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품 법계통화분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덕이 많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덕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하지 않
았을 것이다.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한 것이다.”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울 만한 온
갖 보물을 가지고 보시한다면, 이로 인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많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보시를 두루 폭넓게 수행하기에 큰 복덕을 얻을 것입
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복덕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여래는 결코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설하지 않
았을 것이다. 복덕은 자성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복덕을 얻음이 많아 허공만큼 헤아릴 수
없다고 설한 것이다.”

앞의 제8품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
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
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진정 많지 않겠는가?”
질문 방식은 이 품에서의 그것과 똑같으나 수보리의 대답은 다릅니다. 제8품에서 수보리
는 대답했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본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제8품에서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라는 점을 강조하려 하셨기에 수보
리의 답변에 대하여 평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수보리가 제8품에서 한 대답은 부
처님의 이 질문에 대한 보충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회에 참석한 다른 제자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이치를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복덕이 많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나서 의혹이 생길까 걱
정되어 “부처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 복덕의 본성을 이야기하신 것은 아니십니
다. 본성은 공(空)입니다.”라고 보충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성 교리와 관련해서 여
전히 의혹이 남아있던 제자들 마음속에 본성과 상의 구분이 비로소 생겨난 것입니다. 즉 상
은 많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으나 본성은 비어 있으니 많고 적음으로 가늠할 수 없다는 뜻입
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제19품에서는 오히려 “수보리여,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는 얻는 복덕이
많다고 설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제8품에 있는 수보리의 대답과
완전히 상반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본성과 상은 둘이 아니므로 상을 보
면 곧 본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에게 상과 본성에 대한 구분이 존재한다면 이는 사실 여전히 의식의 경계에다
가 여래의 진공을 세우는 것이 됩니다. 설법이 깊어짐에 따라 여래께서는 제자들 마음속의
모든 상을 층층이 제거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이 상을 보는 것이 곧 본성을 보는 것이기에
수보리는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는 복덕은 매우 많을 것입니다”라고 대답
함으로써 다시는 상과 본성의 구분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공(空)’한 복덕은 공으로 치우친,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는 아니므로 여래께서도
“복덕은 공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수행자가 복덕은 본래 공하다는 이 도리를 깨쳐
야만 공성의 경계에서는 복덕이 너무 많아 허공을 가득 채우고, 법계에 두루 널려있어 헤아
릴 수 없을 정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
역점을 두어 강조하신 것은 바로 이 ‘공’한 복덕이라는 점입니다. 여래께서 제자들에게 일체
는 모두 공하므로 복덕이 없다가 아니라 그렇기에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공즉시색(空即是色)의 시현입니다. 수행자가 만약 복덕이 본래 공하다는 도리를 알고 보시
한다면 복덕이 많기로 허공에 가득 차고, 법계에 두루 있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래께서 진공 경계에 안주하셔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불교사상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왔던 그 당시는 중국
황제인 양무제가 황제의 존엄으로 불교를 호법하던 시기인지라, 장차 선종의 조사가 될 이
분을 즉시 접견했습니다.
양무제가 아주 교만한 마음으로 달마대사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즉위한 이래 사찰을 짓고 경전을 펼쳐냈으며 수많은 승려를 배출하였으니 그 공덕
이 얼마나 되겠소?”
그는 본래 부처님 고향에서 온 성스러운 스님으로부터 공경과 찬탄을 받을 것이라 여겼는
데 생각 밖에 그가 들은 것은 달마대사가 ‘공성’의 견지에서 내뱉은 단호한 대답이었습니다.
“공덕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양무제가 또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다는 말이오?”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이는 단지 인간과 천인의 작은 과보인지라 유루(有漏)의 원인이 있으므로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아 비록 있기는 하나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무제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공덕이오?”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청정한 지혜는 오묘하고 원융하며, 만물의 본체는 공하고 고요한바 이러한 공덕은 세상
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무제가 이어서 물었습니다.
“불교의 성스러운 진리의 으뜸가는 뜻[聖諦第一義]은 무엇인가?”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텅텅 비어 성스럽다할 것이 없습니다.”
양무제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짐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달마대사가 대답했습니다.
“모릅니다.”
물론 양무제는 여래의 진공 경계를 깨닫지 못했고 달마대사의 자비로운 설법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꽉 찬 아만(我慢)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은 그는 달마대사에게 축객령을 내리
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양무제와 달마대사가 나눈 대화 내용을 전부 그대로 옮겨왔을 뿐 현대어 번
역은 따로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금강경의 앞부분 몇몇 품에서 어느 정도
깨달은 바가 있다면, 비록 고문(古文)일지라도 이들이 나눈 대화에서 그들 각자의 마음이
처한 경계를 헤아리기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달마대사는 왜 공덕이 없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달마는 여래의 경계에 서서, 복
덕은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이 실재한다고 여기면서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양무제의 상태를 알아채고는 그의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서 공덕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
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자비롭게 설법하셨습니다. 공성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사
찰을 짓고 경전을 펴내는 그것은 다만 세속의 선행, 선업으로서 유생유멸(有生有滅)이라 그
복덕이 비록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 실체는 없다고 말입니다. 만약 양무제가 공성의
이치를 깨친 상태였었다면 달마대사는 반드시 그의 공덕이 아주 크다고 찬탄하셨을 것입니
다. 물론 만약 양무제가 진정으로 금강경의 반야 지혜를 깨달았다면 달마대사에게 그렇게
묻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달마의 이야기에서 다시 이 품으로 되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께서 이 품에서 복덕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강조하려 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대하던 태도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우리의 집착을 파하
려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복덕은 본래 공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만 복덕이 진
짜로 많아진다는 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달마대사가 말씀하신 것처럼, 복덕은 인간 세상의 선행과
다를 바 없이 비록 있기는 있으나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
게 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은 복덕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없기 때문인데 비로소
여래는 복덕을 많이 얻게 된다고 설한 것”입니다.


https://www.ziguijia.com/translation/KOR/F1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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