을 것이다.”
    모든 시공간에서 중생이 가장 아끼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과 목숨입니다. 속담에 개미도
    제 목숨을 아낀다고 하는데, 불법을 수행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설령 무량한 겁 동안 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보시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경전의 사구게 하
    나를 받아 지니는 복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설령 우리가 법을 위해 기꺼이 몸과 목숨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불법의 무상(無相)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허망한 마음과 생각에 이끌려 끊임없이 윤회하
    여 성도는 무기한 멀어질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만약 이 경을 믿고 받들어 일념에 모
    든 상의 미혹과 유혹에서 깨어난다면 즉시 견성(見性)하여 성불할 수 있는 연고로 부처님은
    이를 통해 반야 지혜가 수행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고 계십니다.
  • 59 –
    제14품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5품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제16품 능정업장분(能淨業
    障分)
    尔时,须菩提闻说是经,深解义趣,涕泪悲泣,而白佛言:“希有,世尊!佛说如是甚深
    经典,我从昔来所得慧眼,未曾得闻如是之经。世尊!若复有人得闻是经,信心清净,即生实
    相,当知是人,成就第一希有功德。世尊!是实相者,即是非相,是故如来说名实相。世尊!
    我今得闻如是经典,信解受持不足为难,若当来世,后五百岁,其有众生,得闻是经,信解受
    持,是人即为第一希有。何以故?此人无我相、无人相、无众生相、无寿者相。所以者何?我
    相即是非相、人相、众生相、寿者相,即是非相。何以故?离一切诸相,即名诸佛。”
    佛告须菩提:“如是!如是!若复有人得闻是经,不惊、不怖、不畏,当知是人甚为希
    有。何以故?须菩提!如来说第一波罗蜜,即非第一波罗蜜,是名第一波罗蜜。须菩提!忍辱
    波罗蜜,如来说非忍辱波罗蜜,是名忍辱波罗蜜。何以故?须菩提!如我昔为歌利王割截身
    体,我于尔时,无我相、无人相、无众生相、无寿者相。何以故?我于往昔节节支解时,若有
    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应生瞋恨。须菩提!又念过去于五百世作忍辱仙人,于尔所
    世,无我相、无人相、无众生相、无寿者相。是故须菩提!菩萨应离一切相,发阿耨多罗三藐
    三菩提心,不应住色生心,不应住声香味触法生心,应生无所住心。若心有住,即为非住。是
    故佛说:‘菩萨心不应住色布施。’须菩提!菩萨为利益一切众生故,应如是布施。如来说:一
    切诸相,即是非相。又说:一切众生,即非众生。须菩提!如来是真语者、实语者、如语者、 不诳语者、不异语者。须菩提!如来所得法,此法无实无虚。须菩提,若菩萨心住于法而行布
    施,如人入闇,即无所见。若菩萨心不住法而行布施,如人有目,日光明照,见种种色。须菩
    提!当来之世,若有善男子、善女人,能于此经受持读诵,即为如来以佛智慧,悉知是人,悉
    见是人,皆得成就无量无边功德。”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참으로 희귀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같이 깊은 경전을 설하심을 제가 옛날
    부터 얻은 혜안으로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그 믿음이 청정해져 곧 실상을 깨닫는다
    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공덕을 이루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것은 곧 실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비로소 이름하여 실상이
    라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듣고서 믿어 받아 지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미래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 믿어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
    이야말로 가장 희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따라서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닌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이를 곧 이름하여 부처라 하기 때문
    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두려
  • 60 –
    워하지도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냐하면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제일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인욕바라밀이
    라 설하였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온몸이 마디마디 찢길 그때 내
    가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옛날 마디마디 찢길 적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 성
    을 내며 원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또한 내가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선인이었을 때를 생각하니, 그 세상에서
    도 나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수
    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모든 상을 떠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해야 한다. 마
    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또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아
    야 한다. 응당 머무는 데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다
    면, 그 머묾은 곧 머묾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보살이라면 그 마음이 마땅히 색에
    머묾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고 설하였다. 수보리여! 보살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한다. 여래는 설하였다, 모든 상은 곧 상이 아니라고. 여래
    는 또 설하셨다, 모든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라고.
    수보리여!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이며,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이며, 허황한 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 그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법에 머문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법에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
    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눈이 있어 햇빛이 밝게 비추면 온갖 형체를 보는 것과 같
    다.
    수보리여! 앞으로 오는 세상에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본다, 이 모든 이들이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을.”
    “须菩提!若有善男子、善女人,初日分以恒河沙等身布施,中日分复以恒河沙等身布
    施,后日分亦以恒河沙等身布施,如是无量百千万亿劫以身布施;若复有人,闻此经典,信心
    不逆,其福胜彼,何况书写、受持、读诵、为人解说。须菩提!以要言之,是经有不可思议、 不可称量、无边功德。如来为发大乘者说,为发最上乘者说。若有人能受持读诵,广为人说, 如来悉知是人,悉见是人,皆得成就不可量、不可称、无有边、不可思议功德。如是人等,即
    为荷担如来阿耨多罗三藐三菩提。何以故?须菩提!若乐小法者,着我见、人见、众生见、寿
    者见,即于此经,不能听受读诵、为人解说。须菩提!在在处处,若有此经,一切世间、天、 人、阿修罗,所应供养;当知此处即为是塔,皆应恭敬,作礼围绕,以诸华香而散其处。”
    “수보리여!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나절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보시하고, 점심나절에 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보시하며, 저녁나절에 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 겁 동안 몸을 보시한다고
  • 61 –
    这三品的大意是,当时须菩提听佛说到这里,终于深切地领会了佛说的道理,不禁喜极而
    泣,对佛陀说:“世上希有的世尊,您说出这样深奥的经典,我从过去一直苦苦修行,纵能有辨识
    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생겨 거스르지 않는다면, 이 복이 저 보시한 복보다 뛰어나다.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
    른 사람을 위해 설해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수보리여! 요약해서 말하면, 이 경에는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끝없
    는 공덕이 있다. 여래는 대승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하여 설하며, 가장 높은 마음을 낸 이
    를 위하여 설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다
    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본다, 이러한 사람 모두가 헤아
    릴 수 없고 잴 수 없으며 가없는 불가사의한 공덕을 이루리라는 것을. 이와 같은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소승을 좋아하는 이들
    은 아견·인견· 중생견·수자견에 집착하기에 곧 이 경을 듣지도 못하고 읽고 외우지도 못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어디에나 만약 이 경이 있다면 일체 세상의 천인·인간·아수라가 마땅히 공
    양을 올려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곳이 곧 탑이므로 모두가 공경히 예배하고 주
    위를 돌면서 온갖 꽃과 향을 그곳에 흩뿌려야 한다는 것을.”
    “复次,须菩提!善男子、善女人,受持读诵此经,若为人轻贱,是人先世罪业,应堕恶
    道,以今世人轻贱故,先世罪业即为消灭,当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须菩提! 我 念 过
    去 无 量 阿 僧 祗 劫, 于 燃 灯 佛 前, 得 值八百四千万亿那由他诸佛,悉皆供养承
    事,无空过者,若复有人,于后末世,能受持读诵此经,所得功德,于我所供养诸佛功德,百
    分不及一,千万亿分、乃至算数譬喻所不能及。须菩提!若善男子、善女人,于后末世,有受
    持读诵此经,所得功德,我若具说者,或有人闻,心即狂乱,狐疑不信。须菩提!当知是经义
    不可思议,果报亦不可思议。”
    “또한 수보리여!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데 이로 인하여 다
    른 사람으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면 이 사람이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는 마땅히 악
    도에 떨어져야 하나, 현생에 다른 사람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은 까닭에 전생의 죄업이
    곧 없어지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될 것이다.
    수보리여! 내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 겁의 기나긴 세월 동안, 연
    등부처님을 뵙기 전에 이미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뵙고 모두 공양하
    고 받들어 섬겨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은 공덕에 비하면, 내가 과거세에 여러 부처님께 공양했던
    그 공덕은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만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더 나아가 숫자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여! 선남자 선여인이 미래 말법 세상에서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
    는 공덕을 내가 만약 다 설한다면, 누군가 그것을 듣고 마음이 어지러워서 의심하여 믿
    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의 뜻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
    다는 것을.”
  • 62 –
    一切真妄的慧眼,但却从未闻听过如此这样的经典。世尊,如果有人能有幸听到这部经,对此言
    说深信不疑,信心清净,即能不被生灭的诸相迷惑,宇宙万法的实相即会在他那儿显露出来。如
    果是这样,这个人就成就了世上第一希有的功德。世尊,我在此说“实相”,并非是说宇宙万法真
    有一个真实不变的相状,只是假名。众生如不被假相迷惑,把这种开悟的状态称为见到“实相”。
    世尊,我现在闻听到这部经典,深信理解并奉行,并不困难,但当未来佛说的末法时期最后五百
    年,如果有众生闻听到这部经能信解受持,此人就太难得了,人中希有啊!我为什么这么说呢?
    因为此人无我相、无人相、无众生相、无寿者相,众生执着的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都虚
    妄不实。可以这样说,离一切相即可称名为佛。”
    이 세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수보리는 부처님 말씀을 여기까지 듣
    고, 마침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깊게 깨닫고는 기쁜 나머지 흐느끼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립니다. “정말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깊고 오묘한 경전을 설하신다
    는 것은! 저는 예로부터 줄곧 수행하여 비록 모든 참된 것과 허망한 것을 분별하는 혜안을
    얻었다고는 하나, 이와 같은 경전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한 사람이 이 경을 듣고, 그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고 믿음이 청정하면
    곧 생멸하는 모든 상에 미혹되지 않아 우주 만법의 실상이 바로 그의 앞에서 드러날 것입니
    다. 만약 이러하다면 이 사람은 세상에서 첫째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입니다. 세존이
    시여, 제가 여기서 말하는 ‘실상’은 우주 만법에 진짜로 이런 변하지 않는 실재하는 상이 있
    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이 다만 가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만약 거짓된 상에 미혹
    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를 ‘실상을 보았다’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 경전을 듣고, 깊이 믿고 깨달아 이를 받들어 행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으나, 만약 먼 훗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법 시대 마지막 500
    년에,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듣고 믿고 깨달아 이를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인간
    세상에서 아주 희유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집착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은 모두 허망하여 실체가 없습니
    다. 그러기에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면 곧 이름하여 부처라 할 수 있습니다.”
    在此,须菩提由衷赞叹,在未来佛灭度后如果有人能不被自我、他人、众生、寿者的种种相
    迷惑,而对此经信受奉行,这样的人太希有难得了。确实如此,今天大部分人修学佛法,发心求
    取无上正等正觉,却无法安住在空性正见上行持,所求、所得心强烈,对自我、他人、众生计
    较、执着、取舍。虽发心向大,却行持上是乐小法者,只希望片刻的清净满足,或求世间福利、
    长生不老、种种神变等等。如果有人能知一切法无生,谈不上去灭、去否定,故能在相而离相,
    即称为佛。佛肯定地告诉须菩提:“就是这样。如果还有人在闻听到这样的言辞后,不惊讶、不恐
    怖,不觉得高深难懂,这样的人非常难得希有。须菩提,如来说这是最好的,能破除一切执着,
    令众生从轮回的此岸到解脱彼岸的法门。当然也并非实有这样一个最好的法,只是交流的方便,
    这样称呼罢了。”
    여기서, 수보리는 미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만약 누군가가 자아·타인·중생·수자의
    온갖 상에 미혹되지 않고, 이 경전을 믿고 지녀 받들어 행한다면 이런 사람은 너무 희유하
    여 얻기 어렵다고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오늘날 불법을 배우면서 무상
  • 63 –
    정등정각을 얻고자 발심한 대부분 사람이 공성 정견에 안주한 상태에서 불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이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 자아·타인·중생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따지거나 집착하고 취하거나 버립니다. 비록 발심은 대승을 향한다고는 하나 불도를
    닦는 일에서는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단지 일시적인 청정함에 만족하거나 세상의
    복리, 장생불로, 모든 종류의 신통한 변화 등을 추구할 뿐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일체법이
    무생(無生)이기에 없어진다거나 부정한다는 것이 논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다면 상에 머물면서도 상을 여읜 것이므로 곧 부처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약 또 한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
    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오하여 알기 어렵다고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매우 드
    물고 희유하다. 수보리여! 여래가 말하는 이것이 바로 일체의 집착을 깨뜨려 중생이 윤회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최고의 법문이다. 물론 실제로 이러한 가장 좋
    은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부를 뿐이다.”
    以上的对话首先是须菩提谈自己的感悟,他认为如果有人能闻听到佛这样说法,可以见性成
    佛。须菩提是佛的十大弟子之一,有“解空第一”的称号,是已离欲的大阿罗汉,即已不被身心内
    外的一切欲望、境界转,人空、法空的道理相信他已听闻过,但在此处,他能喜极而泣,是听到
    佛以这个角度谈空性,他从未听闻过。因为须菩提是代刚发心的善男子、善女人提问,他认为佛
    在当时这样讲解,能很深地契入闻法弟子们的心性,使他们闻法大悟。但时过境迁,今天我们闻
    听到佛这样的说法,一方面由于文字表述是古文,不易看懂,另一方面由于没有定的基础,故完
    全明白佛的开示会有困难。在此处,须菩提又一次慈悲地提到佛灭后五百岁的众生。关于这个后
    五百年的时间是指哪个时间段,在佛教史上有争议。我个人将它理解为末法时期的最后五百年,
    甚至觉得就是在说我们。也有人说它是指佛灭度后的五百年中,但不管怎样都是在佛灭度后的
    事。
    위의 대화는 우선 수보리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이야기한 것으로서, 만약 누군가가 부처
    님의 이와 같은 설법을 듣게 되면 견성하여 성불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내용입니다. 부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수보리는 “해공제일”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으며 이미 욕망을 여읜
    대 아라한입니다. 즉, 이미 심신 안팎의 일체 욕망과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며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이치를 이미 그전에 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기쁨에 겨워 흐
    느끼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러한 각도에서 공성을 논하시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
    니다. 또한, 이제 갓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을 대신하여 문제를 제기한 수보리는 부처님의 당시
    설법이 법을 경청하는 제자들의 심성을 아주 깊이 파고들어, 그들이 법을 듣고 나서 깨달음
    을 크게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오늘날 우리가 부
    처님의 이런 설법을 듣는데, 한편으로는 문자 표현이 고문(古文)이라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정의 기반이 없으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
    이 있습니다. 여기서, 수보리는 또다시 자비롭게도 부처님 열반 후, 후오백세(後五百歲) 중생을 언급합
    니다. 이 후오백세가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지는 불교 역사상 논쟁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
    로는 말법 시대의 마지막 500년이라 이해하고 있으며, 지어는 바로 우리의 이 시대를 지칭
  • 64 –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또 누군가는 그것은 부처님 열반 후 이어지는 500년의 시간대
    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모두 부처님 열반하신 후의 일입니다.
    为何须菩提这样说呢?因为在须菩提看来,佛住世时即使大家听不懂空性之理,生不起信心
    或对佛说的有疑惑,也可以马上去问佛,佛即可对机施教,令大家释疑。但在佛灭后后五百年,
    到了末法时期,佛陀离开已经很久了,众生仅仅看到这些言说章句,如果心有迷茫疑惑,他们可
    能找不到解决疑问的老师。所以,须菩提一再为末法时代的众生担心,也是一片菩萨心肠,并希
    望佛陀的教法能够永远利益众生。
    왜 수보리는 이렇게 말했을까요? 수보리가 보기에는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설령 대
    중이 공성의 이치를 알아듣지 못하여 믿음을 내지 못하고 혹은 부처님의 말씀에 의혹이 생
    기더라도, 곧 부처님께 여쭈어보면 부처님께서 질문자의 근기에 따라서 가르침을 펴 모두의
    의문을 풀어주실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 후 후오백세 말법 시대에 이르면 부처님이 떠나신 지 이미 아주 오래
    되어서 중생은 단지 이런 글귀로만 법도를 접할 수밖에 없기에, 가령 마음이 혼란스럽고 의
    혹이 생겨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줄 스승을 찾지 못할 수가 있습니
    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거듭 말법 시대의 중생을 걱정하는데 이는 보살의 자비로운 마음이
    기도 하고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영원히 유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
    니다.
    在此须菩提说:“佛灭后后五百年,如果有人信解受持本经,第一希有。”佛补充说:“还有人在
    闻听到此经后,能不惊讶、不恐怖、不觉得高深难行,这样的人非常希有。”听到这,也许在此听
    法的大家心想,现在我们很多人闻听到《金刚经》,也没见有人惊讶、恐怖,原因是没有几个人
    真的听懂,也没有人真的信受奉行,所以大家都是不惊、不怖、不畏的状态。
    여기서 수보리가 말합니다. “부처님 열반 후 후오백세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믿고 깨달아 받아 지닌다면, 제일 희유
    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덧붙이십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심오하여 실천하기
    어렵다고도 느끼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 말을 듣노라면 지금 이곳에서 법문을 경청하고 있는 여러분이 속으로 우리 많은 이들
    가운데 금강경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
    니다. 그 이유는 진정으로 알아듣는 사람도 거의 없고 또 진정으로 믿고 받아 지니는 사람
    도 거의 없어서 모두가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如果真听懂佛说,离一切相,从迷梦中醒来,就像一个人从噩梦中苏醒,会惊出一身冷汗。
    想到自己曾执着于此时空的名、利、情、欲之中,孜孜不倦地追求、较真其得失,随名、利、情
    展现自我,寻求自我的价值,孜孜不倦地追求名、利、情的成功。用人类三维角度的眼、耳、
    鼻、舌、身、意狭隘地认知、观看这个世界,却渴求生命的永恒与圆满。自己在这个世界种种无
    法确立、无法看清楚的色相中流连忘返,辗转投胎,因贪、瞋、痴、慢、疑,甚至造下三恶道的
  • 65 –
    业,所做的这一切,只是因为没有佛圆满的认知和智慧。
    만약 진정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모든 상(相)을 여의어 꿈속에서 깨어난다면, 마
    치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몸에서 식은땀이 쫙 날 것입니다. 이 시공간의 명예·이익·감
    정·욕망에 집착하여 끊임없이 추구하고 이러쿵저러쿵 득실을 따져가며 명예·이익·감정에 따
    라 자아를 드러내고 자아의 가치를 찾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명예·이익·감정의 성공을 추
    구했던 자신이 생각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 삼차원적 각도인 눈·귀·코·혀·몸·뜻으로 이 세계를 좁게 인지하고 바라
    보면서도 오히려 영원하고 원만한 생명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립할 수 없고 또한 제대로 볼 수도 없는 갖가지 색상(色相) 속에서 연연하고 전전하며, 윤회하여 태어나고, 탐·진·치·만·의로 말미암아 심지어 삼악도의 업보마저 짓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단지 부처님의 원만한 인지와 지혜를 갖추지 못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当我们真的听懂佛的圆觉境界、圆满觉悟的智慧,一念醒来,想到自己差点可能就会堕落在
    三恶道,想到此闪失,脊背发凉,头上冷汗直冒;不小心困在人道的大菩萨闻佛说法觉醒后,会
    被自己的无明吓一跳;还有一些声闻乘的弟子,他们长久地追随佛陀听法,耳闻心记,精进持戒
    修行,忽闻诸法皆空,所有文字、言说章句皆是假名,离相即佛,如不能言下顿悟,即会心生惊
    怖。所以佛说:“如有人在闻听此经的言说章句后,能不惊、不怖、不畏,甚为希有”,佛说的甚
    为希有指的是离所有相的大菩萨,不是根本还未听懂的众生。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원만한 경계와 원만한 깨달음의 지혜를 알아듣고 일념에 깨어
    나면 자칫 삼악도에 떨어질 뻔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
    를 것입니다. 그리고 방심하여 인간 세상에 갇힐 뻔했던 대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
    어나면 자신의 무명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부처님을 따라 불법을 귀로 듣고 마음에 새겨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에 정
    진하던 성문승 제자들은 홀연 ‘모든 법이 모두 공하며 모든 문자와 글귀가 모두 가명이므로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는 설법을 듣고, 만약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닫지 못한다면 마음속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만약 또 한 사람이 있어 이 경의 문자나 글귀를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참으로 희유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이 말씀하신, 참으로 희유하다는 것은 일체 상을 여읜 대보살을 가리키는 것이지 아예 이를
    알아듣지 못한 중생을 가리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如来接着说:“须菩提,如来说第一波罗蜜,非第一波罗蜜是名第一波罗蜜。忍辱波罗蜜,非
    忍辱波罗蜜,是名忍辱波罗蜜。”如来这样说,仍然是怕弟子们着法相。如来称自己前面说的诸相
    虚妄之理,如众生能了悟是从轮回中解脱的最好方法,在所有解脱的方法中排在第一位。但弟子
    们不要认为真有这样的法可得到,要了悟这个智慧后马上能放下,破除自己的执着,安住在如来
    知见中才是正确的。所以“第一波罗蜜”并非真有一个第一的波罗蜜,只是为了与大家交流的方
    便。这么说,“即名第一波罗蜜”。佛接着又用大菩萨们常修的“六波罗蜜”来做说明。
    여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 66 –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제일바
    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욕바라밀은 곧 인욕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인욕바
    라밀인 것이다.”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여전히 제자들이 법상에 집착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
    다. 여래께서는 자신이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이치를 중생이 만약 깨달
    으면 이것이 곧 윤회에서 해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므로 이 방법을 해탈의 모든 방법 중
    첫 자리에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법을 진짜로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지혜를 깨달은 후에는 즉시 내려놓아 자신의 집착을 깨뜨림으로써 여래
    의 지견에 안주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바라밀’은 실로 제일바라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중과의 의사소통
    편의를 위해서 세운 방편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제일바라밀이라고 한다”라고 이야
    기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또 대보살들이 항상 수행하는 ‘육바라밀’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在菩萨道中,大乘菩萨修行的“六波罗蜜多”,又称“六度”,即布施、持戒、忍辱、精进、禅
    定、般若。每一度的本意是行者通过修行能了悟人空、法空。比如,修忍辱波罗蜜多时,假如你
    身边发生了一件事,使你感觉自己的自尊心、面子很受伤害,一般凡夫众生会因此心生懊恼,甚
    至瞋恨、报复,但大乘菩萨会安住在一切毕竟空的正知见中,默默转化,这就叫忍辱行。在修行
    初期,行者虽知一切皆虚妄,但身心觉受依然非常强烈,但能坚守佛的正知见,不抱怨、不起瞋
    恨,不被身心内外境转,故称忍辱波罗蜜。即指能通过忍辱行来认证诸相的虚妄,解脱身心的束
    缚,解脱轮回。随行者功德逐渐圆满,这种忍辱也就不叫忍辱了。因为在佛法的根本智慧中,行
    者与他人以及所忍的事,在本质上只是因缘聚合呈现出的一个假相,并无实质的含义。如行者给
    他们下个定论,或对、或错,纠结不清,即会因此困在人道,困在万事万物的假相中不能解脱。
    보살도에서 대승보살이 닦는 ‘육바라밀다’를 ‘육도(六度)’라고도 칭합니다. 즉 보시·지계· 인욕·정진·선정·반야입니다. 매 바라밀다의 본래 뜻은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인공(人空), 법
    공(法空)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욕바라밀을 수행할 때 가령 주변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여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이 많이 구겨졌다고 느껴진다면, 일반 범부 중생은 이로 인해 번민하거나 심지어 분노
    하고 보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 보살은 ‘일체가 필경 공하다’는 정지견에 안주하
    여 묵묵히 그것을 전환하는데 이렇게 행함을 인욕행이라고 합니다.
    수행 초기에 수행자는 비록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지만 몸과 마음의 느낌은
    여전히 아주 강렬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지견을 굳게 지켜 원망하지 않고 분노하
    지 않으며 심신 안팎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면 이를 인욕바라밀이라고 부릅니다. 즉 인욕
    행을 통해 일체 상이 허망함을 체험함으로써 심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
    입니다. 수행자의 공덕이 점차 원만해지면 이런 인욕조차도 인욕이라 부르지 않게 됩니다. 불법의
    근본 지혜 안에서 보면, 수행자와 타인 및 참는다는 그 일 자체가 본질적으로 단지 인연이
    모여 나타난 하나의 가상일 뿐 실질적인 뜻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그들에게 어
    떤 정의를 내리거나 혹은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하면 이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 갇히고 만
    사 만물의 가상에 갇혀 해탈할 수 없게 됩니다.
  • 67 –
    佛说这个“忍辱波罗蜜,非忍辱波罗蜜,是名忍辱波罗蜜”,即告诉弟子们,在修行六度时,
    要具备这样的正知见。佛虽然为弟子们设立了这个法门,弟子们似乎在修忍辱行,但在如来圆满
    的境界中,污辱并不存在,是弟子们有我相、他相时,才有污辱、才有忍。弟子们也不能着法
    相,认为通过修忍辱可获得功德,以这种有所求的心来忍。真正的功德是你能通过这个行为,令
    心安住在真空境界,不被境转了,心中觉得没有什么东西不可忍的,此时你即从诸相中解脱出
    来,同时也会了知诸相的虚妄。所以佛说,“忍辱波罗蜜”只是一个名称,本质实无其事。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욕바라밀은 곧 인욕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인욕바라
    밀인 것이다”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육도를 수행할 때 이런 정지견을 갖추어야 함을 알려주
    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제자들을 위해 이 법문을 세우셔서 제자들이 인욕바라밀을
    수행하는 것 같지만 여래의 원만한 경계에서는 모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상과 타상(他相)이 있을 때야만 비로소 모독이 있고 참을 인(忍)이 있는 것
    입니다. 제자들이 또한 법상에 집착하여 ‘인욕 수행을 통해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 그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인욕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공덕은 이런 행위를 통해 마음을
    진공 경계에 안주시켜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며 마음에 참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
    껴져야만 비로소 모든 상으로부터 해탈되는 동시에 일체 상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인욕바라밀’은 단지 하나의 이름일 뿐 본질에서는 그러한 실
    체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佛在这句话的下文,为我们举了一个他在过去世的一个修行故事。曾经有一世,佛在山林僻
    静处一个人修行。有位国王叫歌利王,有一天他带领他的妃嫔、随从在山林中打猎取乐,有几位
    妃嫔发现了在树下静坐的佛陀,心生恭敬,便围绕在佛陀四周赞叹、礼敬、请法。妃嫔们对佛的
    态度使歌利王心中生起了嫉妒和怨恨,听到佛在修忍辱行,他竟拔出佩剑,当着妃嫔们的面,依
    次将这位修行人的双手、双脚、耳鼻等砍了下来。他看到修行人如如不动、沉静的面容,边砍边
    说:“我不相信这样你还不动心,不起瞋恨。”当时还在修忍辱行,未圆满的佛陀对他说:“我如果
    真的对你未生起一念瞋恨,那让肢解的身体恢复如初。”话说完,身体便完全恢复。
    부처님께서는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우리에게 당신이 과거 세상에서 겪었던 수행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과거 그 어느 한 생에 부처님께서는 산림의 한적한 곳에서 홀로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가
    리왕이라 부르는 국왕이 있었는데, 그 어느 날 비빈과 시종을 데리고 산림에서 사냥하며 즐
    기고 있었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고 계시는 부처님을 발견한 비빈은 마음속으로부터
    공경심이 우러나와 부처님의 주위를 맴돌면서 찬탄과 함께 예를 올리고 법을 청했습니다. 비빈들의 부처님에 대한 태도에 가리왕은 마음속으로부터 질투와 원한을 품게 되었고, 부처
    님이 인욕행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칼을 뽑아 비빈들이 보는 앞에서 차례로 이
    수행자의 두 손, 두 발, 귀와 코 등을 베어냈습니다. 수행자의 전혀 변함이 없는 차분한 얼
    굴을 본 그는 베어내면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도 그대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는다는 것을 난 믿지 못하
    겠네.”
    그때 아직 인욕을 수행 중이라 원만에는 이르지 못했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68 –
    “내가 만약 진짜로 그대에 대해 일말의 원한도 생기지 않았다면 이 절단된 몸은 원래대로
    회복될 것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몸은 곧 완전히 원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这是佛在过去无量劫前修忍辱行的一个故事,这个故事佛经多处有记载。在《贤愚经》中提
    到故事最后,歌利王受佛感化,至诚忏悔。当时还是仙人的佛说:“汝以女色,刀截我形,吾忍如
    地,我后成佛,先以慧刀,断汝三毒。”有经典记载,后来世尊成佛,第一个度的就是歌利王,也
    就是憍陈如尊者。佛陀还说:“在过去生,曾有五百世修忍辱行,做忍辱仙人。在那个时候,都坚
    守着无我、无人、无众生、无寿者相的正知见,才圆满忍辱波罗蜜的修行。”
    이는 부처님이 과거 무량겁 전에 인욕행을 닦을 때의 이야기로, 불경 여러 곳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현우경에는 이 이야기 마지막에 가리왕이 부처님께 감화되어 지성으로 참회하
    였다고 적혀있습니다. 당시 선인이었던 부처님께서 “그대가 여색으로 인해 칼로 나의 몸을
    베었으나, 나는 대지처럼 참을 것이다. 훗날 내가 성불하면 우선 지혜의 칼로 그대의 삼독
    (三毒)을 끊어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전의 기재에 따르면 후에 세존께서 성불
    하신 후 처음으로 제도하신 이가 바로 가리왕인바 그가 곧 교진여존자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세에 일찍이 오백세 동안 인욕을 수행하여 인욕선인이 된 적이 있다. 그때에도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는 정지견을 굳게 지키고 있었기에 비로소 인욕바라밀 수행을 원만
    하게 이룰 수 있었다.”
    闻听到佛说的这个故事,我们有什么感触呢?有几位朋友看了这个故事说,佛有神通,修忍
    辱行被歌利王肢解都能复活,那个境界不是凡夫的境界,我们做不到,是否忍辱行就圆满不了
    呢?不是这样的,佛在此举例并非是告诉大家你要准备忍受极端的苦行,是告诉你,只要你无相
    忍辱即可成就。平时大家也修忍辱波罗蜜,但修得气呼呼的,满心的不平、瞋恨,满心的委屈,
    满心的对众生的失望,甚至绝望。其实,只是大家还住在自我的觉受中,还在意他人是非的相,
    故出现了忍辱相,大家也就不叫修忍辱波罗蜜了,只是在承受侮辱,因为你并未按佛的正知见来
    修行。这样的结果是除了一天你忍无可忍,不会有其他结果。而佛在做忍辱仙人时,有五百世的
    时间身心如如不动,不被身心内外一切境转,无人、无我、无众生,不见生灭,这才是真正的“忍
    辱波罗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무슨 느낌이 드십니까? 친구 몇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이 있어 인욕행을 수행할 때 가리왕
    으로부터 사지가 절단되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으니 이는 범부 경계가 아님에 반해,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에 인욕행을 원만히 수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
    다.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예를 드신 것은 여러분더러 극단적인 고행을 참을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상(相)이 없는 인욕을 행하면 곧 성취할 수 있음을 여러분에게 알려주시
    는 것입니다. 평소에 사람들도 인욕바라밀을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닦습니다. 불
    평과 원한, 서러움, 중생에 대한 실망, 심지어 절망한 가슴 가득 안고 닦습니다. 사실 이것
    은 여러분이 여태 자아의 감수 속에 머물러 있기에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이라는 상을 마음
  • 69 –
    에 두고 있어서 ‘인욕상’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이 또한 인욕바라밀을 닦는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다만 모독을 감당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정지견대로 수행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느 날 여러분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
    는 것 외에는 다른 결과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반면 부처님은 인욕선인일 때 오백생 동안
    심신이 여여부동하고 심신 안팎의 일체 경계에 휘둘리지 않았으며, 무인·무아·무중생으로 생
    멸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행함이야말로 진정한 ‘인욕바라밀’입니다.
    我们也可以从另一个角度看佛的这个故事。如果我们在人道的时空中,不能了悟性空之理,
    着种种相、被种种境转,那么自我的贪瞋痴慢疑、名利情、众生的种种欲望就像歌利王和他手中
    的利剑,每一个人迟早会被肢解得体无完肤、支离破碎。我们被困在三界六道的幻境中,从未解
    脱过,无路可走,也无路可退,就这么不知不觉地像旋转的陀螺那样轮回着。而佛的般若智慧,
    可以令我们在所有相的幻境中停下脚步,重新看清身心内外一切相的虚妄不实。此时,我们圆满
    的自性如来显现,不增不减、不垢不净,久远劫的轮回也并不能损耗它半分,就像忍辱仙人马上
    能恢复原貌的身体,歌利王并不能真的伤害到他,三界六道的幻境也不能染着、伤害我们本有的
    圆满的真空自性。这个故事,虽然佛在经中只一句话略略带过,但我们现在能闻听到佛的智慧,
    都是佛在久远劫中历经难行能行的苦行才获得的宝藏,而他无私地、并善巧方便地传授给了我
    们。我们每一位闻听到佛陀正知见的人,都已在接受佛的大布施。没有佛的指航,我们在生命回
    归的路上会迷路,我们会着所有的相,被层层叠叠的境界迷惑。
    우리는 또한 다른 각도에서 부처님의 이 이야기를 조망해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 세상의 시공간에서 본성이 공하다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온갖 상에 집착하고 온갖
    경계에 휘둘리거나 하면 자아의 탐·진·치·만·의와 명예·이익·감정, 그리고 중생의 온갖 욕망
    은 가리왕과 그의 손에 들려진 날카로운 칼과 같아 우리는 모두 조만간 몸이 갈기갈기 찢기
    고,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삼계육도의 환상 속에 빠져 종래로 해탈한 적이 없으며, 갈 길도 없고 물러날 길
    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회전하는 팽이처럼 윤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반야 지혜
    는 우리가 모든 상의 환상 경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심신 내외의 일체 상이 허망하여 실체
    가 없다는 것을 다시 똑똑히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의 원만한 자성여래가 드러나는데, 이는 늘지도 줄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
    끗하지도 않으며, 까마득한 겁의 윤회에도 불구하고 반푼의 손해조차 없습니다. 이는 마치
    인욕선인의 몸이 즉시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처럼, 가리왕 또한 진정으로 그를 해칠 수
    없으며, 삼계육도의 환영 또한 우리 본유의 원만한 진공자성을 더럽히거나 해칠 수 없습니
    다. 이 이야기는 비록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한마디로 간략하게 언급하신 수준에 지나지 않지
    만, 지금 우리가 듣는 부처님의 지혜는 모두 부처님께서 까마득히 먼 겁을 거쳐 행하기 어
    려운 고행을 겪으시면서 얻으신 보물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선교 방편을 통해 아낌없이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정지견을 듣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미 부처님의 큰 보시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인도가 없다면 생명 회귀의 길에서
    우리는 길을 잃을 것이며, 모든 상에 집착하여 겹겹이 쌓인 경계에 미혹될 것입니다.
    从另一个角度,我们也看到佛陀用五百世来专门修忍辱波罗蜜,并且曾忍受了极端的苦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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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而我们有时只忍受了生活中的一点点磨难就会伤心、失望、冷漠,对众生、对佛法失去信心,退
    失道心。所以立志成道的人,看到这个故事应该反省一下。当然,佛在此谈到他过去世的修行故
    事,并非在此夸赞自己,想对弟子们说,看我当年多厉害,或藉此显示自己经历过无量苦行才获
    得今日成就,现在无私地传授给你们,你们应当感恩。如果佛有这样的一念,佛就又着了我、
    人、众生、寿者相,也就不名为佛了。佛这样举例的目的只是告诉弟子,我也是通过这样的见地
    修行成就的,让弟子们看到活生生的例子、榜样,坚定修行的信心。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오백 생 동안 오직 인욕바라밀만을 수행하시고 또한
    극단적인 고행도 겪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생활 중 사소한 시련을
    겪어도 상심하고 실망하고 냉담해지며, 중생과 불법에 대해 믿음을 잃고 도심(道心)을 잃습
    니다. 그러므로 도를 이루고자 뜻을 세운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보고 마땅히 반성해야 합니
    다. 물론 부처님께서 여기서 과거세 수행 이야기를 꺼내신 것은, 제자들에게 “봐라, 내가 그
    당시 얼마나 대단했는지” 하면서 자신을 자랑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또는 이를 빌어 자신
    이 헤아릴 수 없는 고행을 겪고서야 오늘의 성취를 얻었지만 지금 아낌없이 너희들에게 전
    수해 주고 있으니 너희들은 응당 감사해야 한다고 과시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부처님
    께 이런 생각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부처님 역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한 것
    이 되어 부처라 이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상술한 예를 드신 목적은 다만 제자들에게 나 또한 이런 견지(見地)를 통해
    수행하여 성취했음을 알려줌으로써 제자들에게 생생한 예증과 본보기를 보여 그들이 수행을
    행함에 있어서 그 믿음을 굳건히 하려고 하신 것일 뿐입니다.
    佛接着说:“所以须菩提,菩萨应离一切相,发无上正等正觉之心,不应住色、声、香、味、
    触、法生心,应无所住生心。若心有住,即为非住。”这几句话是什么意思呢?《金刚经》开始的
    因缘是须菩提问佛:“善男子、善女人,发出求无上正等正觉的菩提心时,应怎样安住,降伏烦恼
    妄念?”所以,此处佛又回到了这个问题的答案上。佛说,众生应离一切相,发求无上正等正觉之
    心,才能在求法的路上令心安住,没有烦恼。如果众生执着六根六尘之境界,然后发心求取无上
    正等正觉,想回归如来真空境界,这是不可能的。只要着相,烦恼、痛苦就会不断。所以众生一
    旦要发心求取无上正等正觉的果位,从那一刻起,就应离所有相,即在修证中如如不动,不被身
    心内外境转。在见地上始终保持“一切相虚妄不实”的正知见,无所求、无所得,这样发心才能回
    归如来真空。用这样的正知见发心,才会令心安住,降伏烦恼、妄念。如果发心要成就无上正等
    正觉的圆满觉悟,要成就佛果,但心却牵挂着这世界的种种相,种种人情世故,有种种执取,较
    真得失,认为有法可得,这样发心就非正见,不是大菩萨应该身心安住的位置。而且诸相本质虚
    妄,即使心有所住,也是安住了虚妄的地基上,是无法见到实相,成就佛果的。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모든 상을 떠나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발해야 한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응당 머무는 데 없이 그 마음을 내
    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다면, 그 머묾은 곧 머묾이 아니다.”
    이 몇 구절은 무슨 뜻일까요? 금강경이 시작된 인연은 수보리가 부처님께 “선남자, 선
    여인이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냈으면 어떻게 안주해야 하며 어떻게 번뇌와 망념을 항복시
  • 71 –
    켜야 합니까?”라고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부처님은 또다시 이 문제의 해답으로 되돌아가신 것입니다. 부처님께
    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은 응당 일체 상을 떠나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는 마음을 내어야만 법을 구하는 길에
    서 마음을 안주할 수 있어 번뇌가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중생이 육근과 육진의 경계에 집착하면서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는 마음을 내어 여래
    의 진공 경계로 회귀하려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상에 집착하는 한 번뇌와 고통
    이 끊이지 않으므로 중생이 일단 무상정등정각의 과위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냈다면 그 순
    간부터 마땅히 모든 상을 여의어야 합니다. 즉 수행하고 증득하는 과정에서 여여부동하여
    심신 안팎의 경계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며 견해에 있어서 시종일관 ‘일체 상은 허망하여 실
    체가 없다’라는 정지견을 유지하면서 바라는 바도 없고 얻는 바도 없이 발심해야만 여래의
    진공으로 회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지견으로 발심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안주되고 고민과 망념을 항복 받을 수 있습니
    다. 만약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하여 불과를 이루겠다고 발심해 놓고도, 마
    음은 오히려 이 세상의 온갖 상과 갖가지 인정세태에 얽매여 집착하면서 득실을 따지며 ‘얻
    을 수 있는 법이 있다’고 여긴다면, 이런 발심은 정지견이 아니며 대보살의 몸과 마음을 안
    주시킬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상은 본질에서 허망하므로 설령 마음이 그 어디에 머무
    는 데가 있더라도 그것은 허망한 터전 위에 안주한 것이어서 실상을 보고 불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佛又说:“因为以上的道理,所以我说过,菩萨的心不应住色布施。”佛在第四品中已谈过,
    菩萨应无所住行于布施才能圆成佛道。此处,佛重提“不住相布施”,原文中说“是故佛说”,表示前
    面已谈到过。在大乘菩萨道中,布施是放在第一位的。在佛教史上,大菩萨们在累世的修行中为
    法、为利益众生,不惜布施自己的一切,甚至于头脑骨髓、身体性命。但在此处佛强调的重点是
    菩萨在修行布施时,一定要坚守佛的般若智慧。在布施中时时处处见空性,自我空、所施一切
    空、受者空、众生空。否则,所有的布施只会成为人间善业,菩萨的所行也会变成为法、为利益
    众生的付出和牺牲。佛在原文中是这样说的:“须菩提,菩萨为利益一切众生,应如是布施。如来
    说一切诸相即是非相,又说一切众生即非众生。”佛为了加深弟子们的信任与记忆,让他们知道佛
    说的真实不虚,接着又苦口婆心地说:“如来是真语者、实语者、如语者、不诳语者、不异语
    者。”这等于是告诉仍在疑惑的众生,如来不会骗大家,你们不要疑惑。如来是真正能说出万法实
    相的人,万物本来面目的人,如来从不撒谎、欺骗别人,如来已到达生命实相的终点,所讲的法
    都会指引大家走向同一个地方,不会出现互相矛盾,令大家终点不同。
    부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러한 이치 때문에 보살의 마음은 색에 머물면서 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제4품에서 이미 보살은 마땅히 머무는
    데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만 불도를 원만히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계십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라고 거듭 강조하시는데, 원문에서 “그러한 연
    고로 부처가 설하셨다.”라고 하여 앞에서 이미 언급했음을 나타냈습니다. 대승 보살도에서는
    보시를 첫 번째 자리에 놓습니다. 불교사를 보면, 대보살은 누세의 수행에서 법을 위해, 중
    생을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머리와 골수,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보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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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강조하시는 핵심은, 보살이 보시를 수행할 때 반드시 부처님
    의 반야 지혜를 굳건히 지켜 언제 어디서나 공성을 보아, 자아가 공하고 보시한 모든 것이
    공하며 받는 이가 공하고 중생이 공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보시
    는 다만 인간 세상의 선한 업이 될 뿐이며, 보살이 행한 보시도 법과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단순한 헌신과 희생으로 변하고 맙니다. 부처님께서는 원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
    다.
    “수보리여! 보살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한다. 여래는
    설하였다, 일체의 상은 곧 상이 아니라고. 여래는 또 설하였다, 모든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
    라고.”
    제자들의 신뢰와 기억을 깊게 하고, 당신의 말씀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제자들이
    알게 하려고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곡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이며,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이며, 허황
    한 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이는 여전히 의혹을 품고 있는 중생에게 여래는 속이지 않으니 의심하지 말라고 이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래는 진정으로 만법의 실상을, 만법의 본래 모습을 진실로 말해줄 수 있
    는 분입니다. 여래는 종래로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여래는 이미
    생명 실상의 종점에 도달했기에 설하는 법은 모두 대중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
    는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어 대중이 도달하는 종착점이 달리 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接下来,佛说:“如来所得法,此法无实无虚。”在前面,大家几次听到佛与须菩提关于法的
    问答,比如第七品:“佛问须菩提,如来有所说法吗?”;第十品:“如来昔在燃灯佛所,于法有所
    得不?”须菩提说:“如来昔在燃灯佛所,于法无所得。”通过前面对法的讨论,我们应该知道,佛
    法是众生病中的良药,众生在迷失时没有佛的正知见无法转迷为悟,无法真正彻底从梦中醒来。
    在这个意义上,佛法是真实不虚的,是实实在在的,是众生需依止的。但当众生从梦中醒来,所
    修行的一切法门、解脱道等,与梦境一样,同样虚妄不实。但佛担心有些弟子听到“一切相虚妄” 后,认为佛法即是虚妄不实的,即可以不必持戒修法。故在此处又谈到“如来所得法,此法无实无
    虚”,既非真实,也不能否定,在众生迷时,它是依止,是解脱的航灯。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얻은 법, 그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앞서 여러분이 부처님과 수보리 사이에 오고 간 법에 관한 문답을 여러 차례 들
    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7품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은 있는가?”
    물으셨으며, 제10품에서는 “여래가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하고 물으시자 수보리는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실로 아무런 법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앞서 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응당 알아야 합니다, 불법은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는
    양약이기에 중생이 길을 잃었을 때 부처님의 정지견이 없으면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바꿀 수
    없으므로 진정 꿈속에서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러한 의미에서 불법은 진실하며, 허망하
    지 않으며 실재하기에 중생은 이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생이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수행했던 모든 법문과 해탈도(解脱道) 등은 꿈속의 세상과 같아 이것 역시 허망하여 진실하
    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일체 상은 허망하다”라는 말을 듣고 불법 또한 허망하여
  • 73 –
    실체가 없다고 여겨 계율을 지키거나 법을 닦을 필요가 없다고 여길까 봐 걱정되어 여기에
    서 또 “여래가 얻은 법, 그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실
    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생이 미혹되어
    있을 때에 불법은 의지처이며 해탈의 등대이기 때문입니다.
    接下来佛对布施做了一个比喻,原文是:“须菩提,菩萨心住于法而行布施,如人入暗,即无
    所见。菩萨心不住法而行布施,如人有目,日光明照,见种种色。”确实,在菩萨道中,如果行者
    在布施中能够领悟并依照佛的般若正见做,比如施者空、所施一切空、受者空,在整个布施的行
    为中无所求、无所得,菩萨就可以逐渐从这个世界的万法中出离,从而看清万法的实相。这个过
    程,真的会像佛比喻的那样,用般若正见指导下的布施,像阳光明照,能很快地破除菩萨心中的
    无明与黑暗。如果抱着有所求,有所执着,有所得之心行布施,菩萨即使布施再多再久,仍会很
    久被困在无明黑暗之中,智慧之光无法显现,无法证入空性。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보시에 대해서 비유를 드셨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법에 머문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어둠 속에 들
    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보살이 법에 머물지 않은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그
    것은 마치 사람이 눈이 있어 햇빛이 밝게 비추면 온갖 형체를 보는 것과 같다.”
    확실히 보살도에서 만약 수행자가 보시를 행할 때 부처님의 반야 정견을 깨닫고 그에 따
    라 행한다면, 즉 보시하는 자도 공하고 보시한 물건도 공하며 받는 자도 공하여, 보시하는
    전체 행위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얻고자 하는 것도 없으면, 수행자는 점차 이 세상
    의 만법에서 벗어나 만법의 실상을 똑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은 부처님의 비유처
    럼, 진짜로 반야 정견의 가르침을 따른 보시는 마치 햇살이 비추는 것과 같아 수행자 마음
    속에 있는 무명과 어둠을 빠르게 타파해 줄 것입니다. 만약 구하는 바가 있고 집착하는 바
    가 있어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수행자가 설령 오랫동안 많이 보시하더라도 여전
    히 무명의 어둠 속에 갇혀 지혜의 빛이 드러나지 못해 공성으로 증입할 수 없습니다.
