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품 이색이상분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구족한 색신으로 부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구족한 색신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
께서 설하신 구족한 색신은 곧 구족한 색신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구족한 색신이
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구족한 모든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모든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족한 모든 상이라고 하는 것은 곧 구족한 모든 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
하여 구족한 모든 상이라고 여래께서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어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원만하게 갖추어진 육신을 통해 부처를 볼 수 있겠는
가? ”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원만한 육신으로써 여래를 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
래께서 말씀하신 원만한 육신은 ‘여래’께서 진짜로 그러한 몸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세속에 순응하여 가명으로 여래의 원만한 육신이라 이름하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또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모든 상을 갖춘 것을 통해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을 갖춘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
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상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진짜로 모든 상을 갖추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명으로 모든 상을 갖추었다고 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품에서의 질문과 별반 다름이 없이, 부처님께서는 제5품에서도 유사한 질문을 하셨습
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닙니다.”
그 맥락을 보면,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은 일체 상의 허망함을 강조하는 것에 중심이 놓
이는바 여래께서 어떤 특정된 몸의 형상을 갖추었다고 여겨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제13품을 살펴봅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삼십이상이 곧 상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삼십이상이
라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은 여전히 제자들이 부처님의 공덕 상에 집착할까 봐
그것을 경계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로 돌아가려면 부처님에게 32
상이 있다고 여기는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부처는 색신(色身)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모든 형상을 구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이는 무엇을 강조하시려는 것일까요? 그럼 먼저 ‘색신의 구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앞선 품들에서 부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국토 세계와 중
생 마음의 허망함을 말씀하시고 나서 이 품에서는 ‘색신의 구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
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색신의 구족’을 욕계의 범부와 같이 눈·귀·코·혀·몸·뜻에서의 몸
의 형상이 있다거나 혹은 색계의 중생처럼 광화신(光化身)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며, 어떤
이는 이 ‘색신의 구족’을 부처님의 32상 80종호의 자마금신(紫磨金身)으로 이해하며, 어떤
이는 부처님 무량무변의 응화신(应化身)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설법은
삼계육도 중생의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집착하는 그 ‘여래의 색신’이 바로 여기에서의 ‘색신의 구
족’인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여래가 모든 상을 구족한 것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모든
상의 구족’을 어떤 이는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상으로 이해하고 어떤 이는 오온(五蘊)으로
이해하는데 불교에서는 ‘자아’를 ‘오온’으로 칭합니다. 오온은 색온·수온·상온·행온·식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색온은 물질현상을,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모든 정신 현상을 지칭하므
로 불법에서 오온의 개념은 세간의 만법을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막 시작한 중생이 색(色)을 볼 때는 공(空)을 관(觀)해야 하고, 공(空)을 관(觀)
해야 할 때는 마땅히 원만한 색(色)을 봐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기에 지금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의식의 경계에다가 세워둔 색공불이(色空不二)의 상을 타파하시는 것입니다. 제자
들이 만약 의식의 경계에서 ‘여래의 공성’을 깨달았다면, 공은 허공이 아니므로 일체를 부정
하고 버리는 것이 아닌 이상 여래의 진공 경계와 함께 나타나는 것은 마땅히 원만한 부처의
상이거나 혹은 하나하나의 티끌까지도 전부 다 포함한 삼천대천세계일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자들 마음속에 ‘색공불이’의 경계가 있다면 이는 이미 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일찍이 수행 증득 과정에서 어떤 한 경계에 진입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서 자신이 허공과 법계에 두루 편재한 빛으로 화하였고,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마음 내지
는 삼천대천세계가 빛 속에서 찰나에 생멸하여 그 일체가 환상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경계에서는 제가 갑자기 빛의 고리로 화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여여부동하고 단정하
며 장엄한 금신(金身) 불상이 앉아 계셨습니다. 이런 경계는 그렇게 신기한 것은 아니므로
관조력(觀照力)이 아주 강한 수행자라면 ‘색공불이’라는 문자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이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이의 경계는 전생의 수행 증득에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물론
수행자의 깨달음의 실력에 속하는 선경계(善境界)일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수행자의 특정
집착을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경계에 머물면서 색공불이에 증입하였다고 여기거나, 여래를 만났다고
여기거나 혹은 어떤 한 경계가 바로 여래의 진공 경계라고 집착한다면 이것은 그릇된 것입
니다. 자성의 진공(眞空)은 득실이 없고 여여부동하며 본래 그러하기에 그 어떤 경계로도
이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를 당신이 기이하다고 여기면 그것은 오안육신
통을 구족한 것이고, 이를 평범하다고 여기면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잠자는 이 모든 하나하
나가 모두 ‘여래의 진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의 머릿속과 의식 속에 아직 여래의 경계라고 하는 경계가 있고, 아직 얻
고 잃음에 마음을 쓰는 득실심(得失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진공은 수행자가
모든 집착을 타파하고 일체 상에 집착하지 않은 후에 드러나는,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성
품입니다. 그때 비로소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체법 역시 공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수행자는 일체법과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생기는 곳에 더는 매달리지
않고, 더는 경계에 휘둘리거나 상에 미혹되지 않아 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를 일컬어 여
래라고 합니다.

https://www.ziguijia.com/translation/KOR/F1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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