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설할 법이 있다’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설하실 법이 있다”
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내가 설한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다. 수보리여! 법을 설한다는 것은 곧 설할 만한 법이 없으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미래 세상에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낼 중생들이 꽤 있겠습니
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품의 대체적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여기지 말라. 왜
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
는 자이고 내가 설한 모든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법을 설하는 사람은 설
할 법이 없기에 비로소 법을 설한다고 이름한 것이다.”
이 문제를 부처님께서 제7품에서 수보리에게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는가?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부르는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실 수 있는 정해진 법 또한 없습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과 수보리 사이의 문답은 제자들의 과위 및 불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
는데 초점이 놓여 있습니다.
제13품에서 부처님께서 이 경전의 제목을 금강경이라고 설하시던 그 대목에서도 수보
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여기서 수보리는 ‘여래의 진공 경계’에 서서 여래는 설하신 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진공
은 무아·무인·무중생이므로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금강경을 여기까지 강의하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또 수보리에게 이 문제를 거듭 강조하
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
기지 말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만한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
를 비방하며, 내가 설한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수보리여, 법을 설하는 자는 설할
법이 없으므로 비로소 법을 설한다고 이름한 것이다.”
이 단락의 말씀에서 부처님께서 중점적으로 강조하시는 것은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일념도 없다는 그것입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우리는 진공이 묘유를 낳는다고 하면서 진공
으로 증입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만 하면 곧 신통력이 갖추어지는 이것을 묘용이라고 여
기는 등등입니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진공에는 일념도 없고 진공에는 또한 신통력과 지혜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여래의 설법은 마치 텅 빈 골짜기의 메아리처럼, 기러기가 공중
을 날아가는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여래께서 중생을 널리 제도하시되, 진공에서
일념을 일으키신 적도 없으며 또한 어떤 법을 설하신 적도 없습니다.
유마힐경에서는 “진짜로 법을 설하는 자는 말하는 것도 없고 시현하는 것도 없다. 법을
듣는 자는 듣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수행자는 마땅히 만법이 본래 공하고 고요하며,
모든 이름과 언설은 모두 가짜로 세운 것[假立]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습
니다. 진공 속에서는 일체가 생겨남이 없다는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때, 지혜로운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미래 세상에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낼 중생들이 꽤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의 본성은 모두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는 그들을 중생이라고도 하지 않고 중생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는다(여러분이 현
재 본성을 찾지 못한 채 전도, 윤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이 견지에서 그
들이 바로 중생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여,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래
의 진공 경계에서 중생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은 단지 가명으로 중생이라고
할 뿐이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중생상을 완전히 파하시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법을 듣는 중생의 관점에서 “여래의 진공”으로 회귀하게 하여 법을 듣는 제자들 머릿속의,
자신이 아직도 중생이라는 지견을 파하셨던 것입니다.
이 품에서 수보리는 다시금 미래 세상을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미래 세
상의 중생이 이런 법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앞서 수보리가 제기한 질문에서와 마찬가지로 “계율을 지켜 복을 쌓는 사
람, 모든 상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이에 대해 믿음이 생겨 받들어 행할 것이다”라
고 긍정적으로 대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는 부처님께서 중생상을 완전히 타파하여
제자들이 마음속으로 자신이 여래가 아니라는 그 지견을 제거하고자 하셨습니다.
앞의 강설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이 수행 중 중생상에 집착해서는 안 되며, 모든 상은
허망하다고 이미 수없이 언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먼 훗날의 수행과 증득 과정에서 중생상
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보답도, 이해도, 공덕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래께서
금강경은 제자들의 겹겹이 쌓인 집착을 파하는 데 쓰이는 것이므로 모든 제자는 마땅히 듣
는 즉시 무아·무중생의 경계에 안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경우, 제도할 중생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는 있지만 한창 법을 경청
하고 있으므로 법을 듣고 있는 중생과 부처의 구분이 있어 그들 자신과 여래가 둘이 아닌
경계에는 진입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이 양상은 뒷부분에서 수보리가 부처님의 질문에 정확
하게 대답하지 못한 데서 그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진공’ 견지에 서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의 진공 경계에는 중생도 없고 물론 부처도 없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 역시 여래와
같아 둘 사이에는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걱정하는 그 중생도 중생이 아니다. 그러
나 중생은 아직 이 도리를 원만하게 깨닫지 못해 미혹된 상태에서 전도, 윤회하고 있으므로
이 또한 ‘중생이 아님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여, 여래의 경계에 서면 여
래는, ‘삼계육도의 모든 중생은 실제로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연고로 실재하는
부처, 실재하는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단지 가명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생견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보니 일찍이 선정 경계에서 만난, 수만 년이 되는
천산갑이 떠오릅니다. 그는 이미 몸이 빛으로 화할 정도로 수행해 왔으며 심지어 자유롭게
사람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해 머릿속에 자신
을 천산갑으로 확고하게 인지하여 자신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천산갑 껍질을 보배로
삼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너는 천산갑이 아니고
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모습도 아니며 본성은 여래라고 말하자 그는 순간 돈오(頓悟)
하여 즉시 천산갑 껍질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머릿속의 ‘중생견’이 때로는 다른 중생의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것이 버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머릿속에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인지에 너무 집착
하면 그 존재가 바로 중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