    佛接着鼓励所有佛弟子,并提到了未来之世,当然也包括我们,要受持读诵、信受奉行这部
    经所讲的智慧。为此,佛又反复提到了此智慧能为我们带来的功德,他说:“须菩提,未来的时
    代,如果有善男子、善女人,能够读诵此经并信受奉行,如来凭佛的无量智慧完全能肯定地说,
    这些人都将成就无量无边的功德。”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모든 불제자를 격려하시면서 미래의 세상을 언급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를 포함해서 모두가 이 경전을 열심히 읽고 외우고 이 경전의 지혜를 받아 지녀 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이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공덕을
    거듭 언급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앞으로 오는 세상에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전을 읽고 외우며, 믿고
    받아들여 받들어 행한다면, 여래는 부처의 무량한 지혜로써 분명히 말하건대, 이들 모두가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在第十五品中,佛陀接着比喻说:“须菩提,假如有善男子、善女人,每天上午以相当于恒河
    沙数的身体性命来布施,中午再以相当于恒河沙数的身体性命来布施,下午又以相当于恒河沙数
  • 74 –
    的身体性命来布施,像这样经过百千万亿劫的时间都用身体性命来布施。如果又有一人,闻听到
    这部经典,生起绝对的信心,其福德胜过前者,更何况书写、受持读诵,为他人解说。”
    “须菩提,总的说来,这部经有不可思议、不可称量,无边无际的功德。它本来是如来为生起自度
    度人的大乘菩萨而说的,为生起求取佛最高、最圆满觉悟的人说的。如果有人能自己修证、读诵
    这部经,并广为别人讲说,如来完全能肯定此人将会成就不可思议、不可称量,无边无际的功
    德,这样的人即为肩负了如来最高、最圆满的教法。”
    “为什么这样说?须菩提,如果一个人只乐于追求学习那些并非最高、最圆满的教理,执着、取舍
    在自我、他人、众生、寿者的种种知见中,那么他对于这部经中的教理就一定不能听闻接受,更
    别说读诵乃至为他人解说。”
    제15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여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매일 오전에 항하의 모래 수량만큼의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또 점심에 항하의 모래 수량만큼의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다시 또 저녁
    에 항하의 모래 수량만큼의 몸과 목숨을 보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또 이와 같이 매일 헤아
    릴 수 없을 정도로 백천만억 겁의 시간 동안 몸과 목숨을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또 어
    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듣고 절대적인 믿음을 내어 비방하지 않는다면, 그 복덕이 앞 사
    람보다 뛰어넘을 것이다. 하물며 이 경전을 베껴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설해주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수보리여, 요약하여 말하건대, 이 경전은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가히 헤아릴 수도 없이
    가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다. 이 경은 본래 여래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발심한
    대승 보살을 위해 설한 것이며, 부처의 가장 높고 가장 원만한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한 사
    람을 위해 설한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능히 스스로 수지 독송하고 널리 사람들을 위해 설
    한다면, 이 사람은 생각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가없는 공덕을 가히 성취할 것임을 여래
    는 완전히 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바로 여래의 최상, 최고의 원만한 가르침을 짊어진 것
    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수보리여, 만약 한 사람이 다만 최상도 아니고, 가장 원만하지도 않
    은 교리를 배우기 즐기며 자아·타인·중생·수자 등 여러 지견에 집착하고 취하거나 버린다면
    그는 반드시 이 경전의 교리를 듣고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니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해설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在此处佛提到了一个“乐小法者”的概念,什么是“乐小法者”?比如大家着我相、寿者相,就会
    只求长生不老之法,求神通、神变法术,这就是乐小法者,是听不进佛说的空性之理的。即使听
    闻后觉得有道理,也不会令自己安住在真空的知见中去修证。比如,不会用无所求、无所得之心
    去布施;也不会用一切相虚妄去忍辱,并且在内心深处总是爱惜自我,怕自我委屈、受伤害;学
    习一切法术甚至修禅定,也是为了炫耀自我,展现自我与众不同、展现自己个性风采的方式。所
    以佛说:“这些乐小法者,对此经最高的般若智慧,不能听受读诵、为人解说。”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작은 법을 즐기는 자[樂小法者]”라는 개념을 언급하셨는데 “작은
    법을 즐기는 자”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아상과 수자상에 집착하여 장생불로의 법을 추
    구하거나 신통과 도술을 추구하는 자들이 바로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이며, 이들은 부처님
    께서 말씀하시는 공성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비록 듣고 나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
  • 75 –
    하더라도 진공 지견에 안주하여 수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구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얻고자 하는 것도 없는 마음으로 보시하려 하지 않
    을 것이며, 일체 상이 허망하다는 이치로 인욕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심 깊은 곳에
    서는 늘 자아를 아껴 자아가 서러울까,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법술
    을 배우거나 심지어 선정을 닦는 것조차도 자아를 과시하고, 자신의 남다름을 보여주며, 개
    성을 뽐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작은 법을 즐기는
    자는 이 경전의 최고 반야 지혜를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那么,为什么说这些乐小法者不能安住于空性正见中呢?原因是这些乐小法的人,已经着了
    自我、他人、众生、寿者的相,所以才会乐于学习、接受一些不究竟的小法,于大乘空性正见不
    能听受读诵,为人解说。” “须菩提,在任何地方如果有这部经,一切世界的人、天人、阿修罗等
    都应供养,应当认为此处有佛舍利塔,都应恭敬、礼拜、围绕,并散种种香花于其处。”
    “그렇다면, 왜 이런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공성의 정견에 안주할 수 없는가? 그 이유
    는, 이런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이미 자아·타인·중생·수자의 상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부 궁극적이지 않은 작은 법을 배우고 받아들이기를 좋아하기에 대승의 공
    성 정견을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할 수 없다.”
    “수보리여! 어느 곳에든지 이 경전이 있게 되면 바로 그곳을 일체 세간의 인간과 천인, 아수라가 기꺼이 공양해야 한다. 이곳에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하며, 모두 마땅히 공경하고 예배하고 주위를 돌면서 온갖 꽃과 향을 그곳에 흩뿌려야 한다.”
    在第十六品中佛接着说:“还有,须菩提。如果善男子、善女人,因信受修行、读诵此经,遭
    到别人的轻贱,被污辱嘲笑,假若此人在过去世也曾有恶业、果报,应堕三恶道,以今世持此经
    被人轻贱的原因,前世的罪业即会因此消除,而且还会得到最高最圆满的觉悟。”佛在这儿提到,
    这本经的智慧可以消恶业。如果一个人的罪业应堕恶道,就因为受持修证这部经的智慧而被现世
    人轻贱,那先世的恶业就会因此消灭。这是大报化小、化无,本来要堕三恶道,但只受了被人轻
    贱的果报,竟然把恶报化为无形,并且还肯定能得到无上正等正觉的圆满觉悟。听到佛这样说,
    我认为在末法时代,这真是鼓舞人心的一段话。
    제16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보리여,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믿고 받아들여 수행하고 독송함으로써 사
    람들에게 경시당하고 모독과 조소를 받는다면, 가령 이 사람이 전생에 지은 악업과 과보로
    삼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하나, 현생에 이 경전을 지녀 사람들로부터 경시와 천대를 받은 연
    고로 말미암아 전생의 죄업이 없어질 것이며 게다가 가장 높고 가장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이 경전의 지혜가 악업을 없앨 수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가령 어
    떤 사람이 죄업으로 말미암아 응당 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한데 이 경전의 지혜를 받아 지녀
    닦은 까닭에 세상 사람들의 경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그 전생의 악업은 그로 인해 없어진다
    는 것입니다. 이는 큰 과보를 작게, 혹은 사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본래 삼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한데 사람들에게 경시와 천시당하는 과보만을 받고, 놀랍게도 악업의 형체가 사라질 뿐
  • 76 –
    만 아니라 반드시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확언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의 이 말씀을 듣고 저는 말법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고무적인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讲到这,想起曾有一位朋友,当时他在信受奉行《金刚经》,读到这段话时对我说,我肯定
    生生世世造过许多恶业,即使这一世过去几十年,做得也不怎么样。佛说,只要我受持读诵《金
    刚经》时,有人轻贱我,我就可以把恶报消失,并能开悟了。现在苦于没有找到轻贱我的人,你
    是我朋友,帮帮我,轻贱我吧。当然这只是一个玩笑。其实,如果你真了解佛陀说的无我、无众
    生的道理,你的前念就是那个正在读经、曾经造恶业,该下地狱的人,你的后一念就是轻贱前念
    的人。了知无我、无人后,你肯定恶业已了,并可以成就无上正等正觉。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나니 그때 금강경을 받아 지니면서 실천했던 한 친구가 생각납니
    다. 그는 이 구절을 읽고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분명 세세생생 많은 악업을 쌓았을 거야. 이번 생에 지난 수십 년만 봐도 잘한 게
    별로 없거든. 부처님 말씀에 내가 금강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할 때 누군가가 나를 천시하
    기만 하면 나의 악한 업보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어. 지금 나를 천시하
    는 사람을 못 찾아 고민이야. 네가 내 친구니까 나를 도와 나를 좀 경멸해줘.”
    물론 이것은 농담입니다. 사실, 만약 그대가 진정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무중생의 도
    리를 이해하였다면 그대의 앞선 생각은 바로 경전을 독송하는, 일찍이 악업을 쌓아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야 할 그 사람이고, 그대의 다음 생각은 바로 앞선 생각을 경멸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무아, 무인을 깨닫고 난 뒤라면 그대의 악업은 분명 이미 끝났고 또한 무상정등
    정각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当然,如果真的在此世上,当你修证般若空性之理时受到别人的轻贱、诋毁,你就应该记起
    佛说的话,不要瞋怒,应该礼拜、感恩他们,因为他们正在帮你消除恶业。其实在此世界,尤其
    是在过去几十年中,如果你为别人讲解般若性空之理,一定会有人说你迷信、不务正业,也许只
    需提《金刚经》的名字,就会被人轻贱,何需受持读诵。但在近几年,许多人开始探求生命的真
    相和活着的意义,这种因愚昧带来的轻贱和诽谤就少多了。
    물론, 현실 세계에서 그대가 반야 공성의 이치를 수행하고 증득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의
    천시와 비난을 받는다면, 응당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성내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게 예
    배하고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대의 악업을 소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
    다. 사실 이 세상에서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만약 다른 사람을 위해 반야 공성의 이치를
    해설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대가 미신에 빠져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혹은 그저 금강경 이름만 언급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천대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받
    아 지녀 읽고 외움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생
    명의 실상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무지로 인한 이런 천대와 비난은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佛接着说:“须菩提,我现在回忆过去无量久远的时代,我曾在燃灯佛那里,值遇过八百四千
    万亿那由他位佛,我都尽心尽力地供养侍奉,绝不会浪费每一次难得的际遇。如果再有人,于我
  • 77 –
    入灭后的末法时代,能够信受奉持、读诵这部经,他所获得的功德与我供养信奉诸佛的功德相
    比,我的功德远不及他的百分之一、千分之一、万分之一、亿万分之一,乃至根本无法用算术比
    喻来衡量。”“须菩提,如果有善男子、善女人,在我入灭后的末法时代,能信受、修持、读诵此
    经,而所得到的福报、功德,假如我一一细说的话,也许有人听见以后根本无法理解,疑惑不
    信。” “须菩提,应当知晓这部经所说的义理,不可思量,修习此经的果报也不可思议。”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거의 헤아릴 수도 없는 기나긴 세월에 내가 연등부처님
    의 처소에서 이미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의 많은 부처님을 만나 성심성의껏 공양하고 받들어
    섬겨 결코 단 한 번의 귀한 만남도 헛되지 보낸 적이 없다. 만약 다시 어떤 한 사람이 있어
    내가 열반에 든 후의 그 말법 시대에 능히 이 경전을 믿고 받아 지녀 독송한다면, 그가 얻
    게 될 공덕을 내가 과거세에서 모든 부처님을 믿고 받들어 공양했던 그 공덕과 비교할 때, 나의 그 공덕은 그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 천만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
    며 나아가 숫자의 비유로도 도저히 닿지 못한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열반한 후의 말법 시대에 능히 이 경전을 믿고 받
    아 지녀 독송하여 얻게 될 복과 공덕을 내가 만약 하나하나 자세히 말한다면, 아마 어떤 사
    람들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미친 듯이 어지러워져 반신반의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이 설하는 이치는 불가사의하며, 이 경을 닦아 얻는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佛在这段话中,不仅赞叹受持读诵这部经的功德,而且说果报不可思议。大家都知道,佛法
    是讲因果的,说种什么样的因,得什么样的果报。说善有善报、恶有恶报。现在读《金刚经》了
    知佛的般若智慧,这也是个因,而这个因得的果报简直超出你的所有想象,不可思议。般若智慧
    带来的一切功德之相,佛说:“我如果都说出来,有的人闻听心会狂乱,狐疑不信。”我相信,今
    天我们自认为科学已非常发达,但对所有生命的真相并未了解。即使今天佛说出般若智慧能带来
    的功德,不仅是不信佛教者狐疑不信,即使是深信佛者也会内心狂乱,因为太不可思议了,超出
    了人意识认知的极限。
    부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비단 이 경전을 받아 지녀 독송하는 공덕을 찬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다고 하셨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불법은 인과를 이야기합
    니다. 어떤 원인을 심으면 어떤 결과를 얻으므로 선에는 선한 과보가 있고 악에는 악한 과
    보가 따른다고 합니다.
    지금 금강경을 읽어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아는 것, 이 또한 하나의 원인입니다. 그런
    데 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과보는 그야말로 모든 상상을 초월하여 불가사의하다는
    것입니다. 반야 지혜가 가져다주는 일체 공덕의 상을 부처님께서 “내가 만약 자세히 다 말
    한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듣고 마음이 미쳐 흐트러지거나, 반신반의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 스스로는 과학이 이미 아주 많이 발달하였다고 자부하지만
    모든 생명의 진실에 대해서는 아직 다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비록 오늘날 부처님께서
    반야 지혜가 가져다주는 공덕을 다 말씀하신다고 하여도 비단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여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심이 깊은 불자라도 내심이 흐트러질 것입니다. 왜
  • 78 –
    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인간의 의식과 인지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
    입니다. 제17품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尔时,须菩提白佛言:“世尊!善男子、善女人,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心,云何应住?
    云何降伏其心?”佛告须菩提:“善男子、善女人,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心者,当生如是心, 我应灭度一切众生。灭度一切众生已,而无有一众生实灭度者。何以故?须菩提!若菩萨有我
    相、人相、众生相、寿者相,即非菩萨。所以者何?须菩提!实无有法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
    心者。”“须菩提!于意云何?如来于燃灯佛所,有法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不?”“不也,世
    尊!如我解佛所说义,佛于燃灯佛所,无有法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佛言:“如是!如是!
    须菩提!实无有法如来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须菩提!若有法如来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
    者,燃灯佛即不与我授记:汝于来世,当得作佛,号释迦牟尼。以实无有法得阿耨多罗三藐三
    菩提,是故燃灯佛与我授记,作是言:‘汝于来世,当得作佛,号释迦牟尼。’何以故?如来
    者,即诸法如义。若有人言:‘如来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须菩提!实无有法,佛得阿耨多
    罗三藐三菩提。须菩提!如来所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于是中无实无虚。是故如来说:一切
    法皆是佛法。须菩提!所言一切法者,即非一切法,是故名一切法。须菩提!譬如人身长
    大。”须菩提言:“世尊!如来说:人身长大,即为非大身,是名大身。”“须菩提!菩萨亦如
    是。若作是言:‘我当灭度无量众生’,即不名菩萨。何以故?须菩提!实无有法名为菩萨。是
    故佛说:一切法无我、无人、无众生、无寿者。须菩提!若菩萨作是言,‘我当庄严佛土’,是
    不名菩萨。何以故?如来说:庄严佛土者,即非庄严,是名庄严。须菩提!若菩萨通达无我法
    者,如来说名真是菩萨。”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
    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 선여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한다. ‘나는 일체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일체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지만
    실제로 열반을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중
    생상·수자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
    리의 마음을 낸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
    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은 따로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은
    실로 없다. 수보리여!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
    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석가모니라고 부르는 부처가 될 것이
  • 79 –
    《金刚经》的开篇,缘起于须菩提对佛提的一个问题。原文是:“善男子、善女人,发阿耨多
    罗三藐三菩提心,云何应住,云何降伏其心。”在第十七品,须菩提对佛重新提出了问题,原文
    是:“尔时须菩提白佛言,世尊,善男子、善女人,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心,云何应住,云何降
    伏其心。”大家比较上下文可以看到,须菩提提的问题是相同的,佛的回答也基本相同。但开篇佛
    将展开全文进行回答,因众弟子们心中该破的相与执着还很多,非一言两语的开示可以使弟子们
    破尽。而第十七品佛的回答,是已建立在前边所开示的一切之上了,只是到此,佛认为须菩提及
    弟子们还有一个“本体”上的执着未破,这还是根本“我相”。如还有一个可以谈空说有的“心”,如如
    不动的“心”,非空即有的“心”,叫“如来”、“真空”、“自性”、“佛”等,还有这样一个“相”在众弟子们
    的心中。佛开始破弟子们对这个本体上的执着了。佛告诉你,没有一个东西在发无上正等正觉的
    心。不管你头脑、境界中的这个东西叫假我、真我、是凡夫、是虚空还是真空,没有一个能发心
    的东西。这时,须菩提及弟子们会忽然反观内在,一无所住。
    금강경의 서막은 수보리가 부처님께 드린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원문은 이러합
    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
    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제17품에 이르러 수보리는 다시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원문은 이러합니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앞뒤 문맥을 비교해 보면 수보리는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고 부처님의 답변도 기본적으로
    다’라고 수기를 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법이 없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석가모니라고 부르는 부처
    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셨다. 왜냐하면,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있는 그대로
    의 모습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
    다’라고 말한다면, 수보리여! 부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그러한 법은
    실로 없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일체법이
    라 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아닌 까닭에 비로소 이름하여 일체법이라 한 것이다. 수보리
    여!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
    하여 큰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이 만약 ‘내가 반드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
    리라’고 말한다면, 그는 곧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보살이라 이름
    할 수 있는 법이 실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고 부처는 설한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내가 반드시 불국토를
    장엄케 하리라’고 말한다면, 그를 이름하여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불국
    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곧 장엄하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장엄하게
    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비
    로소 그를 진정한 보살이라 부를 것이다.”
  • 80 –
    같습니다. 그러나 경전의 서두에서는 부처님은 전편을 통틀어 답변을 전개하셨습니다. 당시
    제자 마음속에 깨뜨려야 할 상과 집착이 여전히 많았기에 한두 마디 가르침으로 그것을 다
    깨뜨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17품에서의 답변은 앞서 설하신 모든 가르침 위에
    세운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 제자들에게 아직 타파되지 않은 ‘본체’
    즉 근본적인 ‘아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즉 공(空)과 유(有)를 논할 수 있는 ‘마음’, 여여부동하는 ‘마음’, 비공즉유(非空即有)의
    ‘마음’이 있어 이를 ‘여래’·‘진공’·‘자성’·‘부처’ 등으로 이름한다는 식의 ‘상’이 여전히 제자들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러한 본체에 대한 집착을 깨
    뜨리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내는 그 어떤 존재’도 없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즉 여러분의 머릿속이나 경계 속에 있는 그 존재를 가아(假我)·진아(真我)·
    범부·허공 또는 진공이라 부르든 상관없이 마음을 내는 그 존재는 사실 없다는 것을. 이 말
    씀을 듣는 순간, 수보리와 제자들이 문득 내면을 돌이켜 보면 그 어디에도 머무는 데가 없
    었을 것입니다.
    还有一个原因,大家应该了解,《金刚经》是从“金刚般若会”上佛的开示中摘取言论片段,
    结集而成。所以,编写者在此处让须菩提对佛重新提出了问题,这样易使读者了解十七品以后佛
    说法的重点。因佛的前后回答内容虽然差不多,但重点有所不同,并非是佛在金刚法会中与须菩
    提反复这样问答。也有人说须菩提这次的提问是为佛灭后五百岁的众生问的,但观后面佛说法的
    破相重点,我个人认为是编写者刻意这样编写。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금강경은 ‘금강반야회’에서 부처님
    께서 설법하신 말씀의 단편들을 발췌하여 집대성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편찬자는 여
    기에서 수보리가 다시 부처님께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는 식으로 텍스트를 구성했던 것입니
    다. 이는 독자들이 제17품 이후 부처님 설법의 중점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한 조치입니다.
    부처님의 앞뒤 답변 내용이 비록 엇비슷하기는 하나 그 역점 포인트는 다릅니다. 부처님
    께서 금강법회에서 수보리와 반복적으로 이렇게 문답하신 것은 아닙니다. 또한, 어떤 이는
    수보리의 이번 질문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후오백세의 중생을 위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만 텍스트 후반으로 가면서 부처님의 설법 중점이 상을 타파하는 데 있는 것을 보아 저 개
    인적으로는 편찬자가 이를 강조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구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现在我们来听闻第十七品的大意。这个时候,须菩提问佛陀说:“世尊,善男子、善女人,发
    求取无上正等正觉的菩提心,究竟应该怎样安住?应该怎样降伏自己的烦恼、妄心呢?”佛告诉须
    菩提:“善男子、善女人,发求取无上正等正觉之心,应当先这样发心。我应度脱三界六道一切众
    生,使其从生死轮回的苦海中解脱,进入涅槃寂静的如来境界。即使这样灭度了一切众生,心中
    应有这样的知见,其实并非真有一位众生被我度脱了。”“为什么这样说呢?须菩提,如菩萨有自
    我、他人、众生、寿者等种种相的分别,就不是菩萨。”
    이제 제17품의 대의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냈다면, 마땅히 어떻게 안주하고
    어떻게 자신의 번뇌와 망심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81 –
    “선남자 선여인이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고자 발심하였을 때는 마땅히 먼저 이와 같은 마음
    을 내어야 한다. ‘나는 마땅히 삼계육도의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생사윤회의
    고해에서 벗어나 열반의 고요한 여래 경계에 들게 하리라.’ 비록 이렇게 일체중생을 제도하
    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사실 나에 의해 제도된 중생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지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자아·타인·중생·수명 등 온갖 상에 대한 분별
    이 있다면 그는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以上的问答,须菩提的提问与佛的回答与前面第二品中的几乎一样。但下面佛的回答才是这
    一品要破的重点,即:究竟是谁在发求取无上正等正觉的心?能有一个真实不变的这样的心吗?
    这样的境界吗?究竟能有什么东西在发心?既然无我、无人,是谁在发心?或有一个“如如不动、
    不生不灭、无形无相”的东西,等着圆满?等着得佛果?原文佛是这样说的:“佛告诉须菩提,实
    无有法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者。”其中的“实无有法”中的“法”可以指人、心、境界,看得见或看
    不见的物质,或者你认为的任何东西。
    이상의 문답에서 수보리의 질문과 부처님의 해답은 앞서 제2품의 내용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언급되는 부처님의 해답이야말로 이 품에서 깨뜨리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즉 “도대체 누가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는 마음을 냈는가? 변함없는 진실한 이런
    마음, 이런 경계가 존재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마음을 내고 있는가? 어차피 무아·무인이라
    면 누가 지금 마음을 내고 있는가? 혹은 ‘여여부동하는, 생멸이 없는, 형체가 없는’ 어떤 것
    이 있어서, 그것이 원만해지기를 기다리고 불과 획득을 기다린단 말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원문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중의 ‘법’은 사람·마음·경계이거나 혹은 보이
    거나 보이지 않는 물질 혹은 그대가 그렇다고 여기는 그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在经文开篇,须菩提提了一个刚发心怎样安住的问题,这也是大家刚开始修证佛法普遍关注
    的问题。即:想成就佛果,但内心烦恼、杂乱,心无法安住在菩提道上,大家关注的焦点自然是
    怎样的“修证方式”可以做到安心?佛告诉你,不要着种种相,诸相虚妄。这样弟子们在修布施、
    忍辱等菩萨行中,会逐渐将功德汇归空性。但此处,佛直接剑锋回指,令弟子们回到问题本身。
    你说你要发心求取无上正等正觉,如果无我,到底是谁在发心?并直接肯定地告诉你,并无这样
    一位众生存在。如果有一个发心者,我们就会有我相,有众生相,也会等着未来看到佛果、佛
    相,有法可得、有果可成了。这是我们“发心”求佛果时要了知的根本见地——发心时即是“无我” 的。所以根据“般若智慧”,《华严经》中才能说:“菩萨初发心即成正觉。”
    경문 서두에서 수보리는 지금 막 발심한 경우라면 어떻게 안주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는 불법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 모두가 보편적으로 주목하는 문제입니다. 즉 불과를 성취
    하고 싶으나 내심은 번뇌로 어수선해서 보리도에 마음을 안주시킬 수 없을 때, 사람들의 초
    점은 자연히 ‘어떤 수행 방식이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가에’에 맞춰집니다. 부처님께서 온갖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모든 상은 허망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하면 보시나 인욕 등의 보살행을 닦는 중에 공덕이 점차 공성으로 모여들 수 있기
  • 82 –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화제를 돌려 제자들이 문제 자체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대가 무상정등정각을 얻고자 발심하였다고 하는데, 만약 ‘무아’라면 도대체
    누가 발심하고 있냐고? 부처님은 확신에 차서 이런 중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긍정하셨습니
    다.
    만약 발심한 이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상과 중생상이 있어 미래에 불과와 부처의 모습을
    보기 기다리게 되어 얻을 법이 있고 이룰 수 있는 과위가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
    로 우리가 ‘발심’하여 불과를 구하고자 할 때 알아야 할 근본적인 견지입니다. 즉 마음을 내
    는 그 순간이 곧 ‘무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 지혜’에 근거하여 화엄경에서는 “보살은
    처음 마음을 낼 때 곧 정각(正覺)을 이룬 때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金刚经》读到这里,我总会想起禅宗二祖慧可在达摩祖师处求法的故事。当二祖忍着断臂
    的痛苦,跪在雪地中向祖师说:“我心不安,请问安心之法。”达摩祖师瞪圆眼睛,大声说:“将心
    拿来,我为汝安。”想当时在雪地已跪了三天三夜,又刚自断了一条臂的二祖,必定瞬间诸心被达
    摩的话音打落,身心一如白茫茫空寂的大地。他轻声说:“觅心了不可得。”低低的声音在白茫
    茫、空荡荡的身心世界响起,如空谷回音,无生处,也无灭处。萦绕着,却没有痕迹。祖师肯定
    地说:“我已为汝安心竟。”而此时,佛也在问:“谁在发无上正等正觉?”不啻于达摩祖师的“将心
    拿来,我为汝安”。弟子们瞬间闻言反观,也很难寻找到一个“自我”,找到一个“能发心的东西”。
    在佛教史上,因为给《金刚经》划分段落而被挨骂的昭明太子,将这一品起名为“究竟无我分”,
    起得不错。前面佛已与须菩提的问答中谈了很多不应着我相的内容,到这儿真的是究竟无我了。
    금강경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는 늘 선종의 이조(二祖) 혜가(慧可)가 달마대사에
    게서 법을 구하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조가 팔을 자르는 고통을 참으면서 눈밭에 꿇어
    앉아 조사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불안하니 부디 안심의 법을 일러주십시오.”
    달마대사는 눈을 크게 뜨고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갖고 오라. 내가 그대를 위해 안심시켜 주리라.”
    그때 이미 눈밭에서 사흘 동안 밤낮으로 꿇어앉아 있었던 데다가 방금 스스로 팔 하나를
    절단한 이조였기에 달마의 호통에 순간 모든 마음의 생각이 다 떨어져 나가 몸과 마음은 마
    치 온통 하얗고 텅 빈 대지와 같아졌을 것입니다.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마음을 찾았으나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낮은 소리는 하얗고 끝없이 텅 빈 몸과 마음의 세계에 울려 퍼져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
    리처럼 생겨나는 곳도 사라지는 곳도 없이 맴 돌뿐 흔적도 없었습니다.
    조사는 확신에 차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마음을 안온케 하였다.”
    지금 부처님께서도 “누가 무상정등정각을 내었는가?” 묻는 것 또한 달마대사의 “그 마음
    을 갖고 오라. 내가 그대를 위해 안심시켜 주리라.”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스스로 되돌아본다면, ‘자아’, 그리고 ‘마음을 내는 실체’를 찾기란 매
    우 어려울 것입니다. 불교 역사상 금강경에 단락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던 소명태자가 이 품
    의 이름을 ‘구경무아분’이라고 지었는데 꽤 탁월한 선택입니다. 앞서 부처님께서는 이미 수
    보리와의 문답 과정에서 아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많이 다루셨지만, 여기에 이
  • 83 –
    르러서야 진정 궁극적으로 자아가 부재하게 된 것입니다.
    接着,佛又用他在过去世时,在燃灯佛处学佛的事例来谈。他问须菩提:“如来于燃灯佛所,
    有法得无上正等正觉吗?”即如来曾在燃灯佛所,有一个东西得到了无上正等正觉了吗?这个东西
    可以是人、心或境界,或你认为的一切等。须菩提答:“佛于燃灯佛所,无有法如来得无上正等正
    觉。”在此,须菩提已了悟如来的无形无相,无有一念的真空境界。所以,他马上这样回答。佛肯
    定了须菩提的回答,说:“是这样,如果我曾经在燃灯佛那里,还有一个心或还有一念,一个境界
    在得无上正等正觉,就没有安住在“如来本有的真空之境”。燃灯佛也不会与我授记,说,你于未
    来世可以成佛,号释迦牟尼。正因为我安住在“诸法皆空”的境界,如如不动,精勤修六度,燃灯
    佛才说我某某世一定成佛,号释迦牟尼。”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전생에 연등불 처소에서 불법을 배우던 사례를 들어 말씀하셨습니
    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무상정등정각을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는가?”
    즉 여래가 과거에 어떤 ‘실체’가 있어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실체는
    사람·마음·경계 혹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무상정등정각을 얻을 만한 법은 따로 없었
    습니다.”
    이때는 수보리가 이미 형상도 없고 일념도 없는 여래의 진공 경계를 깨달은 상황이었기에
    곧바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답변을 긍정하고 나서 말씀하셨
    습니다.
    “그렇다. 만약 내가 일찍이 연등부처님 그곳에서 아직 어떤 마음이나 한 생각, 혹은 어떤
    경계가 있어 무상정등정각을 얻는 중이라고 여겼었다면 ‘여래 본유의 진공 경계’에 안주하
    지 못한 것이기에, 연등부처님도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부처
    가 되리라’고 수기를 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바로 내가 ‘일체법이 모두 공하다’는 경계에
    안주하여 여여부동하며 정진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였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비로소 내가 어
    느 세상에 반드시 성불하여 이름은 석가모니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佛在此处谈到过去无量劫,他在燃灯佛处修菩萨道。燃灯佛看到弟子已安住在佛的知见道
    上,如“发愿普度众生,内心实无众生可度”,“不着我相、众生相”,“修忍辱,知实无辱可忍,能
    不起瞋念”,“修布施,不着施者、受者、所施一切的相,不着功德相、不着法相、佛果相”。用佛
    的正见不断清除虚妄的,但令自己迷失的贪瞋痴慢疑以及习气、欲望。故燃灯佛方为弟子授记未
    来某一世圆满佛果(授记的意思是成佛的保证)。当然,如没有东西能发无上正等正觉,也无任
    何东西来得燃灯佛的授记。万法无我,这即是如来真义。所以佛接着说:“如来者,即诸法如义” ——所有的一切万法就是这样。
    부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과거 무량겁 동안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보살도를 수행하셨던
    일을 언급하셨습니다. 연등부처님께서는 제자가 이미 부처의 지견도(知見道)에 안주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즉 ‘중생을 널리 제도하겠다고 서원을 세우되 내심에는 제도할 중생이 실
    로 없고’, ‘아상·중생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을 수행하되 실로 참아야 할 욕됨이 없음을
  • 84 –
    알고 화를 내지 않고’, ‘보시를 수행하되 보시하는 자, 보시를 받는 자, 보시하는 물건이라는
    상에 집착하지 않고 공덕의 상이나 법상, 불과상(佛果相)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이었던 것
    입니다. 당신께서는 부처님의 정견을 적용하여 끊임없이 허망한, 그러나 자신을 미혹시키는
    탐·진·치·만·의 그리고 습기·욕망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등부처님께서는 제자를
    위해 미래 어느 세상에 불과를 원만히 이루리라고 수기를 내리셨던 것입니다(수기는 성불의
    보증을 의미함). 물론, 만약 그 어떤 것이 있어 무상정등정각을 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대상도 연등
    부처님의 수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만법은 무아라는 것, 이것이 바로 여래의 진정한 뜻
    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즉 일체 만법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因为弟子们在前面听到的所有道理,即:诸相虚妄不实,不应着一切相,都是佛安住在“如来
    之境”谈的。但这个“如来之境”,在众弟子们还未到达时,只是头脑中的一个幻相,也许是个“虚
    空”一样的东西,也许是一个否定、抛弃一切后剩下的境界、状态,但这都不是“如来真空境界”。
    所以,佛在经文中会继续为弟子们开示“如来”的境界。在此,佛总结说:“如来者,诸法如义。”这
    是说,如来之境就是万法本来的样子,本来就是这样,本来都无自性。当我们破掉分别、执着,
    呈现出的样子就是如来。
    제자들이 앞에서 경청한 모든 이치 즉 ‘모든 상은 허망하여 실체가 없기에 일체 상에 집
    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인데 이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여래의 경계’에
    안주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래의 경계”는 여러 제자가 아직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머릿속에 있는 환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은 ‘허공” 같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일체를 부정한 후에 남은 경계,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래의 진공
    경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계속하여 제자들을 위해 ‘여래’의 경계를
    설법하셨습니다. 이 지점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여래의 경계가 바로 만법 본래의 모습으로서, 원래부터 그러하고 원래부터 모두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별과 집착을 타파하고 나면 드러나는 그 모습이 바로 여
    래입니다.
    下面佛接着开示:“如果有人说,如来得到了无上正等正觉的果位。须菩提,实实在在是其中
    并无一个发心者,也并无一个得到了果位者。正因为这样,佛得到了无上正等正觉。”谈到这,我
    们真的要会心微笑了。无发心者,无果位可得,当我们所求心尽,所得心尽,即可成就无上正等
    正觉。而在此世界,任何有为法的学习中,我们学任何技能、理论、学问,都是有人在学,最后
    总有一个看得见的最高成就。但学习佛法,却是直到彻底知万法虚妄,所求心、所得心不再生
    起,即成就最高、最圆满的觉悟、智慧,而此觉悟智慧无相。
    부처님께서 설법을 이어가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래는 무상정등정각의 과위를 얻었다’라고 말한다면 수보리여, 실제로
    거기에는 발심한 자도 없고 또한 과위를 얻은 자도 없다. 바로 이러하기에 부처는 무상정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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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각을 얻은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우리는 진정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발심한 자도
    없고 얻을 과위도 없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하고,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했을 때, 비로소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
    든 유위법(有爲法) 공부를 보면 그 어떤 기능·이론·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있고 마지막에는
    항상 눈에 보이는 최고의 성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 공부는 만법이 허망하다는 것을 완
    전히 깨닫고 나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때 곧
    최고의 원만한 깨달음과 지혜를 이루게 됩니다. 이때의 깨달음과 지혜에는 상(相)이 없습니
    다.
    我们继续看原文,佛接着说:“在佛成就无上正等正觉这件事中,无实无虚。”佛为什么这么
    说呢?因为当一个人成就无上正等觉时,离所有相,无我、无人、无众生、无寿者,故说无实。
    离所有相后,所求、所得心寂灭,此时才知万法本圆,一切智本具,功德本有,语默动静皆具恒
    沙妙用,所以说无虚。所以如来说:“一切法皆是佛法。须菩提,所言一切法者,即非一切法,是
    故名一切法。”
    계속해서 원문을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가 성취한 무상정등정각 이 일 자체에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누군가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였을 경우라면 모
    든 상에서 벗어나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부재하기에 ‘실다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 모든 상에서 벗어나고 나면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적멸에 들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만법은 본래 원만하고 일체의 지혜와 공덕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음
    을 알게 됩니다.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멈추는 모든 행위 속에 항하의 모래만큼이나 헤
    아릴 수 없는 오묘한 작용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헛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일체법이라 하는 것도 곧 일체법이 아닌 까닭
    에 비로소 이름하여 일체법이라 한 것이다.”
    读到这儿,听到佛说“一切法皆是佛法”。不仅遗憾地想起这么多年在修行中遇到的一些同
    修,没有真正领悟佛说的空性之理,断章取义地记住了这句话,也就被深深地误在了这句话中。
    见过一位同修,吃肉、饮酒、不修边幅,生活中风流多情、放浪形骸、不拘小节、不修禅定、不
    学法门,问他这样可以成佛吗?他说,佛在《金刚经》中说了,“一切法皆是佛法”。是的,一切
    法皆是佛法,在如来之境中皆清净无染。但是,如果你还未真正证入一切法虚妄,还被境转,还
    被相迷,还念念在乎自我的身心觉受,还被此世界七情六欲粘连,所求心、所得心还很重,还有
    恐惧、渴望、得失,还未有平等心,那这世界一切法都会导你走向轮回,而不是导你走向解脱。
    佛法是度人出生死轮回的,如果你不能真了悟佛的性空之理,也就不会真的放下我执,那万法对
    你也无一法是佛法,都成了造业轮回的因。
    이 대목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나니 지난
    많은 세월 동안 수행길에서 만났던 몇몇 도반들이 생각납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부처님께
    서 말씀하신 공성의 이치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채 이 말씀만을 문맥에서 끌어내 기억해
  • 86 –
    두고 결국 이 말씀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만난 그 도반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외모를 가꾸지 않았으며 일상생활에서는
    세속의 예의도 별로 지키지 않았고 풍류를 즐기고 방탕하며 절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정도 닦지 않았고 법문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해서 성불할 수 있겠는가 하
    고 물어봤더니 그는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며, 여래의 경계에서는 모든 것이 청정하며 더럽혀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직 일체법이 허망함을 진정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여러 경계에 휘
    둘리며 상에 미혹되고 끊임없이 자아의 몸과 마음의 느낌에 집착하고 이 세상의 칠정육욕에
    매여 있으며,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강한 데다가 여전히 두렵고
    갈구하는 것이 많아 이해득실에 밝고 평등심이 없다면, 이 세상의 일체법은 그를 해탈이 아
    닌 모두 윤회 쪽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불법은 사람을 생사윤회에서 건져내기 위한 것인데
    만약 부처님의 공성 이치를 깨닫지 못해 아집을 진정으로 내려놓지 못한다면, 일체법이 그
    에게 있어서 불법이 될 법은 하나도 없고 모두 업을 짓고 윤회하게끔 작용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在佛教史上,禅宗二祖晚年浪迹妓院,那是已证入空性的祖师,他可以在一切法中见空性。
    济公活佛怀揣狗肉,说:“酒肉穿肠过,佛祖心中留。”但他说:“学我者、谤我者,皆下地狱。”因
    未证入空性者没有资格学他。或者是现在颇受争议的男女双运道,没有几个人真的在此法门中受
    益,是因为修法者双方都未了悟空性之理,用着相的心,带着情欲来修,故无法在此法门中见空
    性。所以,当我们想到《金刚经》这句话时,别忘了后面那句“所言一切法者,即非一切法,是名
    一切法”,你要彻底了悟万法皆空,无自性,而能时时安住于此,才可能在一切法中见如来。此
    时,才有资格说出“一切法皆是佛法”。
    불교사를 보면 선종의 이조(二祖)는 만년에 기방을 드나들었습니다. 이조는 이미 공성을
    증득한 조사이기에 일체법에서 공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공(濟公) 생불은 개고기를 품에
    넣고 다니면서 “술과 고기는 창자를 지나가고, 부처님은 늘 마음속에 계신다.”라고 말씀했습
    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를 배우는 자, 나를 비방하는 자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말
    씀했습니다. 그것은 공성을 증득하지 못한 자는 그분을 따라 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논란이 많은 남여쌍운도(男女雙運道) 경우도, 이 법문에서 진정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양쪽 모두 공성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상에 집착하는 마음에다 정욕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법문에서 공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금강경의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는 구절을 떠올릴 때, 그 뒤에 이어지는 “이른바 일체법이라 하는 것도 곧 일체법이 아닌 까닭에 비로소 이름하여 일체법이라 한 것
    이다.”라는 구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체법이 모두 공하여 자성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항상 이에 안주해야만 비로소 일체법에서 여래를 볼 수 기 때문입니다. 그때에야 비
    로소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라고 말할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接下来,佛又用人身长大来作比喻。佛第一次讲人身长大是在第十品,佛问须菩提:“譬如有
    人身如须弥山王,于意云何,是身为大不?”须菩提言:“甚大,世尊。何以故,佛说非身,是名
  • 87 –
    大身。”在这一品,佛是要破弟子对功德之身相的执着的。故这次佛又提到大身时,原文是:“须
    菩提,譬如人身长大。”须菩提马上说:“世尊,如来说人身长大,即为非大身,是名大身。”佛讲
    的这个像须弥山王一样的大身,是指大菩萨在修行中的功德庄严之相,此身在法界中可以大如须
    弥山王(须弥山在佛教中,认为它是宇宙中最高最大的山,并且认为它是宇宙的中心)。但即使
    是这样一个功德庄严的巨大身相,因其中并无一个真实的自我,故为非大身,只是起个名字,称
    呼为大身罢了。在此,佛谈到“大身相”是告诉弟子,这个像须弥山王一样的功德身相中,也无
    我、无心,只是一个假名。因在前面佛刚谈到一切法都是佛法,都无自性,都无我,故拿这个功
    德之相来继续阐述此观点。因有的弟子对由功德建立起来的身相有敬畏,易着相。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으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제10품입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으셨습
    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 하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이 크다고 하
    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몸은 몸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공덕으로 이룬 몸의 형상에 대한 제자들의 집착을 파하려고 하셨
    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부처님께서는 또 큰 몸을 언급하셨습니다. 원문은 이러합니다.
    “수보리여,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곧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큰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미산왕처럼 큰 몸은 대보살이 수행 중에 얻은 장엄한 공덕의 상
    을 가리킵니다. 이 몸은 법계에서 수미산왕만큼 클 수 있습니다(수미산을 불교에서는 우주
    에서 가장 높고 가장 큰 산으로, 또한 우주의 중심으로 여김). 그러나 이렇게 공덕이 장엄
    하기를 거대한 몸 같다고 하여도 그 안에 진실한 자아가 없으므로 사실은 장대한 몸인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이름을 붙여 장대한 몸이라 부를 뿐입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장대한 몸’을 논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수미산왕 같은 큰 공덕의 몸
    또한 무아, 무심이기에 가명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부처
    님께서 일체법이 모두 불법으로서 모두 자성이 없고, 무아라고 방금 언급하셨기에 이 공덕
    의 상을 빌려 위 관점을 계속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어떤 제자들이 공덕으로 세워진 몸
    의 형상에 경외심을 느껴 상에 집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佛接着说:“由此,菩萨也是这样。如果菩萨认为有一个我可以灭度无量无边众生时,即不能
    够称为真正的菩萨。何以故,须菩提,实无有一个人或心、或境界可以称名为菩萨。所以佛说一
    切法无我、无人、无众生、无寿者。”听到这,我们要懂得我们在发心,在行菩萨道,但其中并无
    一个可以称名为菩萨的东西。身、心、行为皆空,这就是大菩萨的境界,这就是如来之境。所
    以,佛接着说,原文是:“是故佛说,一切法无我、无人、无众生、无寿者。”这一句仍是呼应前
    面讲的“一切法皆为佛法”,也可以前后文这样理解:“一切法无我、无人、无众生、无寿者,故一
    切法皆为佛法。” 佛接着说:“如果菩萨认为,我当庄严佛土,也不能称名为真正的菩萨。为什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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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这样说呢?如来说,庄严佛土者,即非庄严,是名庄严。”以上这一段也出现在第十品中,原文
    是:“须菩提,于意云何。菩萨庄严佛土不。”“不也,世尊。何以故,庄严佛土者,即非庄严,是
    名庄严。”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보살이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멸도하리라’고 한다면 그는 진정한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진실로 그
    어느 한 사람이나 마음, 혹은 경계를 이름하여 보살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
    처는 말한다, 일체법이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라고.”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발심하여 보살도를 행하되 거기에는 보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 행위 모두 공한 이것이 바로 대보살
    의 경계이며, 여래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고 부처는 설한 것이
    다.”
    이 구절은 여전히 앞에서 설하신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라는 말씀과 호응하므로 앞뒤
    문맥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으므로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보살이 ‘나는 반드시 불국토를 장엄케 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진정한 보살이
    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케 하는 것은 곧 장엄케 하는 것이 아니
    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장엄케 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상술한 이 단락 또한 제10품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원문은 이러합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장엄하게 하는 것이 아
    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장엄하게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大家比较这两段文字,就发现佛破相的重点不同。第十品中,佛要破的是“庄严佛土”这个行
    为在众生心中的执着。而在第十七品,佛是在破菩萨的“自我”,在菩萨的认知中,并无一个“我”在
    庄严佛土。菩萨在行菩萨道中,念念利他,因为实无我、无人、无众生,所以念念利他也是念念
    利自己,所有的功德回向自己,即庄严自心佛土,可以使自己越来越无我,越来越成为万法庄严
    的法界一切,这也是庄严佛土。但正因为万法无我,故庄严佛土这件事也是假名。如果菩萨不能
    安住于这样的知见利他,那是只做人间善业,不能称为真正的菩萨行。所以,佛在本品最后说:
    “如果一位菩萨能通达无我法者,如来说,才可以真正称作是一位菩萨。”
    이 두 단락을 비교해 보면, 부처님께서 상을 깨뜨리시는 그 중점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
    게 됩니다. 제10품에서 부처님께서 깨뜨리려고 하신 것은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라는 이
    행위 자체에 대한 중생 마음속의 집착입니다. 이에 반해 제17품에서는 보살의 ‘자아’를 깨뜨
    리는 데 역점을 두셨습니다. 보살의 인지 가운데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보살이 보살
    도를 행함에 있어 매 순간 남을 이롭게 하지만, 실상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으며, 중생
  • 89 –
    도 없으므로 매 순간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며, 모든
    공덕을 자신에게 회향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모든 공덕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자신 마음속의 불국토는 점점 장엄해지는 반면 자신의 자아는 점차 무아(無
    我)의 경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만법은 장엄한 법계 일체 그 자체로 되어가니 이것
    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법이 사실 무아이
    므로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이 일 또한 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보살이 이런 견지에 안주하지 못한 채 남을 위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다만 인간 세상
    의 선업을 짓는 것일 뿐 진정한 보살행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본
    품의 마지막에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느 한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비로소 그를 진정한 보살이라
    부를 것이다.”
    一个人从生下来,他的认知中就会确立起两个境:一个是我;一个是相对我建立起来的万
    法,也包括他人,无量无边、各道各类有情众生,以及自然界草木顽石等有灵无情众生。而人一
    生执着、分别、取舍、得失的也不过是这些东西。佛的智慧中告诉我们:每一个人、事、物,都
    由诸缘聚集而成。其中并无一个不变的、真实的自性存在,都只是一个假名。你不必执着这一切
    的生灭得失,因为这一切的生灭得失只是幻化,这即称为“无我法”,佛学中分开称“人无我”、“法
    无我”。
    한 사람이 태어나면 그의 인지 속에는 두 가지 경계가 확립됩니다. 하나는 ‘나’, 다른 하
    나는 ‘나’에 상대하여 구축된 만법인바 거기에는 타인과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궤도의 가지
    각색의 유정 중생들, 그리고 자연계의 풀과 나무, 바위 같은 영(靈)은 있으나 정이 없는 무
    정 중생들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평생 집착하고 분별하고 취하고 버리고 잃고 얻는
    것은 사실 이런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과 사건 그리고 사물은 여러 인연이 모
    여서 이뤄진 것일 뿐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진실한 자성이 없으므로 이러한 것 모두 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러한 모든 것들의 생멸과 득실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냐하면 이 일체의 생멸과 득실은 단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로 ‘무아법’이라고 부르
    는데 불교에서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눠서 부릅니다.
    比如说阿罗汉因要离苦得乐,只证到人无我,住在寂灭中,以寂灭为乐,逃避轮回,未证到
    万法本空。比如要离苦得乐,未证入苦也本空;要离情去欲,未证入情欲也空;即未证得法无
    我,故未出轮回,修证不圆满究竟。大菩萨以无我正见证三界六道万法无自性,轮回也成为假
    相,可生生世世出入六道轮回的幻境,救度仍在苦海中无法解脱的众生,叫“游戏毕竟空”。佛
    说,通达无我这个道理的人,才能称其为真正的菩萨。
    예를 들어 아라한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인무아(人無
    我)만 증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적멸에 머물면서 그 적멸을 낙으로 삼아 윤회에서 도피할
    뿐, 만법이 본래 비어 있다는 ‘만법본공(萬法本空)’의 이치는 증득하지 못했습니다. 괴로움
    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 하지만 괴로움 또한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증득하지 못했음을
    입증할 뿐이고, 정욕을 끊어내려 하지만 정욕 또한 공하다는 것을 증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 90 –
    즉 법무아(法無我)를 증득하지 못했기에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수행과 증득
    이 원만하거나 궁극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보살은 무아의 정견(正見)으로 삼계육도 만법에 자성이 없음을 증득하면 윤회
    또한 가상(假相)이 됩니다. 그리하여 세세생생 육도윤회의 환상적인 경계를 드나들면서 고
    해에서 여전히 해탈하지 못하는 중생을 제도하는데, 이것을 ‘유희는 필경 공하다[游戱畢竟
    空]’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의 이 이치를 통달한 사람만이 비로소 참다운 보살이라
    칭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18품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须菩提!于意云何?如来有肉眼不?”“如是,世尊!如来有肉眼。”“须菩提!于意云
    何?如来有天眼不?”“如是,世尊!如来有天眼。”“须菩提!于意云何?如来有慧眼不?” “如是,世尊!如来有慧眼。”“须菩提!于意云何?如来有法眼不?”“如是,世尊!如来有法
    眼。”“须菩提!于意云何?如来有佛眼不?”“如是,世尊!如来有佛眼。”“须菩提!于意云
    何?如恒河中所有沙,佛说是沙不?”“如是,世尊!如来说是沙。”“须菩提!于意云何?如一
    恒河中所有沙,有如是沙等恒河,是诸恒河所有沙数佛世界”,“如是,宁为多不?”“甚多,世
    尊!”佛告须菩提:“尔所国土中,所有众生,若干种心,如来悉知。何以故?如来说:诸心皆
    为非心,是名为心。所以者何?须菩提!过去心不可得,现在心不可得,未来心不可得。”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는 육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는 천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는 혜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는 법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는 불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항하에 있는 모래를, 부처는 모래라고 설하였는
    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래라고 설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한 항하에 있는 모든 모래 수 만큼의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이 세계가 진정 많지 않겠는
    가?”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국토에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곧 모두 마음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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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这一品的大意是,佛连续向须菩提发问:“如来有肉眼不?如来有天眼不?如来有慧眼不?如
    来有法眼不?如来有佛眼不?恒河中所有沙,佛说是沙不?”须菩提都做了肯定的回答:“如是世
    尊,如来有肉眼。如是世尊,如来有天眼。如是世尊,如来有慧眼。如是世尊,如来有法眼。如
    是世尊,如来有佛眼。如是世尊,如来说是沙。”佛为什么忽然向须菩提提问起五眼六神通的问
    题?在此先谈什么是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五眼六神通”是修证佛法者证入空性后具
    有的能力。五眼与六神通相配,除肉眼外,每种眼都带有一定等级的神通,是每个人自性本有的
    功能,每个人都有,但只有进入如来真空境界,才能全部开显出来,五眼代表不同等级的证量。
    이 품의 대의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연속해서 질문을 던지시는 내용입니다. “여래는 육안(肉眼)이 있는가? 여래는 천안(天眼)이 있는가? 여래는 혜안(慧眼)이 있는가?
