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곧 얻음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에 있어서 조그만큼의 법
조차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이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
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곧 얻음이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에 있어서 조그만큼의 법
조차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이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
다.”
이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얻으신 으뜸으로 원만한 깨달음은 바로 얻은 바가 없다는 것입
니까?”
“그렇다, 바로 그렇다. 수보리여, 내가 무상정등정각 내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진실로 얻
은 바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무상정등정각, 으뜸으로 원만한 깨달음이라 이름할 수 있다.”
이 품에서 다루게 될 문제에 대해 수보리 역시 부처님과 몇 차례의 교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10품에서의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입니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실로 아무런 법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과 수보리의 이 대화는 제자들의 법상 집착에 관한 훈계로서 제자들이 얻을 수 있
는 법, 얻을 수 있는 과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파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제17품에서인데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
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은 따로 없었습니다.”
여기에서의 대화 중점은, 법을 듣는 대중들에게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한 사람이 없음을 알
려주면서 아상을 파하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석가모니라 부르는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내리지 않
으셨을 것이다.……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라고 말한다면,
수보리여 부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러한 법은 실로 없다.”
여기에서도 거듭 반복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중생이 진공의 경계에는 무아·무인임을 깨치
도록 도모하셨습니다.
이러한 맥락과 흐름이었기에 지금 제22품에서 수보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곧 얻음이 없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주 놀라운 요약입니다. 거꾸로 말한다면, ‘얻음이 없음’이 바로 부처님께서 얻으
신 무상정등정각으로서 그 뜻은, 부처님께서 얻으신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은 바로
일체법이 허망하여 일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렇다. 만법이 모두 공하기 때문에 여래가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었다 함은,
이 세계의 일체, 아주 조그마한 그 무엇이라도 진실로 얻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바로 그
것인바 이를 가리켜 무상정등정각이라 이름한다.”
여기에서, 수보리와 부처님의 대화는 여러분들에게 사람과 법이 모두 공함을 알고 이로부
터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하면 곧 무상정등정각을 얻게 됨을 알려줍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마땅히 금강경의 시작이 수보리가 제기한 문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마음을 안주해야 하는가?”
지금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무상정등정각의 본체에 관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하는가? 또 무엇을 ‘여래’라고 하는가? 이 본체의 의미를 아는
것이 곧 수행 증득이며 이렇게 행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품
에서 부처님과 수보리는 여전히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질의응답을 지속합니다.
제23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보리여,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라고 한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이 모든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선법이란 것은 곧 선법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
여 선법이라 한다고 여래는 설하였다.”
이 22품과 23품을 하나로 합치면 바로 부처님께서 ‘무상정등정각’에 대한 절묘한 요약입
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상정등정각 즉 불과를 구하기 위해 발심하는데, 여기에서 부처님께
서는 모든 제자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체가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얻고자 하는 마음이 소진되어 수행자가 그 어떤 상에
도 집착하지 않고 만법이 평등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곧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칭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이를 얻는지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고
일체 선법을 행하는데 심지어 선법의 상마저도 집착하지 않으면 곧 무상정등정각을 얻을 수
있다”입니다. 이는 보살의 수행 증득의 길이며, 이 과정에서 선법의 상에 집착하지 않고 또
한,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두 품의 가르침이 말법 시대 중생이 불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너무나
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법 시대에 대부분 사람은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면서도 속세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해
불과와 속세의 일체를 모두 원합니다. 따라서 불법을 증득하고 도를 이루려는 행위조차 자
아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자아의 가치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변질해버립니다.
