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품 법회인유분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큰 비구 1,250인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식사 때가 되자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시고 사위대성
으로 들어가시어 걸식하셨다. 그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시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
오셨다. 식사를 마치시고 가사와 발우를 거두신 후 발을 씻으시고는 자리를 펴고 앉으셨
다.

모든 불경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됩니다. 불교 역사의 기록에 의하
면, 부처님 생전에는 설법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아 제자들이 모두 귀로 듣고 마음으로 기억
하는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이 모여서 부처님의 모든 설
법을 정리하였습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시자로서 오랫동안 부처님을 옆에서 모셨고 또
한 제자들 사이에서 다문제일(多聞第一)로 통하는 바 뛰어난 기억력으로 한번 보면 잊지 않
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당시 설법하시던 정경을 기억해내어
다시 진술하면, 다른 제자들이 이를 기록하고 검증하여 표결에 부쳐 통과시킨 것이 바로 지
금 우리가 보는 경전입니다.
거의 모든 경전은 모두 아난이 다시 진술한 것이기에 불교 경전은 하나의 통일된 형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작마다 첫 구절이 모두 “여시아문”인데 이는 “내가 들은 것
은 이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이 품에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시간과 장소, 그리
고 법회 참석자들을 소개합니다. 거의 모든 불경에는 통일된 시간 표현인 ‘일시(一時)’가 나
오는데, 이는 그러한 어떤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경을 설하실 때 왜 특정 년 월 일로 언급하지 않으셨을까요? 두 가
지 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불법에서는 시공간이 허망하여 실체가 없는, 삼계육도 중생의
심식(心識)에 따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가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설령 있다고 가정해
서 이야기해도, 불법은 육도 중생을 널리 제도하기 위한 것인데, 같은 시간이라도 육도 중
생이 인지하고 체험하는 시공간은 서로 다릅니다. 심지어 같은 인간 세상이라고 해도 현재
우리 시간과 다른 나라는 시차가 존재하므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특정 시간 대신 ‘어
느 한때’라고만 하셨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한 견해는, 역사적 측면에서 인도는 시간관념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
문에 특정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별로 큰 의미가 없으
니 계속해서 아래 경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설하신 장소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祗樹給孤獨園)입니다. 발음하
기 좀 힘든 이 명칭은 사실 ‘기타’와 ‘급고독’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기타는 사위국의 태자였고 급고독 장자는 사위국의 큰 부자였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오래 머무시면서 설법할 수 있는 도량을 지어드리고 싶었던 급고독 장자는 여러
곳을 살펴본 끝에 기타 태자의 원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돈이 부족하지 않았던 기타 태자
는 당연히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원림을 팔려 하지 않았습니다.
태자는 농담 삼아 만약 자신의 원림 바닥을 모두 금화로 깐다면 그 가격에 장자에게 팔겠
다고 했고 의외로 급고독 장자는 진짜로 그렇게 했습니다. 금화를 한가득 실은 수레들이 원
림에 들어오는 것을 본 기타 태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연 어떤
매력이 있기에 급고독 장자가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지혜를 알게 된 후, 태자는 즉시 그 원림을 기증하고는 급고독 장자에게 말했습니
다.

“원림 안의 정사는 그대가 지어 부처님께 기부하는 것으로 하고 원림 안의 숲은 내가 기
부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리하여 이 도량이 완공된 후 기수급고독원이라 명명했습니다. 그 뜻인즉 기타 태자는
나무를 기부하고 급고독 장자는 정사를 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
금강경을 강설하신 곳입니다.