    여래는 법안(法眼)이 있는가? 여래는 불안(佛眼)이 있는가? 저 항하의 모든 모래를 부처는
    모래라고 설했는가?”
    수보리는 모두 긍정적으로 답변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
    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
    래는 법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
    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래라고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갑자기 수보리에게 오안육신통(五眼六神通)에 대해 질문하셨을까요? 여
    기에서 먼저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안육신통’은 불법을 수행하는 이가 공성에 증입한 후에 획득하게 되는 능력입니다. 오
    안과 육신통은 짝을 이루는데 육안을 제외한 나머지 눈은 모두 일정 수준의 신통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자성 본유의 기능인지라 사람마다 모두 지니고 있으나 여래의 진공 경계에
    진입해야만 그것들이 모두 열려서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오안은 서로 다른 단계의 증량
    (證量)을 나타냅니다.
    肉眼大家都知道,每个人都有两只眼睛,只要不盲,就具备肉眼功能。可以视山河大地,也
    可以通过所见揣度、推测过去与未来的一切人、事、物,只是不太准确。但因人类认为万物实
    有,因对物质的执着,故五眼中肉眼障碍局限性最大,无法透视任何物质背后的东西,而且时空
    对其也有障碍,无法观到视力范围之外的一切,无法远距离遥视,无法看到极微小的一切(比如
    细菌),也无法看宏观的东西,同样无法真实地看到过去、未来等。
    육안은 누구나 알고 있듯 모든 사람이 가진 두 눈입니다. 시력을 잃지 않은 이상 육안의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산하대지를 볼 수 있고 또한 이렇게 보이는 것을 통해 과거와 미
    래의 인물·사건·사물을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
    물이 모두 실제로 있다고 믿고 물질에 집착하기에 오안 중 육안의 장애와 국한성이 가장 큽
    니다. 따라서 물질 너머의 것을 꿰뚫어 볼 수 없으며, 시공간의 제약을 받아 시력 범위를
    벗어난 원거리나 지극히 미세한 것을 볼 수 없고, 거시적인 세계도 볼 수 없으며, 같은 이
    치로 과거·미래 등에 대해서도 진실하게 보아내지 못합니다.
    수보리여!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
    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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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眼、慧眼、法眼建立在一定的定力基础之上,有很多类众生在能力上天生具备,但在心性
    的开悟上,没有佛弟子的知见。这三种眼看一切更透彻,时空物质的障碍几乎很少。比如可以遥
    视、透视、微观(像显微镜一样)、宏观(如将整个银河系纳入眼底),观看过去发生的事,预
    测未来等,可以用意念移动、转移、变化物体等。只是从天眼到法眼等级递增,同时配有天眼
    通、天耳通、他心通、神足通、宿命通。神通的大小从天眼到法眼递增,比如天眼的五种神通与
    法眼的五种神通是不一样的。佛眼是成佛后具备的能力,可以彻万法源,在神通中也是最究竟圆
    满,而且只有佛眼具有六通中的漏尽通。
    천안·혜안·법안은 일정한 선정의 힘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많은 유형의 중생은
    태생적으로 이 능력을 갖추기도 하지만 심성의 깨달음에서는 불제자의 지견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 종류의 눈은 모든 것을 더욱 투철하게 볼 수 있고 시공간과 물체의
    장애도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원격 투시, 미세 관찰(현미경과 비슷함), 거시 관찰(은하
    계를 전체를 보는 것)을 할 수 있으며 과거에 발생한 일도 볼 수 있고 미래도 예측할 수 있
    으며 의념으로 물건을 이동·전이·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천안에서 법안으로 등급이 점차 높아갈수록 동시에 천안통·천이동·타심통·신족통·숙명통이
    수반됩니다. 신통력의 크기도 천안에서 법안으로 갈수록 점차 커집니다. 이 경우에 일례로
    천안의 다섯 가지 신통력과 법안의 다섯 가지 신통력은 같지 않습니다.
    불안은 성불 후 생기는 능력으로, 일체 만법의 근원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신통력 중에
    서 가장 원만하고 궁극적인 능력입니다. 또한 오직 불안만이 육신통 중 누진통(漏盡通)을
    갖추고 있습니다.
    这是五眼在能力上的启用。在心性的开悟方面,禅宗祖师六祖说:“一切人尽有五眼,为迷所
    覆,不能自见。”故佛教除却迷心,即五眼开明。念念修行般若波罗蜜法,初除迷心,名为第一肉
    眼;见一切众生,皆有佛性,起怜悯心,是名第二天眼;痴心不生,名为第三慧眼;着法心除,
    名为第四法眼;细惑永尽,圆明遍照,名为第五佛眼。又云,见色身中有法身,名为天眼;见一
    切众生,各具般若性,名为慧眼;见性明澈,能所永除,一切佛法,本来自备,名为法眼;见般
    若波罗蜜,能生三世一切法,名为佛眼。
    이것이 바로 능력적인 측면에서의 오안(五眼)입니다. 심성의 깨달음에 있어서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는 “모든 사람은 모두 오안이 있으나 미혹에 가려져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미혹된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곧 오안을 밝게 여는
    것입니다.
    매 순간 반야바라밀법을 수행하여 미혹된 마음을 처음으로 제거하면 이를 제1 육안이라
    하고,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음을 알고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을 이름하여 제2 천안
    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제3 혜안이라 하고 법에 머무
    는 마음을 없앤 것을 이름하여 제4 법안이라 합니다. 또한 미세한 번뇌마저도 끝까지 제거
    하여 원만한 밝음이 온 누리를 두루 비추는 것을 이름하여 제5 불안이라 합니다.
    또 다른 설명에 의하면 몸의 형상 속에 법신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을 천안이라 하고, 일체
    중생이 모두 반야 자성이 있음을 보는 것을 혜안이라 하며, 자성을 보는 것이 투철하여 주
    체[能]와 대상[所]의 분별이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불법이 본래 스스로 그렇게 있음을 보는
  • 93 –
    것을 법안이라 하며, 반야바라밀이 삼세의 일체법을 생겨나게 함을 보는 것을 불안이라 합
    니다.
    佛说的五眼是当我们真正破尽所有相时,即像拿掉了心性上层层遮挡的东西,对万法的真相
    了悟得越来越清晰了,同时也圆满开启我们本有的能力,我们将它起个名字叫“五眼六神通”。因
    我们现在听讲的人大部分都没有神通,所以佛说肉眼,大家马上还能联想到自己的一双眼睛;说
    天眼,大家都就认为长在眉心,因为神话故事中的神仙们眉心都有一只眼睛;但说到慧眼、法
    眼、佛眼,大家就不知道长哪儿了。自性如来无形无相,其实本质上五眼并无生处。在此,我们
    关注的是佛为什么开始提问须菩提关于五眼的问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오안은 우리가 모든 상을 진정으로 다 타파했을 때, 마치 본래의 성
    품을 겹겹이 가리고 있던 가리개들을 치워버린 것처럼 만법의 실상을 더욱더 명확하게 깨닫
    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능력을 원만하게 연
    상태이기도 한데, 이를 우리는 이름하여 ‘오안육신통’이라고 합니다.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우리 대부분 사람은 신통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육안
    을 말씀하시면 여러분은 즉시 자신의 두 눈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천안을 말씀하시면 여
    러분은 모두 그것이 미간에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신화 속의 신선들이 모두 미간 사이에
    그런 눈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혜안·법안·불안을 이르면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자성여래는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기에 사실 본질적으로는 오안이 위치한 곳이라는 그런 데
    가 따로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부처님께서 왜 수보리에게 오안에 관
    하여 질문하셨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对未开启五眼功能的人,佛这样提问的时候也许只是几个字,但对于须菩提以及在场证阿罗
    汉果位的大弟子们,他们有不同证量的神通。佛说天眼,他们已身心中呈现出的即有天眼的境界
    和认知,慧眼即呈现出慧眼的境界和认知等。在前面第十四品中,须菩提谈到:“我从昔来所得慧
    眼,未曾得闻如是之经”,这说明须菩提至少有慧眼的证量。
    오안 기능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이런 질문은 단순히 몇 마디 말씀에 불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는 다르게 수보리와 그 자리에 참석한 아라한 과위를 증득한 대 제
    자들에게는 각자의 깨달음의 정도[證量]에 따른 신통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천
    안을 말씀하시면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즉시 천안의 경계와 인식이 나타났을 것이며, 혜안
    을 말씀하시면 혜안의 경계와 인지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앞서 제14품에서 수보리는 “저는
    예로부터 얻은 바의 혜안으로는 이와 같은 경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수
    보리가 최소한 혜안의 증량(證量)이 있었음을 설명합니다.
    当然,佛在此问须菩提这些问题并非是与弟子们比神通,也并非是说如来有五眼六神通,你
    们快点证入吧,更不是说我现在比你们厉害,看,我圆满证得了五眼。佛法中视“五眼六神通”是
    小术,真正证入果位的菩萨只把它们作为度众生的一个工具。尤其阿罗汉们以寂灭为乐,长久住
    在灭尽定中,不启用神通。所以在《法华经》中,大家都读到过当佛放光惊天动地大显瑞相后,
    又说有一个最高知见没有告诉弟子们时,有五千比丘退席了。除慈悲心不够、自以为证得之外,
    其实有一个小原因,是他们不屑于观看这些如魔法幻化般的神通境界。但阿罗汉们不屑观看,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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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代表他们没有。他们大多数有天眼、慧眼或法眼,随这些能力的开启,他们在禅定中看到了更广
    阔时空中的众生与境界。比如:阿罗汉可追溯上下几千年的历史,而佛可彻万法源,没有时空的
    限制。
    물론,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수보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신 것은 제자들과 신통을 겨루
    기 위함이 아니며, 여래에게 오안육신통이 있으니 너희들도 빨리 증득하라고 재촉하시는 것
    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너희들보다 더 뛰어나다. 보아라, 난 오안을 원만하게 증득하지 않
    았는가”라고 과시하시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불법은 ‘오안육신통’을 작은 술법으로 여길 뿐입니다. 진정으로 과위에 증입한 보살은 그
    것을 중생 제도의 도구로만 씁니다. 특히 아라한들은 적멸을 더 즐기기에 오랫동안 멸진정
    (滅盡定)에 머물면서 신통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아
    천지를 뒤흔드는 상서로운 징조를 크게 나타내신 후 제자들에게 아직 알려주지 않은 최고의
    지견이 있다고 말씀하시자 오천 명의 비구들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그 장면 말입니다. 이는
    그들의 자비심이 부족하거나 스스로 다 깨달았다고 자만한 탓도 있지만, 사실 또 다른 소소
    한 이유는 그들이 이런 마법이나 환상같은 신통 경계를 보는 것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기
    도 합니다.
    하지만 아라한이 이를 하찮게 여긴다고 해서 그들에게 신통력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 대부분은 천안, 혜안 혹은 법안이 있어 수시로 이런 능력을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정에서 더 광대한 시공간에 있는 중생과 경계를 봅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은 과거와 미래
    수천 년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부처님은 만법의 근원을 꿰뚫
    어 보시기에 시공간의 제약이 전혀 없으십니다.
    那么应该怎样看待境界中的万法与众生呢?这也是应关注的问题。佛在问完五眼的问题后,
    又担心没有神通的众生着神通的相,故马上又问须菩提:“恒河中所有沙,佛说是沙不。”须菩提
    说:“如是,世尊,如来说是沙”。如来真空之境是平凡的,即使如来具备五眼六神通,但在哪一
    道说哪一道的话。如来在人道与人交流,也说沙子是沙。佛在此处,因为着重要谈的是真空的启
    用,所以佛不会说“沙非沙,是名为沙”。因通过前面的讨论,弟子们已不再执着沙相。所以,真
    正证入如来真空之境的人非常的平实普通,不会无缘无故显示任何奇异之相。就像《金刚经》的
    开篇,佛与他的弟子一样普通:托钵化斋、吃饭、打坐、说法,即使显示神通也是为了弘法利生
    的需要,神通光明也虚妄不实,只是幻化。须菩提明白佛要表达的意思,马上平和地回答:“佛说
    是沙”。
    그럼 경계 속의 만법과 중생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 또한 주목해야 할 문제입
    니다. 부처님께서 오안에 대한 질문을 마치신 후 신통력이 없는 중생이 신통이라는 상(相)
    에 집착할까 봐 걱정되어 즉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항하에 있는 모든 모래를 부처가 모래라고 설했는가?”
    수보리가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래라고 설하셨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는 평범하여 비록 오안육신통이 있어도 육도(六道) 중 그 어느 궤도에
    계시면 그 궤도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래께서 인간 세상에서 사람과 교류하실 때 모래를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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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진공의 쓰임새이므로 부처
    님께서는 “모래는 모래가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모래라 한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
    으십니다. 앞선 토론을 통해 제자들은 이미 모래 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여래의 진공경계에 증입한 사람은 아주 수수하고 평범하여 아무런 이유
    없이 그 어떤 기이한 상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는 금강경의 서두에서 부처님께서 제자
    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탁발하시고 식사하시고 좌선하시며 설법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도 오직 법을 널리 펴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방편일 뿐
    이며 신통의 광명 또한 허망하여 실체가 없는 환상일 뿐입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표현
    하시려는 뜻을 분명히 잘 알고 있으므로 즉시 평온하게 “부처님께서는 모래라고 말씀하셨습
    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佛一句一句问完五眼,有证量神通的弟子们头脑中应该有不同的现量境界,此时,佛话锋一
    转,问须菩提:“佛所教化的世界,数量有恒河中所有沙子那么多的恒河,再有这么多条恒河中的
    沙子那么多。”这个比喻有点拗口,但佛这样说,我们有个概念,即:佛世界无量无边,不可数。
    佛接着说,“这么多世界国土中有无量无边数不清的众生,他们有无量无边各个不同的心念,如来
    全部知晓。”在这如来说“无量无边众生的心念,如来全部知晓”,并非是在说神通里的他心通。他
    心通是有感知别人心波振动的能力,并且同时能解读、破译这些东西。佛在此并非谈神通。
    텍스트에서 이 지점은 부처님께서 오안에 관해 한 구절씩 질문하신 후이기에 증량과 신통
    력을 갖춘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저마다의 직접적인 체험[現量]의 경계가 떠올랐을 것입니
    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화제를 돌려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가 교화하는 세계는 항하의 모든 모래 수량만큼이나 많은 항하가 있고, 그리고 다시
    그 수많은 항하의 모래 수량만큼 많다.”
    이 비유는 다소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바에서 우리는 알아
    야 합니다. 부처의 세계는 무량무변이라 그 수량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그 사실 자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토록 수많은 세계와 국토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중생이 있다. 그들 또한 무량무
    변의 같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래는 이에 대해서 그 전부를 다 알고 있다.”
    여기서 여래께서 무량무변의 중생 생각을 전부 다 안다고 하신 것은 신통력 중 하나인
    ‘타심통’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타심통은 타인의 마음 파동을 감지하는 동시에 해독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 대목에서 부처님께서 신통력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
    다.
    我们接着听佛要表达什么,他说:“这么多众生,这么多各种不同的心念,可以总名为一种
    心,即‘妄心’”。原文是:“何以故,如来说诸心皆为非心,是名为心。”到此,我们才终于明白,
    佛为什么要问须菩提关于五眼的问题,佛是要告诉弟子们,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所
    见都是虚妄。不要以为我说的诸相虚妄只是在人道,只是在人世界。在无量无边的佛世界,各种
    各样的众生,有形无形,只要还在时空中,还在轮回之中,都是妄心妄念,都没有一个不变的不
    生不灭的心体。用天眼、慧眼、法眼看到的与肉眼一样,所有的一切都虚妄不实。为什么这么说
    呢?因为过去心、未来心、现在心皆不可得。
  • 96 –
    이어서 부처님의 다음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이토록 많은 중생의 다양한 마음의 생각들을 통틀어 한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망심’이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곧 모두 마음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제야 우리는 부처님께서 왜 수보리에게 오안에 관련하여 질문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으로 보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
    려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이치가 단지 인간 세상에만 해당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의 세상에 존재하는 각양각색의 중생이 형상이 있든 없든, 그들이 여전히 시공간에 존재하고 윤회하기만 하면 모두 망심과 망념이기에 변하지 않는 불
    생불멸의, 마음의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천안·혜안·법안으로 본 것이 육안으로 본 것과
    다르지 않아 모든 것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
    래의 마음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佛告诉弟子们,如来用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遍观众生,无量无边的众生都是活在
    妄心中。为什么全是妄心呢?我们没有神通,但我们可以观察自己的心念。前念刚过,当念又
    起,念念不断,流向未来。观所有的心念,都无有生处,无有灭处,也无一个真实不变的心体。
    即使是无色界、非想非非想处天的众生,看似无形无念,但心却有一个“动”的势。因为他在时空
    里,他就有过去、未来,只要他认为自己动念了就又开始轮回。他要懂得“念”的虚妄,懂得“心”本
    无生无灭的道理,他就可以从轮回中解脱。所以佛最后说:“三心皆不可得,都为虚妄”。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래가 오안으로 중생을 두루 살핀 바에 의하면 헤아릴 수 없
    이 많은 중생이 모두 자신의 망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왜 전부 망심일까
    요? 우리가 비록 신통력은 없지만 자기 생각을 관찰할 수는 있습니다. 앞선 생각이 금방 지
    나가는가 싶더니 현재 생각이 또 일어나고, 이렇게 생각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미래를
    향해 흘러갑니다. 이 모든 마음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것들은 모두 생겨나는 곳도, 사라지는
    곳도 없으며 진실로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 중생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형체도 없고 생
    각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에는 여전히 미세한 ‘움직임’의 추세가 있습니다. 시공간
    속에 있기에 그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있고 스스로 마음을 움직였다고 여기는 순간 윤회는
    또다시 시작됩니다. 그가 ‘생각’의 허망함을 알고 ‘마음’은 본래 생멸이 없다는 도리를 깨달
    아야만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에 “세 가지 마음은 모두
    얻을 수 없으며 그것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听到这儿,大家应该明白“情”的虚幻了吧。比如“爱情”,根本就没有一个“心”可以得到。你执
    着的爱情,只不过是六根被境转之后,意识的念念相续形成的执着。所以,你说要得到爱人的
    心,他(她)不是不给你,是万法都没有。只有证入如来的真空,才是真心,才是如如不动、不
    生不灭、无形无相的圆觉妙心。而真正了知此境界的人,在此世上,才是随缘了旧业。所以如来
    接着说:“过去心、现在心、未来心不可得”。过去、现在、未来是众生执着的时空观念。人的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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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识刹那不停地从过去流向未来,前念刚过,后念又起,即使中间似乎停顿了,但仍有一个“我不
    动”的认知,这个认知也是念。念念相续,即使睡梦中也未停止念念分别、认知,也正因为有这样
    流动的意识、心,人才会觉得自己的生命在延续。但佛告诉我们,我们这个意识流动形成的认知
    是虚妄不实的,我们的意识在刹那不停地生灭变化,即使有定境,也不过是相对于散乱,相对于
    有我而建立起来的幻境。只是依止此幻境,我们更能看清万法的虚妄本质。
    여기까지 듣고 나면 여러분은 아마도 ‘정(情)’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아셨을 것입
    니다. 예를 들어 ‘애정’이라는 것은 애초에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마음’이라는 실체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집착하는 그 애정은 다만 육근이 경계에 휘둘린 후 의식이 끊
    임없이 이어져 형성된 집착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얻고자 하는, 사랑하는 이의
    그 마음을 상대방이 여러분에게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세상 만법 자체에 그런 실체가 존
    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할 뿐입니다.
    오직 여래의 진공에 증입해야만 진정한 마음이며, 그것만이 여여부동하고 생멸이 없는, 형체가 없는 원각묘심(圓覺妙心)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야만
    이 세상에서 그저 인연에 따라 옛 업을 마무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이어서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은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
    거·현재·미래는 중생이 집착하는 시공간의 관념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의식은 찰나도 멈추지 않고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 앞생각이 막 지나가면 뒷생각
    이 또 일어나 그 중간 어디쯤에서 혹시 멈췄었던 것 같아도, 여전히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인식이 작동하므로 이 인식 또한 생각입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게
    되어 꿈속에서조차도 분별과 인지를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이렇게 흐르는 의식과 마음이
    있어야만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이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 인지는 허망하고 실체가 없으며 우리의 의식은 찰나에
    도 멈추지 않고 생멸 변화한다. 비록 깊은 선정 경계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산만한 상
    태에 대비되거나, ‘나’란 존재가 있다는 전제하에 세워진 환상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러한 환상 경계에 의지하면 만법의 허망한 본질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을 뿐이
    다.”
    因为我们着相,执着万法的差别,执着万法的成住坏空、生灭变异,我们的认知被这些相
    转,便感受到意识在过去、未来流动,才有时间的移动。如果在定境中,心不再被境转时,意识
    从流动变成了波的振动,振动或波动使我们不再有时间在流动的感觉,在认知上认为过去、现
    在、未来在一个点上,此时,佛学行者称这个状态为“当下”。行者活在当下的状态里,就会初步
    感受到时空的变异、心的念念相续都虚妄不实,都像分别、认知形成的泡沫。所以对活在当下的
    行者,即使起心动念,做世间一切事,所思所行,也会变成空中飘动的云,无法影响虚空的空与
    宁静。这即是禅宗六祖所说的“惠能无伎俩,不断百思想”所安住的境界。所以佛在此说,过去
    心、未来心、现在心不可得,在如来之境中是虚妄不实的,是众生着种种相,生种种念,形成的
    流动的幻境。
    우리는 상에 집착하고 만법의 차이에도 집착하며 만법의 성주괴공(成住壞空), 생멸변이
    (生滅變異)에도 집착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이러한 상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
  • 98 –
    의식이 과거나 미래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시공간의 이동이 있게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가령 선정에서 마음이 다시는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의식은 ‘흐름’에서 ‘파의 진동’으
    로 변합니다. 이러한 진동이나 파동은 우리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을 사라지게 하며 인
    지적으로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의 점 위에 있다고 여기게 합니다. 이 상태를 불교 수행자는
    지금 이 순간 즉 ‘당하(當下)’라고 부릅니다.
    수행자가 당하의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면 비로소 시공간의 변화와 마음의 면면히 이어지
    는 생각들이 전부 허망하여 실체가 없는 것으로서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분별과 인지 활동
    이 만들어낸 거품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당하에 사는 수행자들에게는
    비록 마음이 움직이고 생각이 일어나 세상의 모든 일을 하더라도, 그 생각과 행동은 마치
    허공에 떠다니는 구름과 같아서 허공의 공(空)과 고요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
    니다. 이것이 바로 선종의 육조 혜능 대사가 말씀하신, “혜능은 재주가 없어 수많은 생각을
    끊지 않는다”에 안주한 경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과거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
    는 것이며, 여래의 경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모두 허망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서 이는 중
    생들이 갖가지 상에 집착하고 갖가지 생각을 일으켜 만들어낸 흐르는 환상 경계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有同修问我,说我已不再留恋过去,也不担忧恐惧未来,是不是已回到当下的境界?是不是
    已没有过去、现在、未来心?这还不是。在当下六根对六尘时,只要你的分别心一起,比如你
    说,垢净、美丑、善恶等等,只要你比较,就已有过去心,你在过去的认知、经验上比较,只要
    你心中有认知、执着、取舍,现在、未来心已同时生起。过去心、现在心、未来心,在着相的一
    念之间都已经在那里了。人的一生就是过去心、现在心、未来心的延续,小到前念、当念、后
    念,大到前世、今世、后世,每个人刹那不停被万法的生灭变异转。起心动念,念念轮回,世世
    轮回。心中只要有过去、现在、未来的流动,轮回就不会停止。行者只要安住当下,不被境转,
    不着一切相,旁观自己这些虚妄的、刹那不停、运转流逝的念头,和因这些念而生起的种种觉
    受,才有可能看清万法实相,回归生命本源。
    한 도반이 저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우려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으니 이미 당하의 경계에
    돌아온 것이 아닙니까? 이미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
    까?”
    저의 대답은, “아직은 아닙니다”가 되겠습니다. 지금 육근이 육진을 대할 때 그대에게서
    분별심이 일어나는 한, 예를 들면 구정(垢净)·미추(美丑)·선악(善恶) 등을 그대가 견주는 것
    만으로도 그대는 이미 과거의 마음이 생겨 과거의 인지와 경험을 통해 비교하게 됩니다. 그
    대의 마음속에 인지·집착·취사선택이 있게 되면 현재의 마음과 미래의 마음이 동시에 생겨
    납니다.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은 찰나의 생각이 상에 집착하는 그 순간 이
    미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인생은 과거 마음, 현재 마음, 미래 마음의 연속입니다. 작게는 앞선 생각, 지금의 생각, 뒤의 생각에서부터 크게는 전생·현세·내세에 이르기까지 매 사람은 찰나에도 멈추지 않고
    만법의 생멸과 변화에 휘둘립니다. 마음의 움직임과 생각남 모두가 윤회이며, 세세생생이
  • 99 –
    윤회입니다. 마음속에 과거·현재·미래의 흐름이 있는 한 윤회는 멈추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오직 당하에 안주하여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 허망
    하고 찰나에도 멈추지 않으면서 운행하며 흘러가는 생각과 이런 생각으로 인해 생겨나는 온
    갖 느낌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을 때만 비로소 만법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제19품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这一品的大意是,佛陀问须菩提:“须菩提,你认为怎样呢?假若有人手拿充满三千大千世界
    的各种珍宝用来布施,因为这个缘故,这人所获得的福德多不多呢?”须菩提回答佛陀说:“是
    的,世尊。这个人会因为广修布施,获得很大的福报。”佛陀说:“须菩提,假若福德是实有的一
    个东西,那如来就不会说得福德多。正因为福德没有自性,如来才能说得福德多,像虚空一样无
    量。”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울 만한 온
    갖 보물을 가지고 보시한다면, 이로 인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많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보시를 두루 폭넓게 수행하기에 큰 복덕을 얻을 것입
    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복덕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여래는 결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하지 않
    았을 것이다. 복덕은 자성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복덕을 얻음이 많아 허공만큼 헤아릴 수
    없다고 설한 것이다.”
    在前面的第八品中,佛问过须菩提同样的问题,原文是:“须菩提,于意云何。若人满三千大
    千世界七宝,以用布施,是人所得福德,宁为多不。”问话方式与这一品一样,须菩提的回答不
    同。在第八品须菩提回答:“甚多,世尊。何以故,是福德即非福德性,是故如来说福德多。”但
    佛在第八品中要强调的重点是“有人受持读诵此经乃至四句偈等,为他人说,其福胜彼”,所以并
    未对须菩提回答的问题做出评论。而须菩提在第八品中的回答是在为佛的这个问题做个补充说
    明,他担心法会上的其他弟子刚听完诸相虚妄的道理,马上又听到佛说福德多,会生起疑惑,便
    “须菩提!于意云何?若有人满三千大千世界七宝以用布施,是人以是因缘,得福多
    不?”“如是,世尊!此人以是因缘,得福甚多。”“须菩提!若福德有实,如来不说得福德多;
    以福德无故,如来说得福德多。”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덕이 많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덕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하지 않
    았을 것이다.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한 것이다.”
  • 100 –
    补充说:“佛陀说福德多,不是指的福德的本性,本性是空的。”这样对空性教理还在疑惑的弟子
    们,在心中就有性相之分。即相可以说多,而性是空的,不能用多少来衡量。
    앞의 제8품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
    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
    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진정 많지 않겠는가?”
    질문 방식은 이 품에서의 그것과 똑같으나 수보리의 대답은 다릅니다. 제8품에서 수보리
    는 대답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제8품에서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라는 점을 강조하려 하셨기에 수보
    리의 답변에 대하여 평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수보리가 제8품에서 한 대답은 부
    처님의 이 질문에 대한 보충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회에 참석한 다른 제자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이치를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복덕이 많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나서 의혹이 생길까 걱
    정되어 “부처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 복덕의 본성을 이야기하신 것은 아니십니
    다. 본성은 공(空)입니다.”라고 보충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성 교리와 관련해서 여
    전히 의혹이 남아있던 제자들 마음속에 본성과 상의 구분이 비로소 생겨난 것입니다. 즉 상
    은 많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으나 본성은 비어 있으니 많고 적음으로 가늠할 수 없다는 뜻입
    니다.
    但佛陀在第十九品中却说“须菩提,如果福德实有,如来不说得福德多,正因为福德无故,如
    来才说得福德多”,表面上完全与第八品须菩提的回答是相反的,其实并不矛盾。性相是不二的,
    见相就应见性。如果弟子们有性相之分,其实还是建立在意境上的如来真空。随讲解开示的深
    入,如来将弟子们心中的所有相层层迁除。此时,弟子们见相即见性,所以须菩提会回答“世尊,
    此人以是因缘,得福甚多”,不会再说性相之分。
    그러나 부처님께서 제19품에서는 오히려 “수보리여,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제8품에 있는 수보리의 대답과
    완전히 상반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본성과 상은 둘이 아니므로 상을 보
    면 곧 본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에게 상과 본성에 대한 구분이 존재한다면 이는 사실 여전히 의식의 경계에다
    가 여래의 진공을 세우는 것이 됩니다. 설법이 깊어짐에 따라 여래께서는 제자들 마음속의
    모든 상을 층층이 제거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이 상을 보는 것이 곧 본성을 보는 것이기에
    수보리는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덕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라고 대답
    함으로써 다시는 상과 본성의 구분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这个“空”的福德并非是偏空的,什么也没有,如来也不会说“福德空”。正因为行者能了知福德
  • 101 –
    本空的道理,在空性的境界中,福德才多得满虚空、遍法界,无量无边。而且在此大家应该注
    意,佛着重强调的是这个“空”的福德,如来不会对弟子说一切皆空,福德没有,而是说福德多,
    这即是空即是色的示现。行者如能了知福德本空的道理而行布施,福德多得满虚空、遍法界无量
    无边,如来安住在真空境界中,也说得福德多。
    이 ‘공(空)’한 복덕은 공으로 치우친,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는 아니므로 여래께서도 “복덕은 공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행자가 복덕은 본래 공하다는 이 도리를 깨쳐
    야만 공성의 경계에서는 복덕이 너무 많아 허공을 가득 채우고, 법계에 두루 널려있어 헤아
    릴 수 없을 정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
    역점을 두어 강조하신 것은 바로 이 ‘공’한 복덕이라는 점입니다. 여래께서 제자들에게 일체
    는 모두 공하므로 복덕이 없다가 아니라 그렇기에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공즉시색(空即是色)의 시현입니다. 수행자가 만약 복덕이 본래 공하다는 도리를 알고 보시
    한다면 복덕이 많기로 허공에 가득 차고, 법계에 두루 있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래께서 진공 경계에 안주하셔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在此想起佛教史上,达摩祖师来到中国,当时中国皇帝梁武帝正以帝皇之尊护持佛法,马上
    接见了这位未来禅宗的祖师爷。当他满心骄傲地对达摩说:“我即位以来,造寺写经、度僧无量,
    有何功德?”他本以为会听到这位从佛陀故乡而来的圣僧的恭敬赞叹,没想到听到的却是达摩从
    “空性”里面坚定的回答:“没有功德。”梁武帝又问:“何以无功德?”达摩说:“此但人天小果,有
    漏之因,如影随形,虽有非实。”梁武帝问:“如何才是真功德?”达摩回答说:“净智妙圆,体自空
    寂,如是功德,不以世求。”梁武帝接着问:“如何是圣谛第一义?”达摩祖师回答说:“廓然无
    圣。”梁武帝最后曰:“对朕者谁?”达摩祖师回答说:“不识”。当然梁武帝没有了悟如来的真空之
    境,没有听懂达摩慈悲的开示,而是满心的我慢受挫,对达摩下了逐客令。在此我把梁武帝与达
    摩的这段话全部摘录出来,不再作翻译,如果大家对《金刚经》前面几品有所领悟,已不难听懂
    他们对话中各自心性所处的角度,虽然是古文。
    이 대목에서, 불교사상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왔던 그 당시는 중국
    황제인 양무제가 황제의 존엄으로 불교를 호법하던 시기인지라, 장차 선종의 조사가 될 이
    분을 즉시 접견했습니다.
    양무제가 아주 교만한 마음으로 달마대사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즉위한 이래 사찰을 짓고 경전을 펼쳐냈으며 수많은 승려를 배출하였으니 그 공덕
    이 얼마나 되겠소?”
    그는 본래 부처님 고향에서 온 성스러운 스님으로부터 공경과 찬탄을 받을 것이라 여겼는
    데 생각 밖에 그가 들은 것은 달마대사가 ‘공성’의 견지에서 내뱉은 단호한 대답이었습니다.
    “공덕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양무제가 또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다는 말이오?”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이는 단지 인간과 천인의 작은 과보인지라 유루(有漏)의 원인이 있으므로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아 비록 있기는 하나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무제가 물었습니다.
  • 102 –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공덕이오?”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청정한 지혜는 오묘하고 원융하며, 만물의 본체는 공하고 고요한바 이러한 공덕은 세상
    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무제가 이어서 물었습니다. “불교의 성스러운 진리의 으뜸가는 뜻[聖諦第一義]은 무엇인가?”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텅텅 비어 성스럽다할 것이 없습니다.”
    양무제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짐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모릅니다.”
    물론 양무제는 여래의 진공 경계를 깨닫지 못했고 달마대사의 자비로운 설법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꽉 찬 아만(我慢)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은 그는 달마대사에게 축객령을 내리
    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양무제와 달마대사가 나눈 대화 내용을 전부 그대로 옮겨왔을 뿐 현대어 번
    역은 따로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금강경의 앞부분 몇몇 품에서 어느 정도
    깨달은 바가 있다면, 비록 고문(古文)일지라도 이들이 나눈 대화에서 그들 각자의 마음이
    처한 경계를 헤아리기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只是达摩祖师在此为什么说没有功德?达摩立于如来之境,知梁武帝不知福德本空,执福德
    实有,为破他的执着才说无功德。而后又慈悲开示,不了悟空性之理,造寺写经也只是世俗善行
    善报,有生有灭,故福德虽有非实。如果梁武帝能了知空性之理,达摩祖师一定会赞叹他功德很
    大。不过如果梁武帝真了解《金刚经》中的般若智慧的话,也不会这样问达摩了。
    여기에서 달마대사는 왜 공덕이 없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달마는 여래의 경계에 서서, 복
    덕은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기면서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양무제의 상태를 알아채고는 그의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서 공덕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
    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자비롭게 설법하셨습니다. 공성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사
    찰을 짓고 경전을 펴내는 그것은 다만 세속의 선행, 선업으로서 유생유멸(有生有滅)이라 그
    복덕이 비록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 실체는 없다고 말입니다. 만약 양무제가 공성의
    이치를 깨친 상태였었다면 달마대사는 반드시 그의 공덕이 아주 크다고 찬탄하셨을 것입니
    다. 물론 만약 양무제가 진정으로 금강경의 반야 지혜를 깨달았다면 달마대사에게 그렇게
    묻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我们从达摩的故事里回到这一品,大家要明白,佛陀在这一品中不是强调福德本空,像达摩
    祖师对梁武帝一样要破我们的执着。而是在讲当我们了悟“福德本空”后,福德才真的多。如果你
    不能了知这一点,就像达摩祖师说的福德就是人道善行,虽有非实。“如来不说得福德多,正因为
    福德无故,如来才说得福德多。”
    달마의 이야기에서 다시 이 품으로 되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 103 –
    것은, 부처님께서 이 품에서 복덕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강조하려 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대하던 태도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우리의 집착을 파하
    려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복덕은 본래 공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만 복덕이 진
    짜로 많아진다는 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달마대사가 말씀하신 것처럼, 복덕은 인간 세상의 선행과
    다를 바 없이 비록 있기는 있으나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
    게 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은 복덕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없기 때문인데 비로소
    여래는 복덕을 많이 얻게 된다고 설한 것”입니다. 제20품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这一品的大意是,佛陀接着问须菩提:“须菩提,你怎样认为,可以通过具足的色身见到佛
    吗?”须菩提回答说:“不可以,世尊。如来是不应该通过具足的色身见的。为什么呢?如来说具
    足的色身并不是‘如来’真有这样的身相,只是随顺世俗,假名称如来具足的色身。”佛陀又问须菩
    提:“须菩提,你怎样认为呢,可以通过具足一切相见到如来吗?”须菩提答:“不可以,世尊。如
    来不应以‘具足一切相’得见。为什么呢?如来说,所有的相具足,并非真的说诸相具足,是假名
    诸相具足。”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어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원만하게 갖추어진 육신을 통해 부처를 볼 수 있겠는
    가? ”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원만한 육신으로써 여래를 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
    래께서 말씀하신 원만한 육신은 ‘여래’께서 진짜로 그러한 몸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세속에 순응하여 가명으로 여래의 원만한 육신이라 이름하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또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모든 상을 갖춘 것을 통해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须菩提!于意云何?佛可以具足色身见不?”“不也,世尊!如来不应以具足色身见。何
    以故?如来说:具足色身,即非具足色身,是名具足色身。”“须菩提!于意云何?如来可以具
    足诸相见不?”“不也,世尊!如来不应以具足诸相见。何以故?如来说:诸相具足,即非具
    足,是名诸相具足。”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구족한 색신으로 부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구족한 색신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
    께서 설하신 구족한 색신은 곧 구족한 색신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구족한 색신이
    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구족한 모든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모든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족한 모든 상이라고 하는 것은 곧 구족한 모든 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
    하여 구족한 모든 상이라고 여래께서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 104 –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을 갖춘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
    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상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진짜로 모든 상을 갖추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명으로 모든 상을 갖추었다고 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这一品佛的提问,在第五品中也提问过类似问题。原文是:“须菩提,于意云何。可以身相见
    如来不。”须菩提答:“不可以。如来说身相,即非身相。”当时佛与须菩提的对答是为了强调诸相
    的虚妄,不应将如来执着认为是某一种特定的身相。在第十三品中,佛问须菩提:“于意云何,可
    以三十二相见如来不?”须菩提回答:“不也,世尊。如来说三十二相,即是非相,是名三十二
    相。”佛在这一品中与须菩提的对答还是担心弟子们着佛的功德之相,要想回到如来真空之境,执
    着佛有三十二相是回不去的。
    이 품에서의 질문과 별반 다름이 없이, 부처님께서는 제5품에서도 유사한 질문을 하셨습
    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닙니다.”
    그 맥락을 보면,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은 일체 상의 허망함을 강조하는 것에 중심이 놓
    이는바 여래께서 어떤 특정된 몸의 형상을 갖추었다고 여겨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제13품을 살펴봅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삼십이상이 곧 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삼십이상이
    라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은 여전히 제자들이 부처님의 공덕 상에 집착할까 봐
    그것을 경계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로 돌아가려면 부처님에게 32
    상이 있다고 여기는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现在,佛在此处又提问,“佛可以具足色身见不,可以具足诸相见不”,是要强调什么呢?我
    们先谈一下什么是“具足色身”。在此一品的前面,佛刚谈了无量无边佛土世界,众生心识的虚
    妄,接着在这一品又谈到“具足色身”。有的人将佛说的这个“具足色身”理解为像欲界凡夫一样有
    眼、耳、鼻、舌、身、意的色身;或像色界众生一样的光化身;有的人将这个“具足色身”理解为
    是佛的三十二相八十随形好的紫磨金身;也有众生理解是佛无量无边的应化身。但佛说法是破三
    界六道众生的执着的,所以,你心中执着的那个“如来身相”,即是此处的“具足色身”。同样道理,
    如来不应以“具足诸相见”。“具足诸相”有的人理解为三千大千世界一切相;有的人理解为五蕴,即
    佛学中将“自我”,称为“五蕴”,由色蕴、受蕴、想蕴、行蕴、识蕴组成。色蕴是指物质现象,受想
    行识都指的是精神现象,可以说佛法中五蕴的概念涵盖了世间万法。
    이 시점에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부처는 색신(色身)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모든 형상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 105 –
    이는 무엇을 강조하시려는 것일까요? 그럼 먼저 ‘색신의 구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앞선 품들에서 부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국토 세계와 중
    생 마음의 허망함을 말씀하시고 나서 이 품에서는 ‘색신의 구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
    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색신의 구족’을 욕계의 범부와 같이 눈·귀·코·혀·몸·뜻에서의 몸
    의 형상이 있다거나 혹은 색계의 중생처럼 광화신(光化身)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며, 어떤
    이는 이 ‘색신의 구족’을 부처님의 32상 80종호의 자마금신(紫磨金身)으로 이해하며, 어떤
    이는 부처님 무량무변의 응화신(应化身)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설법은
    삼계육도 중생의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집착하는 그 ‘여래의 색신’이 바로 여기에서의 ‘색신의 구
    족’인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여래가 모든 상을 구족한 것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모든
    상의 구족’을 어떤 이는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상으로 이해하고 어떤 이는 오온(五蘊)으로
    이해하는데 불교에서는 ‘자아’를 ‘오온’으로 칭합니다. 오온은 색온·수온·상온·행온·식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색온은 물질현상을,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모든 정신 현상을 지칭하므
    로 불법에서 오온의 개념은 세간의 만법을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众生刚开始修证,见色时要观空,观空时认为应该见圆满的色。所以现在佛在破弟子们建立
    在意境中的色空不二之相,因为弟子们如果在意境上了知“如来空性”时,会认为既然空不是虚
    空,也不是否定、抛弃一切,那与如来的空境同时呈现的应该是圆满的佛相,或包括每一粒微尘
    在内的三千大千世界。但如弟子们心中有一个“色空不二”的境界,即已着相了。比如,我曾经在
    修证中进入一种境界,即自己化成了遍虚空、遍法界的光明,而无量无边众生的心识,或三千大
    千世界在光明中刹那呈现生灭,一切如同幻化。还有一个境界,自己忽然化成一个光圈,中间坐
    着一尊如如不动、端正庄严、紫磨金身的佛相。这些境界并不希奇,对一些观照力非常强的行
    者,通过对“色空不二”文字的领悟就可能达成;有些人的境界还来自于宿世的修证;当然也有的
    是行者的证量,属善境界,可以破行者某种执着。但如果我住在这些境界中,认为是证入了色空
    不二、见到了如来,或执着任一境界就是如来真空之境,那就错了。自性真空,无得无失,如如
    不动,本来如是,无任一境界可以诠释。“如来真空之境”你认为奇异时,五眼六神通具足,平凡
    时,如吃喝拉撒睡,无不是“如来真空”。
    수행을 막 시작한 중생이 색(色)을 볼 때는 공(空)을 관(觀)해야 하고, 공(空)을 관(觀)
    해야 할 때는 마땅히 원만한 색(色)을 봐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기에 지금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의식의 경계에다가 세워둔 색공불이(色空不二)의 상을 타파하시는 것입니다. 제자
    들이 만약 의식의 경계에서 ‘여래의 공성’을 깨달았다면, 공은 허공이 아니므로 일체를 부정
    하고 버리는 것이 아닌 이상 여래의 진공 경계와 함께 나타나는 것은 마땅히 원만한 부처의
    상이거나 혹은 하나하나의 티끌까지도 전부 다 포함한 삼천대천세계일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자들 마음속에 ‘색공불이’의 경계가 있다면 이는 이미 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일찍이 수행 증득 과정에서 어떤 한 경계에 진입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서 자신이 허공과 법계에 두루 편재한 빛으로 화하였고,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마음 내지
    는 삼천대천세계가 빛 속에서 찰나에 생멸하여 그 일체가 환상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경계에서는 제가 갑자기 빛의 고리로 화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여여부동하고 단정하
    며 장엄한 금신(金身) 불상이 앉아 계셨습니다. 이런 경계는 그렇게 신기한 것은 아니므로
  • 106 –
    관조력(觀照力)이 아주 강한 수행자라면 ‘색공불이’라는 문자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이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이의 경계는 전생의 수행 증득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물론
    수행자의 깨달음의 실력에 속하는 선경계(善境界)일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수행자의 특정
    집착을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경계에 머물면서 색공불이에 증입하였다고 여기거나, 여래를 만났다고
    여기거나 혹은 어떤 한 경계가 바로 여래의 진공 경계라고 집착한다면 이것은 그릇된 것입
    니다. 자성의 진공(眞空)은 득실이 없고 여여부동하며 본래 그러하기에 그 어떤 경계로도
    이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를 당신이 기이하다고 여기면 그것은 오안육신
    통을 구족한 것이고, 이를 평범하다고 여기면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잠자는 이 모든 하나하
    나가 모두 ‘여래의 진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所以,如果行者在头脑、意境中还有一个境界是如来的境界,还有得失心,那就是错的。真
    空是行者在破掉所有执着,不着所有相后,本来具足的东西。那时只是了知了一切的虚妄,既知
    一切法皆空皆妄,行者即会在一切法中、起心动念处,不再粘着,不再被境转、相迷,而获大自
    在,即称如来。
    그러므로 수행자의 머릿속과 의식 속에 아직 여래의 경계라고 하는 경계가 있고, 아직 얻
    고 잃음에 마음을 쓰는 득실심(得失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진공은 수행자가
    모든 집착을 타파하고 일체 상에 집착하지 않은 후에 드러나는,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성
    품입니다. 그때 비로소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체법 역시 공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수행자는 일체법과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생기는 곳에 더는 매달리지
    않고, 더는 경계에 휘둘리거나 상에 미혹되지 않아 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를 일컬어 여
    래라고 합니다. 제21품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须菩提!汝勿谓如来作是念:‘我当有所说法。’莫作是念,何以故?若人言:如来有所
    说法,即为谤佛,不能解我所说故。须菩提!说法者,无法可说,是名说法。”尔时,慧命须
    菩提白佛言:“世尊!颇有众生,于未来世,闻说是法,生信心不?”佛言:“须菩提!彼非众
    生,非不众生。何以故?须菩提!众生众生者,如来说非众生,是名众生。”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설할 법이 있다’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설하실 법이 있다” 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설한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다. 수보리여! 법을 설한다는 것은 곧 설할 만한 법이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미래 세상에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낼 중생들이 꽤 있겠습니
    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107 –
    这一品的大意是,佛陀说:“须菩提,你不要以为如来有这样的念头,我应当对‘法’有所陈
    说。不要这样想,为什么这样说?假若有人说如来有所说法,即为谤佛,还不能理解我所说的一
    切。须菩提,说法的人,无法可说,是名说法。”
    이 품의 대체적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여기지 말라. 왜
    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
    는 자이고 내가 설한 모든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법을 설하는 사람은 설
    할 법이 없기에 비로소 법을 설한다고 이름한 것이다.”
    这个问题佛在第七品中问过须菩提,原文是:“须菩提。于意云何?如来得阿耨多罗三藐三菩
    提耶?如来有所说法耶?”须菩提言:“如我解佛所说义,无有定法,名阿耨多罗三藐三菩提,也
    无有定法,如来可说。”在这品中,佛与须菩提的对答是破弟子们对果位以及对佛法的执着。在第
    十三品中,佛在说到这本经的名字为《金刚经》时,又对须菩提提了同样的问题,原文是:“须菩
    提,于意云何,如来有所说法不。”须菩提的回答是:“世尊,如来无所说。”在此处,须菩提站在
    了“如来的真空之境”说如来无所说。真空中无我,无人,无众生,故无所说。
    이 문제를 부처님께서 제7품에서 수보리에게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부르는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수 있는 정해진 법 또한 없습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과 수보리 사이의 문답은 제자들의 과위 및 불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
    는데 초점이 놓여 있습니다. 제13품에서 부처님께서 이 경전의 제목을 금강경이라고 설하시던 그 대목에서도 수보
    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여기서 수보리는 ‘여래의 진공 경계’에 서서 여래는 설하신 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진공
    은 무아·무인·무중생이므로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金刚经》讲到此处,佛又对须菩提重申这一问题。佛说:“须菩提,你不要以为如来会生起
    这样的念头,我应当有所说‘法’。如果有人说如来有所说法,即为谤佛,不能理解我所说的一
    切。须菩提,说法者无法可说,是名说法。”这一段话,佛的重点强调的是“如来的真空之境”没有
    “수보리여! 저들은 중생이 아니요,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중생
    을 중생이라 하는 것은 저들이 중생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중생이라고 여래가 설
    하였기 때문이다.”
  • 108 –
    一念。比如,平时我们说真空生妙有,以为证入真空,一起心动念就会神通具足就是妙用等等。
    但如来告诉你,真空中没有一念,真空中也没有神通智慧。所以,如来说法,如空谷回声,如雁
    过长空,不留痕迹。如来普度众生,真空中却从未生起一念,也未有任何法可说。《维摩诘经》
    中说“真说法者,无说无示。听法者,无闻无得。行者应了知,万法本自空寂。一切名言,皆是假
    立”,明白真空中一切无生这个道理。
    금강경을 여기까지 강의하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또 수보리에게 이 문제를 거듭 강조하
    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
    기지 말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만한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
    를 비방하며, 내가 설한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수보리여, 법을 설하는 자는 설할
    법이 없으므로 비로소 법을 설한다고 이름한 것이다.”
    이 단락의 말씀에서 부처님께서 중점적으로 강조하시는 것은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일념도 없다는 그것입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우리는 진공이 묘유를 낳는다고 하면서 진공
    으로 증입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만 하면 곧 신통력이 갖추어지는 이것을 묘용이라고 여
    기는 등등입니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진공에는 일념도 없고 진공에는 또한 신통력과 지혜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여래의 설법은 마치 텅 빈 골짜기의 메아리처럼, 기러기가 공중
    을 날아가는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여래께서 중생을 널리 제도하시되, 진공에서
    일념을 일으키신 적도 없으며 또한 어떤 법을 설하신 적도 없습니다.
