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여래가 설
한 바의 법은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부르는 정해
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수 있는 정해진 법 또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비법도 아니기 때문입
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현은 다 무위의 법으로써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반문하셨는데 이번 설법은 수보리의 질문에서 비롯되
었습니다. 즉 중생이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를 구하고자 발심했다면 어떻게 수행해야만 마음
을 안주시키고 번뇌와 장애가 없이 신속하게 성취할 수 있을지를 물었지요. 부처님께서는
몇 가지 요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상에 집착하지 않고 서원을 행하고, 상에 머무
르지 않고 보시하고 떠나며, 몸의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자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
든 것은 정해진 상이 없으며, 불법 또한 정해진 법이 없기에 부처의 상과 부처의 설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여기까지 듣고 나면 머릿속에 불과를 획득하는 올바른 경로가 그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얻을 수 있는 과위가 있다’, ‘얻을 수 있는 법이 있다’는 마음이 더해져,
즉시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공성의 이치를 당장 돈오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갑자기 수보리에게,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대들이 마음속으로 불과를 성취하려고 하는데, 여래에게 진짜 얻을 수 있는 불과가 있
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방금 혹은 평소에 진짜로 정해진 법이 있어 이를 설한 것인가?”
수보리는 큰 제자 중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는 만큼,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의도를 잘 알아차리고는 즉시 말했습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한 기반에서 말씀드리자면, 무상정등정각의 불과라 부를만한 실
체가 없으며, 불법이라 불리는 정해진 법이 있어 여래께서 매번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이치와 법문은 모두 사람들의 집착에 대응하여 펴신 방편일 뿐입
니다. 이는 의사가 환자의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에는 정
해진 법이 없으며, 중생 또한 그 어느 법이 불법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최고의 진리
는 본래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중생이 더 이상 상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집착을 내려놓
으면 근원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여래의 모든 말씀은 다만 중생의 회귀를 인도하는 이정표
일 뿐이므로 중생이 ‘획득할 수 있는 법이 있다’고 여겨서도 안 되고, 또한 불법을 부정하면
서 올바른 지견의 가르침이 없이 수행과 증득을 하지 않고서도 회귀할 수 있다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지점에서 수보리와 여러 제자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이 또한 지금 경전을
듣고 있는 우리 도반들에게도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지금 ‘내가 이제
몇 년 더 수행하면 법력이 가없는 불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박사학위를 따듯이 공부
를 통해 불법을 얻고 무상정등정각이라는 이론과 기술에 숙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얻을 불과가 존재하지 않고 여래께서 설할만한 정해진 법이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
생의 지금 모든 집착과 윤회,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조차 실은 다 꿈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침대에 누워서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그는 고양이나 강아지가 되기
도 하고, 만 리 길을 걸어가면서 많은 풍경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깨어나면 그는 여전히
원래의 그 사람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이나 그 어떤 무엇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성불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중생이 집착을 내려놓은 후, 마음에 더 이상 상을 취하지 않
으면 곧 꿈에서 깨어나 자연히 본래의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중생에서 부처로 변하거
나 혹은 범부에서 불과를 수련해내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래는 마지막에는 얻는 것이 없고, 또한 휘황찬란하고 지고무상한 불과가 있어
여러분이 획득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래 또한 설한 바가 없으므
로 중생도 불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래는 진정한 공(空)입니다. 진공에는 문자도
언어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기에 여래는 설한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이 분
별과 집착을 내려놓고 진공의 경계에 돌아가고 나면, 이전의 모든 집착과 분별 심지어 행한
보살도와 보시 그리고 발원 등은 다만 중생이 집착할 때 가졌던 그릇된 인지임을 깨닫게 됩
니다.
이는 마치 눈병에 걸린 사람이 허공에서 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부처님
께 “이 꽃은 어떻게 생겨났어요? 꽃이 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왜 빨간색이에요?
왜 다른 꽃과 달라요? 언제 시드나요?”라고 물었다고 합시다. 부처님은 의사처럼 그 사람과
꽃에 관해 이야기하신다면 그것은 단지 그가 부처님을 신뢰하고 부처님 곁에 안주하게 하여
그가 눈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눈병이 나아져 그 꽃이 보이지 않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그 꽃의 실재 여부를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짜라고 말할 때 그는 이치를 따져가며 논쟁하거나 혹은 머릿
속에서 반복적으로 사실 여부와 진가를 고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대신 이전에 의사나 혹
은 다른 사람과 토론했던 그 꽃에 관한 모든 문제를 온전히 속으로 이해하고 그저 웃어넘길
것입니다.
중생 또한 그 본성은 여래이고 진공입니다. 스스로 중생이라 여겨 부처님과 다르다고 분
별하는 것은 마치 병든 눈으로 꽃을 보는 것과 같아 진실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중생이 집
착을 내려놓고 상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병은 나아져 중생상과 불보살상이 모두 그 꽃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중생과 부처는 본래 차이가 없으며, 중생은 본래 부처입니다. 그때 모든 성불하겠다, 보살
도를 행하겠다 하는 개념과 실천은 모두 의사가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그 꽃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목적은 오직 하나, 사람들이 부처의 견지에 안주하여 모든 집착과 취사
선택이 쌓여 빚어진 중생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부처의 언
어와 문자에 집착한다면 결코 진공의 경계로 이를 수 없기에, 여래께서는 설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반문하실 때의 맥락은 이러합니다. 만약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부처님이 항상 진공과 무위의 경계에 안주하여 설법하시면서 중생이 미혹된 꿈
에서 깨어나시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중생이 미혹되었을 때는 부처와 불법
역시 중생의 꿈 일부분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에 수보리의 대답을
긍정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성현은 사실 같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중생에게 여러 가지 다른 법을
설하고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지만, 사실 본질에서 그들은 모두 똑같으며 모두 진공
경계에 입각하여 여러 가지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모든 성현은 다 무위의 법으로써 차이가 있다.”입니다. 여기에서
‘무위법’은 ‘유위법’을 상대해서 세운 개념이 아니라, 여래의 만법이 본래 그렇게 생멸이 없
는, 청정 무위한 진공 경계임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