경전에 따르면, 이번 법회에 1,250명이 함께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1,25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상수중(常隨衆)’이라 하여, 부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
든지 따라다니며 수행했기에 부처님께서 경전을 설법하는 장소에 부재했던 경우가 거의 없
었습니다. ‘함께 했다[俱]’는 것은 이번에도 그들이 모두 참석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금강경의 서두에 인간 세상 승단에서의 부처님 생활 단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침 공양 시간이 되어서 세존께서도 탁발하러 나가셔야 했습니다. 경전은 이렇게 묘사했습
니다.
“점심때가 되자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드시고 도량을 나와 천천히 걸어서
사위성으로 들어가셨다. 성안에서 차례로 일곱 집을 다니며 탁발을 마치신 후, 발우를 들고
다시 도량으로 돌아오셔서 식사를 마치시고 나서 가사와 발우를 거두셨다. 탁발하러 다니실
때 발에 묻었던 진흙을 씻으시고 자신의 좌복을 펴서 정리하신 후 단정하게 그 위에 정좌하
여 휴식을 취하고자 하셨다.”

그 당시 불교 승단은 모두 일중일식(日中一食)인지라 점심이 지나면 식사하지 않았습니
다. 그리고 식사하려면 직접 발우를 들고 나가 탁발하여 공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탁발할
때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일곱 집을 돌고, 그 일곱 집을 다닌 후에는 음식을 얻
었든 얻지 못했든 음식을 위해 더는 분주하게 다니지 않고 도량으로 돌아와 수행을 계속해
야 했습니다. 물론 공양을 받아 온 도반들이 공양을 받아오지 못한 도반들에게 음식을 조금
씩 나눠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얼마 전에 공부한 법화경에서 언급했다시피,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 전에 먼
저 상서로운 상을 보이시는데, 미간의 백호에서 빛을 내어 동방의 한량없는 국토를 비추십
니다. 그리고 많은 대승 경전은 그 시작 부분에서 부처님이 빛을 내어 천지를 진동시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마구니들을 굴복시켜 설법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고, 어떤 경우는 용천호법과 육도 중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중생은 불광을
보고 법을 들으러 오거나 호법하러 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다른 인연
들도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불법 전파의 긴 세월 속에서 지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선종이 형성된 이후, 금강경의 “응당 머무는 데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구절
을 듣고 출가한 육조 혜능은 선종이 널리 퍼져 번성하는데 이바지한 일대 종사가 되었습니
다. 선종의 광범위한 전파와 날로 늘어나는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금강경 또한 육조 혜능
대사의 깨달음 이야기와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금강경은 오천여 자로
분량이 적당하여, 경전을 인쇄하여 공덕을 쌓고자 하는 이와 불법 공부를 갓 시작한 이들이
가장 먼저 선택하는 경전이기도 합니다.

금강경은 불법의 수행과 깨달음에서 이토록 중요하고, 불교의 미래발전에 큰 의미가 있
는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가장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시며 신비
로운 모습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옷을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직접 탁발
하시며 심지어 외출하실 때는 발에 길 위의 오물이나 진흙 또는 소똥까지 묻히시고 돌아와
서는 정좌하기 전에 발을 씻으신 후 직접 좌복을 정리하여 펴십니다. 이는 속세의 부처님
모습으로서,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왜 첫 시작부터 신통력을 시현하시어 삼
계육도를 놀라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사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금강경은 모든 상
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모든 시현은 오직 중생의 해탈을 위한 것인데,
불제자들의 상을 깨뜨릴 때는 부처님의 신통 변화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불과를 얻고자 발심한 중생의 경우, 가장 쉽게 집착하는 것이 바로 법력이
무변한 부처님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아라한 제자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공덕상 즉 32
상 80종호에 집착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머릿속에 부처님
의 가없는 법력에 대한 각종 기이한 생각과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한
제자들이 공성에 안주하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의 공덕이 원만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머릿속
에는 더 원만한 부처님의 모습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서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라 이름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부처상과 중생상에 집착하는 순간 평등심을
잃게 되고, 만약 부처님의 평범함 속에서 자성여래를 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신통 변화에서도 공성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여러분이 쉽게 혼동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을 설명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무엇을 ‘상’이라 하는지 해석하고자 합니다. 금강경을 공부할 때
‘상에 집착한다’와 ‘상을 깨뜨린다’는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상’이란 무엇일까
요? 금강경에서 말하는 ‘상’은 만물의 모양·형태·체험·정의·지견(知見)·정보·시공간 등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사과’라는 이 단어를 말하면 사과를 먹어본 도반은 머릿속에 즉시 사과
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입안에는 사과의 맛이 느껴지며 종류가 다른 사과에 대한 개별적인
구분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먹을까 말까 하는
분별과 취사 선택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과의 모든 정보를 전제로 제가 말하는 ‘사
과’라는 이 단어를 듣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문자상’에 집착한다고 합니다.
‘상’에 대한 인간의 인지는 일반적으로 3차원을 기반으로 구축되었습니다. 한계가 있는
눈·귀·코·혀·몸·뜻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결함이 있는 세계관이자 생명관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에 대한 긍정과 집착은 인류가 우주의 진실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며 인류의 본래 자
유로운 마음을 3차원 시공간에 가두며 인지적인 무명으로 인해 생로병사와 생멸무상(生滅
無常)의 고난과 재액을 겪게 합니다.