    유마힐경에서는 “진짜로 법을 설하는 자는 말하는 것도 없고 시현하는 것도 없다. 법을
    듣는 자는 듣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수행자는 마땅히 만법이 본래 공하고 고요하며, 모든 이름과 언설은 모두 가짜로 세운 것[假立]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습
    니다. 진공 속에서는 일체가 생겨남이 없다는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这时候,智慧的须菩提对佛陀说:“世尊,在未来也有些众生听闻到这样的说法,能生起信心
    吗?”佛陀说:“须菩提,他们不是众生,因每位众生本性都是佛,所以佛说他们不是众生,也并
    非不是众生(因大家现在迷失本性,颠倒轮回)。所以佛从这个角度讲,他们就是众生。但须菩
    提,你应当知道,在如来的真空境界中,众生并非真实的存在,他们不过是假名众生而已。”在
    此,佛对弟子们彻底破众生相,让弟子们从闻法众生的角度回归“如来真空”,破闻法弟子头脑中
    自己还是众生的知见。在这一品中,须菩提又开始为未来世担心了。他问佛,未来世众生听到这
    样的法,能生起信心吗?佛没有像前几次他提问一样肯定地告诉他:“一定会有些持戒修福的人,
    不着诸相的人能对此生起信心,信受奉行。”而这一次,佛要彻底破众生相,要拿掉弟子们心中自
    己不是如来的知见。
    이때, 지혜로운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미래 세상에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낼 중생들이 꽤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의 본성은 모두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는 그들을 중생이라고도 하지 않고 중생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는다(여러분이 현
    재 본성을 찾지 못한 채 전도, 윤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이 견지에서 그
  • 109 –
    들이 바로 중생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여,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
    의 진공 경계에서 중생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은 단지 가명으로 중생이라고
    할 뿐이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중생상을 완전히 파하시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법을 듣는 중생의 관점에서 “여래의 진공”으로 회귀하게 하여 법을 듣는 제자들 머릿속의, 자신이 아직도 중생이라는 지견을 파하셨던 것입니다.
    이 품에서 수보리는 다시금 미래 세상을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미래 세
    상의 중생이 이런 법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앞서 수보리가 제기한 질문에서와 마찬가지로 “계율을 지켜 복을 쌓는 사
    람, 모든 상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이에 대해 믿음이 생겨 받들어 행할 것이다”라
    고 긍정적으로 대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는 부처님께서 중생상을 완전히 타파하여
    제자들이 마음속으로 자신이 여래가 아니라는 그 지견을 제거하고자 하셨습니다.
    在前面的讲述中,佛已无数次提到菩萨在修行中,不应着众生相,诸相虚妄。但弟子们可以
    在未来的修证中不着众生相,不求回报、理解,不求功德,但如来说《金刚经》是在层层破弟子
    们的执着,每一位弟子应在聆听中马上安住于无我、无众生的境界中。而弟子们明了无众生可
    度,但因正在闻法,故还有一个闻法众生与佛的区别,还未进入与如来不二的角度,这在后面须
    菩提答错佛陀的提问中就看到了。故在此处,佛站在“如来真空”的角度告诉须菩提:“在‘如来的真
    空之境’中,并没有众生,当然也没有佛。而众生的本性也与如来一样,并无差别。所以你担心的
    众生,彼非众生。但因众生现在并未圆证这个道理,所以才在迷失中颠倒轮回,所以又说,非不
    众生。但须菩提,站在如来之境中,所有的三界六道一切众生,如来说并非实有其事,实有佛,
    实有众生,都只是一个假名。”
    앞의 강설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이 수행 중 중생상에 집착해서는 안 되며, 모든 상은
    허망하다고 이미 수없이 언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먼 훗날의 수행과 증득 과정에서 중생상
    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보답도, 이해도, 공덕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래께서 
    금강경은 제자들의 겹겹이 쌓인 집착을 파하는 데 쓰이는 것이므로 모든 제자는 마땅히 듣
    는 즉시 무아·무중생의 경계에 안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경우, 제도할 중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는 있지만 한창 법을 경청
    하고 있으므로 법을 듣고 있는 중생과 부처의 구분이 있어 그들 자신과 여래가 둘이 아닌
    경계에는 진입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이 양상은 뒷부분에서 수보리가 부처님의 질문에 정확
    하게 대답하지 못한 데서 그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진공’ 견지에 서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중생도 없고 물론 부처도 없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 역시 여래와
    같아 둘 사이에는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걱정하는 그 중생도 중생이 아니다. 그러
    나 중생은 아직 이 도리를 원만하게 깨닫지 못해 미혹된 상태에서 전도, 윤회하고 있으므로
    이 또한 ‘중생이 아님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여, 여래의 경계에 서면 여
    래는, ‘삼계육도의 모든 중생은 실제로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연고로 실재하는
    부처, 실재하는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단지 가명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谈到要破“众生见”,想起曾在禅定境界中见到一只几万年的穿山甲,它已修到身体化成光,
  • 110 –
    甚至可以自由幻化人形,但它仍未开悟,仍在头脑中死死记着自己是只穿山甲,仍把那只能自由
    出入的穿山甲壳当宝贝,觉得那是它的身体。当我告诉它,它不是穿山甲,也不是任何它变化出
    来的相,本性是如来时,它瞬间顿悟,马上把那只穿山甲壳扔了。所以,我们头脑中的“众生
    见”,有时并非是不着其他众生的相就能摒除舍弃。头脑中有很执着的对自我身心的认知,这就是
    众生。
    중생견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보니 일찍이 선정 경계에서 만난, 수만 년이 되는
    천산갑이 떠오릅니다. 그는 이미 몸이 빛으로 화할 정도로 수행해 왔으며 심지어 자유롭게
    사람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해 머릿속에 자신
    을 천산갑으로 확고하게 인지하여 자신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천산갑 껍질을 보배로
    삼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너는 천산갑이 아니고
    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모습도 아니며 본성은 여래라고 말하자 그는 순간 돈오(頓悟)
    하여 즉시 천산갑 껍질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머릿속의 ‘중생견’이 때로는 다른 중생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것이 버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머릿속에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인지에 너무 집착
    하면 그 존재가 바로 중생입니다. 제22품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3품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这一品的大意是,须菩提对佛陀说:“世尊,佛得到最高最圆满的觉悟就是无所得吗?”佛陀
    说:“是的,是这样的。须菩提,我于无上正等正觉乃至这世界一切,没有一点儿东西真实得到
    过。这才叫做无上正等正觉,最高最圆满的觉悟。”
    须菩提白佛言:“世尊!佛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为无所得耶?”佛言:“如是,如是。 须菩提!我于阿耨多罗三藐三菩提乃至无有少法可得,是名阿耨多罗三藐三菩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곧 얻음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에 있어서 조그만큼의 법
    조차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이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
    다.”
    “复次,须菩提!是法平等,无有高下,是名阿耨多罗三藐三菩提;以无我、无人、无众
    生、无寿者,修一切善法,即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须菩提!所言善法者,如来说即非善
    法,是名善法。”
    “또한 수보리여!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
    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수보리여! 이른바 선법이란 것은 곧 선법이 아니므
    로 비로소 이름하여 선법이라 한다고 여래는 설하였다.”
  • 111 –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얻으신 으뜸으로 원만한 깨달음은 바로 얻은 바가 없다는 것입
    니까?”
    “그렇다, 바로 그렇다. 수보리여, 내가 무상정등정각 내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얻
    은 바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무상정등정각, 으뜸으로 원만한 깨달음이라 이름할 수 있다.”
    这一品的问题,须菩提也与佛有几次的交流。如,第十品中,“佛告须菩提,于意云何,如来
    昔在燃灯佛所,于法有所得不?”“不也,世尊。如来在燃灯佛所,于法实无所得”。佛在此处与须
    菩提的对话是告诫弟子不应着法相,破除弟子有法可得、有果位可得之心。第二次在第十七品,
    原文是:“须菩提,于意云何。如来于燃灯佛所,有法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不?”“不也,世尊。
    如我解佛所说义,佛于燃灯佛所,无有法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此处的对话重点在告诉听法的
    大众,没有人成就无上正等正觉,在破我相。佛还说:“须菩提,若有法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
    燃灯佛即不与我授记,汝于来世,当得作佛,号释迦牟尼……若有人言,如来得阿耨多罗三藐三
    菩提。须菩提,实无有法,佛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此处反复言说,令众生知道,真空之境中
    无我、无人。
    이 품에서 다루게 될 문제에 대해 수보리 역시 부처님과 몇 차례의 교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10품에서의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입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실로 아무런 법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과 수보리의 이 대화는 제자들의 법상 집착에 관한 훈계로서 제자들이 얻을 수 있
    는 법, 얻을 수 있는 과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파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제17품에서인데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
    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은 따로 없었습니다.”
    여기에서의 대화 중점은, 법을 듣는 대중들에게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한 사람이 없음을 알
    려주면서 아상을 파하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석가모니라 부르는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내리지 않
    으셨을 것이다.……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라고 말한다면, 수보리여 부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러한 법은 실로 없다.”
    여기에서도 거듭 반복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중생이 진공의 경계에는 무아·무인임을 깨치
    도록 도모하셨습니다.
    故现在在二十二品中,须菩提说:“世尊,佛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为无所得耶。”这是一
  • 112 –
    个很奇妙的总结,反过来说就是“无所得”就是佛得到的无上正等正觉,意思是佛得到无上正等正
    觉的圆满觉悟,是知诸法虚妄,一切无所得。佛说:“就是这样。因为万法皆空,所以如来于无上
    正等正觉的觉悟,乃至这世界一切,没有一丁点东西真实可以得到,把这个觉悟起名叫无上正等
    正觉。”
    이러한 맥락과 흐름이었기에 지금 제22품에서 수보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곧 얻음이 없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주 놀라운 요약입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얻음이 없음’이 바로 부처님께서 얻으
    신 무상정등정각으로서 그 뜻은, 부처님께서 얻으신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은 바로
    일체법이 허망하여 일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렇다. 만법이 모두 공하기 때문에 여래가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었다 함은, 이 세계의 일체, 아주 조그마한 그 무엇이라도 진실로 얻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바로 그
    것인바 이를 가리켜 무상정등정각이라 이름한다.”
    此处,须菩提与佛的对话意在告诉大家——当了知人法俱空,所得心尽,即是得无上正等正
    觉。在此我们应该回忆起《金刚经》开篇,缘起于须菩提提的问题:“求无上正等正觉,怎样安
    心?”现在探讨的却是无上正等正觉的本体。到底什么叫“得无上正等正觉”?什么叫“如来”?了知
    这一本体的意义即是修证,即才能心安。在下面的一品中,佛与须菩提仍是在探求这个问题中对
    答。
    여기에서, 수보리와 부처님의 대화는 여러분들에게 사람과 법이 모두 공함을 알고 이로부
    터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하면 곧 무상정등정각을 얻게 됨을 알려줍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마땅히 금강경의 시작이 수보리가 제기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마음을 안주해야 하는가?”
    지금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무상정등정각의 본체에 관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하는가? 또 무엇을 ‘여래’라고 하는가? 이 본체의 의미를 아는
    것이 곧 수행 증득이며 이렇게 행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품
    에서 부처님과 수보리는 여전히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질의응답을 지속합니다.
    第二十三品中,佛说:“还有,须菩提。是法平等,无有高下,是名阿耨多罗三藐三菩提。以
    无我无人无众生无寿者,修一切善法,即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须菩提,所言善法者,如来说
    即非善法,是名善法。”此二十二、二十三品合在一起,是佛对“无上正等正觉”非常精辟的概括。
    我们平时发心求无上正等正觉,求佛果,在此,佛告诉所有弟子:当行者知一切虚妄,所得心
    尽,不着任何相,拥有万法平等的心,即可称“得无上正等正觉”。而且告诉你怎样得到,说:“你
    可以不着一切相,行一切善法,连善法的相也不应着,即可得无上正等正觉。”这是菩萨的修证之
    路,不着善法相,勿以善小而不为。我认为这两品对末法时代众生修证佛法真的是太重要了。
    제23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보리여,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라고 한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이 모든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
  • 113 –
    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선법이란 것은 곧 선법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
    여 선법이라 한다고 여래는 설하였다.”
    이 22품과 23품을 하나로 합치면 바로 부처님께서 ‘무상정등정각’에 대한 절묘한 요약입
    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상정등정각 즉 불과를 구하기 위해 발심하는데, 여기에서 부처님께
    서는 모든 제자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체가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얻고자 하는 마음이 소진되어 수행자가 그 어떤 상에
    도 집착하지 않고 만법이 평등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곧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칭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이를 얻는지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고
    일체 선법을 행하는데 심지어 선법의 상마저도 집착하지 않으면 곧 무상정등정각을 얻을 수
    있다”입니다. 이는 보살의 수행 증득의 길이며, 이 과정에서 선법의 상에 집착하지 않고 또
    한,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두 품의 가르침이 말법 시대 중생이 불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너무나
    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在末法时代,大部分人学习、修证佛法,放不下红尘的一切,是佛果与红尘的一切都想要。
    求证佛法、成道也变成满足自我欲望,以及炫耀自我价值的手段。其实,想拥有一切,体现自我
    价值是人之常情,也没有什么错。但佛告诉我们,万法都是诸缘具足的假名,都无真实不变的自
    性,你不可能得到任何东西,不管从世俗中,还是你认为的佛法中。而且连你的自我都是虚妄
    的,根本也实无一个东西能享受快乐、幸福,或承受痛苦。真了知这一点,你的所得心就会尽。
    真了知万法皆空的道理,你的平等心就会生起,不会被种种差别相转。当你安住在万法皆空、平
    等的境界中时,你与这世界一切都不再有变异、生灭、得失,心才会永远安住,不再痛苦、烦
    恼,故无所得的境界是你会永恒地拥有了一切。而要想证入这一境界,佛指出了一条简单易行的
    路:“不着一切相,行一切善法”。
    말법 시대에 대부분 사람은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면서도 속세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해
    불과와 속세의 일체를 모두 원합니다. 따라서 불법을 증득하고 도를 이루려는 행위조차 자
    아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자아의 가치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변질해버립니다.
    사실, 모든 것을 소유하여 자아 가치를 구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에 이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법은 모두 여러 인연이 갖추어져 이루어
    진 가명일 뿐 진실로 변하지 않는 자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속에 있어서든 아
    니면 불법에 있어서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아울러 그대의 그 자아조차 모두 허망한 것이어서, 그 무엇인가 존재하여 즐거움이나 행
    복을 누리거나 혹은 고통을 감내한다는 그 자체마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짜로 이 점을
    알고 나면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다할 것입니다. 진짜로 만법이 모두 공하다는 도리를
    알고 나면 평등심이 생겨나 각양각색의 차별상에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법이 모두 공하여 평등한 경계에 안주할 때 자신과 이 세상의 일체가 더는 변이·생멸· 득실이 없게 됩니다. 그때야말로 마음은 영원히 편안히 머물게 되어 드디어 고통과 번뇌가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의 경계야말로 이 일체를 영원히 소유하게
    합니다. 이 경계에 증입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부처님께서는 간단하고도 실천하기 쉬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일체 상에 집착하지 말고 일체 선법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 114 –
    也许有人听了,既然一切皆空,无所得,那我还需做什么呢?修什么呢?一切皆空是佛说
    的。我们只是听到了这句话,我们的“所得心”还没有尽,万法对我们真的是充满影响力。也许你
    感觉自己不在乎了,对一切没兴趣、没激情了,那不是佛说的无所得心,那叫无聊、无趣。要证
    入佛说的无所得、平等心,需要像佛说的“用不着相的心修一切善法”。什么是不着相的心?知一
    切虚妄,从而不被身心内外一切境转,心能安住,这样的心才是不着相的心。行者安住在这种境
    界中日久,所得心才会尽。尤其是最后智慧相、佛相破尽时,才会觉得自己与世界万法平等,才
    知心、佛、众生三无差别,如如不动的平等心才会真正生起。
    만약 어떤 사람이 이를 듣고는 ‘일체가 모두 공하여 얻는 바가 없는데, 내가 더 이상 무
    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일체가 모두 공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 말을 귀로 들었을 뿐, 우리의 ‘얻고자 하는 마
    음’이 아직 다한 상태가 아니므로 세상 만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것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모든 것에 감흥과 열정이 생겨나지 않
    는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얻고자 함이 없는 무소득
    심은 아니라 지루함이나 무관심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소득의 경계와 평등
    심을 증득하려면 부처님 말씀처럼 “상에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합니
    다.”
    상에 집착이 없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일체가 허망함을 알고 그로부터 심신 안팎의 일
    체 경계에 휘둘리지 않아 마음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이런 마음이 바로 상에 집착이 없
    는 마음입니다. 수행자가 이런 경계에 오래 머물다 보면 비로소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하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에 ‘지혜의 상’과 ‘부처의 상’마저 완전히 파해야만 비로소 자신과 세계
    만법이 평등함을 느껴 마음·부처·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음을 깨쳐 여여부동의 평등심이 진
    정으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也有的同修说,既然一切皆空,无所得、无所失,行恶法能成道吗?不能。百分之九十八的
    人不能。因为行恶法,逆缘太多,修行路上障碍太多;其次,修恶法的人都是极端自我、自私的
    人。他为什么要行恶,如杀人放火、伤害别人?从人道的角度,一般是为了满足私欲,一个私欲
    如此重的人,怎么能成道,怎么能证得圆满的慈悲与智慧?还有两种人可以,一种是来示现的大
    菩萨,为了令众生破善法的相,不要执着善法。善恶也只是个业或共业的因果,是人类定义的。
    在法界,从众生生生世世的轮回看,没有绝对的善恶标准。这类大菩萨真的是大雄大力,他担起
    遗臭万年,甚至被众生诅咒的果报来成就一些人。这种菩萨极少见,也是众生无法知道和理解
    的。还有一种就是魔王级别的,他也能了知一切皆空、不住,杀人如割草,在心中不留一丝痕
    迹。但魔王我慢极重,有一个“空我”未破,故恶果成熟,果报会很惨。但如果他能一念悔悟,生
    起慈悲,放下屠刀,便可立地成佛。
    또 어떤 도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일체가 모두 공하여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다는데, 그렇다면 악법을 행하여도 도
    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98%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악법을 저지르면 역연(逆緣)이
    너무 많아 수행의 길에서 장애가 아주 많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악법을 닦는
  • 115 –
    사람은 대개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살인이나 방화, 다
    른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겠습니까? 인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으
    로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사욕이 이토록 강한 사람이 어찌 도를 이루겠고 어찌 원만
    한 자비와 지혜를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예외적으로 두 부류의 존재는 이것이 가능합
    니다.
    하나는 시현하러 오신 대보살입니다. 대보살은 중생들로 하여금 선법의 상마저 깨뜨리게
    하여 선법에 집착하지 않게 하려고 이런 모습으로 현현하기도 합니다. 선과 악 역시 단지
    개별 까르마 혹은 공업(共業)의 인과일 뿐, 인간이 내린 정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계의
    차원에서 중생의 세세생생 윤회를 조망해보면, 거기에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은 없습니다. 이런 유형의 대보살은 실로 대웅대력(大雄大力)을 지니신 분들로서, 만고에 악명을 남기거
    나 심지어 중생의 저주를 받는 과보를 스스로 짊어지면서까지 어떤 이들을 제도하고 성취하
    게 합니다. 이런 유형의 보살은 지극히 보기 드물기도 하고 일반 중생의 식견으로는 알 수
    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마왕 수준의 존재입니다. 그 역시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 머무는 데가
    없으며 사람 죽이기를 풀 베듯이 하되 마음속에는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왕은 아만(我慢)이 지극히 강해 ‘공아(空我)’라는 마지막 상을 아직 부수지 못했기 때문
    에 악과(惡果)가 익게 되면 그 과보는 아주 처참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일념의 참회에
    자비심이 생겨 살생의 칼을 내려놓는다면 곧 그 자리에서 성불할 수도 있습니다.
    所以,如果我们不是以上两种人,那就要以无我、无人、无众生、无寿者,行一切善法,而
    且应不着善法相。佛说:“所言善法者,即非善法,是名善法。”因为所有的善法也不过是人根据
    人道的道德和善恶标准确立的,其中因果没有多少人知晓,而且在如来真空之境中,无一法可
    生,一切都是缘起缘灭,如同幻化。
    그래서 만약 우리가 위의 두 부류 인물에 속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무아·무인·무중생·무수
    자의 자세로 일체의 선법을 행하고 또한 선법을 행한다는 그 상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
    다. 부처님께서 “이른바 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선법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선법이
    라고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 세상의 도
    덕과 선악 기준에 따라 세운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속에 담긴 인과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그 어떤 법도 생겨나지 않으며, 일체는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에 따라 사라지는 환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4품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须菩提!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诸须弥山王,如是等七宝聚,有人持用布施;若人以此
    《般若波罗蜜经》,乃至四句偈等,受持读诵、为他人说,于前福德百分不及一,百千万亿分, 乃至算数譬喻所不能及。”
    “수보리여!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산의 왕 수미산만큼의 칠보 무더기를 어떤
    사람이 가져다 보시한다고 해도, 또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의 사구게만이라도
  • 116 –
    这一品的大意是,佛陀说:“须菩提,假使有三千大千世界所有的须弥山积聚在一起那么多的
    七宝,有人拿来用作布施。如果再有人于这部经,甚至只是其中的一个四句偈颂能受持读诵,为
    他人解说,此种功德与前者相比,前者还不如后者的百分之一,百千万亿分之一,乃至根本无法
    用算术数字来做比喻。”这一品是佛在赞叹此经义所蕴含的功德,希望受持读诵此经的人能重视此
    经,重视般若智慧。
    이 품의 대체적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수미산을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많은 칠보를 가지고 보시한다고 하자.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가 이
    경전에서 하다못해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
    면, 이 공덕을 앞의 공덕과 비교할 때 전자는 후자의 백 분의 일, 백천만억 분의 일에도 미
    치지 못하며, 나아가 그 어떤 산술적인 숫자로도 도저히 비유할 수 없을 만큼 크다.”라고 말
    씀하셨습니다. 이 품은 부처님께서 본 경전의 뜻에 담긴 공덕을 찬탄하시며,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는
    사람들이 이 경전을 소중히 여기고 반야 지혜를 중시하기를 바라시는 내용입니다. 제25품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这一品的大意是,佛陀说:“须菩提,你认为怎样呢。你们不要以为如来有这样的想法,我应
    当度脱众生,不要这样想。为什么呢。其实并无有众生是如来度的,假如有位众生是因为如来变
    成佛的,如来即有我、人、众生、寿者相。”“须菩提,如来说‘有我’,并非真有一个真实不变的
    我,而凡夫之人,以为实有‘我’存在。”“须菩提,如来说凡夫,也并非真有一个真实不变的凡夫存
    在。只是随顺世俗,假名称凡夫罢了。”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须菩提!于意云何?汝等勿谓如来作是念:‘我当度众生。’须菩提!莫作是念。何以故?
    实无有众生如来度者。若有众生如来度者,如来即有我、人、众生、寿者。须菩提!如来说:
    ‘有我者,即非有我,而凡夫之人以为有我。’须菩提!凡夫者,如来说即非凡夫,是名凡夫。”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대들은 여래가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 는 생각을 한다고 이르지 말라. 수보리여!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여래가 제
    도할 중생이 실로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는 것이다. 수보리여! ‘내가 있는 것은 곧 내가 있는 것이 아니
    건만 범부들은 내가 있다고 여긴다’고 여래는 설한다. 수보리여! 범부에 대해서도 여래
    는 범부가 아니라 이름하여 범부라고 설한다.”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앞의 복덕은 이의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백천만억 분의 일 나아가 그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미치지 못
    한다.”
  • 117 –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나는 마땅히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그대들은 생각하지 말라.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실 여래가 제
    도해야 할 중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한 중생이 여래로 말미암아 성불하였다면
    여래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가진 것이 된다.”
    “수보리여, 여래가 ‘내가 있다[有我]’고 한 것은 곧 진실로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실재하는 ‘내’가 존재한다고 여긴다.”
    “수보리여, 여래가 범부라고 말씀하심은 진짜로 변하지 않는 진실한 범부가 존재함을 지
    칭한 것이 아니다. 다만 세속에 따라서 가명으로 범부라고 부를 뿐이다.”
    这一品佛陀与须菩提的问答模式与第二十一品是一样的,第二十一品的原文是:“须菩提,汝
    勿谓如来作是念,我当有所说法。”这一品的原文是:“须菩提,于意云何。汝等勿谓如来作是
    念,我当度众生。”在《金刚经》的开篇,佛陀与须菩提已探讨过这个问题。佛告诉弟子,要发愿
    普度三界六道众生,要有“实无众生可度”的见地,否则即着我、人、众生、寿者相。现在佛重提
    这个问题,告诉弟子,在如来真空之境中不生一念,当度众生。为什么呢?因为在如来真空中,
    并无众生需如来度。在如来果位看众生,众生轮回颠倒如幻化、假有,本质与佛并无不同,万法
    也如是。故佛说:“实无有众生如来度,若有众生如来度,如来即有我、人、众生、寿者,也就不
    名为如来了。”
    이 품에서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 패턴은 제21품에서의 그것과 같습니다. 제21품의 원
    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이 있다’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 품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대들은 여래가 ‘나는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생
    각을 한다고 이르지 말라.”
    금강경의 서두에서 부처님과 수보리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부
    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삼계육도의 중생을 널리 제도하겠다고 발원하되 “실로 제도할 중생
    이 없다”는 견지를 가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부처님께서 다시 이 문제를 언급하시면서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일념도 일으키지
    않는 상태에서 중생을 제도해야 함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진공 경
    계에서는 여래가 제도해야 할 중생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여래의 과위에서 중생을 바
    라보면 중생의 윤회와 전도는 환상, 가유(假有)와 같지만 그 본질은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만법 역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로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다.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
    상이 있으므로 여래라 이름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金刚经》从第十七品以后,虽然所有的问题与前面所讲的十几品中似乎是重复的,但所破
    弟子的执着重点不同。当弟子们心中层层障碍破除,空明的心境现前时,如来又不断阐述果位境
    界。我们应该知道,我们虽然在颠倒梦想中,但整个佛法修证,应依止佛果位的见地来破我们的
    无明。虽然站在最究竟的意义上,果位、道位并无不同,众生本质就是佛,心、佛、众生本无差
    别。但我们却不知道这个道理,也无法从中真实受用。佛现在不断开示如来真空境界,让我们认
  • 118 –
    清我们自己的本来面目,也即是心最圆满、无憾的归宿。了知一分佛果位的境界,无明就会破一
    分。在整个佛法修证的过程中,应将如来真空境界中的见地作为修证的依止与地基,在此基础上
    才能回归。不能修证佛法时,而在心性认知上还依止人类世俗的理论、见地,否则,即使你修了
    八万四千法门,也无法回归生命的源头,无法成就无上正等正觉。
    금강경은 제17품 이후, 비록 모든 질문이 앞서 설한 십여 품의 내용과 중복되는 듯 보
    이지만 제자들의 집착을 깨뜨리는 데 있어서 그 중점은 다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겹겹의 장애가 제거되어 텅 빈 밝은[空明] 마음의 경계가 드러날 때, 여래께서는 또 끊임없
    이 과위 경계를 설파하십니다.
    응당 알아야 할 요점은, 우리가 비록 전도몽상의 상태에 처해 있기는 하나 전반 불법의
    수행과 증득 과정에서는 마땅히 부처님 과위의 견지에 의지하여 우리의 무명을 파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비록 최고의 궁극적인 의미에서, 과위(果位)와 도위(道位)는 서로 다르지 않
    고 중생의 본질은 바로 부처이며 마음·부처·중생은 서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로부터 진정한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
    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현재도 끊임없이 여래의 진공 경계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
    신의 진면모 즉 마음의 최고로 원만하고 유감없는 귀속처(歸宿處)를 알아가게끔 인도하십니
    다. 부처님 과위의 경계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에 상응하게 무명 역시도 얼마간 파할
    수 있습니다. 전반 불법의 수행과 증득 과정에서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의 견지를 수행 증득
    의 의지처와 기반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기초 위에서 회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불법을 수행함에도 마음의 인식이 여전히 세속적 이론과 견해에 의지한다면 설령 팔만사천
    법문을 닦는다고 해도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고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 없습니
    다.
    在这一品中,佛说:“如来真空中无一念,我当度众生。”是因为真空之境中没有众生,众生本
    质上与佛不二。接着佛又讲:“如来说有我,并非真有一个自我,而凡夫之人以为有我。须菩提。
    凡夫者,如来说即非凡夫。”闻听到这几句开示,我想起佛教史上著名的释迦牟尼佛出生的场景。
    佛陀从母亲的右肋出,大地震动,龙天洒水散花,恭贺供养。此时,只见佛陀步行七步,步步脚
    底生莲,然后用手指天上地下说:“天上天下,唯我独尊。”我们先不去探讨这个境界人类能否看
    到,但这个境界却是佛学中大小乘行者公认的境界,没有任何争议。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진공에는 ‘나는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일념도 없
    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진공 경계에는 중생이 없으며 중생 역시 본질에서는 부
    처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여래가 ‘내’가 있다고 한 것은 곧 진실로 하나의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건만 범부들은
    ‘내’가 있다고 여긴다. 수보리여,범부라는 것도 범부가 아니라고 여래는 말씀하신다.”
    이 몇 구절 설법을 듣고 나니 불교사에서 그 유명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생 장면이 떠
    오릅니다. 부처님께서 어머니의 오른쪽 늑골에서 세상에 태어나시자 하늘땅이 진동하고 용
    천이 물과 꽃을 뿌리면서 축하하고 공양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일곱 발을 내디디시자 그
    내디딘 곳마다 연꽃이 피어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일곱 발을 내디디시고는 손가락으로 하늘
    과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경계를 인
  • 119 –
    간이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은 하지 않겠지만 이 경계가 불교의 대소승 수행자들이 모두
    공인하는 경계라는 데 대해서는 그 어떠한 논란도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有刚修行的朋友问我,佛法不是讲无我吗,怎么佛刚生下来就说,我天上天下独尊呢?所
    以,这就要求我们来了解如来的真空境界,而且这个真空是我们每一个人的本来,每个人的自
    性。我们现在示现在这个三维角度的肉体,只是一个因缘具足的假相,我们的刹那不停变幻的意
    识,只是一个假心。当我们了知真理后,这个“假相假心”再也无法迷惑我们,即是如来的真空之
    境。故佛说的“唯我独尊”的那个“我”,你也有,每一位众生都有,只因众生在颠倒妄想中不能见。
    如果众生执着这个“假相假心”,只能随它的变异、生灭而轮回。因对它的执着,痛苦、烦恼永无
    止境,因“假相假心”怎么能为你带来安心,永恒的幸福与快乐呢?所以佛说:“如来说有我,即非
    有我,而凡夫之人以为有我。”但佛接着说:“须菩提,凡夫者,如来说,即非凡夫。”因为如来站
    在果位上言说,而“真空境界”本无言说。语言是有缺陷的,无法说出如来第一义谛,所以如来每
    说一句话就要再清除前面一句话中不究竟、不圆满之处。
    초보 수행자인 어떤 한 친구가 저에게 불법은 무아를 주장하는데 왜 부처님께서는 태어나
    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여래의 진공 경계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이 진공은 곧 우리 각자의 본
    래 모습이고, 모든 중생의 자성(自性)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삼차원의 각도에서 드러내는 이 육신은 다만 인연이 갖추어져 나타난 가상에 불과하
    며, 이 찰나에도 부단히 변하는 우리 이 의식 역시 가짜 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후 ‘가상과 가짜 마음[假相假心]’이 더는 우리를 미혹할 수 없게 되는 국면
    이 바로 여래의 진공 경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유아독존’의 그 ‘아(我)’는 여러분에게도 또한 모든 중생
    에게도 모두 있습니다. 다만 중생이 전도망상에 빠졌기에 이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중생이 이 ‘가상과 가짜 마음’에 집착하게 되면 이것의 변이와 생멸에 따라 윤회할 수
    밖에 없게 되며, 이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고통과 번뇌는 멈출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가상과 가짜 마음’이 여러분에게 안심과 영원한 행복,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없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래가 내가 있다고 한 것은 곧 내가 있는 것이 아니건만 범부들은 내가 있다고 여긴
    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범부에 대해서도 여래는 범부가 아니라 이름하여 범부라고 설한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과위에 서서 말씀하셨지만, ‘진공 경계’는 애초에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결함이 있는지라 여래의 제일의제를 온전히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여래께서는 한마디 하시고는 또다시 앞서 언급하셨던 말 속에 담겨 있는 궁
    극적이지 못한 부분과 원만하지 못한 부분을 다시 걷어내셨습니다.
    在前一句,如来为彰显如来果位见地,提到凡夫认“假我”为我,但这一品的开始,佛说没有
    众生,众生都是佛,现在又提凡夫的概念,故马上在后一句说如来说凡夫并非真有凡夫,凡夫也
    是假相,只是交流的方便,假名凡夫。再一次破弟子们心中的凡夫相,不要头脑中执着实有众
    生、实有凡夫,众生执着众生相、凡夫相,也会执着佛相,故佛在下一品就问关于三十二相的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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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题了。但佛在这一品的重点不是破这些相,而是告诉弟子,如来真空之境中因为究竟无我,故不
    生一念,不生一法。
    앞 구절에서 여래께서는 당신의 과위 견지를 충분히 드러내시기 위해 범부들은 이 ‘가짜
    나’를 ‘나’로 여긴다고 말씀하신 데 반해 이 품의 서두에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이란 것은 없
    으며 중생은 모두 부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범부의 개념을 언급하시면서
    곧바로 뒤 구절에서 “여래가 말하는 범부는 진실로 존재하는 범부가 아니며, 범부 또한 가
    상이다. 단지 소통의 편의를 위해 가명으로 범부라고 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 제자들 마음속의 범부상을 파하여 머릿속에 실로 중생이 있고, 실로 범부가
    있다고 여기는 집착을 깨도록 하셨습니다. 중생이 중생상과 범부상, 나아가 부처의 상에도
    집착하므로 부처님께서는 다음 품에서 바로 32상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품의 중점은 이런 상을 타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궁극적으로 무아이므로 일념(一念), 일법(一法)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데
    있습니다. 제26품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这一品的大意是,佛陀问须菩提:“须菩提,你认为怎样呢,可以以三十二相观如来吗?”须
    菩提说:“可以,可以以三十二相观如来。”佛陀说:“须菩提,若可以以三十二相观如来,那转轮
    圣王也有三十二相,那转轮圣王即是如来。”须菩提又说:“世尊,现在我理解佛所说的意思,不
    应当以三十二相观如来。”此时世尊说了一个偈子:“若以色见我,以音声求我,是人行邪道,不
    能见如来。”这一品佛与须菩提的问答很微妙,一定要知道他们站在怎样的角度交流,否则我们就
    会纳闷,须菩提怎么会答错佛的问话呢?
    “须菩提!于意云何?可以三十二相观如来不?”须菩提言:“如是!如是!以三十二相观
    如来。”佛言:“须菩提!若以三十二相观如来者,转轮圣王即是如来。”须菩提白佛言:“世
    尊!如我解佛所说义,不应以三十二相观如来。”尔时,世尊而说偈言:“若以色见我,以音声
    求我,是人行邪道,不能见如来”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겠구
    나.”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보
    아서는 안 됩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형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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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이 어떠한가?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그대 말대로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32상이 있으니
    전륜성왕도 곧 여래겠구나.”
    수보리가 또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깨달아 32상으로 여래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게송을 읊습니다.
    “만약 형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
    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이 품에서의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은 아주 미묘하므로 반드시 그들이 어떤 견지에서 교
    류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수보리가 왜 부처님의 질문에 그릇
    되게 답을 했을까 하는 의혹이 들게 됩니다.
    在经文的前面,佛已几次与须菩提探讨过关于如来的身相问题,如第五品:“须菩提,于意云
    何,可以身相见如来不。”“不也,世尊。不可以身相得见如来。何以故,如来所说身相,即非身
    相。”佛告诉须菩提:“凡所有相,皆是虚妄。若见诸相非相,即见如来。”第十三品中:“须菩提,
    于意云何,可以三十二相见如来不。不也,世尊。何以故,如来说三十二相,即是非相,是名三
    十二相。”
    경전의 앞부분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미 수보리와 여래 몸의 형상 문제에 관해 몇 차례 탐
    구하신 적이 계십니다. 예를 들면 제5품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
    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모든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
    라.”
    제13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는 32상이 곧
    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32상이라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我们可以从前面的经文中看到,须菩提在前面所有的回答都是不可以,不可以以某一种特定
    的身相见如来。但现在这一品,为什么当佛问:“须菩提,于意云何。可以三十二相观如来不。” 须菩提言:“如是,世尊。可以以三十二相观如来。”因为此时,佛立于如来真空之境,与他交流
    第一义谛。我们从第二十一品中看到佛否定了须菩提提到的众生的存在,说众生是个假名;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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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到第二十四品中,是须菩提在提问,佛谈到了“无上正等正觉”是不着一切相的平等与无所得
    心;第二十五品又否定了凡夫的存在,说凡夫是假名。
    앞의 경문에서 볼 수 있다시피, 수보리가 앞에서 한 대답은 모두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특정된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품
    에서는 왜 부처님께서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는
    가?”라고 물으시자 수보리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라
    고 대답했을까요? 왜냐하면 이 경우는, 부처님께서 여래의 진공 경계에 서서 그와 제일의제
    (第一義諦)를 교류하고 계시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21품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언급한 중생의 존재를 부정하시면서 중생은 가
    명이라고 설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제22품에서 제24품에 이르기까지는, 수보리가 문제를 제
    기하자 부처님께서 ‘무상정등정각’은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 평등심과 무소득심(無所得
    心)임을 설하셨고, 제25품에서는 범부의 존재를 다시 부정하시면서 범부는 단지 가명일 뿐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其实在这几品的对答中,佛已意在令弟子们不再着相后,抛开仍是凡夫、众生的知见,该从
    “闻法者”的角度进入如来真空境界了,已不能有闻与所闻,观与所观了。而须菩提一时未能领
    悟,未能安住于如来的真空境界中,但须菩提知道“真空生妙有”的道理,如来真空之境可以示现
    一切相而无一切相。从这个角度,我们可以以任一相来观如来,见任一相即见空性,即见如来。
    正因为须菩提了知这个道理,所以他说可以以三十二相观如来。须菩提这样答,对执着“色空不
    二”相的弟子而言,听起来并没有错,但对着如来定相的众生而言,回答就有失偏颇。
    사실 상술한 이 몇 품의 질의응답에서 부처님의 의중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더는
    상에 집착하지 않게 된 후 여전히 남아있는 범부와 중생의 지견을 떨쳐버리고 이제 ‘법을
    듣는 자’의 견지에서 여래의 진공 경계에 들어가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듣
    는 주체[能聞]와 들리는 대상[所聞], 보는 주체[能觀]와 보이는 대상[所觀]이 있을 수 없는
    경계입니다. 그러나 수보리는 이를 한순간에 깨닫지 못했고 또한 여래의 진공 경계에 안주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수보리는 ‘진공이 묘유를 낳는다[眞空生妙有]’는 이치, 즉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일체의
    상을 시현할 수 있으나 그 일체가 사실 상이 없다는 데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견지
    에서 우리는 그 어떤 상으로도 여래를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어떤 상을 보든 곧 공성을 보
    는 것이고 여래를 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 이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보리는 32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답했던 것입니다. 수보리의 이 대답은 ‘색공불이(色空不二)’라
    는 상에 집착하는 제자들이 듣기에는 틀린 말이 아니겠지만, 여래에게 고정된 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중생에게 있어서는 그 대답이 다소 편파적일 수 있습니다.
    所以,如果此品放在前面讨论,这句话的后面可能会加“三十二相即是非相,是名三十二
    相”。但现在须菩提并未这样说,因为须菩提与佛探讨空性的视角已转入色空不二的角度,性相一
    如,弟子们已不能停留在意识层面,用真或假,性或相来分开了悟真理了,而是当下“性相”都不
    住,透过去。因为佛在前几品反复提到如来真空之境中无念、无心、无一切相,而在此基础上如
    来说法、如来度众生、如来说有我。每一位众生都具备如来此品质。
  • 123 –
    그러므로 만약 이 품을 앞부분에 배정해서 토론했다고 가정하면, 이 구절 뒤에 아마도
    “32상은 곧 상이 아니므로 이름하여 32상이라 한다.”가 추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수보리는 이같이 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와 부처님께서 공성을 탐구하는 시각
    이 이미 색공불이의 관점으로 전환 되었으므로 본성(性)과 상(相)은 하나와 같기 때문입니
    다. 따라서 제자들도 더는 의식 차원에 머물러 참과 거짓, 본성과 상으로 나눠서 진리를 깨
    닫는 단계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당하의 ‘본성과 상’에 머물지 말고 꿰뚫어 나
    가야 할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앞선 몇 품에서 여래의 진공 경계는 무
    념·무심·무일체상(無一切相)이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하시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여래가 법을
    설하고,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며, 여래가 아(我)가 있다고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은
    모두 여래의 이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습니다.
    而须菩提从一开始探讨空性到现在,虽然内心深处诸相层层破,但他的关注点始终放在面前
    的佛陀上,说如来之境也认为是佛陀的如来之境,自己此时并未安住在与佛同等的位置上。故他
    在对空性的回答中还有一个我、佛以及问答,须菩提与佛还是两个。所以,未证果位的人,即使
    已领悟佛的见地,已开悟,但仍需时时觉照自己言行的角度,否则易有微细的执着,偏离空性。
    只有安住在果位上,才算真正证得。
    수보리는 공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내면 깊은 곳에서 온갖 상을 겹겹이 타
    파해 왔으나, 그의 관심은 시종일관 눈앞에 계신 부처님께 놓여 있었습니다. 여래의 경계를
    논함에도 그것을 자신의 것이 아닌 부처님의 경계로만 여겼기에 자신은 아직 부처님과 동등
    한 위치에 안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성에 대한 그의 답변 속에는 여전
    히 ‘나’와 ‘부처’, 그리고 ‘문답’이라는 분별이 남아있으며, 수보리와 부처님은 여전히 별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 과위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은 비록 부처님의 견지를 이해하여 깨달음을 얻었
    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언행이 어떤 관점에 서 있는지 늘 살피고 비추어 보아야 합
    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쉽게 미세한 집착들이 생겨 공성의 궤도를 이탈하기 쉽습니다. 오직 그 과위에 온전히 안주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증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所以,此处,佛又轻轻问:“须菩提,于意云何。可以三十二相观如来否?”如果此时须菩提
    已安住在如来真空之境,他即会会意佛说的话,根本没有一个须菩提能观,他拿什么来观呢?也
    无有一个如来三十二相可观。能观的,所观的都应空。因为无须菩提,眼前也不会有如来,因为
    无我、无人,故也无如来三十二相。须菩提显然有对空性圆满的知解,但一时未安住在如来真空
    之境,仍然在回答中滞留了我相、佛相,有我在观,而佛提醒的是,须菩提此时应与如来是一体
    的。故佛马上否定了他的回答,并说:“须菩提,若以三十二相观如来,转轮圣王即是如来。”
    그래서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또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가령 이때 수보리가 이미 여래의 진공 경계에 안주하고 있다면 그는 즉각 부처님께서 하
    신 말씀의 진의를 알아듣고 “수보리란 존재가 근본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갖고 이를 보겠
    습니까? 여래 또한 32상이 부재하므로 이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주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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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는 대상 모두 공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보리가 부재하므로 눈앞의 여래도 역시 부재하고, 무아·무인이므로 여래의 32
    상 역시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분명히 공성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있었으나 잠시 여래
    의 진공 경계에 안주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답변은 여전히 아상과 부처상에 머물
    러 있으면서 ‘내가 보고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 여래는 이
    시점에서 사실 하나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렇게 부처님께서는 즉시 그의 대답을 부정하
    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겠구나.”
    佛用一个例子来否定了须菩提刚才的回答。在佛教经典中,传说转轮圣王功德很大,他出现
    于世可以一统天下,而且身体上天生具有如来的三十二种功德之相,但没有八十种随形好。佛
    说,“如果你这样说,转轮圣王也是如来了。”须菩提马上明白了佛的角度,说:“世尊,现在我理
    解了您的意思,不应以三十二相观如来。”这是真空的起用,观如来三十二相,心中实无三十二
    相,故如来无相。 부처님께서는 한 가지 예를 들어 수보리의 앞선 대답을 부정하셨습니다. 불교 경전에는, 전륜성왕은 그 공덕이 아주 커서 그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몸도 태어날 때 이미 여래와 같은 32가지 공덕의 상을 갖추고 있으나 80종호는 없다는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대 말대로 그러하다면 전륜성왕 또한 여래겠구나.”
    수보리는 즉각 부처님의 논조를 알아차리고는 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깨달아 32상으로 여래를 보아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진공의 쓰임입니다. 여래의 32상을 관(觀)하되, 마음속에는 실로 32상이 없으므로
    여래는 상이 없는 것입니다.
    这一品的最后,世尊说了一个偈颂:“若以色见我,以音声求我,是人行邪道,不能见如
    来。”佛的这个偈颂是站在如来真空的见地上说的,如果行者真的想了知如来是什么样,就要了知
    佛的“空性”智慧,否则即使你在禅定中看到满天神佛,也不能算真的有一次见到如来。真正想见
    到如来,要了悟自性,了悟如来真空之境,了悟每个人本质都是佛。
    이 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존은 게송을 읊습니다.
    “만약 형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
    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부처님은 이 게송을 여래 진공의 견지에서 읊은 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진정 여래의 참
    모습을 알고 싶다면 부처님의 “공성” 지혜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선정 속
    에서 온 하늘에 가득 찬 신선과 부처를 본다고 할지라도 진실로 여래를 본 것이라고 할 수
    는 없습니다. 진정 여래를 보고 싶다면 자성을 깨닫고 여래의 진공 경계를 깨닫고 모든 사
    람의 본질은 모두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看到这首偈子,想到一位同修问我说,佛说不能以音声求我,不能以色见我,那观世音菩萨
  • 125 –
    说闻声救苦,千处祈求千处现,阿弥陀佛说临终呼唤他的名字,他就会来接引。这不是让我们行
    邪道吗?《金刚经》中佛的偈颂是立于“如来真空之境”中,告诉所有发心求取无上正等正觉的弟
    子们的。如果一位修行大乘佛法的人心中还着我相、人相、众生相、佛相、佛法相等,是无法回
    归成就佛果的。而阿弥陀佛和观世音菩萨的角度是空性在时空中慈悲、方便的示现,是帮助那些
    在苦海中无力自拔走出烦恼绝境的人。一个谈真空,一个谈妙用的,这是两个角度。佛谈的是如
    来真空之境、果位境界,是众生要想从梦中醒来,必须有的见地。而阿弥陀佛与观世音菩萨的行
    为即是进入众生的梦中,帮助接引那些梦到自己正在受苦受难、无法解脱的众生。我们学习佛法
    要有佛学的空性正见,也要善用慈悲方便,在空性正见的指导下,入世行菩萨道,以种种善巧的
    法门接引、救度众生。
    이 게송를 보고 있자니 예전이 한 도반이 저에게 물었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부처님께서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지 말고 형색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
    는데 그럼 관세음보살님은 소리를 듣고 고통에서 구해주시는 바 천 곳에서 기도하면 그 천
    곳에 나타나신다고 하셨고, 아미타불께서는 임종 시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그곳에 오셔서
    맞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삿된 도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
    이 아닙니까?”
    금강경 중 부처님의 게송은 ‘여래의 진공 경계’에 임하여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고자 발
    심한 모든 제자에게 이르신 것입니다. 만약 대승 불법을 수행하는 이의 마음속에 여전히 아
    상·인상·중생상·불상·불법상 등이 남아있다면 성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과 관세
    음보살의 경우는 시공간에서의 자비롭고 방편적인 공성의 시현으로서 고해에서 스스로 벗어
    날 힘이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공 담론이요, 다른 하나는 묘용
    (妙用)으로서 이는 두 측면입니다. 부처님께서 언급하신 여래의 진공 경계와 과위 경계는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려면 반드시
    지녀야 할 견지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행위는 곧 중생의 꿈에 들어가서
    중생 자신이 꿈속에서 고통과 고난을 느끼고 있는 등 스스로 해탈이 불가능한 중생을 도와
    주고 인도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공부하면서 불교의 공성 정견을 갖추어
    야 할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방편 역시 잘 활용함으로써 공성 정견의 지도 아래에 속세에
    들어가 보살도를 실천하고 각종 선교 법문으로 중생을 인도하고 제도해야 할 것입니다.
    还有一些行者,引用佛的这首偈颂,对一些谈自己证悟境界或神通的人进行攻击和诽谤,认
    为这些人是在行邪道,或直接说是走火入魔。其实,不管这个人在说什么,首先是看他是否执着
    这些神通境界,是否在炫耀,或以此想获得名闻利养。如果不是,只是行者疑惑求问,或者想告
    诉别人自己在某一境界中的领悟等,而行者的见地是佛的空性正见,那就不可以说他是在行邪
    道,诽谤他就在造口业了。
    또 일부 수행자는 부처님의 이 게송을 인용하여, 자신이 증득한 경계나 혹은 신통력을 이
    야기하는 그 누군가에 대해 이런 사람들이 삿된 도를 행하고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아예 주
    화입마하였다고 공격하고 비방합니다. 사실 그 누군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든지 간에 우선은
    그가 이런 신통 경계에 집착하는지 아니면 과시하는지 혹은 이를 통해 명예와 이득을 얻고
    자 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단지 그 수행자가 자신의 의문점을 타인에게 묻거나 혹은 자신의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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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 한 경계 중의 깨달음 등을 다른 이에게 알려주려고 이야기한 경우이며 또한 수행자의 견
    지가 부처님의 공성 정견이라면 그가 삿된 도를 행하였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런 상황에
    서 그를 비방한다면 이는 구업을 쌓는 일이 됩니다.
