標題:金剛經 講義 금강경 강의
編號:14
日期: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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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품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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尔 时, 须 菩 提 白 佛 言:“ 世 尊! 当 何 名 此 经, 我等云何奉持?”佛告须菩提:“是经名为《金刚般若波罗蜜》,以是名字,汝当奉持。所以者何?须菩提!佛说般若波罗蜜,即非般若波罗蜜,是名般若波罗蜜。须菩提!于意云何?如来有所说法不?”须菩提白佛言:“世尊!如来无所说。”“须菩提!于意云何?三千大千世界所有微尘是为多不?”须菩提言:“甚多,世尊!”“须菩提!诸微尘,如来说非微尘,是名微尘。如来说:世界,非世界,是名世界。须菩提!于意云何?可以三十二相见如来不?”“不也,世尊!不可以三十二相得见如来,何以故?如来说:三十二相,即是非相,是名三十二相。”“须菩提!若有善男子、善女人,以恒河沙等身命布施;若复有人,于此经中,乃至受持四句偈等,为他人说,其福甚多。”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
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해라. 이 이름으로 그대는 마땅히 받들어 지
녀야 한다. 그것은 수보리여!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
소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지 않은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그 모든 티끌을 여래는 설하기를 티끌이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비로소 이름
하여 티끌이라 하는 것이다. 여래는 세계가 곧 세계가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세계라
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
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삼십이상이 곧 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삼십이상이라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목숨을 보시했다고 하더라도,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이 복
이 저 복보다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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这一品的大意是须菩提问佛陀说:“世尊,应当如何称呼这部经?我们应当如何奉受持行呢?”佛陀讲法到这里,须菩提认为前面的内容应该有个总结性的名称,方便大家记忆、理解、传诵,便问佛陀应该起一个什么样的名字可以涵盖前面内容所表达的一切?佛说:“这本经可以起名叫《金刚般若波罗蜜》,你们可以根据这一名称所表达的意义去信受奉行。”佛在此将他前面所开示的道理用金刚来做比喻,金刚是地球上最坚硬的矿物质,可用以摧毁、切割其他物质而自己不受损伤。佛用来比喻他开示的道理像金刚一样,无坚不摧,能摧毁你的烦恼、不正见,令你从轮回的此岸到解脱的彼岸。但佛马上接着说,并非真有这样一个智慧存在。原文是:“须菩提,你认为如来有所说法吗?”须菩提说:“世尊,如来无所说。”
이 품의 대략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마땅히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가 어떻게 이 경을 받들어 지녀
야 합니까?”
부처님의 설법이 여기까지 이르자, 수보리는 앞선 내용을 갈무리할 수 있는 명칭이 있어
야 대중이 기억하고 이해하며 전하는데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앞의 내용을 포괄할
수 있는 이름을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전을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해라. 이 이름이 표현하는 뜻에 따라서 믿
고 받들어 행하라.”
부처님께서는 앞서 설하신 이치를 금강석에 비유하셨습니다. 금강석은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광물질로서, 다른 물질은 파괴하거나 절단할 수 있되 그 자체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당신께서 설법하신 도리는 마치 금강석처럼 단단하므로 아무
리 견고한 그 무엇이라도 모두 부술 수 있어, 그대의 번뇌와 삿된 견지를 깨뜨려 윤회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할 수 있다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
서는 즉시 이어서 진정으로 그러한 지혜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은 아
래와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는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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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经典中,有很多提问都是一次次在反复,这显示着佛的慈悲,同时也是佛对弟子们的理解。在对佛法无相之理的领悟上,在未完全彻悟之前,很多人都是听懂一些道理后觉得自己似乎已经大梦初醒,但遇到另一个问题时,却又执着、迷失进去了。所以,佛力求在他提到的每一个概念、名相上,在他每次对一切的肯定中都提示弟子不要心外求法。比如,此处的“如来有所说法吗?”,这是怕弟子们着法相,第二次问须菩提同样的问题。第一次在第七品,如来在说完众生受持这部经,功德很大、不可思议后,说一切诸佛皆从此经出。如来怕弟子们执着佛说的法,认为有所得,而不去反观自己,如如不动,安住在空性的见地上,所以问须菩提“如来有所说法耶”?须菩提第一次的回答是:“无有定法如来可说”,这一次须菩提的回答是:“如来无所说”。须菩提的这两个回答也可以以两个角度来理解,“无有定法可说”是在有的层面上答,指并无一个固定的法叫佛法。只要能破众生执着,令众生从迷梦中醒来,从轮回中解脱的法都是佛法。如来随机施教,也无定法可讲。
경전에서는 많은 질문이 거듭 반복되는데, 이는 부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동시에 제자들
에 대한 부처님의 이해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불법의 무상(無相), 그 이치에 대한 깨달음은
