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참으로 희귀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같이 깊은 경전을 설하심을 제가 옛날
부터 얻은 혜안으로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그 믿음이 청정해져 곧 실상을 깨닫는다
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공덕을 이루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것은 곧 실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비로소 이름하여 실상이
라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듣고서 믿어 받아 지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미래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 믿어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
이야말로 가장 희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따라서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닌 까닭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이를 곧 이름하여 부처라 하기 때문
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두려
워하지도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왜
냐하면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제일바라밀이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인욕바라밀이
라 설하였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온몸이 마디마디 찢길 그때 내
가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옛날 마디마디 찢길 적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 성
을 내며 원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또한 내가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선인이었을 때를 생각하니, 그 세상에서
도 나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수
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모든 상을 떠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해야 한다. 마
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또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아
야 한다. 응당 머무는 데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다
면, 그 머묾은 곧 머묾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보살이라면 그 마음이 마땅히 색에
머묾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고 설하였다. 수보리여! 보살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한다. 여래는 설하였다, 모든 상은 곧 상이 아니라고. 여래
는 또 설하셨다, 모든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라고.
수보리여!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이며,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이며, 허황한 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 그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법에 머문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법에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
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눈이 있어 햇빛이 밝게 비추면 온갖 형체를 보는 것과 같
다.
수보리여! 앞으로 오는 세상에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본다, 이 모든 이들이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을.”
“수보리여!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아침나절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보시하고, 점심나절에 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보시하며, 저녁나절에 또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몸을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억 겁 동안 몸을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생겨 거스르지 않는다면,
이 복이 저 보시한 복보다 뛰어나다.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
른 사람을 위해 설해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수보리여! 요약해서 말하면, 이 경에는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끝없
는 공덕이 있다. 여래는 대승의 마음을 낸 이를 위하여 설하며, 가장 높은 마음을 낸 이
를 위하여 설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다
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본다, 이러한 사람 모두가 헤아
릴 수 없고 잴 수 없으며 가없는 불가사의한 공덕을 이루리라는 것을. 이와 같은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소승을 좋아하는 이들
은 아견·인견· 중생견·수자견에 집착하기에 곧 이 경을 듣지도 못하고 읽고 외우지도 못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어디에나 만약 이 경이 있다면 일체 세상의 천인·인간·아수라가 마땅히 공
양을 올려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곳이 곧 탑이므로 모두가 공경히 예배하고 주
위를 돌면서 온갖 꽃과 향을 그곳에 흩뿌려야 한다는 것을.”
“또한 수보리여!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는데 이로 인하여 다
른 사람으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면 이 사람이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는 마땅히 악
도에 떨어져야 하나, 현생에 다른 사람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은 까닭에 전생의 죄업이
곧 없어지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될 것이다.
수보리여! 내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지 겁의 기나긴 세월 동안, 연
등부처님을 뵙기 전에 이미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뵙고 모두 공양하
고 받들어 섬겨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은 공덕에 비하면, 내가 과거세에 여러 부처님께 공양했던
그 공덕은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만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더 나아가 숫자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여! 선남자 선여인이 미래 말법 세상에서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얻
는 공덕을 내가 만약 다 설한다면, 누군가 그것을 듣고 마음이 어지러워서 의심하여 믿
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의 뜻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
다는 것을.”
이 세 품의 대체적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수보리는 부처님 말씀을 여기까지 듣
고, 마침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깊게 깨닫고는 기쁜 나머지 흐느끼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립니다.