    佛在第十八品中也说:佛有天眼、慧眼、法眼、佛眼,当然也有天眼、慧眼、法眼、佛眼的
    境界。即使佛谈这些境界,我们知道佛是在了知一切相虚妄的基础上,谈神通,谈法力无边,谈
    无量无边的佛土世界状况。我们不能以此来诽谤佛,但也是因为众生实在是太容易执着这些相
    了,有时不执着肉眼所见,却执天眼所见。所以,后世很多师父们才让弟子们见佛斩佛、见魔斩
    魔,全是因弟子还未进入“如来真空之境”,担心弟子们执着这些路上的风景。如果弟子已知一切
    相虚妄,佛相、魔相,不管示现什么都是虚妄,如如不动就好,斩个什么?即使说空说有,谈佛
    谈魔,也只是度众生的方便。
    부처님께서 제18품에서도 부처는 천안·혜안·법안·불안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당연히 천
    안·혜안·법안·불안의 경계 또한 있을 겁니다. 사실 부처님께서 이런 경계를 논하시기는 하나
    이는 부처님께서 일체 상이 허망함을 깨달은 전제 위에서 신통력과 끝없는 법력 그리고 한
    량없는 불국토 세계의 상황을 말씀하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를 빌미로 부처님을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생은 실로 이런 상에 너무나 쉽게 집
    착하게 되는데 때론 육안으로 본 것에는 집착하지 않으나 오히려 천안으로 본 경계에는 집
    착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후세의 많은 스승이 제자에게 부처를 보면 부처를 베고, 마구니를 보면 마구니
    를 베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제자들이 ‘여래의 진공 경계’에 온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수행 과정에서 스쳐 지나가는 현상에 집착할까 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자
    가 일체 상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에게 부처의 형상이든 마구니의 형상이든 아
    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이 나타나든 그것들이 모두 허망한 것임을 알기에 마음이 여여부동하
    면 그만인데 그렇다면 벨 것 또한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설령 공(空)과 유(有)를 설하고
    부처와 마구니를 논한다고 해도 이는 단지 중생을 제도하려는 방편일 뿐입니다. 제27품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제28품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须菩提!汝若作是念:‘如来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须菩提!莫作是
    念,‘如来不以具足相故,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须菩提!汝若作是念,发阿耨多罗三藐三
    菩提心者,说诸法断灭。莫作是念!何以故?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心者,于法不说断灭
    相。”
    “수보리여! 그대가 ‘여래는 상을 원만하게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를 얻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여래는 상을 원만하게 갖추지 않았기 때문
    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수보리여! 그대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자는 일체법이 단절되고 소멸된
    다고 설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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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这一品的大意是,佛陀说:“须菩提,你(现在)如果有这样的念头,如来无须以三十二种圆
    满的身相证得无上正等正觉,须菩提,不要有这样的心念。如果你有这样的想法,那么生起最高
    最圆满觉悟的人,就是在说要舍弃一切存在现象的断灭相了。为什么呢?生起最高最圆满觉悟的
    人,对一切存在现象不是全盘否定、舍弃进入断灭的境界。”因为如来在上一品中,否定了须菩提
    的回答,说不应以三十二相观如来,令须菩提安住在了“如来真空之境”上,无能观与所观,但对
    如来见地仍迷惑的众生可能会认为,既然三十二相是虚妄的,那可以不用修清净行,不用功德就
    可以成佛了。
    이 품의 대체적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가 (지금) 혹시 ‘여래가 32가지 원만한 몸의 형상을 갖추지 않고서도 무
    상정등정각을 증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여,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만약 그대
    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최고로 원만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일체 존재하는 현상을
    전부 부정하고 없애버리는 단멸상(斷滅相)을 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최고로
    원만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일체 존재하는 현상에 대해서 전부 부정하고 이를 버
    린 후 단멸의 경계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앞선 품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대답을 부정하시며 32상으로 여래를 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수보리는 보는 주체[能觀]와 보이는 대상[所觀]이 없는 ‘여
    래의 진공 경계’에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래의 견지에 대해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는 중생은 32상이 허망한 것이라면 굳이 청정행을 닦지 않아도, 공덕을 쌓지 않아도 성불
    할 수 있으리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因如来三十二相八十随形好是功德圆满之相,所以此处,佛说:“你们千万别这样想,成就无
    上正等正觉不需要具足圆满功德。没有功德,你可能永远无法从梦中醒来。”而一位真正了悟般若
    智慧的佛弟子,于这世界一切不会简单地否定或抛弃。如果在意识层面认为佛说万法虚妄,没有
    或舍弃万法,住在寂灭中,即佛说的断灭见,非佛正知见。为了证明佛以上观点,令弟子们对这
    음을 발한 자는 법에 대하여 단절되고 소멸된다는 상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须菩提!若菩萨以满恒河沙等世界七宝持用布施;若复有人知一切法无我,得成于忍,
    此菩萨胜前菩萨所得功德。何以故?须菩提!以诸菩萨不受福德故。”须菩提白佛言:“世尊!
    云何菩萨不受福德?”“须菩提!菩萨所作福德,不应贪着,是故说不受福德。”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한다고 해
    도, 만약 또 어떤 보살이 있어 일체법이 무아임을 알아 인욕을 성취하게 된다면, 이 보
    살의 공덕이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수보리여! 보살은 자신이 쌓은 복덕에 탐착하지 않아야 하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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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个观点有更深入的领悟,让弟子们知道在修行中了知一切“法无我”应怎样做,佛马上举了一个例
    子来阐述刚才所说,即是第二十八品。
    여래의 32상 80종호는 공덕이 원만한 상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
    습니다. “그대들은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말라. 공덕이 없다면 그대들은 어쩌면 영원히 꿈에서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반야 지혜를 깨달은 부처님 제자라면 이 세상의 일체에 대해 단순히 부정하거나
    내버리지 않습니다. 만약 의식 차원에서 부처님께서 만법이 허망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만법을 버린 채 적멸 속에 머물고자 한다면 이는 바로 부처님께
    서 말씀하신 단멸견(斷滅見)일 뿐 부처님의 올바른 지견(知見)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관점을 증명하여 제자들이 이 관점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하고, 제자들이 수행 중 일체 ‘법무아(法無我)’를 깨닫기 위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고 즉시 한 예를 들어 방금 언급한 바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제28품입니다.
    原文大意是:佛陀说:“须菩提,假如有一位菩萨,拿恒河沙一样多的世界七宝来用作布施。
    又有一人,了悟一切法无我,修行能从‘忍’中成就,此菩萨所得功德超出了前面的菩萨。为什么
    呢,须菩提?因为这位菩萨不受福德的原因。”须菩提问佛陀:“世尊,什么是菩萨不受福德?”佛
    陀说:“须菩提,菩萨对所做的福德不贪着、不执着,所以说不受福德。”
    원문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한 보살이 있어 항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의 칠보를 가져다 보시한다고 하
    자. 또 어떤 보살이 있어 일체법이 무아임을 깨닫고 수행하여 ‘인(忍)’을 통해 이를 성취해
    낸다면 이 보살이 얻는 공덕은 앞의 보살의 공덕을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이 보살
    이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자신이 행한 복덕을 탐하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
    다고 설한 것이다.”
    在这一品中佛说:“须菩提,比如有一位菩萨,拿恒河沙一样多的七宝来做布施。又有一人了
    悟一切法无我,在‘忍’中成就。此菩萨所获得的功德胜过前面的菩萨。”什么是我说的“忍”呢?即
    令心安住在一切境中,如如不动,即为忍。比如,修六度中的忍辱行,如果我们知一切法空,没
    有可忍的人、可忍的事,而自我也空,这样修才能令心真的安住在忍辱行中,否则我们的“忍”辱
    就是承受,就是在忍受。只要觉得有个自我,有个他人,有个在忍受的事,就迟早会忍无可忍。
    即使坚持下来,也是在经受磨难、牺牲与付出。所以知一切法空,我们才能不起瞋念,才能令心
    长久、无得无失地安住在修行中,圆证佛果。去修忍辱行,如果不知万法皆空的道理,其实所有
    善行,所有忍受也只是人天福报。
  • 129 –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예를 들어 어떤 보살이 있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칠보로 보시한다고 하
    자. 또 어떤 보살이 있어 모든 법이 무아임을 깨닫고 인(忍)을 통해 이를 성취해 낸다면 이
    보살이 얻는 공덕은 앞의 보살의 공덕을 뛰어넘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忍)’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떤 경계에서도 마음이 편
    안히 머물며 여여부동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곧 ‘인’입니다. 예를 들어 육바라밀 중 인욕행
    을 닦을 때 일체법이 공함을 알아 참아야 하는 대상도 없고, 참아야 하는 일도 없으며 나
    자신 또한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때야 비로소 마음이 진정으로 인욕행에 안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인욕’은 그저 억지로 감내하는 것이거나 참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있고 상대가 있으며 참아야 할 일이 있다고 여기는 한 조만간에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설령 끝까지 견딘다고 하더라도 고난·희생·헌신을 겪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깨우쳐야만 비로소 화가 나지 않고 마음이 오랫동안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이 수행에 안주할 수 있어 불과를 원만히 증득할 수 있습니다. 인욕
    행을 닦되 만법이 모두 공하다는 이치를 모르면 사실 모든 선행과 모든 인내는 그저 인간과
    천인의 복에 그치고 맙니다.
    有些弟子可能会认为一切法空、我空、人空、“忍”辱的事也空,那不是忍与不忍一个样吗?
    既然如此,我为什么要“忍”辱呢?我不修“忍”辱,只要事过后,我心中不罣碍就可以了。但万法皆
    空时,你即是众生,你不挂,与你计较、被你伤害的众生能不挂吗?所以,如果行者有如上想
    法,即是佛在前面说的不修福德就想成就无上正等正觉,认为“忍”辱也空,福德也空,只要否定
    一切就是佛说的空性,这即是断灭见。再比如,我们在修行时,要忍受身心内外一切境的诱惑,
    忍受习气欲望的牵引,令心安住在空性正见上而如如不动。未圆证如来境界,就说做与不做一
    样,从而随顺自己习气欲望、随心所欲,干什么都无所谓,这就不是在菩萨道上,也不是在学佛
    了。佛弟子应知一切相虚妄,而行一切善法,圆一切功德,才能彻底迁除一切我执、习气欲望,
    从梦中醒来。
    어떤 제자들은 일체법이 공하고, 아(我)가 공하고, 인(人)이 공하며, 인욕하는 일도 공하
    다고 하니, 참는 것이나 참지 않는 것이나 매한가지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
    다면 왜 굳이 인욕해야 하는가? 인욕을 수행하지 않고 일이 지나간 후에 마음속에 걸림이
    없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법이 모두 공할 때, 당신이 곧 중생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걸림이 없다고 해서
    당신하고 따지던 중생이나 당신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중생의 마음에도 걸림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만약 수행자가 위에서와 같은 생각을 품는다면 이것인즉 부처님께서 앞
    서 말씀하신 복덕을 닦지 않고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그렇게 인욕도
    공하고 복덕도 공하다면서 그저 일체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성이라
    고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단멸견(斷滅見)입니다. 또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수행할 때, 심신 내외 일체 경계의 유혹을 참고, 습기
    와 욕망의 이끌림을 참아, 마음을 공성 정견에 편안하게 머물게 한 후 여여부동해야 합니
    다. 여래의 경계를 원만하게 증득하기 전에 하는 것이나 안 하는 것이나 다 똑같다고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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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습기와 욕망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고 여기는 태도
    는 보살도의 길이 아니며 불교를 배우는 자세도 아닙니다. 불제자들은 마땅히 일체 상이 허
    망하다는 이치를 깨닫고서도, 동시에 일체 선법을 실천하여 일체 공덕을 원만하게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모든 아집과 습기, 욕망을 철저히 뿌리 뽑고 미혹의 꿈에서 깨어
    날 수 있습니다.
    在此,佛说,菩萨不受福德,如来的“真空之境”讲到这,一切都从有开始谈了。空即是色,
    如来之境用到时空中、人道的生活中,平凡的只是不受不贪。我们在这儿谈一下什么是“不受”,
    佛为什么会用“不受福德”来解释菩萨“得成于忍”,让解空第一的须菩提都没有马上反应过来。我
    想,也许须菩提一直将随佛修行作为生命中最大的福德,从未想过还有什么出世入世的福德要
    受,所以才没能马上意会佛的话。
    이 지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에 대한 설명이 이 대목에 이르게 되면, 이제 모든 것을 유(有)의 관점에서부터 논의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공즉시색(空即是色)의 도리입니다. 여래의 경계를 시공간 속에서
    즉 일상 생활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평범하게도 그저 ‘받지도 탐하지도 않는 것’으로 나타납
    니다.
    여기서 ‘받지 않음[不受]’이 무엇인지,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왜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표
    현으로 보살이 ‘인(忍)을 이루게 됨’을 해석했는지, 그래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는
    수보리마저도 이에 대해 바로 반응하지 못했는지를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견입니다
    만, 수보리는 시종일관 부처님 곁에서 수행하는 것 자체를 생의 최고 복덕으로 여겨 왔기
    에, 그 밖에 또 받아야 할 출세간(出世間)이나 세간(世間)의 복덕이 따로 있다고는 종래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의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
    이 아닌가 싶습니다.
    在人道,菩萨了知万法皆空,却忍受身心欲望的煎熬,忍受外境种种美食、音乐、歌舞、华
    衣、奢侈的享受,忍受种种外境的诱惑,如如不动安住于空性正见中,安坐于僻静处修行。在世
    俗人眼中,这个人似乎没有福德。大菩萨真的生生世世没有累积福德吗?真的没有能力获取、享
    受这世界一切吗?不是,是一位真正的菩萨不贪恋这世界所有的有漏福德。菩萨不贪恋这世界有
    漏福德,广行菩萨道,功德逐渐圆满,但菩萨也同样不贪恋出世的功德,视出世界的功德也如幻
    化,所以才能在“忍”中成就无上正等正觉。佛把大菩萨这个行为称为“不受福德”。
    인간 세상에서 보살은 만법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심신의 욕망이 가져다주는
    번뇌를 견뎌내고 각양각색의 미식·음악·가무·화려한 의복·사치스러운 향락 등 온갖 외부 환
    상 경계의 유혹을 참으면서 공성 정견에 여여부동하게 안주하여 한적한 곳에서 수행에 전념
    합니다. 세속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사람들이 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
    다면 대보살은 정말로 세세생생 복덕을 쌓지 않은 것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고 누
    릴 능력이 정말로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보살은 이 세상의 모든 유루복덕(有漏福德) 즉 번뇌가 있는 복
    덕을 탐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이 세상의 유루복덕을 탐내지 않고 보살행을 널리 행
    하면 공덕이 점차 원만해집니다. 이와 동시에 출세간의 공덕 또한 탐내지 않고 그 공덕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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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환상으로 여겨야만 비로소 인(忍)을 통해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는 대보살의 이런 행위를 일컬어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所以在座的每一位有大福德的行者,如果你们有能力有条件得到这世界上的奢侈繁华,但却
    如如不动,安住于佛的空性正见中去求无上正等正觉,而不是安住于世间的荣华富贵中。同样,
    修证中的行者能观禅悦、光化身、神通神变、三十二相视为幻化,也是不受福德,也是不贪。这
    就是经中说的菩萨不受福德,菩萨不应贪着。所以,佛在此说:“如果有一个人了知一切法无自
    性,而能令心安住于种种诱惑的幻境中,如如不动,并以此成就,福德大于以满恒河沙等七宝做
    布施的菩萨。”而且他还接着说:“因为这位菩萨不受福德的缘故。”须菩提问佛陀:“世尊,什么是
    菩萨不受福德?”佛说:“菩萨所做福德不应贪着,是故说不受福德。”
    그러므로 여기에 자리한 큰 복덕이 있는 수행자 여러분, 설령 여러분이 세상의 사치와 부
    귀영화를 누릴 능력과 여건이 된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공성 정견에 여여부동하게 안주하
    여 무상정등정각을 구해야 마땅하지 세간의 부귀영화에 안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
    다. 마찬가지로, 수행 증득 과정에서 수행자가 선정의 기쁨, 빛으로 화한 몸, 신통력과 신변
    (神變), 부처님의 32상 모두를 환상으로 여긴다면 이 또한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고 ‘탐하
    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 말한,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으며 보살은 마땅히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법이 자성이 없음을 깨닫고, 온갖 유혹의 환상 경계에서도 마음을
    안주시켜 여여부동하여, 이를 통해 성취를 이룬다면 그 복덕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칠보
    로 보시한 보살의 복덕보다도 더 클 것이다.”
    그리고 또 이어서 “그것은 이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은 자신이 쌓은 복덕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까닭으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
    고 설한 것이다.”
    第二十八品的内容基本上是在为第二十七品做阐述,在第二十七品中,佛担心弟子们认为既
    然诸法皆空,不需要修三十二种清净行,不需要具足圆满的功德就可以得无上正等正觉,这个见
    地是对佛说的空性见地的错误认知,是对万法的简单否定与抛弃,非佛正见。所以,佛说:“一位
    菩萨知一切皆空,以‘忍’成就,此人所得福德很大。”但大家要注意一下,在此品的前面,佛与须
    菩提的交流中已无数次谈到了福德的虚妄,而在第十九品中谈到正因为福德无自性,也本质空,
    所以如来说得福德多。所以此处,佛在说到菩萨福德多时又加了一句:“因为这些菩萨已经不受、
    不贪福德,即已破了对福德的执着了,所以我说他们能知一切法空,而得成于忍。如此修证,所
    得福德胜过满恒河沙七宝持用布施的功德。”
    제28품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제27품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제27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법이 공하기에 굳이 32가지 청정행을 닦을 필요가 없고, 원만한 공덕을 갖추
    지 않아도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길까 봐 염려하셨습니다. 이런 견지는 부처님
  • 132 –
    께서 말씀하신 공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서 다만 만법에 대한 단순한 부정과 포기이지
    부처님의 올바른 지견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한 보살이 일체법이 모두 공함을
    알고 인욕을 성취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은 아주 크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점은, 이 품에 앞서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 중 복덕의 허
    망함을 이미 수없이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19품에서는 바로 복덕은
    자성이 없고 본질적으로 공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보살이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아울러 한마디를 추가하
    셨습니다. “이러한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도 탐하지도 않아 이미 복덕에 대한 집착을 파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알고 인욕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
    게 수행하여 증득하면 얻는 그 복덕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칠보를 가져다 보시한 그
    공덕을 뛰어넘는다.”
    제29품 우의적정분(威儀寂靜分)
    这一品的大意是,佛陀说:“须菩提,如果有人说如来有时来、有时去、有时坐、有时卧,说
    这话的人就不能理解我所说的一切了。为什么这样说呢?因为如来的意思就是无所从来,也无所
    去(即没有一个来的地方和形象,也没有一个去的地方和形象),这才叫如来啊。”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때로는 오고, 때로는 가고, 때로는 앉고, 때로는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래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
    는 바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즉 오고 가는 특정한 장소나 형상이 없다는
    뜻임) 비로소 여래라 이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这一品,佛仍然在阐述如来的真空之境。我们看到佛有来、有去、有坐、有卧,可我们安住
    在真空之境中时,就知道,如来从未动过,因真空中根本无可动的东西。对证入空性的人,语默
    动静如同幻化,“如来真空”中无我、无人、无生灭、无变异,如如不动,不来不去,所以佛说:
    “如来者,无所从来,也无所去,故名如来。”到此,我们想到佛在第十七品中对如来的一句定
    义:“如来者,即诸法如义”,即万法本质上都如如不动,不曾生灭变异,不来不去,所以称名如
    来。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여전히 여래의 진공 경계에 대해 설하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는
    부처님께서 오고, 가고, 앉고, 눕는 모습이 보이지만 하나 만약 우리가 진공 경계에 안주해
    “须菩提!若有人言:如来若来若去、若坐若卧,是人不解我所说义。何以故?如来者,
    无所从来,亦无所去,故名如来。”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거나 가거나, 앉거나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어디에서 오는 바
    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여래라 하기 때문이다.”
  • 133 –
    있다면 여래께서 종래로 움직인 적이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공에는 움직일
    수 있는 그 무엇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성을 증득한 사람에게는 말과 침묵,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환상과 같기에, ‘여래의 진
    공’ 속은 무아·무인·무생멸·무변이(無變異)이며, 여여부동하고 오고 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여래란 어디에서 오는 바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
    하여 여래라 하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제17
    품에서 여래에 대해 내리신 정의를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일체법
    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만법의 본질은 모두 여여부동하
    며, 생멸 변이를 일으킨 적도 없고, 오고 감도 없으므로 여래라 이름한 것입니다.
    这世间万法都圆满具足如来的本性。现在科学证明宇宙是因为大爆炸形成,爆炸后才形成了
    无量无边的星球。佛法中认为,宇宙一切都是因缘具足形成的,比如这个爆炸也是一个缘,但佛
    学讲缘起的同时讲性空,认为人类要回归生命的源头,认清生命终极的意义,就应安住于万法缘
    起但性空的境界中,如如不动,不被境转,不被相迷。在这个基点上谈宇宙大爆炸只是幻境,宇
    宙只是一个假有。安住在这样的见地来修证,人类才可以回归生命的源头,才能结束在时空中的
    流浪,才会真正安心,明了生命的终极意义是回归本源。也许到此时,安立在“如来真空之境” 中,再看宇宙的一切,宇宙的一切都变成了妙有,都与清净无染的源头没有两样,才能真正全然
    享受时空中带给我们的一切,所有的世界也变成了极乐世界。
    이 세상 만법은 모두 여래의 본성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주가 빅뱅
    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고 폭발 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행성이 형성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우주 만물은 모두 인연이 갖추어져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이 대폭발 또한 하나의 ‘연(緣)’인 셈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연기를 설하는 동시에 공성도
    설합니다. 따라서 인류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생명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닫고자 한다면
    마땅히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만법 속에서 공성의 경계에 안주하여 여여부동하며,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상에 미혹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주 대폭발은 다만 환상에 불과하고, 우주는 또한 가상에 지나지 않
    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견지에 안주하여 수행하고 증득해야만 인류는 비로소 생명 근원으로
    의 회귀와 시공간에서의 방랑 종료에 힘입어 진정으로 마음이 편안해져서 생명의 궁극적 의
    미는 근원으로의 회귀임을 알게 됩니다. 혹여 이 지점에 이르러 ‘여래의 진공 경계’에 서서
    우주의 일체를 다시 본다면 우주의 일체는 모두 묘유(妙有)로 화하여 청정하고 오염 없는
    근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시공간이 우리에게 선사하
    는 모든 것을 온전히 즐길 수 있으며 모든 세상 또한 극락세계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제30품 일합상리분(一合相理分)
    “须菩提!若善男子、善女人,以三千大千世界碎为微尘,于意云何?是微尘众宁为多
    不?”须菩提言:“甚多,世尊!何以故?若是微尘众实有者,佛即不说是微尘众,所以者何?
    佛说:微尘众,即非微尘众,是名微尘众。世尊!如来所说三千大千世界,即非世界,是名世
  • 134 –
    这一品的大意是,佛陀问须菩提:“须菩提,假若有善男子善女人,将三千大千世界碎为微
    尘,你认为怎样呢,这些微尘的数目是不是很多?”须菩提回答说:“非常多,世尊。为什么这样
    说,假若这些微尘有一个真实存在的本性,佛就不会说这些微尘众数目众多了。为什么呢?佛说
    的微尘众,并没有一个微尘众的实体,是假名微尘众。世尊,如来所说的三千大千世界,也没有
    一个真实的实体存在,只是随顺世俗,假名世界。为什么这样说呢?假如世界实有,那就是众多
    现象聚合而成的一个统一体。如来说,众多现象聚合而成,也并无一个真实存在的本体,所以‘合
    相’只是称名为‘合相’。”佛陀说:“须菩提,众多现象聚合而成一个统一体,是不可言说的,但一
    般人在其中执着、分别。”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이를 티끌로 만든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티끌의 수가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티끌이 진실로 존재하는 본성이 있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티끌들의 수량이 많다고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
    처님께서 설하신 티끌들이란 티끌들이라 할 수 있는 실체가 없으므로 가명으로 티끌들이라
    고 이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 또한 진실
    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세속을 따라서 가명으로 세계라고 할 뿐입니다. 왜냐
    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허다한 현상이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큰 통일체
    이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여러 현상이 모여서 형성된 그것도 실제로 존재하는
    본체가 없기에 ‘하나로 합쳐진 모습’은 다만 이름하여 ‘하나로 합쳐진 모습’이라고 부를 뿐
    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허다한 현상이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통일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인데
    界。何以故?若世界实有者,即是一合相。如来说:‘一合相,即非一合相,是名一合相。’”
    “须菩提!一合相者,即是不可说,但凡夫之人贪着其事。”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티끌로 만든다면, 그대 생각
    은 어떠한가? 이 티끌들이 진정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티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
    님께서는 티끌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티
    끌들은 티끌들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티끌들이라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세계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로
    합쳐진 상이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하나로 합쳐진 상은 곧 하나로 합쳐진 상이 아니
    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하나로 합쳐진 상이라고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수보리여! 하나로 합쳐진 상이란 것은 곧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범부들이
    그것을 탐착할 따름이다.”
  • 135 –
    일반인들은 그 속에서 집착하고 분별한다.”
    这一品中,佛与须菩提的问题在第十三品中也提到过。原文是:“须菩提,于意云何。三千大
    千世界所有微尘,是为多不?”须菩提言:“甚多,世尊。”“须菩提,诸微尘,如来说非微尘,是名
    微尘。如来说世界,非世界,是名世界。”在第十三品中,如来从对弟子眼下关注的问题中,将视
    角拉向微尘一样多的广阔浩瀚的三千大千世界,告诉弟子们小到一粒微尘、大到三千大千世界,
    都只是假名,无实质的东西,令弟子们了悟如来说的诸法虚妄,不被境转,不被相迷。
    이 품에서 부처님과 수보리가 나눈 문답은 제13품에서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원문은 다
    음과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지 않은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그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비로소 이름하
    여 티끌이라 하는 것이다. 여래는 세계가 곧 세계가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세계라고 설
    한 것이다.”
    제13품에서 여래께서는 눈앞에 있는 문제에 집중하는 제자들의 시선을 티끌만큼 수없이
    많으며, 광활하고 아득한 삼천대천세계로 끌어올립니다. 작게는 티끌 한 톨에서 크게는 삼
    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단지 가명일 뿐 실체가 없음을 제자들에게 일깨워주
    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의 허망함을 깨닫고 경계에 휘둘리지 않
    으며 상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在这一品,佛同样用微尘众世界来作比喻,但这次《金刚经》已对无我、无人、无众生、诸
    相虚妄、不生不动、不灭不异等见地在与须菩提的问答中,经过了不断的剖析,现在弟子们已站
    在如来无定相的认知上。但既然万物无我,又无定相,又不是虚空、简单地否定或抛弃,那在认
    知上,如来自性就是三千大千世界任意相或就是三千大千世界。为破弟子在这个认知中对相的执
    着,佛说:“如果善男子、善女人,以三千大千世界碎为微尘,是微尘众宁为多不?”如来在此,
    以微尘众来比喻众生还在执着时自性中显现出来的假相,像三千大千世界碎为微尘那样多,如果
    我们执着其实有,这些假相就会导引我们进入无量无边的生灭轮回了。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전과 마찬가지로 티끌들로 세계를 비유하셨으나 이미 무아·무
    인·무중생·제상허망(诸相虚妄)·불생불동(不生不動)·불멸불이(不滅不異) 등의 주제에 대해 수
    보리와의 문답을 통해서 끊임없이 분석하셨기에 이제 제자들은 여래의 ‘정해진 상이 없다
    [無定相]’는 인식의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만물은 자아가 없고, 정해진 상도 없으며 그렇다고 그것이 허공이거나 단순히 부
    정하거나 내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식의 차원에서 여래의 자성은 곧 삼천대천세계의
    임의적인 한 형상이거나 혹은 삼천대천세계 그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 속에
    서 제자들이 다시 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이를 티끌로 만든다면, 그 티끌들이 많지
    않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티끌들을 들어 중생이 집착에 빠져 있을 경우, 자성에서 나타나는
  • 136 –
    가상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티끌로 만든 것만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비유하셨
    습니다. 이는 만약 우리가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겨 거기에 집착한다면 이런 가상들은 우리
    를 끝없는 생멸의 윤회 속으로 끌어갈 것이라 설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在此处,有人可能不太明白如来的这个比喻,这是在修证佛法中,当一位行者在了悟如来无
    定相、色空不二时,意境中很容易出现的一个错误认知:如来是宇宙一切相,而我们每个人本性
    都是如来,那我们本质上是宇宙任意相。这个见地没错,但如果行者是站在还着相的基点上这样
    说,就毫无意义了。我们自性可以是宇宙的任一相、任一缘起,但万法无生、本性空,这即是佛
    学中的缘起性空思想。如来不着一相实有,但也不会否定一切,或住在虚空不起用。
    이 대목에서 누군가는 여래의 이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법을
    수행 증득하는 과정에서, 수행자가 여래에게는 ‘정해진 상이 없다[無定相]’라는 것과 ‘색과
    공은 둘이 아니다[色空不二]’라는 이치를 깨달았을 때 그 의식 경계에서 쉽게 나타나는 잘
    못된 인지 중 하나입니다. 즉 ‘여래는 우주의 일체 상이며 우리 각자의 본성은 모두 여래이
    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주의 임의의 모습이기도 하다’라는 견지입니다. 이 견지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수행자가 만약 상에 집착하는 전제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아무 의
    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자성은 우주에서의 임의의 모습이나 임의의 연기가 될 수는 있으나, 만법은 본래
    생겨남이 없고 그 본성은 공한 것이라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불교에서의 연기성공(緣起性空)
    사상입니다. 여래는 단 하나의 상이라도 실재한다고 집착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일체를 부
    정하는 것도 아니며 허공에 머물면서 아무런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佛讲到此处,弟子们已不是一个闻法者,弟子们也已安住在如来真空之境中,尤其是称解空
    第一的须菩提。在如来真空中,像微尘众那样多的心相就是宇宙、就是世界,在此,心与物已是
    一元。微尘众既是指众生自性心相,也是指无量无边的物质世界,即指万法,所有这些都不是实
    有的。在此,我们借用现代科学来谈谈佛说的这个心物一元的世界。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대목에 이르자 제자들은 이미 단순한 법의 경청자만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미 여래의 진공 경계에 안주해 있었는데 특히 해공제일이라 불리는 수보리는 더
    욱 그러합니다. 여래의 진공에서 티끌들만큼이나 많은 심상(心相)이 바로 우주이고 바로 세
    계이기에 이 지점에서 마음과 물질은 이미 하나인 심물일원(心物一元)의 상태입니다. 티끌
    들은 중생의 자성 심상을 가리키기도 하고 끝없이 펼쳐진 물질세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즉 만법을 의미하며,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현대 과
    학의 관점을 빌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심물일원의 세계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现代科学常把物质分解,认为物质由分子构成,分子是由原子构成,而原子由电子、中子和
    质子组成。再后来,又发现中子和质子可以分解成更微小的东西——“夸克”。虽实验室证实了夸克
    的存在,然而单个的夸克却找不到。粒子学家们对此的最终解释是:夸克是极不稳定的、寿命极
    短的粒子,它只能在束缚态内稳定存在,而不能单个存在。如果这样,意味着构成物质的基本粒
    子我们看不到,那物质也是虚妄不实的。
  • 137 –
    현대 과학은 흔히 물질을 분해하여 물질은 분자로, 분자는 원자로, 원자는 전자·중성자·양
    자로 구성되었다고 여깁니다. 또 그 후에 중성자와 양자는 더 작은 미립자 ‘쿼크’로 분해될
    수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비록 실험실에서 쿼크의 존재를 증명해내기는 하였으나 단일 쿼
    크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입자물리학자들의 이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은, 쿼크는 지극히
    불안정하고 수명이 극히 짧은 입자로서 오직 속박된 상태에서만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는 있
    으나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사실이 그러하다면 물질을 구성하
    는 기본 입자를 우리는 볼 수 없으니 이 같은 경우라면 물질도 결국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
    습니다.
    二十世纪后期,科学界又提出了“弦论”。弦论的观点认为:自然界中的基本单元,如电子、
    光子、中微子和夸克等等看起来像粒子,实际上都是很小很小的一维弦的不同振动模式。我们姑
    且将它起个名字叫“宇宙弦”。每种振动模式都对应有特殊的共振频率和波长,而不同频率的振动
    对应于不同的品质和能量,所有的基本粒子,如电子、光子、中微子和夸克等,都是“宇宙弦”的
    不同振动模式或振动激发态。如果把宇宙看作是由“宇宙弦”组成的大海,那么基本粒子就像是水
    中的泡沫,不断产生,瞬息湮灭,我们现实的物质世界其实就是“宇宙弦”演奏的一曲壮丽的交响
    乐。这似乎与物质的对立面——意识,有一些相同了,与佛法中的“心物一元”的观点相吻合。
    20세기 후반, 과학계에서는 ‘초끈이론’을 제기하기에 이릅니다. 초끈이론의 관점은 자연계
    의 기본단위 예를 들면 전자·광자·중성자·쿼크 등 이러한 것들이 보기에는 입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두 아주 미세한 일차원 끈의 다른 진동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정적으
    로 이를 ‘우주끈’이라 칭합시다. 모든 진동 모델은 모두 특수한 공진 주파수와 파장에 대응
    하는바 다른 주파수의 진동은 다른 질량과 에너지에 대응합니다. 모든 기본 입자 예를 들면
    전자·광자·중성자·쿼크 등은 모두 ‘우주 끈’의 다른 진동 모델 혹은 진동의 격발 상태입니다. 만약 우주를 ‘우주끈’으로 구성된 바다로 본다면 기본 입자는 마치 물속의 거품과 같아
    끊임없이 생성되고 또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 마주하는 현실의 물질세계는 사실 ‘우주
    끈’이 연주하는 장엄한 교향곡인 셈입니다. 이는 마치 물질의 대척점인 의식과 어느 정도
    비슷한 데가 있으며 불법에서 말하는 ‘심물일원(心物一元)’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物理学发展到了“弦论”,宇宙的万有都已“自性本空”,物质并非是客观实在。于是,二十世纪
    自然科学发展中,用“关系实在”来取代绝对的物质实体,即主张事物不是孤立的、由固有物质构
    成的实体,而是多种潜在因素缘起显现的结果。每一存在者都以它物为根据,是一系列潜在因素
    结合生成的现象,实在和存在被限定在一组本质上不可分离的关联式结构中。科学当中讲的“关系
    实在论”与佛法中的“缘起”说、“因果”说有共通之处。
    물리학은 ‘초끈이론’으로까지 발전하였고 우주의 만물은 모두 ‘자성이 본래 공[自性本空]’
    하기에 물질은 객관적인 실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20세기 자연과학은 ‘관계는 실재한다’는
    개념이 절대적인 물질 실체를 대체하게 됩니다. 즉 사물은 고립되어 있고 고유한 물질로 구
    성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잠재적 요소가 인연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 주장하고 있습니
    다. 모든 존재는 타자를 근거로 하여 일련의 잠재된 요소들이 결합하여 생성된 현상으로서
    실재와 존재는 본질에서 분리될 수 없는 일련의 연관된 구조 속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과학
    에서 말하는 ‘관계 실재론’은 불법의 ‘연기설’, ‘인과설’과 상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 138 –
    因为现在大家生活在一个科学发达的时代,对大多数人而言,科学的论据比佛法更有说服
    力,故我摘录了中国科学院院士朱清时写的《物理学步入禅境——缘起性空》一文的资料,完整
    的原文可以在网上查找。在这些资料中,我们看到科学家在实验室推导出了宇宙万法并非实有,
    而是一种关系的显现。这与两千六百多年前佛陀在菩提树下证得的结果竟然不谋而合,佛陀告诉
    我们,宇宙万法缘起性空,而在人世界,佛也谈因果报应丝毫不爽。
    지금 여러분은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대다수 사람에게 있어서 과학적
    논거가 불법보다 더 설득력이 있으므로 저는 중국과학원 원사 쭈쯔칭이 쓴 「물리학이 선의
    경지에 들어서다 – 연기성공」이라는 자료에서 그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전체 원본 텍스트는
    인터넷에서 검색해볼 수 있습니다. 이 자료들에서 우리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우주 만법
    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현현임을 추론해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26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증득하신 그것과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치하는 결
    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주 만법은 연기성공이며, 인간 세상에서 인과의 응보는
    추후의 오차도 없다고 일깨워주셨습니다.
    我们回到原文,在此品的最后几句,如来说:“如果世界实有,即是一合相”,“一合相”的意思
    是无数相总合在一起。但佛又说,这个假名的“一合相”即是不可说,但凡夫之人贪着其事。这个
    佛在经文中提到的不可说的“一合相世界”,即指“缘起性空”。万法因缘具足而生,每种缘又本性
    空,只是假名,这就是我们眼中的世界,我们执着的人生。这个世界的一切,如无量无边的种种
    泡沫堆砌,互相作用,互相影响,不断地生、灭、变、异,无法知道最终结果,也不会有目标方
    向,只有互相作用的因果不爽,因指向果,这就是方向。而这个“因”也不是你一个人的“因”,万物
    的“因”互相在起作用,故在不同的时空相同的“因”也可示现不同的果。佛说,这个“一合相”不可
    说,但凡夫之人贪婪这个聚沫般因因果果的世界,认为其实有,纠结其中的生灭、变异、得失。
    원문으로 되돌아와 이 품의 마지막 몇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래께서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로 합쳐진 상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
    로 합쳐진 상’이란 곧 무수히 많은 상이 총체적으로 합쳐져 있다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또 이 ‘하나로 합쳐진 상’이라는 가명은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도 범부들은 그것을 탐내고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언어로는 사실 표현이 불가능한 이 ‘하나로 합쳐진 상의 세계’란 바
    로 ‘연기성공’을 지칭합니다. 만법은 인연이 갖추어져서 생겨나고 모든 인연은 또한 본성이
    공하기에 가명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이고 우리가 집착하는 인생
    입니다. 마치 한량없고 끝없는 온갖 거품으로 쌓아 올린 듯한 이 세계의 일체는 서로 작용
    하고 서로 영향을 주어 부단히 생멸 변이합니다. 따라서 그 최종적인 결과도 알 수 없고 정
    해진 목표와 방향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 작용하는 인과만이 추후의 오차도 없이 원인에서
    결과를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 ‘원인[因]’은 그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원인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에
    원인이 서로 얽혀 작용하고 있으므로 다른 시공간에서 같은 원인이라 할지라도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하나로 합쳐진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하셨
    으나, 범부는 거품 더미와 같은 이 인과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탐내 그 속에서
  • 139 –
    일어나는 생멸·변이·득실에 연연하며 괴로워합니다. 제31품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这一品的大意是,佛陀问须菩提:“须菩提,假若有人说,佛在谈关于我、人、众生、寿者的
    知见,须菩提,你认为怎样?这个人理解我说过的法义吗?”须菩提回答佛陀:“世尊,这个人没
    有理解佛说什么,为什么这样说呢?世尊谈到我、人、众生、寿者,并非是在探讨研究我、人、
    众生、寿者,只是为了言说的方便,假借这样的名相罢了。”佛陀说:“须菩提,生起最高最圆满
    觉悟的心,对于一切法,应该这样认识、这样看待、这样去理解,对一切存在现象都不要妄加分
    别、执着。须菩提,所谓的一切存在现象,如来说自身并无一个真实的实体,只是随顺世俗,假
    名称之为存在现象罢了。”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가 아·인·중생·수자에 대한 견해를 설한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사람이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한 것인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아·인·중생·수자를 말씀하신 것은 아·인·중생·수자를 탐구하거나 연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
    지 설법을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이름을 빌려 쓰신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일체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
    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이해하여 일체 존재하는 현상에 대해 함부로 분별하거나 집착
    하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여, 이른바 일체 존재하는 현상이라 하는 것은, 여래가 설하기를
    “须菩提!若人言:佛说我见、人见、众生见、寿者见。须菩提!于意云何?是人解我所
    说义不?”“不也,世尊!是人不解如来所说义。何以故?世尊说:我见、人见、众生见、寿者
    见,即非我见、人见、众生见、寿者见,是名我见、人见、众生见、寿者见。”“须菩提!发阿
    耨多罗三藐三菩提心者,于一切法,应如是知,如是见,如是信解,不生法相。须菩提!所言
    法相者,如来说即非法相,是名法相。”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가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설한다고 한
    다면,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이 사람이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했다고 하
    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은 곧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모든 법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 마음에 법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여! 이
    른바 법상이란 것은, 곧 법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법상이라 여래가 설하였다.”
  • 140 –
    그 자체에 진실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세속을 따라 편의상 가명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라 부를 뿐이다.”
    首先大家注意一下,佛在前面所有的说法中,都是说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而在这
    一品中变成了我见、人见、众生见、寿者见。在文字的领悟上,我们知道“相”指的是万法的现
    象,包括相貌、形态、体验、定义、知见、资讯等,范围比较广。而“见”是指思想、见解,比如
    我们现在探索心理学、哲学等思想而形成的观点都属于“见”。而佛在此品又对须菩提说:“如果有
    人说,我是在研究我、人、众生、寿者,在说出自己的见解,那这个人了解我的一切吗?”须菩提
    答:“没有,世尊。这个人不了解佛在说什么。”在文中,又用了我见、人见、众生见、寿者见,
    即非我见、人见、众生见、寿者见,是名我见、人见、众生见、寿者见的句式。
    우선 여러분이 이 대목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는 앞서 행한 모든 설
    법에서는 이것을 전부 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으로 이름하여 설하셨으나 이번 품에서는
    이를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으로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문자 독해에 있어서 우리 모두 알
    다시피 ‘상’은 만법의 현상으로서 외모·형태·체험·정의·지견·정보 등을 포함하는바 그 범위가
    비교적 넓습니다. 그러나 ‘견(見)’은 사상과 견해를 가리키니, 예를 들면 심리학이나 철학
    등 사상을 탐구하여 형성된 관점은 모두 ‘견’에 속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품에서 또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가 아·인·중생·수자를 궁구하여 자기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했다고 말한
    다면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부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경전에서는 다시금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 곧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 아니므로 비
    로소 이름하여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이라고 이른다는 문장구조를 인용하였습니다.
    如来说法是破众生对“我、人、众生、寿者”幻境的执着的,并非是与弟子们探讨、交流、研
    究这四相的。弟子们听完如来开示,了知这四相的虚妄,即放下对这四相的执着,安住于如来的
    真空之境中,不被境转,不被相迷,无我,无人。但如果一个人把如来的开示当成是理论来研
    究,认为佛是一个理论家,在探讨一种思想见解,即是错了,并未了知佛在说什么。所以后世把
    一些只知道“谈空说有”的信徒称为“知解宗徒”。佛的般若智慧最后要落实在行上,所以佛经最后都
    说弟子信受奉行。如未放下执着,都是没有真正了解佛所说义。放下执着,佛学也应放下,如针
    挑刺,刺拔出来以后针也应一同放下。如果你没用佛的般若智慧去除你的分别、执着,照亮你的
    盲区,而认为佛在探讨一种理论、思想,就未解如来所说义。佛接着总结说:“须菩提,发阿耨多
    罗三藐三菩提心者,于一切法,应如是知,如是见,如是信解,不生法相。”这一品昭明太子起的
    题目是“知见不生分”,个人感觉起得不错。
    여래의 설법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는 환상에 대한 중생의 집착을 파하는 데 있
    는 것이지, 제자들과 함께 이 네 가지 상을 탐구하고 교류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자들의 경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난 후 이 네 가지 상의 허망함을 깨달아 즉시 이에 대
    한 집착을 내려놓고 여래의 진공 경계에 안주하여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상에 미혹되지 않
    으면 무아·무인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 141 –
    그러나 만약 그 누군가가 부처님의 설법을 이론으로, 부처님을 이론가로 여겨 이에 관하
    여 사상과 견해를 탐구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이런 태도는 그릇된 것입니다. 그는 부처님께
    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사실 잘 모릅니다. 이러한 연고로 후세에서는 공론밖에 할 줄 모르
    는 일부 신도들을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의 반야 지혜는 결국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하므로, 불경의 끝머리에 항상 모든 제
    자가 이를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집착을 여태 내려놓지 못했다
    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집착을 내려놓는다고
    함은 불교 역시 내려놓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바늘로 가시를 뽑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
    시를 뽑아낸 후에는 바늘 또한 함께 내려놓아야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만약 부처님의 반야
    지혜로써 자신의 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여 무지의 사각지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서 그저 이론이나 사상을 탐구하고 계신다고 여긴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모든 법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
    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 마음에 법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
    소명태자가 이 품의 제목을 “지견불생분”으로 달았는데 개인적인 견해로는 아주 잘 지은
    것 같습니다.
    佛开示果位境界到现在,告诉弟子,如来真空之境中没有知见,你不要认为在“如来真空之境” 中有一个空或有、非空或非有、甚至缘起性空的知见。在经文的前面,如来常说“如来没有说法” 来破弟子们对有佛法可得的执着。在此,佛立于果位境界谈,告诉弟子们,如来真空中万法无
    生。如来在不生一法的基础上炽然建立万法,谈空说有,只为众生从迷中醒来。没有缘起,也无
    性空。
    부처님께서 과위 경계를 여태까지 설법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어떠한
    지견도 없음을 일러주셨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공(空) 혹은 유(有), 비공(非空) 혹
    은 비유(非有) 심지어 연기 성공의 지견조차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경전
    의 앞부분에서 부처님께서는 늘 “여래는 법을 설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시어, 제자들이 얻
    을 수 있는 어떤 불법이 있다는 집착을 파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과위
    경계에 서서 제자들에게 여래의 진공에서는 만법이 생겨남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
    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어떠한 법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기반 위에 만법을 세우시고 ‘공’과
    ‘유’를 논하시는데 이는 오직 중생들이 미혹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사실 연기
    도 없고 성공(性空)도 없는 것입니다.
    谈到“知见”,便想起禅宗的六祖,这位大菩萨在传佛心法时示现了“不识字”的相,因为弟子们
    要破文字相了。在如来最后的真空境界中,所有的“概念”统统放下,弟子们是闻法开悟的,虽然
    知“无佛果可得”,“不需执着佛法,佛法也无定法”,但这些也是“知见”啊!
    지견을 논하는 자리이다 보니 선종의 육조 대사가 생각납니다. 이 대보살은 부처님의 심
    법(心法)을 전하실 때 ‘글자를 모르는’ 상을 시현하셨는바 그것은 제자들이 문자에 얽매인
    상 즉 문자상을 깨뜨려야 하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래의 마지막 진공 경계에서
    는 모든 ‘개념’을 모조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설법을 듣고 이를 깨달아서 비록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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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수 있는 불과는 없다’, ‘불법에 집착할 필요가 없고 불법 또한 정해진 법이 없다’는 이치
    를 인지하고 있지만 이 깨달음의 내용마저 결국은 하나의 ‘지견(知見)’인 것입니다.
    佛谈“缘起”,谈“性空”,但“如来真空之境”中并无“缘起”,并无“性空”!在“如来真空之境”中万
    法平等无生。这世界如《法华经》中所说:“如是相,如是性,如是体,如是力,如是作,如是
    因,如是缘,如是果,如是报,如是本末究竟。”相、性、体、力、作、因、缘、果、报,万法的
    起始、终结,都应如是知,如是见,如是信解,不生法相。所有的修行,所有的说法,所有的破
    执着,所有的知见,都是众生梦中行、梦中闻思、梦中悟,到最后连开悟也不存在。万法本来如
    是,万法本是如来,这即是不生法相,这即是开悟。所说开悟,即非开悟,是名开悟。所言法
    相,即非法相,是名法相。
    부처님께서 ‘연기’를, ‘성공’을 논하기는 하셨지만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사실 ‘연기’도,
    ‘성공’도 없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만법이 평등하게 그것 자체가 생겨나지 않습니
    다. 이 세계는 마치 ‘법화경’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와 같은 모습, 이와 같은 성품, 이와
    같은 본체, 이와 같은 능력, 이와 같은 작용, 이와 같은 원인, 이와 같은 조건, 이와 같은 결
    과, 이와 같은 과보, 그리고 이와 같은 처음과 끝의 궁극”입니다. 모습·성품·본체·능력·작용· 원인·조건·결과·과보 등 만법의 시작과 끝을 모두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
    와 같이 믿고 이해하여 법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수행, 모든 설법, 모든 집착의 타파, 모든 지견은 중생들이 꿈속에서의 실천, 꿈속
    에서의 문사(聞思), 꿈속에서의 깨달음뿐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깨달음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법은 본래 그러하고 만법은 본래 여래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상을 내지 않는
    것이요, 이것이야말로 곧 깨달음입니다. 이른바 깨달음이란 곧 깨달음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설한 바의 모든 법상이란 또한 곧 법상이 아니므로 비
    로소 이름하여 법상이라 하는 것입니다. 제32품 응화비진분 (應化非真分)
    “须菩提!若有人以满无量阿僧祗世界七宝持用布施,若有善男子、善女人发菩提心者, 持于此经,乃至四句偈等,受持读诵,为人演说,其福胜彼。云何为人演说,不取于相,如如
    不动。何以故?”“一切有为法,如梦幻泡影,如露亦如电,应作如是观”佛说是经已,长老须
    菩提及诸比丘、比丘尼、优婆塞、优婆夷,一切世间、天、人、阿修罗,闻佛所说,皆大欢
    喜,信受奉行。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져다 보시한
    다고 해도, 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보리심을 내어 이 경을 지니되 사구게만이라도 받
    아 지녀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한다면 그 복이 앞의 복보다 더 뛰어날 것
    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할 것인가?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부동해야 한다. 왜
    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
    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설하시자,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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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这一品的大意是,佛陀说:“须菩提,如果有人拿充满无量无数世界的种种珍宝用来布施,又
    有善男子、善女人发菩提心,并按此经中的教义修行,甚至是经中的一个四句偈子,受持读诵,
    为人讲说,他的福德超过前者。”“怎样为他人演说这部经呢?令自己安立于心即万法,本来寂静
    涅槃、无生的角度,不生知见,不着所有的相,不被身心内外一切境转,如如不动。为什么这么
    说呢?一切有生灭变化的存在现象,如同梦幻泡影,如刹那闪过的电光,如晨露暂存,应当这样
    看待它们。”佛说完这段话后,长老须菩提及所有的比丘、比丘尼,男女居士们,一切世界的天
    人、阿修罗等众生,听到佛的说法都非常欢喜,愿意相信,并身体力行去做。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져다가 보
    시를 한다고 하더라도, 또 선남자 선여인이 보리심을 내어 이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
    거나 더 나아가 경전 중의 사구게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
    면, 그 복이 저 앞 사람의 복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해야 하는가? 마음이 곧 만법(萬法)이
    며, 본래 고요한 열반이자 무생(無生)이라는 관점에 자신을 안주시켜야 한다. 어떠한 지견
    도 내지 말고, 모든 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몸과 마음 안팎의 일체 경계에 휘둘리지 말고 여
    여부동해야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생멸 변화가 있는 모든 존재 현상은 꿈·환영·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찰나에 번쩍이는 번개 같고, 잠깐 머무는 새벽이슬과 같으니, 일체를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장로 수보리와 모든 비구·비구니·남녀 거사들 그리고 일
    체 세상의 천인·아수라 등 중생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며, 이를 믿고 받
    아들이고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하였습니다.