이어지는 금강경 경문에서 부처님이 깨뜨리신 ‘상’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생·부처상·아
라한상·보살상·공덕상·법상·단멸상·지혜상·과위상 등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상을 언급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수행의 길에서 가장 쉽게 이런 상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실재
한다고 집착하면서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면 여래의 진공 경계에 회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살도를 속세의 선업(善業)과 선한 과보로 변질시키며 수행자가 보살도의 길을 걷는 것을
아주 힘들게 만듭니다.

두 번째로는, 금강경을 처음 접할 경우, 경전에 나오는 문장구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A는 A가 아니므로 비로소 A이다”와 같은 문장입니다.
부처님께서 상을 깨뜨리실 때 일반적으로 다른 이름을 빌려와서 깨뜨리십니다. 예를 들어
바늘로 가시를 빼낸다면, 바늘은 가시를 빼내기 위해 빌린 이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가
시는 빼냈는데 또 바늘의 상에 집착할까 봐 걱정하십니다. 그래서 바늘에 대하여 “바늘은
바늘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바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모든 상이 본래 허망함을 설명하셔야 하기에, 가시 또한 “가시는 가시가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가시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마라집대사가 번역에서 이런 문장 유형
을 사용한 것은 모든 이름과 문자는 모두 임시방편으로 세운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그
목적은 여러분 마음속의 집착과 인지를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는 부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경전에는 ‘부처’, ‘세존’, ‘여래’라는 세 가지 호칭이
등장합니다. 이 세 가지 호칭은 그 의미에 있어서 서로 별다른 점이 없는데 경전에는 왜 동
시에 나타날까요?
경전에서 ‘부처’라는 호칭은 보통 설법하실 때 제자들을 마주하고 계신 부처님의 그 육신
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부처
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는 색공불이인 도(道)의
본체를 설명하실 때는 ‘여래’라는 다른 명칭을 사용하십니다. 제가 해석할 때는 그것을 또
‘자성’, ‘여래’, ‘진공 경계’ 등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또한 듣는 이가 ‘부처’, ‘여래’라는 문자
상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리고 ‘세존’이라는 호칭은 수보리가 부처님을 부르는 존칭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보신불’·‘화신불’·‘법신불’로 나눠서 이해합니다. ‘보신불’은 불법을 수행하여 성취한 분으로
서 속세에서 공덕이 원만하고 법력이 무궁무진한 육신의 모습을 말합니다. ‘화신불’은 부처
님께서 여러 세계에서 인연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내신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 세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정을 떠나 욕구를 제거한 아라한 상을 시현하셨습니
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신은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는 자성(自性)
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제가 경문을 해석할 때 이러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색공불이
의 반야 지혜를 설하셨는데, 저는 여러분이 부처님을 인식할 때 본성과 상(相)의 분별을 두
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화신·보신·법신은 제자들의 공부와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
일 뿐, 과위의 경계를 증득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 셋은 결국 하나입니다. “상을 보는 것이
바로 공성을 보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눈앞의 상을 제쳐두고 따로 공성을 볼 수는 없습니
다. 오직 상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만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들을 여러
분은 알아두셔야 합니다.

https://www.ziguijia.com/translation/KOR/F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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