있으나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이 도리를 좀 알아듣고는 큰 꿈에서 깨
어난 것 같다가도, 다른 문제에 맞닥뜨리면 다시 집착하고 길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부처
님께서 언급하시는 모든 개념과 명칭, 그리고 긍정하시는 모든 것에서 제자들이 마음 밖에
서 법을 구하지 않도록 힘써 일깨우십니다. 예를 들어, 이곳의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제자들이 법상에 집착할까 염
려하여 두 번째로 수보리에게 묻는 같은 질문입니다. 첫 번째는 제7품에서 여래께서 중생이
이 경전을 받아들여 지니면 공덕이 아주 커서 불가사의하다고 하신 뒤 “모든 부처님은 모두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여래께서는 제자들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에
집착하여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고, 자신을 돌이켜보지 않은 채 공성의 견지에 여여부동하
게 안주할까 봐 염려하여 수보리에게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수보
리가 처음에는 “여래께서 설하실만한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번에는 “여래
께서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수보리의 이 두 대답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래께서 설하실만한 정
해진 법이 없다”는 있음의 측면에서 대답한 것으로, 불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정된 법이
없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중생의 집착을 깨뜨려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 윤회에서 해탈하게
할 수 있는 법은 모두 불법입니다. 여래께서는 근기에 따라서 가르침을 펴시기에 가르칠 만
한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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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次的回答是安住在如来本有的真空角度。如来的空性状态是我们每个人本来的自性,也是我们本来的样子。其他任何在时空中示现出来的相,都是因缘具足后假相的生生灭灭,其中并无一个真实的自我。佛法中把自我的这种假有比喻成就像梦一样,大家认梦为真,成为梦中主角,在梦中颠倒妄想,轮回生死。未觉悟者听佛说法也像在梦中与佛交流,就像是梦中你病了,佛开了一剂药给你,等你梦醒时就知道如来并未做什么。梦中事非真非假,梦中确实你吃过药,但醒来后你本来就没有病,病这件事变得虚妄不实,只是梦,那如来给药这件事也同样虚妄不实。故在此须菩提说“如来无所说”。如果我们不能懂得佛与须菩提是站在本性真空的角度来问答,就会疑惑,明明前面佛说了一大堆的道理,那么多言辞,却一再说如来无所说(此处的如来是指我们的无形无相的自性)。
두 번째 대답은 여래 본래의 진공에 안주한 관점에서 답한 것입니다. 여래의 공성 상태
는 우리 각자의 본래 자성이기도 하고 우리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공간에 나타난 각자
다른 모든 상은 인연이 구족되어 나타난 가상의 생멸일 뿐, 그 속에는 진실한 자아가 존재
하지 않습니다. 불법은 자아라는 이런 가짜 존재를 꿈에 비유합니다.
사람들은 꿈을 진짜로 여겨 꿈속의 주인공이 되어 꿈속에서 전도된 망상을 하며 생사를
윤회합니다. 깨닫지 못한 자가 불법을 듣는 것도 꿈속에서 부처님과 교류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치 꿈속에서 그대가 아프면 부처님이 약을 처방해주셨는데 꿈에서 깨고 보니
여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꿈속의 일은 진짜도 가짜도 아
닙니다. 꿈속에서 그대는 확실히 약을 먹은 적이 있으나 깨어나고 보니 그대는 원래 아프지
않았기에 아팠다는 이 사실도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는 꿈이었으니, 여래가 약을 처방해준
일 또한 허망하고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수보리는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우
리가 부처님과 수보리가 본성진공의 관점에 서서 문답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혹
이 생길 것입니다. ‘분명 앞에서 부처님께서 많은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왜 자꾸 여래는 설
한 바가 없다고 하는 걸까?’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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接下来,佛接着开示弟子们。佛陀又问须菩提:“须菩提,你认为怎样呢?三千大千世界里所有的微尘其数目多吗?”须菩提回答说:“非常多,世尊。”佛说:“须菩提,这些微尘并无一个不变的真实的实体存在,如来只不过是给它们一个假名,叫它们为微尘罢了。如来说到世界,所有的世界也只是因缘具足而生,因缘具足而灭,并无一个真实的固定不变的世界,只是随顺世俗,假名称它们为世界罢了。”在佛法中常常提到微尘世界,比喻三千大千世界之多,万相之繁杂、无量无边。在此处,佛一直在前面讲弟子们眼前修证中易出现的执着与迷惑,比如怎样发心?怎样布施、忍辱?怎样看待阿罗汉的果位、菩萨的功德庄严?怎样正确看待佛法?如来有固定的形象吗等等。这些都是弟子们每天都必须面对的问题,在这些问题中应该持有佛的正知见,才能在修证中越来越安心,尽快回归如来真空之境。
이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설법하시어 또 수보리에게 물으십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이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이런 티끌들은 변하지 않는 진정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래는 그저 가
명을 붙여 티끌이라 부를 뿐이다. 여래가 언급한 세계 또한 단지 인연이 갖추어지면 생겨나
고 또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일 뿐, 진정으로 고정 불변하는 세계가 없다. 그리하여 세
속에 순응하여 가명으로 그것들을 세계라고 부를 뿐이다.”