    这一品是《金刚经》的最后一品。在整个《金刚经》中,佛有六处提到受持读诵此经乃至四
    句偈等,为人说法的功德胜过用无量七宝用作布施。这一品的重点是怎样为人解说。佛说“不取于
    相,如如不动”。什么是“不取于相,如如不动”?如来安住在真空之境,不生法相,但在时空中为
    无量无边众生随机开示,而“如来真空”不生众生身相,不生众生心相,不生度众生、说法的相,
    这样普度众生,无众生可度,无佛法可说,这即名为:“不取于相,如如不动”。“如来”语默动静皆
    是佛法,如在禅坐中,知身心虚妄,那身体的酸麻冷胀痛虚幻、头脑的杂念虚幻、闭眼看到的境
    界虚幻、身体外的一切声音吵闹都虚幻,如果了知这一切都虚妄不实而安住,即是安住于“无所
    住”中(因身心内外虚妄,你能安住于哪儿呢?),即是不取于相,如如不动。
    이 품은 금강경의 마지막 품입니다. 전반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거나 사구게라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면, 그 공덕이 한량없는 칠보로
    보시한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는 점을 여섯 차례나 언급하셨습니다. 이 품의 핵심은 어떻게
    남을 위해 설해야 하는지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부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을 취하지 말고
    리고 일체 세상의 천인·인간·아수라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 144 –
    여여부동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래는 진공 경계에 안주하시어 법상을 내
    지 않으시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위해 시공간에서 상황에 맞게 설법을 하십니
    다. 그러나 ‘여래의 진공’에서는 중생의 신상(身相)도 생기지 않고, 중생의 심상(心相)도 생
    기지 않으며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 설법한다는 상 역시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생을
    두루 제도하되 제도할 중생이 없으며 설할 불법 역시 없습니다. 이를 이름하여 “상을 취하
    지 말고 여여부동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여래’의 말씀과 침묵, 움직임과 멈춤은 모두가 불법입니다. 만약 좌선 중 몸과 마음이 허
    망함을 알면 그 몸의 시리고 저리고 춥고 붓고 아픈 것이 허황하고 머릿속의 잡념도 허황하
    며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경계가 허황하며 몸 밖의 모든 소음도 허황하다는 것을 알게 됩
    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음을 알고 거기에 안주한다면 그것이 바로 ‘머
    무는 데가 없이[無所住]’ 안주하는 것이며(몸과 마음 안팎이 다 허망한데 어디에 안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부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如果行者能于语默动静、行住坐卧中,不取于相,如如不动,即是安住于“法界大定”中。万
    法本无生,也即无形无相的“如来空定”。如来在空定中一言未出,有无量众生也可因此得度。佛
    最后为“不取于相,如如不动”作了一个解释。因为在如来之境中,观这个世界的一切法如梦幻泡
    影,如露亦如电,并告诉所有的闻法弟子,也应作如是观。
    만약 수행자가 어묵동정(語默動靜)과 행주좌와(行住坐臥)의 모든 순간에 능히 상을 취하
    지 않고 여여부동하면 그것이 바로 ‘법계대정(法界大定)’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만법은 본래
    생겨남이 없으니 이것이 곧 형체도 모습도 없는 ‘여래공정(如来空定)’입니다. 여래께서는 공
    정(空定)에서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으나 헤아릴 수 없이 허다한 중생이 이로 말미암아
    득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부동해야 한다.”에 대
    해 해석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경계에서는 이 세상의 일체법은 꿈·환영·물거품·그
    림자 같고 번개와 이슬 같아서 부처님은 법을 듣는 모든 제자에게 이같이 보라고 가르치셨
    습니다.
    《金刚经》的最后这首偈子,常被一些初读《金刚经》的人拿来运用,不但常挂在嘴边,在
    打坐中也常观想,把这世界万法观想成梦幻、观想成水泡、观想成露珠、观想成闪电。但这样做
    就大错特错了,因又着了梦幻泡影、闪电露珠的相。佛说观一切如梦幻泡影、如露亦如电,是想
    告诉众生,这世界万法,包括你自己的身心,是刹那变异生灭、无常的,是虚妄不实的,你不要
    执着了,不要再执着生命中一切的变异、得失而痛苦了,当然你的烦恼痛苦亦如露如电般的虚
    妄。安住于这种见地上,把令你迷惑、令你痛苦、令你快乐、令你渴求、令你恐惧的一切,都当
    成梦幻泡影一样,你不需要纠结怎样拿、怎样放,你只需要从梦中醒来。佛说完所有的开示后,
    长老须菩提以及所有闻法大众都非常欢喜,马上信受奉行。什么是信受奉行?即听懂了并相信、
    接受佛说的一切,而后马上执行。
    금강경의 이 마지막 게송은 처음 이 경전을 접한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곤 합니다. 비단
    늘 입에 달고 살뿐만 아니라 좌선할 때도 이 세계의 만법을 꿈·환영·물거품·그림자·번개·이
    슬로 관상(觀想)하려 애쓰기도 하는데 이는 아주 크게 잘못된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이것
    은 그들이 또다시 꿈·환영·물거품·그림자·번개·이슬의 상에 집착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 145 –
    부처님께서 일체를 꿈이나 거품으로 간주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중생들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포함한 이 세계의 만법이 찰나에 변화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것이자 허망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집착하지 말 것이며 삶 속의 모든 변화와 득실에
    집착하여 고통스러워하지도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번뇌와 고통 역시 이슬과 번개처럼
    허망한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 안주하여 여러분을 미혹시키고 여러분을 괴롭게 하고, 여러
    분을 즐겁게 하고 여러분을 갈구하게 하고,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한낱 꿈이나
    환영으로 여길 수 있게 되면, 여러분이 그것을 잡을지 내려놓을지 더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
    다. 그냥 꿈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설법이 끝나자 장로 수보리와 법을 경청한 모든 대중이 아주 기뻐하면서
    즉시 이를 신수봉행(信受奉行)하였습니다. 신수봉행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
    하신 일체를 알아듣고 믿고 받아 지닌 후 이를 받들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회고
    现在我们来简单回顾一下《金刚经》在说什么?佛说《金刚经》,缘自于佛的大弟子须菩提
    问的一个问题,即:“刚发心求取佛果的善男子、善女人,该怎样安住在佛的知见道上?怎么降伏
    内心的烦恼、妄念?”佛从下面几点做了开示,因为这几点是弟子们当下修证必须面对的问题,也
    是最容易执着,最容易在知见上出错的地方。
    그럼 이제 금강경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간단히 되짚어 보겠습니다. 부처님
    께서 금강경을 설하시게 된 계기는 부처님의 대 제자인 수보리가 제기한 질문 즉 “갓 발
    심하여 불과를 구하고자 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부처님의 지견도(知見道)에 안주해야
    하며 어떻게 내면의 번뇌와 망념을 항복시켜야 합니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설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몇 가지는 제자들
    이 수행 증득에서 당장 직면하게 될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가장 집착하기 쉽고 그 지견
    (知見)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기 쉬운 영역들이기 때문입니다.
    第一点,首先发愿普度众生。
    因为一个人要发愿成就佛果时,应该知道自己是要回归到生命的源头,而站在生命的源头
    看,我们的“心”是包含宇宙万物的。故当一个人发愿成就佛果的同时,也意味着是要发愿普度宇
    宙一切有情众生,内外一如。所以站在佛果位看,大乘菩萨发心求佛果,首先应发愿平等普度三
    界六道一切有情众生,要为救度众生出轮回而成佛,不能只为自己。
    첫째, 우선 중생을 널리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발원하여 불과를 이루고자 염원할 때는 자신이 마땅히 생명의 근원으로 회
    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에 서서 보면 우리의 ‘마음’은 우주 만물
    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누군가가 불과를 이루고자 발원했다는 것은, 이와 더불어
    우주의 일체 유정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자 발원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안과 밖은 하나
    와 같으니까요. 그러므로 부처의 과위에 서서 본다면, 대승 보살이 발심하여 불과를 구하고
    자 할 때는 마땅히 우선 삼계육도의 일체 유정 중생을 평등하게 제도하겠다고 원을 세워야
  • 146 –
    하며, 중생을 윤회에서 구제하기 위해 성불해야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这个发心是修证的方法,目的是从发心开始就要破我执。如果我们无法理解自己的心包含一
    切众生,那试想一下,我们的心有时会慈悲得像菩萨;有时会愤怒、瞋恨、忌妒,像修罗;有时
    又渴求圣洁、纯净、完美,像天人;有时被身心的欲望吞噬,不再有任何做人的底线,随心所
    欲,像畜生;身心痛苦时像地狱道众生;对食物或情感饥渴时,像饿鬼道众生;对名、利、情执
    着贪婪时,痛苦不堪也不懂舍弃放手,像人;住在禅悦中享受光化境界时,像色界天天人;住在
    四空定中,像无色界天人。所以观我们自己的心识,具有三界六道一切众生的现象。所以度自己
    出轮回,度自己成佛,也同时等于是度六道众生的心。所以佛一开始说:“一切众生之类,若卵
    生、若胎生、若湿生、若化生、若有色、若无色、若有想、若无想、若非有想、非无想,我皆令
    入无余涅槃而灭度之。”我们的心识中,涵盖一切有情众生的心识,我们成佛,其实是令一切众生
    入无余涅槃。
    이 발심은 수행 증득의 한 방법으로 발심하는 순간부터 바로 아집을 파하는 것이 그 목적
    입니다. 가령 우리의 마음속에 일체중생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면, 다음
    과 같이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마음은 때로는 보살처럼 자비롭다가도 때로는 아수라처럼 분
    노하고 화내고 질투합니다. 때로는 천인처럼 성스럽고 순결하며 완벽을 갈구하고, 때로는
    축생처럼 몸과 마음이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저한도의 예의마저도 버린
    채 제멋대로 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는 지옥의 중생 같고 음식물이나 감
    정에 굶주릴 때는 아귀도의 중생 같으며 명예와 이익, 감정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려 고통스
    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손을 떼지 못할 때는 인간 세상의 사람 같고 선정의 기쁨
    속에서 빛으로 화하는 경계를 즐길 때는 색계의 천인 같으며 사공정(四空定)에 머물러 있을
    때는 무색계의 천인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의 심식(心識)을 관찰해보면, 삼계육도 일체중생이 나타내는 모든 현상
    이 마음속에 있음을 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윤회에서 해탈시켜 성불하게
    하는 것은 바로 육도 중생의 마음을 제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부
    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중생인 난생·태생·습생·화생과 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
    두 제도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
    우리의 심식에는 일체 유정 중생의 심식을 포함하고 있기에 우리가 성불한다는 것은 사실
    일체중생을 모두 온전한 열반에 들게 하는 일입니다.
    众生无量无边,我们的心识现象也没有止境。现在我们要回归生命的源头,那怎样安住修行
    道上,没有烦恼、妄心、杂念呢?佛在经文中告诉我们,我们只需要不着三界六道一切相,就可
    以安住,就可以没有烦恼障碍地顺利回归,就可以见到我们的自性如来了。但生生世世习气、欲
    望的牵引,使我们生起许多分别、认知、执着,“心识”中六道众生的种子触缘即发芽、开花结
    果。刚开始修证佛法,我们似乎对这些“缘”无能为力,佛便告诉我们:“要不取于相,如如不动。” 不管是身心中生起的欲望、觉受,还是身心六根所见所闻,六根所感知、分别的一切,都不应被
    它们转。将它们先看成是幻境,就像你要离开一个地方,你一定不能还抓住一个地方的某些东西
    不放手,那你就无法离开半步。而现在要离开三界六道,是你的心识,故心不能有牵挂、执着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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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何东西。三界六道的一切都像路过的风景,了了分明,但在你心中却是幻境,不需执着、取舍,
    更不能粘着、绝不放手。否则,你的心就无法安住在佛的见地中回归源头了。
    중생이 한량없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 현상 또한 끝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근원
    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데, 어떻게 해야 수행 길에 안주하여 번뇌·망상·잡념이 없도록 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우리가 삼계육도의 모든 상에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안
    주가 가능해져 고민이 가져다주는 장애 없이 순조롭게 회귀하여 우리의 자성여래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세생생의 습기와 욕망이 우리를 견인하여 우리로 하
    여금 수많은 분별·인지·집착을 일으키게 합니다. ‘마음의 의식’ 속에 잠재된 육도 중생의 씨
    앗들은 인연이 닿기만 하면 곧 싹트고 꽃피며 열매를 맺습니다. 불법에 갓 입문하여 수행 증득을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이런 ‘인연’에 무력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부동하라.”고 가르쳐주십니
    다. 이 경우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 느낌 그리고 몸의 육근이 보고 들은 것, 육근
    이 감지하고 분별하는 일체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우선 이러한 것들을 환상 경계로 간주해야 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어느 한 곳을 떠나려
    할 때 그곳의 물건을 움켜쥐고 내려놓지 않는다면 결코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의 마음이 삼계육도를 떠나야 하므로 마음에는 그 무엇에도 미련
    이나 집착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삼계육도의 일체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길 위의 풍경처럼
    분명하게 인식하되, 마음속에서는 그것들을 환상으로 여겨 집착하거나 취사 선택하지 말아
    야 하며,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마음은 부처님 견
    지에 안주하여 근원으로 회귀할 수 없게 됩니다.
    佛在经文中重点先破人类要成佛最执着的四相,即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我相”是
    对“自我”的认知,认为这个不断生灭变异的“身心”即是自己。这个“自我”的相是大家罣碍的,它的
    每一点觉受都牵动我们,令我们生起贪、瞋、痴、慢、疑,留在人道。
    경문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성불하는데 있어 가장 크게 집착하게 되는 네 가지 상
    즉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생을 깨뜨리는 데 주력하고 계십니다. ‘아상’은 ‘자아’에 대한 인식
    으로서 부단히 생멸하고 변화하는 ‘몸과 마음’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나’ 라는 껍데기는 우리 모두가 집착하는 걸림돌입니다. 자아가 느끼는 감각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에게 영향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탐·진·치·만·의를 일으키게 하여 우리를 이 인간 세상
    에 묶어둡니다.
    “人相”即是指对他人的分别、认知,比如美丑、善恶等,然后生起种种见解、取舍、觉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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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起种种烦恼与不自在。我们管不住自己,还想占有、控制别人。
    ‘인상’은 바로 타인에 대한 분별과 인식을 가리키는바 예를 들면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등으로 그로 인해 온갖 견해와 취사 선택 그리고 느낌이 일어나 갖가지 번뇌와 부자연스
    러움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고 제어하려
    고 합니다.
    “众生相”即我们认知的三界六道有情众生,我们认为这些众生各有各的相貌、习性,故被他
    们的差别相转,不能平等对待一切有情。而且大多数人的众生相其实是一个广大时空的想象,除
    畜生道外,其他道众生看不见,似乎只存在于我们的习气种子里。我们被自己的习气欲望迷惑、
    牵引,就是被三界六道一切有情众生在转。
    ‘중생상’은 바로 우리가 인식하는 삼계육도의 유정 중생에 대한 관념입니다. 우리는 이런
    중생들이 각기 다른 모습과 습성이 있다고 여김으로써 그들의 차별상에 휘둘려 일체의 유정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다수 사람의 중생상은 사실 광대한 시
    공간에 대한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축생도를 제외한 다른 궤도의 중생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다만 우리 습기의 씨앗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습기와
    욕망에 미혹되고 끌려가는 것 자체가 곧 삼계육도의 일체 유정 중생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
    것입니다.
    “寿者相”是人追求的目标,每个人都爱惜生命,都惧怕死亡,都想长生不老,这是人类着万
    物的生灭相,有固定执着的时间、空间观念导致的。着生死相的人即使追求佛的涅槃境界,也是
    想不再生灭。
    ‘수자상’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그 누구나 모두 생명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
    하며 불로장생을 꿈꿉니다. 이는 만물의 생멸상에 집착하는 인간의 이러한 성향은 고정된
    시공간 관념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생사상(生死相)에 집착하는 사람은 설령 부
    처의 열반 경계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단순히 더 이상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 상태
    로만 여기는 데 불과합니다.
    佛说:“现在善男子、善女人,要发心回归生命源头,那不能安住,牵引他们无法回去的首先有
    根本的四种现象,即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先把它们看成虚妄不实,先从这儿放手。”所
    以在红尘中,菩萨自度利他,都实无“我”、无“众生”可度,要先有这样的见解。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선남자 선여인이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발심하였으나 안주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회귀를 방해하는 근본적인 네 가지 상 즉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먼저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여기고, 이러한 것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기에 속세에서 보살은 자신을 제도하고 남을 이롭게 하지만 사실 실로 제도할 ‘나’도
    없고, 제도할 ‘중생’도 없다고 여기는 이런 견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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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二点,佛谈到了大乘菩萨的出离:“不住相布施一切”。
    布施是大菩萨修行中“破自我”的最快方法。菩萨要成佛,首先应有的就是出离心,即要能舍
    离身心内外一切,即舍离三界六道。如果你还留恋三界六道一切,怎么回归生命源头呢,那只能
    在三界六道流浪了。怎样舍离呢?布施、舍离时,观一切都是梦幻泡影,无得无失,这叫“不住相
    布施”、“不住相舍离”。因菩萨只要认为“自我实有”、“布施的一切实有”,那这个布施只是人间善
    业,只能得善报,无法成就佛果。而且菩萨在布施中,即会感受到付出、失去、牺牲、奉献,就
    会走得异常艰难,烦恼痛苦不断,很难安住在如来的知见道上,顺利回归生命本源。
    둘째, 부처님께서는 대승 보살의 출리(出离)인 상에 머물지 않으면서 일체를 보시해야 하
    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는 대승 보살이 수행에서 ‘자아’를 타파하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보살이 성불하려
    면 우선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이 바로 출리심(出離心)으로서 이는 심신 안팎의 일체를 버
    리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곧 삼계육도를 떠날 수 있습니다. 만약 여전히 삼계육도의 일
    체에 미련이 남아있다면 어떻게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삼계
    육도에서 방랑해야겠지요. 어떤 식으로 버리고 떠나야 할까요? 보시하고 떠날 때 일체를 모
    두 꿈과 같고 환상과 같아서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음을 인지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상에 머물지 않는 버리고 떠남’입니다.
    보살이 ‘자아는 실재한다’거나 ‘보시하는 모든 것이 실재한다’고 여기기만 하면 그 보시는
    다만 인간 세상의 선한 업에 지나지 않아, 다만 선한 과보를 얻는 것에 그칠 뿐 불과를 이
    룰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보살이 보시하면서 헌신과 상실 그리고 희생, 봉사를 느껴
    이 수행 길에서의 정진을 아주 힘들어하는 등 번뇌와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면 여래의 지견
    도(知見道)에 안주하여 순조롭게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기가 몹시 어렵게 됩니다.
    故大菩萨的“出离心”是知三界六道一切虚妄不实,来修布施,来舍离,这才是真正的出离。
    这样布施的功德才是满虚空、遍法界,才能令众生从轮回幻境中觉醒。在现实的修证中,如果一
    位行者真的了知身心内外一切都是虚妄不实,也就没有什么不能舍离了。但大部分行者是先有这
    样的见地,慢慢修布施,从不舍到舍,从舍不求回报、不求理解中功德逐渐圆满。当贪婪、得失
    心终于尽时,才能知佛说的一切虚妄,原来所有一切的美丽、价值、作用、意义等都是你着相的
    心赋予的。所以,“不住相舍离”是菩萨的修证方法。菩萨在用佛的正知见对治舍离造成的“得失心” 的过程中,功德逐渐圆满,慢慢从三界六道的幻境中觉醒了。
    그러므로 대보살의 ‘출리심(出離心)’이란 삼계육도의 일체가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보시
    를 닦고 이를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진정한 떠남[出離]입니다. 이런 보시의
    공덕이야말로 허공을 채우고 법계에 두루 퍼져 중생을 윤회라는 환상 경계로부터 깨어나게
    합니다. 실제 수행 증득 과정에서 가령 어느 수행자가 심신 안팎 일체가 모두 허망하여 실
    체 없음을 깨닫게 되면 버리고 떠나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대부분 수행자는 우선 이러한 견지가 있고 난 뒤에 천천히 보시를 닦게 됩니다. 베
    풀지 않던 데로부터 베풀게 되고, 여기에 진일보하여 베풀면서도 그 보답과 이해를 바라지
    않는 데로까지 나아가면서 공덕이 점차 원만해지게 됩니다. 탐욕과 득실심이 끝내 다했을
    때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우리가 느꼈던 모든
    아름다움·가치·작용·의미 등은 사실 상에 집착한 우리 마음이 그것들에 부여한 것임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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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됩니다. 그러므로, ‘상에 머물지 않는 버리고 떠남’은 보살의 수행 방법입니다. 보살은 이렇
    게 부처님의 정지견에 기반하여, 버리고 떠나므로 인해 오는 ‘득실심’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공덕이 점차 원만해져 삼계육도의 환상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게 됩니다.
    第三点,佛谈到一个人要发心成就佛果,执着佛相不能见自性如来。
    即行者不能在意境中将“如来”固定认为是任一形象,而努力变成他的样子。如来在时空中示
    现种种相,但所有的相都是为了度众生随缘示现的。如果你现在要发心成佛,就应见到每位众生
    本有的佛性,才能称真正见到如来。不是令自己变成一位如来在时空中示现的样子,如果是那
    样,天界有神通、神变的众生,直接变成佛的样子就可以了,不需修行了。但那不是成佛。如果
    在你心中佛有固定的样子,你也无法了知如来的境界,无法成就佛果了。如果你能了知所有的相
    虚妄,不着自我的相、众生的相,也不着佛相,那你即可知你及众生的本来面目都是如来。
    셋째, 부처님께서는 불과 성취를 발심한 그 누군가가 부처상에 집착해서는 자성여래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수행자는 의식 속에서 ‘여래’를 어느 특정된 형상으로 고정해 두고 그 모습으로 변모
    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여래는 시공간에서 각양각색의 형상을 시현하기는 하나 그
    모든 형상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인연에 따라 시현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발심하여 성불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모든 중생에게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불성을 보아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여래가 시공간에서 시
    현한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이라면 천계의, 신통력과 신변
    이 있는 중생들의 경우 직접 부처님의 모습으로 변모하면 그만이지 더 수행할 필요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불의 길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처의 고정된 상이 있다면, 여래의 경계도 알 수 없고 불과도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자아상과 중생상은 물론 부처상에
    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곧 여러분과 중생의 본래 모습은 모두 여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我们刚开始修证,因为心中不平等,有种种差别相,故有众生相,认为自己是凡夫众生,心
    中会有一个意境中要变成的佛相,这样圆满佛果便成为一个从凡夫相变成一个佛相。佛告诉众
    生,所有相都是虚妄的。你要回归生命的源头,不能有自我的凡夫相、众生相,当然也不能有一
    个要成的佛相,否则你无法成就。当你真的离所有相,不执着所有相,即会见到如来。
    수행 초기에는 마음이 평등하지 못해 온갖 차별상이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중생상이 생겨
    자신을 범부 중생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속에 하나의 경계로서 이루고자 하는
    부처상이 생기고 이로 인해 원만한 불과라는 것은 범부상에서 부처상으로 변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모든 상이 허망하다고 중생들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자아의 범부상과 중생상이 있어서는 안 되며 물론
    이루고자 하는 부처상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성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모든 상을 떠나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여래를 볼 수 있
    습니다.
  • 151 –
    第四点,佛谈到一个人要发心成就佛果,还不能执着佛法相,也不能有非法相。
    佛现在为我们说法,如因病与药,病不同,药也不同,我们病好后药也应舍。如果我们无佛
    相、无我相,就不会有说法和闻法者,也不会有法相。不应该有“得到佛法”或“某一种法是佛法”的
    知见;但也不应理解成佛否定了一切,说一切虚妄,佛法也虚妄,不需要学习、修证佛法,不需
    要功德,就可以从宇宙万相、从轮回的幻境中觉醒,或认为无法可依止学习,这又着了“非法
    相”。
    넷째, 부처님께서는 그 누군가가 발심하여 불과를 성취하려고 한다면 불법상(佛法相)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비법상(非法相)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위해 설법하십니다. 일례로 병과 약의 경우처럼, 병이 다르면
    약도 다른 법이고, 병이 나으면 약도 역시 버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부처상이 없고 아
    상이 없다면, 설법하는 자도 법을 듣는 자도 없기에 법상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법을 얻었다’거나 ‘어떤 특정한 법은 불법이다’라는 지견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일체를 부정하신 것으로 이해하여 일체가 허망하기에 불법도 허망하므로 불법
    공부도, 수행과 증득도, 공덕도 필요 없이 우주 만상과 윤회의 환상 경계에서 깨어날 수 있
    다거나 의지하여 배울 만한 법이 없다고 여기는 것 또한 비법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如果执着“佛法的相”学习佛法,心识中只会增加许多佛学的概念文字,多加分别知见,是无
    法回到如来果位境界的。佛在说到不应着法相,不应着非法相时,开示说:“如果众生头脑中装着
    很多‘破相’的知见,而不是马上听完佛说法后放下执着,即着了法相。或放下执着后,又执着他
    学的那套法是真正的佛法,他得到了佛法,这样对法的执着和有所得心,就像一个人过了河背着
    船上岸了,仍未了知佛在说什么。”
    ‘불법상’에 집착하면서 불법을 배운다면 의식 속에 허다한 불교적인 개념과 문자만 늘어
    날 뿐만 아니라 분별하는 지견이 가중되어 여래의 과위 경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께서 법상에 집착해서도, 비법상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고 설하시며 다음과 같이 일러주셨습
    니다.
    “만약 중생의 머릿속에 ‘상을 깨뜨려야 한다’는 지견만 가득 차 있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
    고 바로 집착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이는 곧 법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혹은 집착을 내려놓은
    뒤, 다시 자신이 배운 그 법만이 진정한 불법이며 자신이 불법을 얻었다고 집착한다면, 이
    또한 법에 대한 집착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는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등에 짊어
    지고 뭍에 오르는 격이라, 여전히 부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모르는 것이다.”
    第五点,佛谈到一个人要发心成就佛果,意境中不能有“果位”可得,佛讲法也无定法可讲。
    即一个人虽不着佛相了,认为佛无形无相,其实着文字相的人,“无形无相”也是一个相。如
    果一个人不执着佛长什么样子了,进一步不能认为有个无上正等正觉的果位可得,因为成佛是放
    下所有的“所求心”、“所得心”。如果行者认为“无上正等正觉”是一个可获得的东西,不管是一个境
    界或是圆满的证量,所求心、所得心始终无法停下来,即也永远无法在当下回归到如来的真空之
    境中,也无法成佛了。
    다섯째, 부처님께서는 그 누군가가 발심하여 불과를 성취하려면 경계 속에서 얻고자 하는
  • 152 –
    ‘과위’가 있어서는 안 되며, 부처의 설법 역시 정해진 법이 있어 그것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누군가가 비록 부처상에 집착하지 않아 부처는 형체가 없다고 여기기는 하지만, 사실
    문자상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형체가 없다’는 이것조차 하나의 상이 됩니다. 만약 그
    누군가가 부처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가 더 나아가 무상정등정각의 과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불은 모든 ‘구하고자 하는 마음’, ‘얻고자 하는 마
    음’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무상정등정각’은 얻을 수 있는 그 무엇
    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이 어떠한 경계이든 아니면 원만한 증량이든 구하고자 하는 마음, 얻
    고자 하는 마음만은 시종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지금, 이 순간에 여래의
    진공 경계로 돌아갈 수 없으며 성불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佛说:“我平时为大家说种种法门,并没有一个定法叫佛法。佛说法是安立于无我、无人、无
    众生的基点上说法,不可取、不可说,是对应每一类众生的执着随机施教的。因众生执着不同,
    说出的佛法也不同,根本就没有一个固定的佛法可得、可取。不是我一个人这样说法,其他圣人
    也一样。”
    부처님께서 “내가 평소에 그대들을 위해 갖가지 법문을 설하지만 ‘불법’이라 이름할 정해
    진 법은 없다. 나의 설법은 무아·무인·무중생의 기반 위에서 행해지므로 가질 수도 없고 언
    어로 다 표현할 수도 없다. 각 중생 각자의 집착에 따라 그때그때 근기에 대응하여 가르침
    을 펼칠 뿐이다. 중생들의 집착이 서로 달라 설하게 되는 불법도 다르므로 근본적으로 얻거
    나 가질 수 있는 고정된 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 한 사람만 이렇게 설법하는 것이 아
    니라 다른 모든 성인들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佛在说完一般善男子、善女人刚发心想成佛,最易产生错误的地方,这几处如没有佛的正知
    见,所有的修证就不是行菩萨道了,当然无法成就佛果。在现实生活中,大菩萨与凡夫众生一
    样,做世界一切事业、善行,但因为菩萨在佛的正知见指导下去做,就可出轮回苦海,成就佛
    果。而凡夫众生如没有佛的正知见指导,不管做什么,即使做慈善,有时候也会掉进烦恼、虚妄
    的苦海中,最多得些人天善报。
    부처님께서는 이제 막 성불하고자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이 가장 쉽게 틀릴 수 있는 부분
    을 지적하신 후, 이 몇 가지에서 만약 부처님의 정지견이 없다면 모든 수행은 보살도를 행
    하는 것이 아니므로 당연히 성불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현실 생활에서 대보살들은 범부 중생과 마찬가지로 세간의 일체 사업과 선행을 하고 있으
    나, 이를 부처님 정지견의 지침 아래에 행하기 때문에 윤회의 고해에서 벗어나 불과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범부 중생의 경우, 만약 부처님 정지견의 인도 없이 이를 행한다면
    그 무엇을 하든 설령 그것이 자선사업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번뇌와 허망함의 고해에 빠지
    게 되어 그가 얻게 되는 최상의 결과 역시 기껏해야 인간 세상과 천계의 선한 과보 수준에
    그치게 됩니다.
    第六点,佛更贴近眼前闻法弟子的修行状态来说法。
    《金刚经》开篇提到佛这次说法,闻法的有大比丘众千二百五十人,那这些大比丘很多有初
  • 153 –
    果到四果阿罗汉的证量,而且没有证入初果到四果境界的善男子、善女人也会以他们为榜样,努
    力想证入他们的境界。怕弟子们用有所得的心求取果位成就,而不是通过放下分别、执着获得,
    所以佛就一一提问须菩提,从初果到四果有无果位可得。当然前面已谈过无我相、无人相、无众
    生相、无佛相、无法相,当然也不会有阿罗汉的果位相。须菩提一一作了回答,说并无果位可
    得。佛又用自己举例说:“昔日我在燃灯佛处学习,也没有得到任何法与果位。”
    여섯째, 부처님께서는 눈앞에서 법을 듣는 제자들의 수행상태에 근거하여 더욱 적절한 방
    식으로 설법하셨습니다. 금강경 서두에서 부처님의 이번 설법을 경청한 큰 비구들이 1,250인에 달했다고 언급
    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초과에서 사과 아라한에 이르는 깨달음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아직 그 경계에 이르지 못한 선남자 선여인들은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 정진하고 있었습니
    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분별과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얻고
    자 하는 마음의 작용 하에 과위 획득에만 집중할까 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초과에서
    사과에 이르기까지 그 획득할 과위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지 일일이 질문하셨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아상·인상·중생상·불상·법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라한의 과위상 역시 있
    을 수 없습니다. 수보리는 얻을 수 있는 과위가 따로 없다고 하나하나 답했습니다. 부처님
    께서는 또 자신을 예로 들어 “옛날에 내가 연등불 처소에서 배울 때도 그 어떠한 법이나 과
    위를 얻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所有这些对答都是在破弟子们的“有所得心”。因一切相虚妄,但众生闻听后,这个“一切相”范
    围太大,佛又落实到具体的事项上,比如佛相、佛法相、阿罗汉相,这是佛弟子们马上希望得到
    的相,而且在意境中易执着的相。其实这些相与凡夫众生着的我相、人相、众生相、寿者相并没
    有不同。在日常生活中,佛肯定四果阿罗汉的每一个果位,只是代表修行中破了某些执着,暂时
    得到了一些普通人无法有的境界和证量。但众生本来是佛,我们应安立于这样的知见上来学习、
    修证佛法,那修证中经历的一切都是梦中事,不管获得什么、还是放下什么。但不要因此轻视四
    果阿罗汉,因为他们的证量使他们拥有了从梦中更快觉醒的能力。
    이 모든 문답은 제자들의 ‘얻고자 하는 마음’을 깨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일체 상이 허망
    하기는 하지만 이 말이 중생에게는 너무 막연할 수 있기에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시 불상(佛
    相), 불법상(佛法相), 아라한상(阿羅漢相) 등으로 구체화하여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상
    은 바로 제자들이 얻고 싶어 하는 상일뿐만 아니라 경계 중 쉽게 집착하게 되는 상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상들은 범부 중생이 집착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과 다르지 않습
    니다.
    일상생활에서 부처님께서 아라한의 각 과위를 인정하셨지만, 그것은 단지 수행과정에서
    특정 집착을 파하여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경계와 증량을 그들이 잠시 확보했다고 수긍하
    시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임을 명기하고 마땅히 이러
    한 지견 위에 서서 불법을 배우고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에서 겪는 모든 일 즉 그 무엇을
    얻든 그 무엇을 내려놓든 한낱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을 경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증량은 꿈에서 더 빨리 깨어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154 –
    第七点,佛说完阿罗汉果位后,又谈到了菩萨的功德相。
    在刚发心的善男子、善女人眼中,菩萨行入世间、出世间一切善法,净化自心以及他人,普
    度众生,做一切护持佛法的功德,叫庄严自心或他方一切佛土。佛说本无我、无众生,世界万法
    平等,佛土本自清净,故菩萨行即无所行。发心成佛的人不能执着菩萨行,以及大如须弥山王的
    菩萨功德身相,否则仍会是“心有所住”,无法回到如来果位。菩萨“应不着一切相行一切善法”,也
    即“无所住生其心”,此时,菩萨的功德才能汇归空性,才能成佛。在现实生活中,不执着“菩萨
    相”、“功德相”,佛不是说不需要行菩萨道,不需要功德圆满,只是要带着佛果位上的知见来做,
    这样,你才能很快就具有佛圆满的功德、品质和证量。因为你本来是佛。
    일곱째,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의 과위를 말씀하신 후 보살의 공덕상에 대해 언급하셨습니
    다. 갓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의 눈에는, 보살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선법을 행하고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정화하며 중생을 널리 제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모든 공덕을 쌓는 것이 자
    신의 마음이나 타방의 모든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본래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세계의 만법은 평등하고 불국토는 본래 청정하기에 보살
    행은 곧 행함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불하고자 발심한 사람은 보살행과 수미산만큼 거대한 보살의 공덕신상(功德身相)에 집
    착해서는 안 됩니다. 안 그러면 여전히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기’에 여래의 과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일체 상에 집착함이 없이 일체 선법을 행’해야 합니다. 즉 ‘머
    무는 데가 없이 그 마음을 내’야만 비로소 보살의 공덕이 공성으로 회귀하여 성불할 수 있
    습니다. 현실에서 ‘보살상’이나 ‘공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보살도를 행할 필요가 없다거나
    원만한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부처의 과위에서 바라보는 지견을
    갖고 이를 실천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야만 비로소 이른 시일 내에 부처의
    원만한 공덕과 품성 그리고 증량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사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第八点,佛告诉弟子们,发心成就佛果,应知小到一粒微尘,大到三千大千世界都是虚妄
    的。这样才能安立于“无所住”的境界中,行菩萨道而无所行,生一切心没有生处、灭处、住处,
    这样回归如来果位才会安心,才会无烦恼、无妄念。
    여덟째,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발심하여 불과를 성취하려면 마땅히 작게는 한 티끌에
    서 크게는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
    다. 이러한 자세라야만 ‘머무는 데가 없는’ 경계에 서서 보살도를 행하되 사실 행함이 없고, 모든 마음을 내되 사실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머무는 곳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여래의 과
    위로 회귀해야만 안심할 수 있어 번뇌와 망념이 없게 됩니다.
    第九点,佛破的是弟子们心中的佛的功德之相,三十二相八十随形好,也是刚发心的弟子们
    易追求、贪婪的形象。
    虽佛说一切相虚妄,但弟子们不一定马上就能把这个功德之相从心识中消除,仍可能会有所
    求、有所得,而且如果知道这个身相是菩萨累劫行菩萨道、行布施忍辱的结果,会生起敬畏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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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心,不敢轻易说它也是虚妄的。但佛说这个相是虚妄的,只是假名。
    아홉째, 부처님께서 파하신 것은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의 공덕상 즉 32상 80종호입
    니다. 이는 막 발심한 제자들이 쉽게 갈구하고 욕심내는 형상이기도 합니다. 비록 부처님께서는 일체 상이 허망하다고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이 공덕의 상을 마음속
    에서 즉시 지우지 못하고 여전히 이를 구하고자, 얻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
    다. 또한 이 몸의 형상이 보살이 누겁의 세월 동안 보살도를 행하고 보시와 인욕을 닦아 얻
    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면 경외심이 생겨나 그것 또한 허망하다고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상 또한 허망하며 단지 가명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当佛破弟子们心中的执着到这儿时,解空第一的须菩提诸心消落,涕泪交流,得出了“离一切
    诸相,即名诸佛”的结论。现在大家听到此,也应懂得须菩提说的“离一切相”就是佛说的“一切相虚
    妄”。不是让你在现实生活中抛弃、否定一切相,或去辨别、争论一切相的真假、虚实,而是“知
    一切相虚妄”就是真离一切相,这样即是“无所住”生心,这样即是行无所行,修无所修,得无所
    得。如果一个发心成就佛果的人“知一切相虚妄”,所有障碍自己成道的事情便绝不会去做,更不
    会做伤害其他众生的事,而且在菩萨道上行布施、持戒、忍辱等也不会觉得艰难。
    부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속 집착을 여기까지 깨뜨리시자, 해공제일(解空第一)인 수보리
    의 모든 마음은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일체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이
    름한다’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지금 이 말을 듣는 여러분도 마땅히 수보리가 말한 ‘일체
    상을 여읜다’가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 상이 허망하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현실에서 일체 상을 내팽개치거나 부정하라는 뜻도 아니요, 일체 상의
    진위와 허실에 대해 분별하고 논쟁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일체 상이 허망함을 아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일체 상을 떠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머무는 데 없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것인즉 곧 행하되 행함이 없고 수행하되 수행함이 없으며 얻되 얻
    음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발심하여 성불하려는 사람이 ‘일체 상이 허망함’을 안다면 자신의 도를 이루는데 방
    해되는 모든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중생을 해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
    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보살도에서 보시, 지계, 인욕을 행하는 것도 그리 힘들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佛还用自己昔日修忍辱行的事例来阐述以上观点。佛说自己昔日做忍辱仙人五百世,并且在
    某一世“修忍辱行”,被歌利王割截身体,都安住在“一切相虚妄”的见地上,无我相、人相、无可忍
    的事相,不起瞋念,最后才能在“忍辱行”中见到空性,最终圆满佛果。
    부처님께서는 또 자신이 과거에 인욕을 수행하시던 사례를 들어 위의 관점을 보충설명하
    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과거 500세 동안 인욕선인으로 수행하였으며 또 어느 한
    생에서는 ‘인욕을 수행’할 때 가리왕으로부터 몸이 절단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일체 상은
    허망하다’는 견지에 안주하여 아상과 인상 및 참아야 할 일이라는 상도 없어 성내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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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으키지 않아 마침내 ‘인욕행’에서 공성을 보아 결국 원만하게 성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佛说到此总结说:“善男子、善女人,发心求无上正等正觉的佛果,应‘离一切相而发心’,因
    诸相虚妄,离一切相便无所求、无所得,这是真正的出离心,真正的菩萨发心。”虽知一切相虚
    妄,实无众生可度,但每一位菩萨要发心为利益一切众生而行布施、修忍辱等,这是修证方法,
    回归如来果位“破我执”的需要,而且从本质上,利益众生就是利益自己。利益众生才能功德圆
    满,成就佛果。
    부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발심하여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를 구하려면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
    발심’해야 한다. 모든 상은 허망하기에 일체 상을 떠나면 곧 구하는 바도 없고 얻는 바도
    없게 되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출리심(出離心)이고 진정한 보살의 발심이다.”
    비록 일체 상이 허망하여 실로 제도할 중생이 없음을 알고 있을지라도 모든 보살은 발심
    하여 일체중생의 이익을 위해 보시하고 인욕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는 수행의 방법이며 여
    래 과위로의 회귀를 위한 ‘아집 파하기’에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중생
    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중생을 이롭게 해야만 공덕이 원만
    해져서 성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佛又举例说,如果菩萨住相修行布施,我相、所求心、人相,都会形成修行的障碍,这些障
    碍使人的心就像进入暗处,无法见到光明。所有的相,小到一粒微尘,轻如一片羽毛,只要你以
    为它实有,并在心中执着、牵挂,那粒微尘、羽毛就会遮住你的眼睛,使你一叶障目不见森林,
    就会充满你的全部身心世界,使你如困囚笼,如负重压,不能回归如来自在之境。佛还说,这样
    的见地,乐小法的人听不进去,因为“乐小法”者只求一点神通、神变之术,求此生平安健康、宁
    静快乐,求此生长生不老、生活得安逸幸福。这样的人要使他离所有相,接受“一切相虚妄”的见
    地而去行布施、持戒、忍辱等菩萨行,暂时舍离人间的荣华富贵,他是无法接受的。因他有我
    见、人见、众生见、寿者见。而在佛的眼中,这一生即使寿长千岁,也只是刹那弹指间。
    부처님께서는 또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러 보시를 수행하면
    아상, 구하고자 하는 마음, 인상 등이 모두 수행에서의 장애로 작용하여 이로 말미암아 사
    람들의 마음은 어두운 곳에 들어있듯이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 작게는 미세
    한 티끌 하나, 가볍기는 깃털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기고 거기에
    집착하여 매달린다면 그 티끌이나 깃털은 여러분의 눈을 가려 여러분이 눈앞에 있는 전체를
    볼 수 없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여러분의 심신 세계를 가득 채워 여러분은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중압감에 시달려 여래의 자유로운 경계로 회귀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
    다. 부처님께서는 또 이러한 견지를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왜냐하면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단지 약간의 신통력과 신변의 술법을 구하거나
    이번 생의 평안과 건강, 편안함과 즐거움 그리고 불로장생과 안락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
    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일체 상은 허망하다’는 견지를 받아들여 모든 상을 떠나 보시·지계· 인욕 등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잠깐에 불과한 인간 세상에서의 영화와 부귀를 포기하라고 한
    다면, 그들은 절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견·인견·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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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수자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안목에서 본다면 이번 생에 설령 천년을 산다
    고 할지라도 그것은 찰나의 탄지(彈指)에 지나지 않습니다.
    佛在说以上见地时,告诉弟子们,如果有人能懂得我说的一切而去修行,功德、果报之大不
    可思议。因这样做可以获得从轮回中解脱,可以成佛,获大自在,当然功德果报不可思议。以上
    所说基本上是佛在指出弟子们刚发心容易在见地上出现的错误,而且易执着的相,在经文中属于
    一个部分,即我们现在版本的前十七品。
    부처님께서 위의 견지를 말씀하시면서 또한 제자들에게 만약 누군가가 내가 말한 모든 것
    을 깨달아 수행에 정진한다면 그 공덕과 과보가 불가사의하다고 피력하셨습니다. 이렇게 행
    한다면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고, 성불하여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으므로 그 공덕과 과보는
    당연히 불가사의합니다. 이상은 기본적으로 부처님께서 제자들이 발심 초기에 견해상 범하기 쉬운 오류와 집착하
    기 쉬운 상을 지적하신 부분이며, 현재 우리가 보는 판본의 제17품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입
    니다.
    《金刚经》在第十七品之后,我们看到须菩提向佛重新提出了问题,即发心求取佛果的善男
    子、善女人,应该怎样安住在佛的知见道上?怎样降伏内心的烦恼、妄念?而经文中佛的回答角
    度有所不同。因佛在前面十七品中已将弟子们心中当下执着的相全破了一遍,现在开始谈破相后
    的如来果位境界了,意在令弟子返观内照、如如不动,安立于诸法无我的角度,如果这样,弟子
    们与佛已不二了。我们假名弟子们应安立的这个境界叫“如来真空之境”,我们看看佛是怎样说这
    个境界的。
    금강경의 제17품 이후에, 우리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다시 질문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
    다. 즉 불과를 얻고자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은 마땅히 어떻게 부처의 지견도(知見道)에 안
    주해야 하며, 어떻게 내심의 번뇌와 망념을 항복시켜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앞선 부분과는 다소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앞의 17품까지는 제자들
    마음속에서 현재 집착하는 모든 상을 하나하나 깨뜨리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부터는 그 상
    을 타파한 후 여래의 과위 경계를 논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
    들에게 내면을 돌이켜 관조하여 흔들림 없이 모든 법이 무아라는 견지에 서도록 인도하십니
    다. 그렇게 된다면 제자와 부처님은 이미 둘이 아니게 됩니다. 제자들이 마땅히 안주해야
    할 이 경계를 가명으로 ‘여래의 진공 경계’이라 부르는데 지금부터는 부처님께서 이 경계를
    어떻게 설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一、“如来真空之境”中没有发心者。因无我、无人、无众生,那谁在发心求无上正等正觉?
    在此,如来用自己在燃灯佛处来举例,说我昔日在燃灯佛所修行,正因为了悟了并没有一个发心
    者,也无一个得果位者,所以燃灯佛才为我授记成佛。并总结说,如来者,诸法如义。即说万法
    都是如此,都无我、无自性,本性都是如来。
    二、“如来真空之境”中无菩萨。没有一个东西可以称名为菩萨,无大如须弥山的功德之身
    相,也无庄严佛土这回事。
    三、“如来真空之境”中有五眼六神通,但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所见都是虚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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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所有的眼并无生处,所见一切都自性空。
    四、如来有无量化身,随众生得度的缘示现在每一道,但“真空之境”中无示现之心。在人道示
    现,如来也说沙子是沙,也托钵化斋,没有与众不同。
    五、“如来真空之境”中无过去心、现在心、未来心、无时空、无“时空”的流逝、变异或不动,
    是无生。
    六、“如来真空之境”中无福德。因此菩萨道上所积的福德能无量无边,圆满遍一切处。
  1.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발심하는 이가 없습니다. 무아·무인·무중생인데 누가 발심하여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겠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연등부처님 처소에서의
    수행을 예로 들어, 발심하는 이도 과위를 얻는 이도 없음을 깨달았기에 연등부처님께서 자
    신을 위해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를 내리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여래란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
    그러함[諸法如義]이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즉 만법은 모두 그러하고 모두 무아·무자성
    이며 본성은 모두 여래임을 뜻합니다. 2.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보살이 없습니다. 보살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실체가 없으며, 수미산처럼 큰 공덕의 몸 형상도 없으며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그런 일도 실재하지 않
    습니다. 3.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오안육신통이 있기는 하지만 육안·천안·혜안·법안·불안으로 보
    는 것은 모두 허망하며 그 눈들은 생겨난 곳이 없으며 보이는 것 또한 모두 자성이 공(空)
    합니다. 4. 여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신이 있어 중생이 제도 될 인연에 따라 각각의 궤도에
    서 시현하시지만,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시현하실 때, 여래도 모래를 모래라 하고 발우를 들고 탁발하는 등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
    습니다. 5.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이 없고 시공간이 없으
    며 “시공간”의 흐름이나 변화 또는 움직임도 없기에 무생(無生)만이 있을 뿐입니다. 6.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복덕이 없기에 보살도에서 쌓은 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원만하게 모든 곳에 두루 편재해 있습니다.