사실, 모든 것을 소유하여 자아 가치를 구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에 이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법은 모두 여러 인연이 갖추어져 이루어
진 가명일 뿐 진실로 변하지 않는 자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속에 있어서든 아
니면 불법에 있어서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아울러 그대의 그 자아조차 모두 허망한 것이어서, 그 무엇인가 존재하여 즐거움이나 행
복을 누리거나 혹은 고통을 감내한다는 그 자체마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짜로 이 점을
알고 나면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다할 것입니다. 진짜로 만법이 모두 공하다는 도리를
알고 나면 평등심이 생겨나 각양각색의 차별상에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법이 모두 공하여 평등한 경계에 안주할 때 자신과 이 세상의 일체가 더는 변이·생멸·
득실이 없게 됩니다. 그때야말로 마음은 영원히 편안히 머물게 되어 드디어 고통과 번뇌가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의 경계야말로 이 일체를 영원히 소유하게
합니다. 이 경계에 증입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부처님께서는 간단하고도 실천하기 쉬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일체 상에 집착하지 말고 일체 선법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를 듣고는 ‘일체가 모두 공하여 얻는 바가 없는데, 내가 더 이상 무
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일체가 모두 공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 말을 귀로 들었을 뿐, 우리의 ‘얻고자 하는 마
음’이 아직 다한 상태가 아니므로 세상 만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것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모든 것에 감흥과 열정이 생겨나지 않
는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얻고자 함이 없는 무소득
심은 아니라 지루함이나 무관심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소득의 경계와 평등
심을 증득하려면 부처님 말씀처럼 “상에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합니
다.”
상에 집착이 없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일체가 허망함을 알고 그로부터 심신 안팎의 일
체 경계에 휘둘리지 않아 마음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이런 마음이 바로 상에 집착이 없
는 마음입니다. 수행자가 이런 경계에 오래 머물다 보면 비로소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하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에 ‘지혜의 상’과 ‘부처의 상’마저 완전히 파해야만 비로소 자신과 세계
만법이 평등함을 느껴 마음·부처·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음을 깨쳐 여여부동의 평등심이 진
정으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도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일체가 모두 공하여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다는데, 그렇다면 악법을 행하여도 도
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98%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악법을 저지르면 역연(逆緣)이
너무 많아 수행의 길에서 장애가 아주 많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악법을 닦는
사람은 대개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살인이나 방화, 다
른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겠습니까? 인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으
로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사욕이 이토록 강한 사람이 어찌 도를 이루겠고 어찌 원만
한 자비와 지혜를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예외적으로 두 부류의 존재는 이것이 가능합
니다.
하나는 시현하러 오신 대보살입니다. 대보살은 중생들로 하여금 선법의 상마저 깨뜨리게
하여 선법에 집착하지 않게 하려고 이런 모습으로 현현하기도 합니다. 선과 악 역시 단지
개별 까르마 혹은 공업(共業)의 인과일 뿐, 인간이 내린 정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계의
차원에서 중생의 세세생생 윤회를 조망해보면, 거기에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은 없습니다.
이런 유형의 대보살은 실로 대웅대력(大雄大力)을 지니신 분들로서, 만고에 악명을 남기거
나 심지어 중생의 저주를 받는 과보를 스스로 짊어지면서까지 어떤 이들을 제도하고 성취하
게 합니다. 이런 유형의 보살은 지극히 보기 드물기도 하고 일반 중생의 식견으로는 알 수
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마왕 수준의 존재입니다. 그 역시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 머무는 데가
없으며 사람 죽이기를 풀 베듯이 하되 마음속에는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왕은 아만(我慢)이 지극히 강해 ‘공아(空我)’라는 마지막 상을 아직 부수지 못했기 때문
에 악과(惡果)가 익게 되면 그 과보는 아주 처참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일념의 참회에
자비심이 생겨 살생의 칼을 내려놓는다면 곧 그 자리에서 성불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위의 두 부류 인물에 속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무아·무인·무중생·무수
자의 자세로 일체의 선법을 행하고 또한 선법을 행한다는 그 상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
다. 부처님께서 “이른바 선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선법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선법이
라고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 세상의 도
덕과 선악 기준에 따라 세운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속에 담긴 인과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래의 진공 경계에서는 그 어떤 법도 생겨나지 않으며, 일체는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에 따라 사라지는 환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