불법에서 흔히 티끌 세계를 언급하여 삼천대천세계의 많음과 수만 가지 모습의 복잡함이
무궁함을 비유합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앞에서 제자들이 눈앞의 수행 중에 빠
지기 쉬운 집착과 미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발심하는가?”, “어떻게
보시하고, 인욕해야 하는가?”, “아라한의 과위와 보살 공덕의 장엄함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불법을 어떻게 올바르게 볼 것인가?”, “여래는 고정된 형상이 있는가?” 등등을 말입니다. 이런 것은 제자들이 매일 직면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이런 문제에서 마땅히 부처님의 정지견
을 가져야만 수행을 하는데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조속히 여래의 진공 경계로 돌아갈 수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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现在,佛从弟子们眼下关注的事情中,将弟子们的头脑拉向了如微尘众一样多的无量无边的世界,告诉弟子们,万事万物,包括整个三千大千世界的一切都是假名,在如来之境中都不过是心的妄念而已。妄心生起,微尘世界生起;妄心灭,微尘世界如梦。当弟子们的意识突然从眼前关注的事物,被佛的开示拉向无量无边的世界一切时,佛又将问题的焦点回来对准了佛三十二相、八十随形好的功德之身。也许这个功德之身在潜意识里是某些弟子们渴求示现的,是弟子们敬畏的,不敢在心中妄加揣度评论的,他的份量在有的弟子们心中比三千大千世界还重。原文是,佛继续问须菩提:“众生可以通过三十二相见如来吗?”须菩提说:“世尊,不能通过三十二相见如来。为什么?因为佛说如来有三十二种奇妙庄严的身相,也只是功德、因缘具足在时空的显现,并非如来实有任何相。只是随顺世俗交流的方便,称其为如来特有的三十二相。”
이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장 관심을 두던 눈앞의 일들로부터 티끌처럼 많은 무량
무변의 세계로 제자들의 시선을 돌려 수만 가지 일과 물건, 전반 삼천대천세계의 일체가 모
두 가명이며 여래의 경계에서는 모두 마음의 망념 뿐임을 알려주십니다. 망심이 일어나면
티끌 세계가 생기고, 망심이 꺼지면 티끌 세계는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의식이 갑자기 눈앞의 관심사에서 부처님의 설법에 따라 무량무변한 세계 일체
로 확장되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문제의 초점을 여래의 32상 80종호 공덕의 몸으로
맞추십니다. 이 공덕의 몸은 잠재의식 속에서 어떤 제자들이 갈구하는 모습이자 경외하는
대상으로, 마음속으로 감히 추측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삼천대천세계보다 더 큰 비중을 차
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원문을 보면,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중생은 32상을 통해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래의
32가지 기묘하고 장엄한 몸의 형상 또한 공덕과 인연이 구족되어 시공간에 나타난 것일 뿐, 여래에게 실재하는 그 어떤 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속의 의사소통 방편
을 따라 여래 특유의 32상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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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为怕众生执着佛相见性,佛这也是第二次问同样的问题。第一次在第五品,佛问须菩提:“可以以身相见如来吗?”须菩提答:“不可以”。因为众生要从种种执着、分别中解脱,见到自性如来,头脑中不能将如来定义为任何相。如果认为如来有定相可见,即成佛就成为从一个相变成另一个相,这样我们是永远不能回归真空,也不能真正了解如来的境界。所以,对已经执着有的众生,如来讲“无相”,让你放下对身相的认真与执着。
중생이 부처의 상에 집착하는 방식을 통해 견성(見性)하려고 할까 봐 그것이 걱정되어, 부처님께서는 두 번째로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첫 번째는 제5품에서 “몸의 형상으로 여래
를 볼 수 있는가?”고 물으셨고, 수보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중생이 온갖 집착과 분별에서 해탈하여 자성여래를 보려면 머릿속에서 여래를 그 어떤 형
상으로도 정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래에게 볼 수 있는 정해진 상이 있다고
여긴다면, 성불은 하나의 상에서 다른 상으로 변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는 진공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가 없고 또한 여래의 경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있음’에 집착하는 중생에게 여래는 ‘무상(無相)’을 설하여 몸 형상에 대한
진지함과 집착을 내려놓도록 촉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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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次如来说不应以身相见如来,是指众生不可以执着一个固定的色相见如来。比如说起释迦牟尼佛,有人头脑中会出现一个佛的图像,这没有什么问题,但如果执着如来就是那个样子就错了。如果这个知见不明确,那么行者在禅修中如果见到空中出现一尊佛像,也许会认为自己快成道了,见到了如来实相,或者在内心追求自己变成想象中的佛的样子。所以在这一品中,佛又重申了这个问题。那如果你不认为佛有一个像普通人一样固定的色身,那你是否又会认为佛有一个三十二相、八十随形好的身相呢?如果你在成道的路上想着自己要变成这样一个身相,想着如来是这样一个身相的话,你就永远无法回归如来真空之境了。因三十二相、八十随形好的身相也只
是一个功德之相。诸相皆虚妄不实。三十二相、八十随形好,是一位菩萨在修道路上功德圆满后,在人道能显现出来的最圆满的身相。如释迦牟尼佛刚出生,身形、气脉就具备这样的特征。经典中还说转轮圣王也具备这样的大千世界三十二相,但没有八十随形好。但一位佛在各道时空中显现什么样的形象,会以众生的共业以及众生成道的需要来定。虽然三十二相、八十随形好只是如来化境,但功德未圆满之人很难化现这样身心圆满的形象出来。即使神通具足能变化出来,但佛的八十随形好的细行很难顾及周全,因为必须心性圆满才能成就。