    七、“如来真空之境”中无三十二相八十随形好。
    八、“如来真空之境”中无宇宙一切相,无三千大千世界。
    九、“如来真空之境”中不生一念,无人说法,无人度众生。
    十、“如来真空之境”中无众生,无凡夫。
    十一、“如来真空之境”无所得心。
    十二、“如来真空之境”诸法平等(因诸法性空)。
    十三、“如来真空之境”如来也说有我,但只是假名。
    十四、“如来真空之境”无所观者与能观者。
    十五、“如来真空之境”于宇宙万法不说断灭,即不是抛弃或否定一切。
    十六、“如来真空之境”中如来不来不去,不生不灭。
    十七、“如来真空之境”中无缘起,也无性空。
    十八、“如来真空之境”无任何分别知见。
    十九、“如来真空之境”万法平等,不生法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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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32상 80종호가 없습니다. 8.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우주의 모든 상이 없으며 삼천대천세계도 없습니다. 9.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일념도 생기지 않고 설법하는 이도, 중생을 제도하는 이도 없
    습니다. 10.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중생도 없고, 범부도 없습니다. 11.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12.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모든 법이 평등합니다(모든 법의 성품이 비어있기 때문입니
    다). 13.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여래도 ‘나’가 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는 단지 가명일
    뿐입니다. 14.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없습니다. 15.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우주 만법이 단멸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일체를 버
    리거나 혹은 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16.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여래가 오지도 가지도 않고 생멸하지도 않습니다. 17.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연기가 없고 성품의 공함도 없습니다. 18.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그 어떠한 분별 지견도 없습니다. 19.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만법이 평등하고 법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那么怎样供养、修证、弘扬《金刚经》呢?佛在经文中有几处重要的开示:
    第一、什么是无上正等正觉的圆满觉悟?
    在第二十三品中,佛说:“是法平等,无有高下,是名阿耨多罗三藐三菩提。”所以,无上正
    等正觉的圆满觉悟是指:证得万法平等。故拥有圆满觉悟的人对宇宙万法有平等的心,平等的
    眼、耳、鼻、舌、身、意。
    그렇다면 어떻게 금강경을 공양하고 수행 증득하며 널리 알릴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는 경전에서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첫째,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제23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
    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즉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이란, 만법이 평
    등함을 증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원만한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우주 만법을 평등한
    마음과 평등한 눈·귀·코·혀·몸·뜻으로 대합니다.
    第二、怎样达成无上正等正觉的圆满觉悟?在第二十三品中,佛说:“以无我、无人、无众
    生、无寿者,修一切善法,即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所谓善法者,如来说非善法,是名善法。” 所以,行者在红尘中应不着一切相,修一切善法,当然也不执着善法相,就能成就无上正等正
    觉。
    둘째,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제23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수보리여! 이른바 선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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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은 곧 선법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선법이라 한다고 여래는 설하였다.” 즉 수행자는
    속세에서 일체 상에 집착함이 없이 일체 선법을 수행하되 선한 법상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수 있습니다.
    第三、怎样供养《金刚经》,供养如来?
    佛在第五品中说:“凡所有相,皆是虚妄。若见诸相非相,即见如来。”
    在第十四品中,须菩提说:“离一切诸相,即名诸佛。”佛说:“如是,如是。”
    故行者应离一切相,发心成道。
    故行者应离一切相,舍离三界六道、六根六尘。
    故行者应离一切相,见自性如来。
    故行者应离一切相,行菩萨道。
    故行者应离一切相,弘扬佛法。
    故行者应离一切相,做出世、入世间一切利生事业,无所求心,无所得心。
    行者应以此来供养自性如来,供养《金刚经》。
    셋째, 어떻게 금강경을 공양하고 여래를 공양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제5품에서 “무릇 일체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14품에서 수보리가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이를 곧 이름하여 부처님이라 합니다.”라고
    말하자 부처님께서 “그렇다, 그렇다.”고 화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도를 이루고자 발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삼계육도와 육근, 육진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자성여래를 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보살도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불법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출세간과 세간의 일체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되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할 때, 그것이 바로 자신의 자성여래를 공양하는 것이며, 
    금강경을 공양하는 길입니다.
    第四、怎样修证、解说《金刚经》?
    佛在第三十二品中说:“不取于相,如如不动,观一切有为法,如梦幻泡影,如露亦如电。”
    行者不管是在座垫上,还是在日常行为中,信佛所说“一切相虚妄”,那身心内外一切觉受、
    体验、境界、分别、认知都虚妄。此时,心无生处、无灭处、无住处,此时安心,叫“安住于无所
    住”,这即“法界大定”,“如来空定”。只是刚开始修证,着相的人把“虚妄”也定义为一个境界、一
    个相,那即安住在了虚空或虚无中,还是着相安住,无法直接契入空定。这样便可以通过先修其
    他法门,如止、观的渐次学习来达成。在经文中,佛还让我们这样来解说、诠释《金刚经》,所
    以我们需要通过实证才能不执着于一切相,如如不动安住于佛的见地中,为别人诠释出佛的般若
    智慧。
    넷째, 어떻게 금강경을 수행 증득하고 해설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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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는 제32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상을 취하지 말고 여여부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
    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수행자가 좌복 위에 앉아 있든 아니면 일상생활 중이든 부처님께서 하신 “일체 상은 허망
    하다”는 말씀을 믿는다면 몸과 마음 안팎의 모든 감각·체험·경계·분별·인지는 모두 허망한
    것입니다. 이 경우에 마음은 생겨나는 곳도, 사라지는 곳도, 머무는 곳도 없게 됩니다. 이때
    편안해진 마음을 ‘머무는 데가 없이 안주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법계대정(法界大定)’
    이고 ‘여래공정(如来空定)’입니다.
    다만 수행 초기에는 상에 집착하는 버릇 때문에 ‘허망함’ 자체를 하나의 경계나 하나의
    상으로 규정하여 허공이나 허무에 안주하게 됩니다. 이 또한 여전히 상에 집착한 안주이기
    에 이렇게 해서는 직접 공정(空定)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지(止)와 관(觀) 같
    은 다른 법문을 통해 점진적으로 수행하여 이를 이루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우리
    에게 금강경을 이렇게 해설하고 해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실질적인
    증득을 통해서야만 일체 상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하게 부처의 견지에 안주하여 다른
    사람에게 부처의 반야 지혜를 온전하게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第五、学习《金刚经》的证量境界。
    佛在第三十一品中说:“发阿耨多罗三藐三菩提心者,于一切法应如是知,如是见,如是信解,不
    生法相。”当行者真正听懂佛的般若智慧后,便不生法相,“不生法相”即是学习《金刚经》的证量
    境界。当行者证得“不生法相”时,同时进入“无我”之境,因为“自我”就是“诸法相”,当所有法相不
    生,“我”即不生,此时,行者进入“如来真空之境”。
    다섯째, 금강경의 증량(證量) 경계를 공부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제31품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모든 법에서 마땅히 이
    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 마음에 법상을 짓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알아들었다고 하면 법상이 생겨
    나지 않게 됩니다. 이 ‘법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곧 금강경의 증량(證量) 경계에 대
    한 터득을 의미합니다. 수행자가 ‘법상이 생기지 않음’을 증득했다는 것은 그가 ‘무아’의 경
    계에 진입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바로 ‘모든 법상(諸法相)’’에 속하기에, 모
    든 법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므로 이 경
    우라면 수행자는 ‘여래의 진공 경계’에 진입한 것입니다.
    最后谈谈功德。
    佛在经文中多次提到,如果有人能于般若智慧信受奉行,或只是接受、修证其中的一个观
    点,并为他人解说,功德都无量无边。在《金刚经》的后半篇,佛与须菩提的问答中,弟子们需
    安住在“真空境界”中来了悟佛所说的一切了。
    마지막으로 공덕에 대해 논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경문에서 여러 차례 만약 누군가가 반야 지혜를 믿고 받들어 행하거나 혹은
    다만 그중의 관점 하나를 받아들여 수행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해준다면 단지 이것만으
    로라도 그 공덕이 무량무변하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금강경 후반부에 기록된 부처님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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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의 문답을 통해, 제자들은 “진공 경계”에 안주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깨
    달아야만 했습니다.
    在此,我们想到了大家熟悉的“般若”智慧的心要——《般若波罗蜜多心经》。在《心经》中,
    观自在菩萨对佛大弟子中智慧第一的舍利弗说:
    第一、“如来真空之境”,诸法不生不灭,不垢不净,不增不减,因为诸法空相。
    第二、“如来真空之境”,无色、受、想、行、识,五蕴。
    第三、“如来真空之境”,无眼、耳、鼻、舌、身、意,六根。
    第四、“如来真空之境”,无色、声、香、味、触、法,六尘。
    第五、“如来真空之境”,无眼界乃至无意识界,即无十八界。
    第六、“如来真空之境”,无无明。也不是无明通过修行尽了,因无明本空。
    第七、“如来真空之境”,无老死。也不是老死通过修行尽了,生、老、病、死本空。
    第八、“如来真空之境”,无“苦集灭道”四圣谛。
    第九、“如来真空之境”,无智慧可得,在世界也无少法可得。
    第十、懂得诸相虚妄这个智慧,大菩萨即可心无罣碍,没有烦恼、得失,没有恐怖,远离颠
    倒梦想,证入涅槃。
    第十一、证得诸法空相,起用万法时即色空不二。
    第十二、三世诸佛都以这个智慧得无上正等正觉。
    第十三、所以“诸法无我”,“自性空”的般若智慧是大神咒,大明咒,是无等等咒,能除一切
    苦,真实不虚。
    第十四、故说“般若波罗蜜多咒”。即说咒曰:“揭谛揭谛,波罗揭谛,波罗僧揭谛,菩提萨婆
    诃。”听说咒文的意思是:快来吧,快来吧,快来了悟佛的般若智慧,与我一起从轮回的此岸进入
    解脱的彼岸。
    이에, 이 지점에서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반야’ 지혜의 요체 –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떠올리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부처님의 수제자 중 지혜제일인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모든 법이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
    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데 이는 모든 법상이 공하기 때문이다. 둘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없다. 셋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눈·귀·코·혀·몸·뜻의 육근이 없다. 넷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색·성·향·미·촉·법의 육진이 없다. 다섯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안계(眼界)에서 의식계(意識界)에 이르기까지 십팔계가
    없다. 여섯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무명(無明)이 없다. 또한 무명은 수행을 통해 그것이 다
    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명은 본래 공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늙고 죽음이 없다. 또한 늙고 죽음이 수행을 통해 그것이
    다해지는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는 본래 공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고집멸도’ 사성제가 없다. 아홉째,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없고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법도 없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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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째,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이 이치를 깨닫게 되면, 대보살은 곧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되
    어 번뇌·득실·두려움 역시 사라져 그 전도된 몽상에서 아주 완벽히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게
    된다. 열한째, 모든 법의 공상을 증득하고, 만법을 활용할 때는 곧 색공불이(色空不二)인 것이
    다. 열두째,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 이 지혜로 무상정등정각을 얻으셨다. 열셋째, 그러므로 ‘모든 법은 무아’와 ‘자성은 공하다’는 반야 지혜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
    고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이로써 온갖
    괴로움을 없앨 수 있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열넷째,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한다. 주문은 이렇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어서 오라, 어서 오라, 어서 와서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깨달아 나와 함께 윤회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으로 가자.”
    《心经》与《金刚经》都是阐述佛的般若智慧的,一个称般若智慧的心要,一个称般若智慧
    的总纲。佛阐述般若智慧的经文翻译成汉文的有六百卷之多,合称《大般若波罗蜜多经》,《心
    经》与《金刚经》从六百卷中摘录出来。既然谈到《心经》,那下面我们来闻听一下《心经》的
    全文(唐·玄奘法师译)。
    观自在菩萨,行深般若波罗蜜多时,照见五蕴皆空,度一切苦厄。舍利子,色不异空,空不
    异色,色即是空,空即是色,受想行识,亦复如是。舍利子,是诸法空相,不生不灭,不垢不
    净,不增不减。是故空中无色,无受想行识。无眼耳鼻舌身意,无色声香味触法,无眼界,乃至
    无意识界。无无明,亦无无明尽,乃至无老死,亦无老死尽。无苦集灭道,无智亦无得。以无所
    得故,菩提萨埵,依般若波罗蜜多故,心无罣碍。无罣碍故,无有恐怖,远离颠倒梦想,究竟涅
    槃。三世诸佛,依般若波罗蜜多故,得阿耨多罗三藐三菩提。故知般若波罗蜜多,是大神咒,是
    大明咒,是无上咒,是无等等咒,能除一切苦,真实不虚。故说般若波罗蜜多咒,即说咒曰,揭
    谛揭谛,波罗揭谛,波罗僧揭谛,菩提萨婆诃。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모두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설명한 경전으로써, 하나는 반야 지
    혜의 요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반야 지혜의 총강(總綱)이라 부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
    지혜를 진술하신 경전은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600여 권에 달하는데 이를 합쳐 대반야바
    라밀다경이라고 부릅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은 그곳에서 정수만을 뽑아낸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이렇게 언급하게 된 이상 그럼 이제 반야심경의 전문(당나라 현장 법사
    역)을 들어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
    로움과 재앙에서 벗어났느니라.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
    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
    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
    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
    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도 없다.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느니라.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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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고 가장 밝은 주
    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이에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心经》开篇,说观自在菩萨行深般若波罗蜜多时,这个行不是坐在座垫上在禅定境界中行
    的,是按照佛的般若智慧,不着一切相行布施、行忍辱、修六度万行成就的,菩萨才能破除我
    执,破能观与所观,能照与所照,最终见五蕴皆空。所以,他对舍利弗说出了如来的真空境界。
    站在如来真空境界中,看万法都虚妄不实,色即空。了知每个相本性空,见相就见空性,并无一
    个抛弃万法后的空,故空即是色。在如来果位境界中,起用万法即色空不二。受、想、行、识都
    是这样的,在受、想、行、识中,也包含着如来圆满的色空不二本质。但所有这一切,需要按佛
    说的一切去修证,所求心、所得心尽时,真正证入诸相虚妄的如来真空境界,获得心、佛、众生
    三无差别的平等心,才能真正圆满认知。
    반야심경 도입부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라고 하였는데 여기
    서 말하는 이 ‘행(行)’은 단순히 좌복 위에 앉아 선정에 든 상태에서 행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반야 지혜에 따라 일체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보시와 인욕을 행하며 육도만행
    (六度萬行)을 수행하여 이를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행했기에 보살은 아집을 파하고 관찰하
    는 주체[能觀]와 관찰되는 대상[所觀], 비추는 주체[能照]와 비추어지는 대상[所照] 파하여
    마침내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사리불에게 여래의 진공 경계를 설하셨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에 서서
    보면 만법은 모두 허망하고 실체가 없으니 ‘색이 곧 공[色卽是空]’입니다. 모든 상의 본성이
    공함을 깨닫고 나면 상을 보는 것이 곧 공성을 보는 것이기에 만법을 버린 후에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이 곧 색[空卽是色]’입니다. 여래의 과위 경계에서 만법을
    일으켜 이를 쓰는 것이 곧 색과 공이 둘이 아닌 ‘색공불이[色空不二]’입니다.
    수·상·행·식 또한 모두 이와 같아서, 이 속에도 여래의 원만한 색공불이의 본질이 담겨 있
    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수행 증득하되 구하고자 하는 마음
    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했을 때, 일체 상이 허망한 여래의 진공 경계에 진정으로 증입하
    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부처·중생, 이 셋에 대해 차별이 없는 평등심을 얻어 그 인지
    를 진정 원만히 이룰 수 있습니다.
    下面我们来了解一下《心经》中出现的几个概念,内容选自子归家《学习佛法》的视频资料
    中 “ziguijia.com”。
    이어서 반야심경에 있는 몇몇 개념에 대해서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관련 내용은 자귀가
    (子歸家)의 “불법학습” 영상 자료(ziguijia.com)에서 발췌했습니다. 五蕴
    佛教认为世界和生命是由色、受、想、行、识五种因素构成,这五种因素称为五蕴。
    色蕴是指物质由地、水、火、风所构成。世界的一切都是色的暂时组合。由于色的组合生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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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变化不定,所以人们就看到物质的成、住、坏、空,生命的生死轮回。在人,色蕴分内色和外
    色。内色就是眼、耳、鼻、舌、身五根;外色就是色、声、香、味、触五境。
    受蕴(觉受)是指外界作用于眼、耳、鼻、舌、身而产生的痛痒、苦乐、忧喜、好恶等觉
    受,是说人的心理活动。
    想蕴(概念)是指通过对外界万物产生的觉受进行分析判断后得到的知觉和表像,是一种理
    性活动,概念作用。如,人听到鸣笛声,心中就判断那是汽车发出的声音,给它定一个名称,这
    就是想。
    行蕴(行为)是通过对外界事物的认识而产生的行动意志,相当于心理活动、意志活动。行
    蕴所生的心是造业的主要力量与原因,因这些心念可以驱使我们的身、口、意去造业。识蕴(了
    别)是人的总的意识,即把受、想、行三蕴会集在一起,形成对境界的觉知分别,也就是认识的
    功能和结果。
    오온에 관해서입니다. 불교에서는 세계와 생명이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며,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오온이라 부릅니다. 색온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색’의 일시적인 조합입니다. 색의 조합은 생멸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의 성·주·괴·공과 생명의 생사윤회를 보게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색온은 내색(內色)과 외색(外色)으로 나뉘는데 내색은 눈·귀·코·혀·몸 오
    근(五根)이고 외색은 색·성·향·미·촉 오경(五境)입니다. 수온(감각)은 외부 세계가 눈·귀·코·혀·몸에 작용하여 생기는 아픔과 가려움, 괴로움과 즐
    거움, 근심과 기쁨, 좋음과 싫음 등의 감각을 가리키는바 다시 말해 사람의 심리 활동을 뜻
    합니다. 상온(개념)은 외부 사물로부터 말미암아 생겨난 감각을 분석과 판단을 거쳐 얻은 지각과
    표상인바 이는 일종의 이성적인 활동으로서 개념 도출의 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어 경적을
    듣게 되면 마음속으로 저것이 자동차가 내는 소리임을 판단하여 이름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각 즉 상(想)입니다. 행온(행위)은 외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통해 나타내게 되는 행동 의지로서 심리 활동과
    의지 활동에 해당합니다. 행온을 낳는 마음이 바로 업을 짓는 주요 에너지이고 원인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생각들이 우리의 몸·입·뜻을 부추겨서 업을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식온(분별)은 인간의 총체적 의식으로서 수·상·행 이 삼온(三蘊)이 한데 모여 경계에 대
    한 지각분별이 형성된 것이기도 하고 인식의 기능과 결과를 말합니다. 六根六尘十八界
    六根六尘称为十二处,六尘是指色、声、香、味、触、法,六根是指眼、耳、鼻、舌、身、
    意。六根称内六处,六尘称外六处,合为十二处。故十二处即为眼处、耳处、鼻处、舌处、身
    处、意处、色处、声处、香处、味处、触处、法处。
    十八界是指在十二处的基础上加上六识就是十八界。六识是眼识、耳识、鼻识、舌识、身
    识、意识。十八界内容如下:眼界与色界形成眼识界; 耳界与声界形成耳识界; 鼻界与香界形成
    鼻识界; 舌界与味界形成舌识界; 身界与触界形成身识界; 意界与识界形成意识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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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근 육진과 십팔계에 관해서입니다. 육근과 육진을 합쳐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릅니다. 육진은 색·성·향·미·촉·법을 가리키고
    육근은 눈·귀·코·혀·몸·뜻을 가리킵니다. 육근을 내육처(六內處), 육진을 외육처(外六處)라
    부르며 합쳐서 십이처라 합니다. 이 십이처란 곧 안처(眼處)·이처(耳處)·비처(鼻處)·설처(舌
    處)·신처(身處)·의처(意處)·색처(色處)·성처(聲處)·향처(香處)·미처(味處)·촉처(觸處)·법처
    (法處)를 말합니다.
    십팔계는 십이처의 기반 위에 육식(六識)을 더한 것입니다. 육식은 곧 안식(眼識)·이식
    (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입니다. 십팔계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안계(眼界)와 색계(色界)가 안식계(眼識界)를, 이계
    (耳界)와 성계(聲界)가 이식계(耳識界)를, 비계(鼻界)와 향계(香界)가 비식계(鼻識界)를, 舌界(설계)와 미계(味界)가 설식계(舌識界)를, 신계(身界)와 촉계(觸界)가 신식계(身識界)
    를, 의계(意界)와 식계(識界)가 의식계(意識界)를 형성합니다. 苦集灭道(四圣谛)
    四圣谛即佛说的四种真理。内容是苦、集、灭、道。
    关于苦:佛法中认为,对三界的生命体来讲,三界都是苦海,而且把苦归纳为三类:苦苦、
    坏苦和行苦。
    苦苦就是生命体恒常处在饥寒交迫、惊惧恐怖、被酷刑折磨等等痛苦之中,几乎无有快乐的
    时候。如地狱、饿鬼道众生,对此种苦体验最强烈。此苦欲界众生有,色界、无色界无。
    坏苦是生命体从一切事物的无常变化中带来的痛苦,比如人得病、衰老、拥有的财富及爱情
    失去、死亡等等。此苦欲界、色界都有。无色界无身,无此苦。
    行苦是生命体意识到生命以及一切都在迁流不断的变化之中,对永恒生命的追求永远得不到
    的痛苦。行苦三界都有,但欲界众生体悟不深,或根本体悟不到此苦。色界、无色界众生体悟较
    深。
    고집멸도(사성제)에 관해서 입니다.
    사성제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합니다. 고(苦)·집(集)·멸(滅)·
    도(道)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래는 고(苦)에 관해서입니다. 불법은 삼계의 생명체에게 삼계를 모두 고해라고 보며 그
    들이 받는 고통을 세 유형 즉 고고(苦苦)·괴고(壞苦)·행고(行苦)로 분류합니다.
    고고는 바로 생명체가 항상 굶주림과 추위,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고 가혹한 형벌과 고
    문에 시달리는 등등의 괴로움에 처해 있어 거의 즐거울 때가 없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지옥, 아귀도의 중생들은 이런 고통을 가장 강하게 체험합니다. 이런 괴로움이 욕계
    중생에게는 있으나 색계·무색계 중생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괴고는 생명체가 일체 사물의 무상한 변화에서 겪는 괴로움으로서, 예를 들어 사람이 병
    에 걸리거나 늙어 가고, 가진 재산이나 애정을 잃고, 죽는 것 등등입니다. 이 괴로움은 욕
    계·색계에는 모두 있으나 무색계에는 몸이 없기에 이런 괴로움이 없습니다. 행고는 생명체가 생명 및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나
    결코 그것을 얻을 수 없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행고는 삼계 모두에 존재하지만, 욕계
    중생은 이를 깊이 체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터득하지 못하기도 합니
    다. 색계·무색계 중생은 비교적 깊이 체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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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对人道来讲,苦又细分为八苦:生苦、老苦、病苦、死苦、怨憎会苦、爱别离苦、求不得苦
    和五蕴炽盛苦。
    生苦是指人住胎、出胎时都受痛苦,婴儿会觉受到,但他不出。当婴儿会说话时,又把住
    胎、出胎的痛苦遗忘了。
    老苦是人到了老年后,发白齿落,肌肉松弛,五官失灵,神智昏暗,生病日促,渐趋于死
    亡。
    病苦是指人身体遭受种种病痛的折磨。很少有人一生都未生过一次病的。
    死苦是指人终归有一死,而且会因种种原因死去。对于人来讲,不管因何种原因死去,都是
    一种痛苦的事。
    怨憎会苦是指人生在世,对于怨仇憎恶的人和事,本求远离,但却分也分不开,离也离不
    了,因而造成痛苦。
    爱别离苦是指人生在世,与自己所爱的人因种种原因必须分离,无法见面,或因所爱的人死
    亡造成的伤痛。求不得苦是指人因种种欲望驱使而有所求,但却求之不得,从而引发的痛苦。
    五蕴炽盛苦:五蕴是指色、受、想、行、识,五蕴炽盛苦可以说是前面七苦汇集而导致的
    苦。因为每个人的一生,生、老、病、死的苦都不可避免,怨憎会苦、爱别离苦、求不得苦在每
    个人的一生中都有不同程度的体验,最后汇集成五蕴炽盛而痛苦。
    这就是佛刚开始宣扬佛法时,告诉弟子们的苦谛。只求弟子们生起从诸苦中出离,从轮回中
    解脱之心。
    인간 세상에 있어서, 괴로움을 또 팔고(八苦)로 세분할 수 있는바 생고(生苦)·노고(老苦)·
    병고(病苦)·사고(死苦)·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치
    성고(五蘊熾盛苦)가 바로 그것입니다. 생고는 사람이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올 때 모두 괴로움을 받는다는 뜻인데 이 고통
    을 아기들이 느끼지만 표현하지 못합니다. 말을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아기들은 이미 주태
    (住胎)와 출태(出胎)의 고통을 잊어버린 상태가 됩니다. 노고는 사람이 노년에 들어선 후 흰머리가 나고 이가 빠지고 근육이 처지며 오관이 둔감
    해지고 정신이 흐릿해지며 병에 자주 걸려, 점차 죽음으로 향하는 그 양상을 말하는 것입니
    다. 병고는 사람 몸이 온갖 잔병에 시달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평생 한 번도 병에 걸린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고는 사람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때 죽음에 이르는 원인은 여
    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그 어떤 원인으로 죽든 그것은 모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원증회고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멀리 떠나려고 하나 헤어지고 싶어도 헤어질 수 없고,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으므로 이
    로 인해 초래된 고통을 가리킵니다. 애별리고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반드시 헤어져야 하고, 혹은 만날 수 없거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초래된 아픔을
    가리킵니다. 구부득고는 사람이 각종 욕망의 부추김에 의해 그 무엇을 구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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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없으므로 인해 초래된 고통을 가리킵니다. 오온치성고: 오온은 색·수·상·행·식을 말하며 오온치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 고통이 모여서
    생긴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나 인생에서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피할 수 없으며
    원증회고·애별리고·구부득고는 사람에 따라서 그 체험의 정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이 오온치성고가 모여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불법 전수를 본격 시작했던 그 초기에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고제
    (苦諦)입니다. 이렇게 고해를 알려줌으로써 다만 제자들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윤회
    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도록 했던 것입니다. 关于集:
    四谛中的第二条真理是集谛。集谛指的是很多原因汇集在一起造成了众生的苦果。但这所有
    的原因归纳起来,罪魁祸首主要是贪、瞋、痴三毒的存在。贪是众生对三界的贪着、留恋。贪使
    众生永不会满足;瞋是众生对三界不喜欢的一切生起爱憎、分别。瞋会让众生产生嫉恨与恶意;
    痴是众生缺失圆满的智慧。痴让众生对世界一切产生错误、片面的自我认知。
    众生因为贪、瞋、痴三毒的作用,造成了种种业力,又因为业的牵引,从而生生世世在三界
    中轮回,遭受苦的果报。比如,佛在讲到人在具足很多因缘后,从生到死的轮回,这就是“十二缘
    起说”。内容即是:无明→行→识→名色→六入→触→受→爱→取→有→生→老死。
    “十二缘起”的意思是:当我们问佛人为什么会老会死时,佛告诉我们因为人有生,有生就会
    有老死。
    为什么要生呢?佛说因为“有”,此处的“有”即指有业力的牵引,人会身不由己。
    为什么会有业力呢?佛说是因为“取”,取的意思是众生对色、声、香、味、触五欲的执着追
    求与获取。这种追求与获取会造种种业。
    为什么人会执着追求这些?是因为“爱”,即“欲望”。为何人会产生欲望?是因为人对一切有感
    官及身心的觉受。为何会产生觉受?是因为触境。
    何为触境?是因为人有六根,眼、耳、鼻、舌、身、意,六根面对世界的一切,佛法把它分
    为六尘,即色、声、香、味、触、法时,会产生分别执着,这即是“六入”。
    为何会有“六入”?是因为有“名色”,“名色”指的是“自我”,凡夫众生执着认为,这个不断生灭
    的肉体和意识就是“自我”,佛法中认为这个“自我”只是一个名相,没有永恒不变的自体,所以称为
    “名色”或叫“假我”。
    为何会有这个“假我”存在?是因为“识”,指的是过去世的业力而生现世受胎之一念,凭“中有
    身”而结“生有身”。
    为何会有“识”?是因为“行”,即心意的无常,不断变化才产生种种妄念,造种种业,产生种种
    果报。
    为何会有“行”?这种无常的变化,是因为“无明”,“无明”是指对万事万物的真相认识不清楚,
    没有智慧。
    所以,最终佛告诉我们一个道理,要想从生死之中解脱出来,最终需要拥有佛的智慧。(小
    乘的辟支佛、缘觉佛通过思维“十二因缘法”认为斩断其中的某一个“缘”,这个“生死”轮回就不成
    立,就可获“涅槃解脱之境”,这是不究竟的见地。因在佛最究竟的见地中,所有的“缘”也都只是假
    说,“缘”也虚幻。如辟支佛、缘觉佛不能证入“缘也虚幻,实无可断的缘”这个见地,是无法真正获
    得佛的涅槃之境的)
    十二缘起法是对四谛很好的诠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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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집(集)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는 집제(集諦)입니다. 집제는 수많은 원인이 함께 모여서 형성된
    중생들의 고통이라는 결과 즉 고과(苦果)를 만들어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원인
    을 요약하면, 주요 원인은 주로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탐(貪)은 중생이 삼계를 향한 집착과 미련을 가리킵니다. 탐은 중생이 영원히 만족을 모
    르게 합니다. 진은 중생이 삼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체에 대해 증오와 분별이 생겨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瞋)은 중생이 질투와 악의가 생기게 합니다. 치(癡)는 중생에게 원만
    한 지혜가 부족한 것을 가리킵니다. 치는 중생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그릇되고 편협한 자
    아 인식이 생기게 합니다. 중생은 탐·진·치 삼독의 작용으로 인해 온갖 업력을 쌓게 되며 또한 업의 이끌림에 의해
    세세생생 삼계에서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인연이
    구족된 후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윤회의 순환이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
    씀하신 ‘십이연기설(十二緣起)’입니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
    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바로 그것입니다. ‘십이연기’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사람은 왜 늙고 죽게 되냐고 물으면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에게 태어남이 있으므로, 태어남이 있으면 곧 늙고 죽는 것이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태어날까요? 부처님께서는 ‘유(有)’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유’란 바로 업
    력의 이끌림을 의미하는바 이것에 대해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
    닙니다. 왜 업력이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취(取)’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취란 중생이 색·성· 향·미·촉 이 오욕에 대해 집착하고 추구하며 얻으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런 추구와
    획득은 갖가지 업을 짓게 합니다. 왜 사람은 이런 것에 집착하고 이를 추구할까요? ‘애(愛)’, 즉 ‘욕망’ 때문입니다. 왜 사람은 욕망이 생길까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감각기관과 심신으로 그것을 지각하
    기 때문입니다. 왜 느낌이 생길까요? 경계와의 접촉 즉 촉경(觸境) 때문입니다. 무엇을 촉경(觸境)이라고 할까요? 사람은 육근, 즉 눈·귀·코·혀·몸·뜻으로 세계의 모든 것
    을 마주하는데, 불법에서는 마주하는 그것을 육진 즉 색·성·향·미·촉·법으로 나눕니다. 또 이
    로부터 생겨나는 분별 집착을 육입(六入)이라고 합니다. 왜 ‘육입(六入)’이 있을까요? ‘명색(名色)’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색’은 ‘자아’를 가리킵니
    다. 범부 중생은 끊임없이 생멸하는 이 육체와 의식을 곧 ‘자아’라고 고집스레 여기고 있습
    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이 ‘자아’가 다만 하나의 명상(名相)일 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
    체가 없다고 여겨 ‘명색(名色)’ 혹은 ‘가아(假我)’라고 부릅니다. 왜 ‘가아’가 존재할까요? ‘식(識)’때문입니다. 이는 과거세의 업력으로 말미암아 현세에 수
    태(受胎)되는 일념이 생겨 중유신(中有身)에서 생유신(生有身)이 되는 것입니다. 왜 ‘식(識)’이 있을까요? 행(行)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무상(無常)함으로 인해 부단히 변
    화하여 갖가지 망념을 연출하고, 각종 업을 지으며 갖가지 과보를 낳기 때문입니다. 왜 ‘행(行)’이 있을까요? 이런 무상한 변화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됩니다. ‘무명’이란 만
    사 만물의 진실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지혜가 없음을 말합니다.
  • 170 –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생사에서 해탈하려면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의 지혜
    가 필요하다는 이치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소승의 벽지불과 연각불은 ‘십이인연법’에 대
    한 사고를 통해 그중 어느 한 ‘인연[緣]’을 끊으면 ‘생사’ 윤회가 성립되지 않아 ‘열반의 해
    탈 경계’를 획득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이는 궁극적인 견지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견지에서 보면, 모든 ‘인연’은 또한 가설에 지나지 않기에 ‘인연’도 역시 허망합니다. 그러므
    로 벽지불, 연각불의 경우 ‘인연 또한 허망하기에 실로 끊을 인연이 없다’는 이 견지에 증입
    하지 못하면 부처님의 진정한 열반의 경계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십이연기법은 사성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입니다. 关于灭:
    四谛的第三条真理是灭谛。灭是梵语“涅槃”的意译。涅槃在梵文和巴厘文中指熄灭、止灭和
    吹灭的意思,表火的熄灭。贪、瞋、痴在佛法中被视为三毒火,在圣者的眼中,这个世界的一切
    都被三毒火燃烧,无刹那之安息。圣者就将“自我”及“贪瞋痴”等根本烦恼造作的“业因”永远断除,
    证得清净寂灭、解脱轮回的境界称为涅槃,这也是小乘佛法修行者追求的方向和目标。但在佛法
    中,把小乘行者证得的阿罗汉的境界称为“有余涅槃”。因为虽然阿罗汉的境界可以暂时在较长的
    时间里靠禅定力阻断生死之流,但还未能彻底从轮回中解脱。涅槃之境并不是死后才能获得,而
    是当生就可成就。
    다음은 멸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는 멸제(滅諦)입니다. 멸(滅)은 산스크리트어 ‘열반’의 의역입니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서 불이 꺼짐, 멈춤, 불을 불어서 끔을 의미하여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합니다. 탐·진·치를 불법에서는 삼독(三毒)의 불로 간주하는데 성자의 눈으로 보면
    이 세계의 일체가 모두 삼독의 불에 타고 있어 찰나의 안식도 없는 상태입니다. 성자가 ‘자
    아’ 및 ‘탐·진·치’ 등 근본적인 번뇌가 만들어 낸 ‘업의 근원’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청정한 적
    멸의 경계와 윤회에서 해탈한 경계를 증득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소승 불법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방향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소승 수행자들이 증득한 아라한의 이러한 경계를 ‘유여열반’이라고 부
    릅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의 경계는 선정의 힘에 의지하여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생사의
    흐름을 차단할 수는 하지만, 아직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반의
    경계는 사후에야만 획득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에도 바로 성취할 수 있습니다. 关于道:
    四谛的第四条真理是道谛。道谛是佛陀告诉我们,要想从生、老、病、死等种种烦恼、痛苦
    中解脱,就要修道。佛在一生四十九年的说法过程中,根据众生不同的根器,宣说了种种修道、
    证道的法门,小乘佛法中有较重要的三十七菩提道品,大乘佛法有菩萨道的六波罗蜜多需了解。
    도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성제의 네 번째 진리는 도제(道諦)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생로병사 등 갖가지 번
    뇌와 고통에서 해탈하려면 마땅히 도를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도제입니
    다. 부처님께서는 49년간 설법하시며 중생들의 서로 다른 근기에 따라 각종 수도(修道)와
    증도(證道)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그중 소승불교에는 중요한 삼십칠보리도품(三十七菩提
  • 171 –
    道品)이 있고, 대승불교에는 보살도의 육바라밀다가 있는데 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
    니다. 六波罗蜜多
    六波罗蜜多也称“六度”。“波罗蜜多”为梵文的音译,即“到彼岸”之意。意思是指由生死岸到涅
    槃岸。意译为“度”,指渡过、渡达的意思。“六度”是指导大乘菩萨走向解脱的六种方法。
    六波罗蜜多即布施、持戒、忍辱、精进、禅定、般若。这六种方法,行者边修边能观其空性,才
    能称为解脱法门。
    육바라밀다에 관한 내용입니다. 육바라밀다를 ‘육도’라고도 부릅니다.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어 음역으로서 ‘저 언덕에
    이르다’, 즉 생사의 언덕에서 열반의 언덕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의역하면 도(度)가
    되는데 건너다, 도달하다의 뜻입니다. ‘육도’는 대승 보살을 해탈로 향해 나아가게끔 인도하
    는 여섯 가지 방법입니다. 육바라밀다는 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를 말합니다. 수행
    자가 이 여섯 가지 방법으로 수행하면서 공성을 볼 수 있어야만 가히 해탈법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第一、布施波罗蜜多,是由布施入解脱门。
    布施所拥有的一切给需要帮助的人。如金钱、劳动、知识、微笑等等。修此布施法,没有目
    的,不求回报,布施完便不挂在心上。佛法中说“三轮体空”而施,即是指施者空、受者空、所施
    一切空。用此“三轮体空”来布施才是布施波罗蜜多,才能入解脱之门。否则,只是累积人间善行
    和功德。
    첫째, 보시바라밀다는 보시를 통해 해탈문에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보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재물·노동·지식·미소 등)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보시법을 수행할 때는 목적이나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보시
    한 후에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야 합니다. 불법에서는 ‘삼륜체공(三輪體空)’의 보시를 이야
    기하는데 이는 보시하는 이, 받는 이, 보시한 모든 것이 모두 공한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
    이 ‘삼륜체공’의 마음으로 하는 보시야말로 보시바라밀다로서 이렇게 해야만 해탈문으로 들
    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인간 세상의 선행과 공덕을 쌓는 일에 지나지 않습
    니다.
    第二、持戒波罗蜜多,即是由持戒入解脱门。
    大小乘的戒律很多,但对大乘在家行者来说,莫过于“诸恶莫作,众善奉行”这八个字。合乎
    于国情、道德规范、准则,利益众生的事即为善事,反之即为恶。
    持“戒”的本质是通过行为的约束而收摄心性的放纵,从而逐渐洗刷贪、瞋、痴三毒。如果只
    重形式,心性上一点没有改变,也不叫持戒波罗蜜多。如五戒之中的“不杀生”。它的目的是去除
    行者的杀心、瞋恨之毒。如果你一边吃素、放生,但心中却对身边的人和事愤愤不平,心中充满
    怨恨、敌对的情绪,常东家长西家短数说别人的不是,恨不得被抱怨者皆倒楣而后快。这时瞋恨
    之毒一点也未减轻,已破“杀生戒”。或你打死一只蚊子,当它血染墙面时,心中瞬间升起的快
    意,这些都是我们平时不易察觉的“杀心”。我们不是打死蚊子除害虫,而是对它的死亡有快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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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这些都是破“杀生戒”。所以“持戒波罗蜜多”重点是行者通过诸行为检点到自己内心的不善,内心的
    贪、瞋、痴,从而马上警觉而改正,即“摄心为戒”。这才是大乘道入解脱门的“持戒波罗蜜多”。
    둘째, 지계바라밀다는 계율을 지킴으로써 해탈문에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대소승은 그
    계율이 아주 많으나 대승의 재가 수행자에게는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
    하라’라는 그 이상의 가르침은 더 없습니다. 국가의 법과 도덕 규범 및 준칙에 부합되고 중
    생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그것은 바로 선이고 그 반대라면 악입니다. 지계의 본질은 행위의 속박을 통하여 심성의 방종을 다잡음으로써 점차 탐·진·치 삼독을
    씻어내는 일입니다. 만약 형식만 중요시하고 심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
    계바라밀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오계 중 ‘불살생’ 의 목적은 수행자의 살생하려는 마음과 증오라는 독을 제거
    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채식을 하고 방생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주변 사람과 일들에
    대해 불만과 원망을 품고 늘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며 상대가 잘못되어 자기 마음이 후련
    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이는 진한(嗔恨)의 독이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이므로 이미 ‘살
    생계’를 어긴 것입니다.
    혹은 모기를 때려죽이는 상황에서 벽이 모기 피로 범벅이 되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쾌감
    이 올라온다면 이 역시 우리가 평소에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살심(殺心)’입니다. 모기를 잡
    아 해충을 제거하는 데 초점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모기의 죽음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이런 것은 모두 ‘살생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계바라밀다’의 중점은 자신의 행위
    를 통해 자기 내심의 불선(不善) 즉 마음속의 탐·진·치를 점검하여 즉시 이를 경계하고 고
    쳐나가는 일입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곧 계율[摄心爲戒]’인 것
    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승도(大乘道)가 해탈로 이끄는 참된 ‘지계바라밀다’입니다.
    第三、忍辱波罗蜜多,即是由忍辱入解脱法门。
    “忍辱”并非是指对一切事,一切人都逆来顺受,任人欺凌不加反抗。而是面对这些欺凌你的
    人和所有你认为不平等的待遇和恶劣处境时,你心中能不起瞋恨。如果你心中已生起极大瞋恨,
    不管行为怎样做,都已不在“忍辱波罗蜜多”。“忍辱波罗蜜多”的“忍”有安住于一境、知其空性的意
    思。在任何环境中,心能不断观人空、法空,让自己从六根带来的分别觉受中解脱出来。有时即
    使愤怒,但其中并无瞋恨之毒,此即入解脱门。如因孩子犯错,责骂孩子,虽有愤怒,但无瞋
    恨。如密宗诸佛像虽呈忿怒相,但他们因证入“空”性,所有的忿怒也是“真空妙有”,具有极大的加
    持力。
    셋째, 인욕바라밀다는 인욕을 통해 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욕’은 일체 일과 일체 사람들에 대해서 무조건 참고 견디어 그 누가 괴롭혀도 반항하
    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나 불공평한 대우, 열악한 처지에 처했을 때 마음속으로 울화나 원망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속으로
    이미 크게 화나고 원망이 생겼다면 겉으로 어떻게 하든 이미 “인욕바라밀다’가 아닙니다. ‘인욕 바라밀다’에서의 ‘인(忍)’은 하나의 경계에 안주하여 그 공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환상 경계에서도 끊임없이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보아내어 육근이 가져다주는 분
    별과 느낌에서 해탈하는 것입니다. 가끔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으나 그 속에 원한의 독이
    없다면 그것은 곧 해탈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서 꾸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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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는 하는데 이 상황에서 비록 분노는 있으나 증오하는 마음이 없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한 예를 들자면, 밀교의 여러 불상은 분노상을 하고 있으나 그들은 이미 ‘공성’으로 증입하
    였기에 이 모든 분노 또한 ‘진공묘유’인지라 아주 큰 가피력을 갖고 있습니다.
    第四、精进波罗蜜多,即由精进入解脱门。
    “精进”有多种方式。如一闻正法,即刻能放弃自己以前种种不善业,种种消耗时间、生命而
    且无益的俗务,而生起听闻学习正法之心,这也叫精进。在修持佛法中,能忍则忍,能断则断,
    认真用心,每时每刻能端正修法态度。对上师布置的功课坚持不懈修证,不给自己找任何放松的
    借口等等,这都是“精进波罗蜜多”。
    넷째, 정진바라밀다는 정진을 통해 해탈문에 진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진’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법을 듣는 즉시 이전의 갖가지 불선
    업(不善業)과 시간과 생명 투자로 도모했던 무익한 속세의 일을 내려놓고 정법을 배우려는
    마음을 내는 것도 정진입니다. 불법을 닦음에 있어 참을 것은 참고 끊을 것은 끊으며, 심혈
    을 기울여 매 순간 법을 수행하는 태도를 단정하게 하는 것도 정진입니다. 스승이 정해준
    공부를 꾸준히 수행하고 증득하며, 자신에게서 그 어떤 해이해지고자 하는 구실도 찾지 않
    는 것 등 모두가 ‘정진바라밀다’입니다.
    第五、禅定波罗蜜多,即由禅定入解脱门。
    在修禅定中,不以获得少许定力而骄傲自满。禅定的目的是由定而开启我们本有的智慧,天
    道中人以禅悦、寂灭为乐,但恒久住于四禅八定之中是无法出三界的,只有佛的智慧才能使我们
    从三界轮回中解脱,获得最终的大自在。禅定的方法很多,基本分三个阶层:静虑、止观、定
    慧。依次渐进,靠禅定力心能安住于任何境,心安住日久即能超越人的觉受,超越事物的外在现
    象而看到万事万物的本质。禅定力依次渐进,这种觉照也愈清楚圆满,从而入解脱门。
    다섯째, 선정 바라밀다는 선정을 통해 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선정 수행 중 약간의 선정력을 얻었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선정의 목적은 선정
    을 통해 우리 본유의 지혜를 여는 데 있습니다. 천인은 선열과 적멸을 낙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선팔정(四禪八定)에만 영구히 머물러 있어서는 삼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
    다. 오직 부처의 지혜만이 우리를 삼계 윤회에서 해탈하게 하여 궁극적인 대 자재를 얻게
    할 수 있습니다. 선정의 방법은 아주 많은데 기본적으로는 세 단계 즉 정려(靜慮)·지관(止觀)·정혜(定慧)
    로 나눕니다. 순차적으로 정진하여 선정의 힘에 의지하면 마음은 그 어떤 경계에도 안주할
    수 있는데 마음이 안주하는 시간이 길수록 점차 인간의 느낌과 사물의 외적인 현상을 초월
    하여 만사 만물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선정의 힘이 깊어질수록 이런 깨달음도 점점 분명해
    지고 원만해져 이로 말미암아 해탈문에 진입하게 됩니다.
    第六、般若波罗蜜多,即由般若入解脱门。
    般若为梵文音译,意为智慧,指了解空性的智慧,不是指人世间的聪明才智。靠了解佛空性
    智慧入解脱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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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째, 반야바라밀다는 반야를 통해 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지혜라는 뜻입니다. 이는 공성을 이해하는 지혜를 의미
    하는 것이지 인간 세상의 총명과 재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공성 지혜를 깨
    달아야만 그것에 의지해서 해탈문에 들어가게 됩니다. 에필로그
    听完《金刚经》有一位同修说,听到佛说“观所有相皆是虚妄”后,生命不再有激情了,没意
    思了,这是这位同修又着了“一切虚妄”的相。
    首先,佛说《金刚经》是为发心求佛果的善男子、善女人听的,所以他的见地都是为了让弟
    子放下执着,安住在如来的知见道上。因为人在生生世世的生命流转中,不断追逐、抓取、依
    恋、执着、占有自己喜欢的一切,同时也是在不断定义、重建、肯定自我,而佛说身心内外一切
    都是虚妄不实的,这样弟子们就会在像陀螺一样轮转、被身心内外境牵引的状态中止步。既然身
    心内外一切都为虚妄,那还较真什么?求个什么?又能得个什么?这样心会在一切虚妄的见地中
    安住下来。
    금강경 법문을 다 듣고 난 후 어느 한 도반은, 부처님께서 “일체 상을 모두 허망한 것
    으로 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열정도 재미도 없다고 하였습니
    다. 이는 그 도반이 “일체가 허망하다.”는 상에 집착했음을 의미합니다. 우선,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하신 대상은 불과를 구하고자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입니
    다. 따라서 그 견지는 제자들이 집착을 내려놓고 여래의 지견도(知見道)에 안주하도록 인도
    하는 데 그 목적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세세생생 생명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부단히 추구하고 붙잡고 연연하며 소유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끊임없이 자아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재건하며 긍정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몸과 마음 안팎의 일체가 모두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치를 알게 되면 제자들은 마치 팽이처럼 심신
    내외의 경계에 이끌려 회전하던 상태에서 뚝 멈추게 됩니다. 몸과 마음 안팎의 일체가 모두
    허망하다면 무엇을 그렇게 진지하게 여기고, 무엇을 구하며, 또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
    까?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마음은 일체가 허망하다는 견지에 안주하게 됩니다.