앞서서 여래께서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만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중생
이 고정된 육신의 모습에 집착하여 여래를 보려고 해서는 안 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경우,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부처의 이미지가
떠오를 텐데, 이것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래가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집착하게 되면 이는 그릇된 것입니다. 만약 상술한 바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
에서 수행자가 선정 중 허공에서 부처의 형상을 보았다고 상정할 경우, 도를 거의 이루었다
거나 여래의 실상을 보았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상상 속의 부처님 모습으
로 변화시켜 나가기를 추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 문제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
처님에게 일반인과 같은 고정된 몸의 형상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32상
80종호의 몸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여길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도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
신이 이런 몸의 형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여래가 이런 몸의 형상이라고 생각한
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여래의 진공 경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32상 80종호의
몸의 형상은 다만 공덕의 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은 다 허망할 뿐 실재하는 것
은 아닙니다. 32상 80종호는 보살이 수행의 길에서 공덕이 원만해진 후, 인간 세상에서 시현할 수 있
는 가장 원만한 몸의 형상입니다. 석가모니불이 금방 태어나셨을 때 몸의 형상과 기맥이 이
런 특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전륜성왕도 이러한 대천세계의 32상은 갖추고 있
으나 80종호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 부처님이 각 세계의 시공간에서 어떤 형상을 시
현하실지는 중생의 공업(共業)과 중생 성도의 필요에 따라 정해집니다. 비록 32상 80종호
가 여래의 화경(化境)이긴 하나 공덕이 아직 원만하지 못한 사람은 심신이 원만한 이런 형
상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설령 신통력이 구족하여 변화해 낸다고 해도 부처님의 80종호
와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반드시 심성이 원만해야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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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在这一品的最后说:“须菩提,假如有善男子、善女人,用像恒河沙粒那样多的身体性命来做布施,如果再有一个人能信受此经,并以此修行,甚至只是领悟经中的一个四句偈颂而随缘为他人解说,所得福德超越前者。”在所有时空中,众生最爱惜的莫过于自己的身体性命。俗话说,蝼蚁也爱惜生命,但修行佛法的善男子、善女人即使在无量劫,为了成道不惜布施自己的身体与性命,都比不上受持此经四句的福报。在此佛告诉我们,即使我们为法愿意舍去身体性命,但不了解佛法的无相之理,妄心妄念被境牵引、轮转不止,成道便遥遥无期。如果能在信受此经后,一念从诸相的迷失、诱惑中醒来,马上见性成佛,佛以此说明般若智慧对修行者的重要。
부처님께서는 이 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알 수량과 같이 많은 몸과 목숨을 바쳐 보
시했다고 하더라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믿고 받아들여 이를 따라 수행하고 심
지어 단지 경전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깨달아 인연에 따라 이를 다른 사람에게 설하였다고
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이 앞 사람의 그것을 뛰어넘을 것이다.”
모든 시공간에서 중생이 가장 아끼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과 목숨입니다. 속담에 개미도
제 목숨을 아낀다고 하는데, 불법을 수행하는 선남자 선여인이 설령 무량한 겁 동안 도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보시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경전의 사구게 하
나를 받아 지니는 복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설령 우리가 법을 위해 기꺼이 몸과 목숨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불법의 무상(無相)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허망한 마음과 생각에 이끌려 끊임없이 윤회하
여 성도는 무기한 멀어질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만약 이 경을 믿고 받들어 일념에 모
든 상의 미혹과 유혹에서 깨어난다면 즉시 견성(見性)하여 성불할 수 있는 연고로 부처님은
이를 통해 반야 지혜가 수행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