    此时,不再对内外境执取、占有、取舍、分别、渴求了,这就是佛法修证中真正的“止”。所
    以,“止观”的“止”并非只是止息了纷飞的杂念,更重要的是你止息了因无明带来的妄心、过去的牵
    挂、未来的恐惧等。弟子们生命的轮转因为听到佛的空性见地后戛然而止,在对“身心”以及这个
    世界的永不满足中停下抱怨,停下索取、占有,停下思辨的头脑……
    이때, 안팎의 경계에 대해서 더는 붙잡거나 점유하거나 취사 선택하거나 분별하거나 갈구
    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불법 수행에서 말하는 진정한 멈춤[止]입니다. 그러므로 ‘지
    관(止觀)’의 ‘지’는 단지 번뇌만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무명에서 비롯된 망
    심과 과거에 대한 미련 및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을 멈추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윤회하는
    삶은 부처님의 공성 견지를 듣는 순간 거기에서 멈추게 됩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이 세계
    에 대한 영원히 불만족 속에서 오던 원망과 갈구, 점유 그리고 사변적인 생각을 멈추게 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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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而刚开始修止,欲望、习气未尽,觉受仍在,虽有正见,但弟子们仍随时会被诱惑牵引,再
    次轮转,只能无数次觉照,无数次停下所求心、所得心,停下追逐、占有的心。而且因生生世世
    轮转的惯性,刚开始不受内外境转,安住在佛的知见中时,有人会有一段时间感觉身体疲惫,头
    脑迟钝、木然,一切索然无味。此时,一定要注意坚持修禅定,最好在座垫上修。因为这是头脑
    刚开始止息轮转、索求,但行者心、气仍散乱所致,如果伴随昏沉、昏睡,即是气脉太浑浊,要
    少吃、吃素、清心寡欲等。总之,有佛的正知见,再加上定力的修持,行者短时间的灰暗期消失
    后,即开始进入有光明或禅悦的状态。这时,行者即能在佛的“般若智慧”中初尝乐趣。
    그러나 지[止,멈춤] 수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욕망과 습기가 아직 다하지 않아 감각이
    여전하기에, 비록 정견이 있는 제자일지라도 여전히 유혹에 이끌려 언제든지 다시 윤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끊임없이 각성하고 관조하여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
    는 마음을 멈춰 세워야 하며 추구하는 마음과 차지하려는 마음을 반복적으로 멈춰야 합니
    다. 그리고 세세생생 윤회의 관성으로 말미암아 내외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고 부처님의 지
    견에 안주하는 첫 경험을 하게 될 때, 어떤 이는 한동안 몸이 피곤하고 머리가 둔해지며 멍
    해져서 일체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반드시 선정 수
    행을 꾸준히 견지해야 하며, 될수록 좌복에 앉아서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머리가 처음으로 회전과 추구를 멈추기 시작했으나 수행자의 마음과 기
    는 여전히 흩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수행 중 만약 혼침(昏沉)과 졸음이 수반된다
    면, 이것은 곧 기맥이 너무 혼탁해서 생기는 현상으로 소식하고 채식하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등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요컨대, 부처님의 정지견을 가지고 선정 수행
    을 병행하면 짧은 암흑기를 거쳐 광명이나 선열(禅悦)의 상태에 진입하게 됩니다. 이때 비
    로소 수행자는 부처님의 ‘반야 지혜’에서 참된 즐거움을 맛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所以刚开始学习、领悟“般若智慧”的人,尤其只是意识层面的听闻,容易进入偏空的灰暗境
    界。这样等于行者在日常生活中又建立起一个“一切虚妄”的幻境,会对一切不感兴趣,生命中一
    切都变得索然无味,没有色彩。所以佛在修证般若智慧时,为他的大乘弟子们设立了六度,即:
    布施、持戒、忍辱、精进、禅定、般若。般若放在最后,并不是“般若智慧”不重要,而是要圆满
    彻悟、证得它,需要建立在前面的布施、持戒、忍辱的功德之上,再加上精进的修行,一段时间
    妄心的止息,才能听到佛说的般若空性后,真正生起出离心,放开心中执着、粘着的一切,而不
    会掉入“万物皆虚妄”的幻境中,进入无聊、偏空的世界。在整个佛法的修证中,行者都应安立于
    佛的果位见地上,修行菩萨道。
    그러므로 막 ‘반야 지혜’를 배우고 깨닫기 시작한 사람, 특히 다만 의식적인 차원에서 청
    취자에 불과한 사람은 쉽게 공(空)에 치우친 암울 경계에 진입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행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체가 허망하다’는 환상 경계를 다시 세우는 것과 같아서 세상
    만사에 관심을 잃고 삶의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며 색채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부
    처님께서는 반야 지혜를 닦는 대승의 제자들을 위해 육바라밀, 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반야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반야를 제일 마지막에 배정해둔 것은 ‘반야 지혜’가 중요하지 않
    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원만하고도 완전하게 깨닫고 증득하기 위해서는 앞선 보시·지계·인욕의 공덕의 토대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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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야 하고, 여기에 정진과 선정의 힘으로 망심을 멈추는 과정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
    니다. 그래야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 공성을 듣고 진정한 출리심을 내어 마음속 집착
    과 걸림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으며 ‘만물이 모두 허망하다’는 환상 경계나 무력한 공(空)
    에 치우친 세계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하여간 모든 수행과정에서 수행자는 항상 부처의 과
    위 견지 위에 서서 보살도를 수행해야 합니다.
    其次,佛在《金刚经》中说“观一切相虚妄”的后句是“若见诸相非相,即见如来”,即说,你会
    通过不执着这世界的万法而回归生命的源头,真正成为你自己——一位充满智慧与慈悲,不再有
    任何烦恼、痛苦,不再被时空的幻境所困的如来。所以佛说般若智慧不是要否定这个世界、否定
    人生,而是为弟子指出一条回归生命源头的路。
    또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일체 상을 허망하다고 보라”고 하신 뒤 바로 “일체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음
    으로써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해야만 지혜와 자비로 충만하고 그 어떤 번뇌와 고통도 없으며
    더는 시공간의 환상 경계에 속박되지 않는 진정한 자기 자신 즉 여래가 될 수 있음을 설하
    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 지혜는 이 세상과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 아
    니라 제자들에게 생명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길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还有一位朋友说,佛说让人通过修行获大自在,但学习佛法后反而不自在了。我们的生活本
    来就已经很辛苦了,佛还让我们克制种种欲望,持种种戒律,念念利他,处处在压制、摧毁我们
    的习气、欲望。而作为一个人,是以满足这些习气、欲望获得刺激和快乐的,让人放弃这些,这
    不是与人性对着干吗?
    또 어느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통하여 큰
    자유자재를 얻으라고 하셨는데, 불법을 배우고 나니 오히려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고
    요. 우리의 삶은 이미 아주 고달픈데 부처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갖가지 욕망을 절제하고 여
    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항상 남을 위한 마음을 지니라고 하고, 여기에 더해 곳곳에서 우리
    의 습기와 욕망을 억누르고 그것을 파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인간은 바로 이런 습기와
    욕망의 충족을 통해 자극과 즐거움을 얻는데 이러한 것들을 포기하라는 것이 인간성에 반하
    는 것이 아니냐고요.
    佛大慈大悲,众生已经浸泡在生老病死的苦海中,佛怎舍得再夺去你那些小情、小欲、小
    乐?只是佛知道,你的欲望、习气使你生生世世轮转在共业的海洋中,像一叶没有方向,不能自
    主的浮萍。在尘世,洪水、地震、海啸、瘟疫、战争、宇宙的任何变化都能轻而易举地毁灭你。
    你的欲望和习气还使你造下种种个业,随个业轮回成生生世世不同的“自我”,这些“自我”又在不断
    生灭、变异、得失的状态中苦不堪言。佛说我们生存的世界就是苦海,并非是佛不懂得“一分为
    二”说话,而是你在苦海中,那些昙花一现的快乐、刺激根本不值得留恋,即使你的快乐、刺激持
    续了一生一世,但善报享尽,你还会去地狱报到。而在三恶道(地狱、畜生、饿鬼),你所遭受
    的苦难却罄竹难书(地狱、饿鬼看不到,看看畜生道吧)。在你生生世世的生命长河里,你的苦
    与血泪岂是人间或天界一些快乐就能令你遗忘的?它们还会以资讯残留在你的意识中,随因缘成
    熟,随时开花结果。有时,你并未轮回在三恶道,但三恶道苦的觉受已经来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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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신 분입니다. 생로병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에게서 작디작은 애욕과
    즐거움을 빼앗으려 하시겠습니까? 다만 부처님께서는 여러분의 욕망과 습기가 여러분을 세
    세생생 공업(共業)의 바다에서 방향 없는 부평초처럼 떠돌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뿐
    입니다. 이 세상의 홍수·지진·해일·온역·전쟁, 그리고 우주의 그 어떠한 변화라도 모두 아주
    쉽게 여러분을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욕망과 습기는 여러분더러 수많은
    개별적인 업을 짓게 합니다. 이러한 업에 따라 세세생생 서로 다른 ‘자아’로 윤회를 거듭하
    게 되는데 이런 ‘자아’는 부단히 생멸·변이·득실의 상태 속에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
    도의 고통을 받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고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세상
    의 양면성을 볼 줄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해에서 누리게 되는 잠깐의 즐
    거움과 자극은 근본적으로 미련을 가질 가치도 없고 설령 우리의 즐거움과 자극이 한 평생
    지속한다고 하더라도, 선한 과보가 다하면 결국 지옥으로 가는 과보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
    니다. 삼악도(지옥·축생·아귀)에서 겪는 고통은 실로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지옥· 아귀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니 축생도를 보세요). 세세생생 이어온 생명의 큰 흐름에서 체
    험하게 되는 그 고통과 피눈물이 어찌 인간 세상이나 천계가 가져다주었던 약간의 즐거움으
    로 인해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정보의 형식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 잔류하여 인연이
    성숙하면 언제든지 과보로 나타나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가 아직 삼악도에서 윤회하고 있지
    않은데도 삼악도의 고통스러운 느낌이 이미 찾아오기도 합니다.
    佛要带你从苦海出离,佛要让你从生灭轮回的幻境中觉醒。一位佛出现于世,《法华经》中
    说有四个原因:为使众生开启本有的佛智;为向众生开示如来知见;为使众生能领悟如来知见;
    为使众生安住佛的知见道上获得身心大自在。所以,佛来这个世界不是与人的欲望、习气过不去
    的。他制定了戒律,不是为了让他的弟子们活在戒的禁锢之中的;他同样也不是来讲人间伦理道
    德的,讲万恶淫为首,让所有人离情去欲的。他是来告诉众生,从时空幻境中解脱的方法,最终
    让众生不管生活在功德化现的世界,还是共业化现的世界都能身心获大自在。而要达到这一目
    的,众生需回归生命源头,看清万物以及自我的实相。但人类太随心所欲,太自私,占有欲、征
    服欲等种种欲望太强了,自我永远无法满足的欲望,使人类贪婪时空幻境中的名、利、情等一切
    喜爱之物,从而被这些东西牵引、轮转,引发烦恼、痛苦,生种种邪见,无法回到自己本来清净
    无染、不生不灭的位置上去。所以佛制戒,约束习气。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고해에서 건져내어 생멸 윤회의 환상 경계에서 깨어나게 하려 하십
    니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신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
    다. 즉 중생에게 본래 있는 부처의 지혜를 열기 위해서, 중생에게 여래의 지견을 설법해주
    기 위해서, 중생들이 여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도에 안주
    하여 심신의 큰 자유자재를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인간의 욕망, 습기가 못마땅하여 그것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이 세
    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신 것은 제자들이 계율의 속박 속에서
    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고, 같은 도리로 인간 세상의 윤리 도덕을 논하러 오신 것도 아니
    며, 온갖 죄악 중에서 음욕이 가장 으뜸임을 말씀하시러 오신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정을 멀리하고 욕구를 제거해야 함을 설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 178 –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에게 시공간의 환상 경계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알
    려주시어 궁극적으로는 중생이 공덕으로 화현한 세계에서든 아니면 공업(共業)으로 화현한
    세계에서든 모두 심신의 크나큰 자유자재를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중생은 생명의 근원으로 되돌아가서 만물과 자아의 실상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자기 멋대로 하고 너무나 이기적이며 소유욕과 정복욕 등 온갖 욕
    망이 너무 강합니다. 따라서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자아의 욕망 때문에 인간은 시공간 환
    상 경계의 명예·이익·정 등 일체 좋아하는 것을 탐하여 끌려다니며 번뇌와 고통을 일으키고
    또한 온갖 삿된 견해를 낳아 자신의 본 모습인 청정하고 깨끗하며 불생불멸인 그 위치로 돌
    아갈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제정하여 습기를 예속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佛谈诸法性空,因时空中的幻境与人的妄心杂念一样多得不可计数,如果众生逐个去放弃,
    用无量无边的岁月也无法达成。佛说“众生幻心,还依幻灭”,故才有佛法,才有经、律、论,都
    是为对治、导引众生幻心的。佛谈般若智慧,修行者会暂时安住于佛的见地中,放下对红尘的所
    求、所得心,放下贪婪。弟子们的“心”必须先安立于佛果位的见地上,精进行持一切善法,才能
    尽快破尽我执,成就佛果。
    부처님께서 모든 법의 성품은 공하다고 하셨습니다. 시공간에서의 환상 경계라는 것이 그
    수량에 있어서 인간의 망심과 잡념만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기에 이를 하나하나 제거
    한다면 한량없는 세월이 걸려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의
    환심(幻心)은 여전히 환(幻)에 의지하여 없애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근거로 비로
    소 불법이 있고, 경(經)·율(律)·논(論)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중생의 환심을 다스리고
    인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야 지혜를 설하시면 수행자는 잠깐 부처님의 견지
    에 안주하여 속세의 구하고자 하는 마음, 얻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탐욕을 내려놓을 수 있
    습니다. 제자들은 그 ‘마음’을 반드시 부처의 과위 견지에 안주시킨 후 일체 선법을 꾸준히
    행해야만 비로소 이른 시일 내에 모든 아집을 깨뜨리고 성불할 수 있습니다.
    在人间,佛对众生执着幻境的头脑谈“缘起性空”的般若智慧,因为人对自己以及身心外的世
    界充满好奇,总是不断询问:这一切从哪里来?这一切从何而起?第一个人从哪里来?而人类史
    上有无数答案,比如宇宙大爆炸说、进化论、上帝造人,但有人又问上帝从哪儿来等等?但佛对
    他的弟子说“缘起性空”,他不说如来造人,他讲如来与众生平等,众生皆有如来之本性。但他不
    谈第一因,即第一个缘从哪儿来。第一个因缘不可说,他既非实有,也非虚空、虚无,无法用人
    世间任何语言、文字、名相定义,一说即错。佛只说一切都是缘生缘灭,本质都无自性,故万物
    本质都虚妄不实。佛的“缘起说”是最接近现代科学宇宙起源的论断,但佛通过他的“缘起性空”理
    论,却能让弟子不执着时空,以及时空中的一切,从而放下所求心、所得心,获得平等心。此
    时,人才会在时空中,让身心从欲望的控制中、生死的轮转中,彻底解脱,获得大自在。
    인간 세상에서 부처님께서는 환상 경계에 집착하는 중생에게 ‘연기성공(緣起性空)’의 반
    야 지혜를 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심신 밖의 세상에 대해 호기심으로
    가득하여 늘 끊임없이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최초의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류 역사상 빅뱅 이론, 진화론,
  • 179 –
    창조론 등 무수히 많은 답이 있었지만, 누군가는 또 그럼 신은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묻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연기성공’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는 여래가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여래와 중생은 평등하며 중생 모두에게
    는 여래의 본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제일인(第一因) 즉 첫 번째 인
    연이 어디에서 왔는가는 논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 인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허공이나 허무도
    아니기에 인간 세상의 그 어떤 언어·문자·명상(名相)으로도 정의를 내릴 수 없습니다. 따라
    서 말하는 순간 틀리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멸하는데 그 본질은
    모두 자성이 없으므로 만물의 본질은 모두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의 ‘연기설’은 현대 과학의 우주 기원론에 가장 근접하는 논단이지만, 부처님은 이 ‘연기성
    공’설을 통해 제자들이 시공간과 시공간 속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 구하고자 하
    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 평등심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인간은
    비로소 시공간 속에서 욕망이 심신에 대한 통제와 생사의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하여 큰 자
    유자재를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在此,想起曾经看到过的一个量子力学的实验视频。在试验中,实验的结果竟与实验者的注
    视有关。有人在旁观看与无人观看的情况下,实验结果不同,也许不同心识的众生看,结果也会
    不同。所以,在佛教中,三界六道每一道的形成与每一道众生的心识有关,与每个人的自我有
    关,佛法中有“三界唯心,万法唯识”的说法。所以改变“自我”即可改变你的全部世界,如果所有人
    都改变“自我”,即可改变大家共同居住、认知的世界,而放下“自我”即可成就“无我”的如来境界,
    与天地同辉,与万法同源,不生不灭,生命进入永恒与圆满。
    이에, 일찍이 보았던 양자역학 실험 영상이 생각납니다. 실험 결과는 뜻밖에도 실험자의
    응시와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볼 때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의 실험 결과는 서로 달랐는데, 어쩌면 서로 다른 마음(심식)을 가진 중생이 이를 지켜보는
    상황이었다면 결과 또한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삼계육도의 각 궤도의 형성은 상응한 궤도에 머무는 중생의 마음과 관련이 있
    으며, 모든 사람의 자아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법에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万法唯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바꾸면 그대의 세계 전부를
    바꿀 수 있고, 만약 모든 사람이 ‘자아’를 바꾼다면 곧 우리가 함께 거주하고 인지하는 세상
    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를 내려놓으면 곧 ‘무아’의 여래 경계를 이룰 수 있어 천
    지와 더불어 빛나고 만법과 더불어 그 근원을 같이하며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영원하고 원
    만한 생명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有朋友又问,佛在涅槃时曾说“以戒为师”,是不是只要持戒精严就可成佛了?不需要再学习
    般若智慧?首先,这是一句有争议的话,因为有人寻找过,却无法从任一本佛经中准确找到佛说
    过这句话。但假如佛说过,我认为也真不会是这个意思,说众生只要依止“戒”就可成佛。如果老
    师要涅槃,对人间弟子而言,将没有老师不断提醒、劝导,检查弟子们的心行了,众生在回归途
    中,有“戒律”就不会随觉受留恋在七情六欲的幻境中无法自拔、退失道心或因此烦恼、障碍不
    断。有戒律,修证生活就可以外息诸缘,避免很多善业、恶业的成熟和打扰。行者在修证中,不
    易出偏,不易散乱。戒律是为佛弟子们护航的,也是破我执的一个工具,但弟子们必须在领悟佛
  • 180 –
    的般若智慧后,以戒约束自己(就像老师在旁边看着自己一样,不放逸),精进行持,才能没有
    老师在旁监督、提醒也能顺利成就。所以,佛为大乘菩萨制定的修证方法有六波罗蜜多,即:布
    施、持戒、忍辱、精进、禅定、般若,并非只有戒律。
    어떤 도반이 또 질문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계율만 엄격히 지키
    면 곧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반야 지혜를 따로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선, 상술한 언급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여기에 대해서 찾아본 적이 있지
    만, 그 어떤 불경에서도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합
    니다. 개인적인 견해이기는 하지만, 설사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가정하더라도, 중
    생이 오직 ‘계율’에만 의지하면 곧 성불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은 정말로 아닐 것입니다. 만약 스승님이 열반에 들면, 인간 세상의 제자들 처지에서는 그 마음과 행동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권유하고, 점검해주시는 스승님이 부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회귀
    하는 길에 ‘계율’이 있어 이를 지켜준다면 그들이 자신의 느낌에 이끌려 칠정육욕의 환상
    경계에 미련을 두어 발목이 잡히거나 도심(道心)을 잃거나 혹은 그로 인해 번뇌 장애가 끊
    이지 않게 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율이 있으면 수행과 생활에서 외적인 여러
    인연을 제지하거나 많은 선업과 악업이 성숙하여 방해하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며, 또한 수행
    자가 수행 중에 쉽게 빗나가거나 산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계율은 불제자들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 역시 아집을 파하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반드시 먼저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깨달은 후에, 계율로 자신을 단속하며
    (마치 스승이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처럼 방일하지 않음), 지계(持戒)에 정진해야만 스
    승이 곁에서 감독하고 일깨워주지 않아도 비로소 순조롭게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가 있습니
    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대승 보살을 위해 제정하신 수행 방법은 육바라밀다 즉 보시·지계· 인욕·정진·선정·반야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 것이지 오직 계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大乘菩萨修证的“六波罗蜜多”在排列上是有次序的,但在末法时期,因佛陀逝去,众生很难
    找到榜样和明师,而人性的“自我”却增强,出离心、利他之心很难短时间真正生起来,而要闻听
    佛法,只能从佛的经典中学习、闻听,所以大部分大乘弟子的修学次序基本变成了:般若、禅
    定、精进、忍辱、持戒、布施,但也因为没有前五度的修证,马上开始学习般若智慧,使佛的般
    若性空理论变成了意识层面的思辨与理解,甚至变成了人世界的哲学和辩证法,失去佛一切名言
    皆是假立,只为度众生出生死轮回苦海的说法本怀。
    대승 보살이 수행 증득하는 ‘육바라밀다’의 배열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
    에 드신 후 말법 시대 중생들은 본보기가 될 훌륭한 스승을 찾기 어려운 데다가 인성의 ‘자
    아’는 오히려 더 강해져 출리심, 이타심이 짧은 시간에 진정으로 일으키기가 어렵습니다. 불
    법을 들으려고 해도 다만 부처님의 경전에서 배우고 경청해야만 하기에 현재 대부분 대승
    제자들의 수학(修學) 순서는 기본적으로 반야·선정·정진·인욕·지계·보시로 재정렬된 실정입
    니다. 그러나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의 수행 없이 직접 반야 지혜를 배우기 시작할 경우, 부처
    의 반야성공 이론이 의식적인 측면으로 너무 치우쳐 사변과 이해로 변질하거나, 심지어 인
    간 세상의 철학과 변증법으로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모든 명칭과 언어는 모두 가
  • 181 –
    설에 지나지 않게 되어 중생을 생사윤회의 고해에서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부처님의 설법 본
    뜻을 잃게 합니다.
    同时,有历史记载以来,佛法在人世间已传播了两千六百多年,从轮回的角度,在末法时代
    修证佛法的人,很多人也许经历过正法或像法时期。对未圆满再来的佛弟子,基本上是在复习功
    课,所以很多人的修证都是跳跃式的,大乘弟子有时同时涉猎兼修大、小、密三乘的法门,这
    样,般若正见的指导似乎比其他时期尤为重要。但所有的大乘弟子一定要懂得,即使你有出离心
    和坚固的成道之心,只凭宿世的根器和禅定力来领悟如来智慧,虽可能凭一时的“忘我”有开悟之
    境,或者在学习佛法时忽如醍醐灌顶、法喜充满,进入一些不可思议的境界中,但不注重累积功
    德资粮,不重视戒律,仍会经历很多磨难,走很多弯路,迟迟无法破尽执着、分别,见到圆满解
    脱的曙光。如果未具备出离心,还在贪婪时空幻境中一切的众生,用着相的心来了悟佛的般若性
    空之理,听到佛说一切虚妄,会更无所顾忌,随心所欲满足自己欲望,也就永远无法领略到如来
    慈悲与智慧合一的圆满自在境界。即使能即有即空,都无法破尽我执成佛。
    이와 더불어 역사기록 이래 불법이 인간 세상에서 전파된 지 이미 2600년이 지났습니다. 윤회의 견지에서 보면, 말법 시대에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 중 많은 이들은 이미 정법 시대
    와 상법 시대를 거쳤을지도 모릅니다. 원만에 이르지 못하여 다시 윤회한 불제자들은 기본
    적으로 원래 배웠던 것을 복습하는 셈이라, 많은 사람의 수행과 증득은 모두 도약식입니다. 대승 제자들이 때로는 대·소·밀 삼승의 법문을 동시에 섭렵하고 수행하기도 하는데 이런 상
    황에서 반야 정견의 가르침이 다른 그 어느 시대에서보다 특히 더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대승 제자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설령 출리심과 도를 이루고자 하는 굳
    건한 마음이 있다고 해도, 다만 전생의 근기와 선정의 힘에만 의지해서 여래의 지혜를 깨닫
    고자 하면, 비록 일시적인 ‘망아’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경계가 있거나 혹은 불법을 배울 때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고 법희로 충만하며 불가사의한 경계에 진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
    나 공덕과 자량(資粮)을 쌓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고 계율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많
    은 고난을 겪게 되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며 결국은 집착과 분별을 다 깨뜨릴 수 없어
    원만한 해탈의 서광을 보는 것이 느려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출리심을 갖추지 못했고 아직도 시공간의 환상 경계 중 모든 것을 탐하는 중생이라
    면, 상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반야성공 이치를 나름 터득하여 일체가 허망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는 더욱 거리낌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
    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여래의 자비와 지혜가 합일된 원만하고 자유자재한 경계를
    영원히 깨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가 즉유즉공(即有即空)의 경계를 안다고 할지라
    도 자신의 아집을 다 깨뜨리고 성불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还有一位同修问,学了《金刚经》,知道佛法是佛对治众生执着之病的良药,随机施教,并
    无定法可说,众生病好后,佛法也应舍去,那为什么又为菩萨道重点设立了六度呢?虽然,佛为
    弟子们说法,随机施教如因病与药,并无定法,但弟子们同在人道修学,大部分人有相同的习
    气、欲望和执着,许多弟子修学会遇到共通的障碍和问题,这样就可以“吃同一类药”了。故佛为
    大乘弟子设立的六度,是弟子们普遍修证佛法都可能要面临的问题。所以,佛要归纳、提醒弟子
    们,在这些问题的解决、突破中,应依止佛的正知见才能破掉我执。而且佛在设立法门时,还要
    慈悲考虑人道的弟子们能否普遍做到,如果太难,大家基本都做不到,那也无法成为共同的、普
  • 182 –
    遍能运用的法门了。故佛为人道大乘弟子设立的六度,是大家都应该能做并可以依此成就的法
    门,大乘弟子们应该珍惜。
    또 한 도반은 나에게 금강경을 배우고 나서 불법은 중생의 집착이라는 병을 치료하는
    양약이고,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기에 정해진 법이 없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불법 또한 버려야 함을 알았는데, 그럼 부처님께서 왜 또 보살도를 위해 굳이 육바라밀을
    중점적으로 설정하셨는지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실 때, 병에 따라 약을 주듯 근기에 따라서 가르침을 펴
    시기에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다 같이 인간 세상에서 수행하고 있으며 대
    부분 비슷한 습기와 욕망, 집착이 있습니다. 허다한 제자들이 수행 중에 공통된 장애와 문
    제에 부딪히게 되므로, ‘같은 종류의 약’을 복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대승 제
    자들을 위해 세우신 육바라밀은 제자들이 보편적으로 불법을 수행할 때 직면하게 되는 문제
    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약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귀납한 후 제자들에게 이런 문제의 해결과 돌파에 있어서 부처
    님의 정지견에 의지해야만 아집을 깨뜨릴 수 있다고 일깨워주셨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법
    문을 세우실 때, 인간 세상의 제자들이 보편적으로 행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셨는데 만약 너
    무 어려워 대부분 이들이 이를 행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공통으로, 보편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법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인간 세상의 대승 제자들을 위
    해 세우신 육바라밀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법문이기에 대승
    제자들은 마땅히 이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下面我们简单聊一下六度,在子归家网站《学习佛法》部分中,有修证“六度”的详细解说,
    有兴趣的同修可打开流览 “ziguijia.com”。“六度”又称“六波罗蜜多”。“波罗蜜多”为梵文音译,即
    “到彼岸”之意,意思是从生死岸到涅槃岸,中文意译为“度”,即度过、到达的意思。故“六度”是指
    引大乘菩萨走向解脱的六种方法。
    아래에 육바라밀에 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자귀가(子歸家) 웹사이트 《불법
    공부》섹션에는 ‘육바라밀’의 수행에 관한 상세한 해설이 있으니 관심 있는 도반은 홈페이
    지(ziguijia.com)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도(六度)’는 ‘육바라밀다’라고도 합니다.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서 ‘저
    언덕에 이르다’는 뜻으로 생사의 언덕에서 열반의 언덕에 다다름을 의미합니다. 한자 의역
    으로는 건널 ‘도(度)’를 씁니다. 그러므로 ‘육도’는 대승 보살이 해탈로 향하는 여섯 가지 방
    법을 가리킵니다.
    第一种方法:布施。
    菩萨要成就佛果,首先应舍弃“自我”及“三界六道一切”,生起“出离心”,这个“舍”与“出离心” 即是菩萨的大布施。在现代人的日常生活中,大乘修行者的布施也并非是极端的要舍自己的身
    体、性命,要舍离红尘一切等。一般行者只是要用自己拥有的一切无私地给需要帮助的众生,即
    使没有财物等可布施的东西,也可以布施自己的劳动、才能,甚至一个微笑,一句随喜的赞叹
    等,这是每位行者容易做到的事情。
    布施是用来对治修行人的“贪婪”和“得失心”的。菩萨刚开始发心要出三界六道,要出轮回,但
  • 183 –
    人世间总有他不舍的东西,布施自己的任何喜爱之物,都会令行者患得患失,反复纠结挣扎,反
    复思量,即使是身体力行的付出或举手之劳,都要问凭什么这么做。此时,虽有佛一切虚妄的正
    知见,也有出轮回的道心,也想三轮体空布施,但所有舍离、布施的一切仍会强烈牵动行者的“自
    我”,只有随着修证的坚持,付出与舍离才会对行者的影响越来越小,一直到为成就佛果回归如来
    之境,舍离、布施自我的一切都不会恐惧不安,也没有得失的挣扎,不会求回报、理解、感恩
    等,此时行者功德圆满,可以从“布施度”证入佛的空性,三界六道的一切相对于行者毕竟空,证
    量境界不可思议。
    첫 번째 방법은 보시입니다. 보살이 성불하려면 우선 ‘자아’ 및 ‘삼계육도의 일체’를 포기하고 ‘출리심’을 내야 하는데
    이 ‘버림’과 ‘출리심’이 바로 보살의 대 보시입니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대승 수행자의
    보시가 반드시 자신의 몸과 목숨을 포기하고 인간 속세의 일체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 극단
    적인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는 자신이 가진 일체를 사심 없이 도움이 필요한 중
    생에게 내어주는 것으로서 설령 재물 같은 보시할 물건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노동과 재
    능 더 나아가 미소, 한마디의 칭찬 등으로도 보시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어느 수행자나
    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보시는 수행자의 ‘탐욕’과 ‘득실심(得失心)’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보살이 처음 삼계
    육도와 윤회에서 벗어나겠다고 발심하였지만, 인간 세상에는 늘 그가 연연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보시할 때 수행자는 이해득실에 민감하여 반복적으로 갈등
    하고 고민하며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심지어 몸으로 하는 봉사나 작은 도움조차도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비록 일체가 허망하다는 부처님의 정지견도 있고 윤회
    를 벗어나려는 도심(道心)도 있으며, 삼륜체공으로 보시하고 싶지만 보시하는 모든 것이 여
    전히 수행자의 ‘자아’를 강하게 건드릴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수행과 증득이 계속되어야만 베풂과 버림이 수행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적어져, 마침내 성불하여 여래의 경계에까지 이르게 되어야 자신의 일체를 버리고 보시해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고 득실의 갈등도 없으며, 보답이나 이해, 감사 등도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수행자의 공덕이 원만해져 ‘보시바라밀’로부터 부처님의 공성에 증입할 수 있
    으며 삼계육도의 일체 상이 수행자에게 있어서 필경 공(空)하며 깨달음의 경계는 불가사의
    할 것입니다.
    第二种方法:持戒。
    行者虽知道佛说的身心内外一切虚妄,不应着相,但欲望、习气未尽,世界的一切对行者的
    诱惑仍在。面对超过行者自制力、承受力的诱惑时,佛的见地就抛在脑后了,行者即会迷恋三界
    六道的一切而退失道心,生不起出离心了。如果行者受戒,此时行者可能就会生起破戒的懊恼,
    会惭愧、忏悔、改过,或在被诱惑的当下即回忆起佛制订的戒律,用不愿破戒来抵抗诱惑。尤其
    是佛陀在世时,弟子受戒时有佛陀与证果位的大阿罗汉们参与授戒仪式,并作为日后行者持戒的
    督查。这样行者等于在佛陀和戒律精严的证果位的同修面前承诺、接受戒条中规定的一切,那种
    力量和加持足以让行者日后抵抗住红尘的种种诱惑,有人宁死也不破戒条。
    두 번째 방법은 지계입니다. 수행자가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심신 안팎의 일체가 허망하므로 상에 집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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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욕망과 습기가 아직 남아있어 세상 모든 것이 수행자에게는 여전히
    유혹의 대상입니다. 자신의 자제력과 인내력을 초과하는 유혹에 직면하였을 때라면 수행자
    는 부처님의 견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곧 삼계육도의 모든 것에 미혹되어, 도심(道心)을
    잃고 출리심을 내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수행자가 계를 받았다면 이때 파계에 대한 뉘우침
    속에서 창피해하고, 참회하며, 반성하거나 혹은 유혹당하는 순간에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
    이 생각나 파계를 원하지 않은 자세가 됨으로써 유혹에 대항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부처님과 과위를 증득한 대 아라한들이 제자들의 수계
    의식에 참여하여 훗날 수행자의 지계(持戒)를 감독했습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수행자가
    부처님과 계율을 엄정히 지켜 과위를 증득한 도반들 앞에서 계율이 정한 일체를 승낙하고
    받아들였기에, 그 힘과 가피력은 수행자가 나중에 속세의 온갖 유혹을 저항하기에 충분하므
    로 어떤 이는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계율만은 어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第三种方法:忍辱。
    行者发心出离轮回成就佛果时,刚开始似乎是与自己的习气、欲望是对着干的。此时虽有佛
    的正知见,但身心有觉受,比如布施、持戒时,还是有克服自己的贪婪、不舍、身心随心所欲的
    放纵等。此时,在佛正知见的指导下,克制自己的觉受叫“忍辱波罗蜜多”。再比如,行者要出离
    轮回,但仍是生活在世间的种种关系之中的。你要舍离,与你有缘的众生不答应,因为你所做的
    一切可能会触及他们的利益或欲望。如父母、妻子、丈夫、孩子等,他们需要你将亲情放在第一
    位,满足他们的认知、观念与欲好,如果你因为修行佛法暂时达不到他们所求,他们便会愤怒、
    伤心,觉得受到了伤害,认为你不孝,不顾念亲情、家庭,自私自利等。还有朋友,要你陪他们
    去赌去嫖或吃喝玩乐,但你如果又要静坐、又要吃素、又要清心寡欲,有的朋友就觉得你不够义
    气了,不能与大家同乐。甚至说你故作清高、装模作样、虚伪,因不理解,什么诽谤、中伤你的
    言论都可能说出来。此时,行者要修忍辱,以佛的知见继续修证,保持慈悲就好了。
    세 번째 방법은 인욕입니다. 수행자가 발심하여 윤회에서 벗어나 성불하려고 할 때 처음에는 자신의 습기, 욕망과 정
    면으로 대항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 비록 부처님의 정지견이 있긴 하지만 심신은 여전히 감
    수가 있어, 예를 들면 보시나 지계를 행할 때 여전히 자신의 탐욕과 아쉬움,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했던 방종 등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때, 부처님 정지견의 안내하에 자신의 감수
    를 극복하는 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수행자가 윤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여전히 세간의 각종 관계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대가 버리고 떠나려 하나 그대
    와 인연이 있는 중생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들의 이익과 욕망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
    를 들면 부모·아내·남편·자녀 등은 그대가 혈육의 정을 첫 자리에 놓고 그들의 인식과 관념
    그리고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바랍니다. 만약 그대가 불법 수행으로 인해 그들이 바라는 바
    에 잠시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분노하고, 상처받으며,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그대를
    불효자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대가 그들과 함께 도박하거나 유흥을 즐기거나 혹은 먹고 마시고 놀기
    를 바라는데 그대는 좌선하고 채식하며 마음을 맑게 하고 욕구를 줄인다고 하면, 어떤 친구
    들은 당신이 의리가 없다고 하며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심지어 청고한 척한
    다거나 위선적이라며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방과 중상모략마저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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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수행자는 인욕을 닦아 부처님의 지견으로 계속 수행하면서 자비심을 유지해야 합니
    다.
    第四种方法:精进。
    大乘行者心中在任何时候都不失成道之心,将成道放在第一位,按佛的知见念念觉照,尽快
    去除欲望习气、自我的执着带给自己的无明,要将心安住在佛的知见道上,坚持不断地修行,这
    叫真精进。因为人类寿命有限,而且有旦夕祸福,每位佛弟子都不能预知自己在人道的修学时间
    能有多久,而且需要多久才能破尽执着、分别,进入无我的涅槃境界。而在娑婆世界的欲界,人
    道是修行佛法最好的地方,最易生起出离心,还能有种种条件来修行。如轮回在天道,太快乐不
    想出离;地狱、饿鬼道又太苦,无力出离;畜生道又太愚痴,听不懂佛法,也没条件修证。所以
    在人道,能闻听到佛法是很大的福报,故需精进。一失人身,可能很久也不会修行了。
    네 번째 방법은 정진입니다. 대승 수행자는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도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성
    불을 첫 자리에 놓고 부처님의 견지에 따라 생각마다 이를 자각하며 욕망과 습기 그리고 자
    아의 집착이 가져오는 무명을 될수록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마음을 부처님의 지견도에 안
    주시키고 꾸준히 수행을 견지하는 것이 진정한 정진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는 데
    다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모든 불제자는 자신이 인간 세상에서 수행할 수 있
    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또한 집착과 분별을 모두 깨고 무아의 열반 경계에 진입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바세계의 욕계에서 인간 세상은 불법을 수행하기 가장 좋은 곳입니다. 출리심을
    일으키기가 가장 쉽고 수행할 여건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도에 윤회하면 너
    무 즐거워서 거기를 벗어날 생각이 없고, 지옥과 아귀도는 너무 괴로운 곳이라 거기에서 벗
    어날 힘이 없으며, 축생도는 또 너무 어리석어서 불법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수행할 조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 불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복이기에 마땅히
    정진해야 합니다. 일단 사람의 몸을 잃게 되면 오랫동안 다시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
    다.
    第五种方法:禅定。
    行者在了知佛的见地后,在整个菩萨道的修证中,佛的正知见因为只是来自头脑的理解,还
    未证得诸相虚妄,从三界六道解脱,所以此世界的一切时时对行者充满诱惑,身心世界布满陷
    阱,行者常常困在一些自我的觉受或知见中,无法解脱。这样行者需配合禅定力,有禅定,行者
    对抗诱惑与觉受的承受力大大增强,还可获得神通力,而且“定”还能开启行者本有的智慧,使行
    者更容易看清万法实相,对般若智慧的领悟更透彻、圆满。
    다섯 번째 방법은 선정입니다. 수행자가 부처님의 견지를 알았다고 해도 보살도의 전체 수행과정에서 부처님의 정지견을
    다만 머리로만 이해할 뿐,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증득하지 못하여 삼계육도에서 해탈
    하지 못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시각각 수행자에게 큰 유혹으로 다가오고, 심신 세
    계는 함정으로 가득 차서 늘 자아의 느낌이나 지견에 갇혀 해탈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선정의 힘을 병행해야 합니다. 선정이 받쳐준다면 유혹과 느낌을 감당해내는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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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신통력도 얻을 수 있으며 아울러 ‘선정’을 통해 본유의 지혜까지
    도 열 수가 있어 수행자는 더욱 쉽게 만법의 실상을 볼 수 있으며 반야 지혜를 더욱 투철하
    고 원만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第六种方法:般若。
    即佛果位的见地,也包括佛为众生到达佛境界设立的种种善巧方便的开示与法门。《金刚
    经》与《心经》都是在阐述般若智慧的,所有的佛弟子需依止佛的果位见地来指导自己日常的修
    证,才能尽快回到如来的品质、果位上去,才能避免“修行”变成轮回的善业,而不是趋向解脱。
    여섯 번째 방법은 반야입니다. 즉 불과(佛果)의 견지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중생들이 부처 경계에 다다르는데 필요한 부
    처님의 여러 가지 선교 방편의 가르침과 법문이 포함됩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모두
    반야 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제자는 마땅히 부처의 과위 견지에 의지하여 자신
    의 일상적인 수행을 지도해야만 ‘수행’이 윤회의 선업(善業) 수준에 국한되는 것을 피해 최
    대한 이른 시일 내에 여래의 품성과 과위로 돌아갈 수 있고 해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
    다.
    还有同修又问:修证佛法中,受过高等教育的人是否对般若智慧的理解和掌握上更快?是
    的,受过高等教育的人或科学家、哲学家等,在理解佛的般若智慧上更快。尤其进入网络时代,
    信息量大、传播快,使现代人的观想力比佛法传播的任何时期都强,而且能从更多角度闻思佛
    理。但这些都不能代表你成佛更快,因为你的理解还是意识层面的,而般若智慧却是要你听懂后
    放下自我的执着的。此时,受过这世界高等教育的人不一定占有优势,因为你可能有更多放不下
    的东西,比如面子、尊严、傲慢、偏见、优越感、嫉妒等。反而平时在人道做人正直、善良、厚
    道,没太多“自以为是”的知见、愿意无私帮助别人的人,不管他是博士、还是小学生,一旦领悟
    佛在说什么,会更快放开对自我的执着而成道。
    또 어느 한 도반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불법 수행 중 반야 지혜를 이해하고 장악하
    는 데 있어서 더 빠르지 않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과학자, 철학가 등은 부처의 반야 지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특
    히 인터넷 시대에 그 전달되는 정보량이 많고, 전파 속도가 빨라 현대인들의 관상력(觀想
    力)은 불법 전파에 있어서 그 어느 시기보다 강할 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불법을 듣고
    사고할 수 있는 여건이 새롭게 조성된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건으로 말미암아 더 빨리
    성불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이해가 여전히 의식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진정한 반야 지혜는 알아들은 후 자아의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
    다. 이때, 이 세상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체면·존엄·오만·편견·우월감·질투 등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평소에 인간 세상에서 정직하고 착하고 후덕하며,
    ‘내가 옳다’는 지견이 별로 없으며, 기꺼이 사심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면 그가 박
    사든, 초등학생이든 부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일단 깨달았다면 바로 자아에 대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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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을 내려놓기에 더 빨리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故在佛的弟子中,有乞丐、妓女、生活在社会最底层没有受过任何教育的人,也有像舍利
    弗、目犍连这些学术巨匠或皇亲国戚等受过良好教育的人,而在成道面前,他们几乎是平等的。
    但不要由此修行者就否定人世间的聪明才智、各种才艺技能的掌握学习,觉得要成佛就不需要学
    习世间其他学问了,不用上学了,尤其是大乘菩萨,法门无量誓愿学,多掌握人世间的学问,在
    弘法利生中如虎添翼,会有更多善巧方便导引众生。但不管是谁,从未经历过布施、忍辱、持
    戒、精进、禅定前五度的修证,直接想凭人世界的聪明才智完全领悟并契入佛的智慧,很难圆满
    达成。即使是再来的大菩萨,在末法时期也要通过前五度的修证,来突破自我带来的层层雾霾,
    才能证到自性如来。否则,即使讲法能说得天花乱坠,口吐金莲,也还是在讲佛证得的境界,不
    能算自己证得的,当然也不会有如来果位的证量和品质。
    그래서 부처님 제자 중에는 거지나 기생, 사회 최하층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은 적 없는
    사람도 있었고, 사리불이나 목건련 같은 학술 거장이나 왕족 등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
    도 있었지만, 도를 이루는 일 앞에서는 그들 모두가 거의 다 평등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고 하여 수행자들이 인간 세상의 총명함과 재능, 지혜와 여러 가지 기예와 기능의 습득을
    부정하면서 성불에는 세간의 다른 학문이 필요 없으므로 배울 필요가 없다거나 학교에 다니
    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히 법문은 한량없으나 맹세코 배우겠다고 서원한
    대승 보살은 세간의 학문을 많이 익힐수록 불법을 널리 알리고 중생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되어 더 많은 선교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든지 보시·인욕·지계·정진·선정 이 앞의 5가지 수행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
    간 세상의 총명과 재능만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완전히 깨닫고 여기에 들어가려 한다면 이를
    원만하게 성취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령 다시 온 대보살이라고 할지라도 말법 시대에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다의 수행을 거쳐 자아가 초래한 겹겹의 안개를 뚫어야만 비로소 자성여래
    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설법을 유창하게 잘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처
    님이 증득하신 경계를 옮기는 것일 뿐, 자신이 증득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당연히 여래
    과위의 증량과 성품도 없을 것입니다.
    佛说,我们的自性即“生命源头”,本不可说,因不管怎样的定义,不同道众生都会根据自己
    的理解,形成不同的境界、相状。而众生的源头是一样的,所有众生都终将回归这个源头,因为
    那是生命内在最核心的渴求,是生命孜孜不倦寻找的最满足的存在状态。而在如来的境界中,万
    法本来就未曾离开过本位,无所从来,也无所去,故称如来。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자성 즉 ‘생명의 근원’은 본래 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서로 다른 궤도의 중생은 각자의 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경계와 상(相)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근원은 모두 같기에 일체중생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그
    근원으로 회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가장 핵심적인 내적 갈구이고, 생명이
    지칠 줄 모르고 찾는 가장 원만한 존재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래의 경계에서 보면
    만법은 본래부터 원래 자리를 떠난 적이 없어 오는 곳도, 가는 곳도 없기에 이를 여래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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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想起曾经有一段时间,我在困惑中思考过生命的终极意义到底是什么?人为什么要活着?思
    考后,我得出的结论是生命是没有意义的,它所有的意义必须由你来赋予,你怎样走过你的人
    生,你的生命就有了怎样的内涵和意义。
    한동안 저는 곤혹 속에서 생명의 궁극적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
    다. 사람은 왜 사는가? 사색의 과정을 거쳐 제가 내린 결론은, 생명 자체에는 의미가 없으
    며 생명의 모든 의미는 반드시 우리 스스로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은 곧 그에 걸맞은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
    다.
    后来学习佛法,听到佛说,在人中并无一个固定不变的你来享受人生,也无一个固定不变的
    世界万法让你来享受,你的身心以及身心外的世界一切,都是随因果示现的缘聚缘散,其中并无
    一个真正的主宰者。明白这一点,你即可从缘生缘灭的诸幻境中觉醒。当一个人从轮回不断的时
    空幻境中醒来,身心彻底不再受这些幻境影响时,被称为佛,被称为真正到达了生命的终点,也
    是回到了生命的源头。众生的生命到此真正停止了。在佛法中,叫进入了不生不灭的涅槃境界,
    叫到达了解脱生死的彼岸。
    그 후 불법을 배우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간들 가운데 인생을 누리
    는 고정불변의 ‘사람’도 없고, 그가 누릴 고정불변의 세계 만법도 없으며, 그의 몸과 마음
    그리고 몸과 마음 밖의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인과에 따라 인연의 모임과 흩어짐일 뿐, 그
    속에는 진정한 주재자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알고 나면 우리는 곧 인연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모든 환상 경계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윤회가 끊이지 않는 시공간의 환상에서 깨어나서, 몸
    과 마음이 더는 이런 환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게 될 때, 이를 이름하여 부처라고 부를
    수 있고 진정으로 생명의 종착역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갔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의 생명은 여기에서 진정으로 멈춥니다. 불법에서는 이를 불생불
    멸의 열반 경계에 들어섰다고 하고, 생사를 해탈한 저 언덕에 이르렀다고도 합니다.
    听懂佛法后,我知道了,在人世界我曾无法找到生命的意义,是因为我把刹那不停、生灭变
    异,而且有局限性的眼、耳、鼻、舌、身、意当成了自我,又把依止这六根建立起来的世界万法
    (即佛法中说的色、声、香、味、触、法,六尘)当成了真实来执着,这样根尘相对,形成了自
    我的世界。而这个世界本质上就建立在虚妄之上,是个幻境,我却一直活在这个幻境中,希望在
    不断生灭、变异的幻境中寻找到完美、永恒的生命可依止的终极意义,这是永远不可能的。
    불법을 알아들은 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제가 생명의 의미를 따로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찰나에도 멈추지 않고 생멸 변이하고 또한 제한성이 있는 눈·귀·코·혀·몸· 뜻을 자아로, 또한 이 육근에 의지하여 세워진 세계 만법(즉 불법에서 말하는 색·성·향·미· 촉·법인 육진)을 실재한다고 집착하였으며, 이런 근진(根塵)이 서로 교착하면서 자아의 세
    계를 형성하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 본질적으로 허망함 위에 세
    워진 환상 경계입니다. 저는 줄곧 이런 환영 속에서 살면서 늘 끊임없이 생멸 변이하는 이
    환영 속에서 완벽하고 영원한 생명이 의지할 수 있는 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 했으니, 이는
  • 189 –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明白这一点后,虽然习气、欲望未尽,觉受仍在,但这些已像漂浮在虚空的浮云,不能影响
    虚空的空与宁静,像是小小微尘,无法遮挡太阳的光明普照,而且一切假相和幻境终将随修证的
    圆满而消失。佛法的智慧使我终于明白,每一位众生生命的终极意义是回归并安住在生命的源
    头,做众生本来的样子——如来。只有到此,每位众生才为自己不断生灭变异、轮转的生命划上
    了圆满的句号,才算为自己的生命赋予了最高最终极的意义。
    이 점을 명확히 알고 난 후, 비록 습기와 욕망이 남아있어 그 느낌이 여전하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허공에 있는 뜬구름과 같아서, 허공의 텅 빔과 고요함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
    다. 이는 마치 아주 미세한 티끌이 두루 비추는 햇빛을 가릴 수 없는 것과 같은 도리입니
    다. 여기에 덧붙여 말해본다면, 일체 가상과 환상 경계는 결국 수행 증득이 원만한 경계에
    이르게 되면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불법의 지혜는 저로 하여금 모든 중생 생명의 궁극적 의미는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그
    곳에 안주하여 중생 본래의 모습인 여래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오직 여기에
    이르러야만 모든 중생은 생멸하고 변이하며 윤회하는 자신의 생명에 원만한 마침표를 찍는
    것이며, 비로소 자신의 생명에 가장 높고,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됩니다.
    最后,感恩释迦牟尼佛,感恩鸠摩罗什法师,感恩我心中的上师与龙天护法,感恩父母与众
    生。愿把自己修证、讲法的所有功德回向给法界一切有情。愿众生平安、健康、幸福、快乐!愿
    国泰民安,佛法久住!
    마감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구마라집법사님께 감사드리며, 제 마음속의
    스승님과 용천호법(龍天護法)께 감사드리며, 부모님과 중생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의 수행
    증득과 설법의 모든 공덕을 법계의 모든 유정에게 회향합니다. 중생들이 평안하고 건강하며
    행복하고 즐겁기를 기원합니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며, 불법이 오래 머물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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