“정말 드문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깊고 오묘한 경전을 설하신다
는 것은! 저는 예로부터 줄곧 수행하여 비록 모든 참된 것과 허망한 것을 분별하는 혜안을
얻었다고는 하나, 이와 같은 경전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한 사람이 이 경을 듣고, 그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고 믿음이 청정하면
곧 생멸하는 모든 상에 미혹되지 않아 우주 만법의 실상이 바로 그의 앞에서 드러날 것입니
다. 만약 이러하다면 이 사람은 세상에서 첫째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입니다. 세존이
시여, 제가 여기서 말하는 ‘실상’은 우주 만법에 진짜로 이런 변하지 않는 실재하는 상이 있
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이 다만 가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만약 거짓된 상에 미혹
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를 ‘실상을 보았다’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 경전을 듣고, 깊이 믿고 깨달아 이를 받들어 행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없으나, 만약 먼 훗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법 시대 마지막 500
년에,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듣고 믿고 깨달아 이를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인간
세상에서 아주 희유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집착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은 모두 허망하여 실체가 없습니
다. 그러기에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면 곧 이름하여 부처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수보리는 미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만약 누군가가 자아·타인·중생·수자의
온갖 상에 미혹되지 않고, 이 경전을 믿고 지녀 받들어 행한다면 이런 사람은 너무 희유하
여 얻기 어렵다고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오늘날 불법을 배우면서 무상
정등정각을 얻고자 발심한 대부분 사람이 공성 정견에 안주한 상태에서 불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이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 자아·타인·중생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따지거나 집착하고 취하거나 버립니다. 비록 발심은 대승을 향한다고는 하나 불도를
닦는 일에서는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단지 일시적인 청정함에 만족하거나 세상의
복리, 장생불로, 모든 종류의 신통한 변화 등을 추구할 뿐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일체법이
무생(無生)이기에 없어진다거나 부정한다는 것이 논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다면 상에 머물면서도 상을 여읜 것이므로 곧 부처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약 또 한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
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오하여 알기 어렵다고도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매우 드
물고 희유하다. 수보리여! 여래가 말하는 이것이 바로 일체의 집착을 깨뜨려 중생이 윤회의
이 언덕에서 해탈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최고의 법문이다. 물론 실제로 이러한 가장 좋
은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부를 뿐이다.”
위의 대화는 우선 수보리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이야기한 것으로서, 만약 누군가가 부처
님의 이와 같은 설법을 듣게 되면 견성하여 성불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내용입니다. 부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수보리는 “해공제일”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으며 이미 욕망을 여읜
대 아라한입니다. 즉, 이미 심신 안팎의 일체 욕망과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며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이치를 이미 그전에 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기쁨에 겨워 흐
느끼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러한 각도에서 공성을 논하시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
니다.
또한, 이제 갓 발심한 선남자 선여인을 대신하여 문제를 제기한 수보리는 부처님의 당시
설법이 법을 경청하는 제자들의 심성을 아주 깊이 파고들어, 그들이 법을 듣고 나서 깨달음
을 크게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오늘날 우리가 부
처님의 이런 설법을 듣는데, 한편으로는 문자 표현이 고문(古文)이라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정의 기반이 없으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
이 있습니다.
여기서, 수보리는 또다시 자비롭게도 부처님 열반 후, 후오백세(後五百歲) 중생을 언급합
니다. 이 후오백세가 어느 시기를 가리키는지는 불교 역사상 논쟁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
로는 말법 시대의 마지막 500년이라 이해하고 있으며, 지어는 바로 우리의 이 시대를 지칭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또 누군가는 그것은 부처님 열반 후 이어지는 500년의 시간대
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모두 부처님 열반하신 후의 일입니다.
왜 수보리는 이렇게 말했을까요? 수보리가 보기에는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설령 대
중이 공성의 이치를 알아듣지 못하여 믿음을 내지 못하고 혹은 부처님의 말씀에 의혹이 생
기더라도, 곧 부처님께 여쭈어보면 부처님께서 질문자의 근기에 따라서 가르침을 펴 모두의
의문을 풀어주실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 후 후오백세 말법 시대에 이르면 부처님이 떠나신 지 이미 아주 오래
되어서 중생은 단지 이런 글귀로만 법도를 접할 수밖에 없기에, 가령 마음이 혼란스럽고 의
혹이 생겨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줄 스승을 찾지 못할 수가 있습니
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거듭 말법 시대의 중생을 걱정하는데 이는 보살의 자비로운 마음이
기도 하고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영원히 유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
니다.
여기서 수보리가 말합니다.
“부처님 열반 후 후오백세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믿고 깨달아 받아 지닌다면, 제일 희유
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덧붙이십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심오하여 실천하기
어렵다고도 느끼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 말을 듣노라면 지금 이곳에서 법문을 경청하고 있는 여러분이 속으로 우리 많은 이들
가운데 금강경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
니다. 그 이유는 진정으로 알아듣는 사람도 거의 없고 또 진정으로 믿고 받아 지니는 사람
도 거의 없어서 모두가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모든 상(相)을 여의어 꿈속에서 깨어난다면, 마
치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몸에서 식은땀이 쫙 날 것입니다. 이 시공간의 명예·이익·감
정·욕망에 집착하여 끊임없이 추구하고 이러쿵저러쿵 득실을 따져가며 명예·이익·감정에 따
라 자아를 드러내고 자아의 가치를 찾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명예·이익·감정의 성공을 추
구했던 자신이 생각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 삼차원적 각도인 눈·귀·코·혀·몸·뜻으로 이 세계를 좁게 인지하고 바라
보면서도 오히려 영원하고 원만한 생명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립할 수 없고 또한 제대로 볼 수도 없는 갖가지 색상(色相) 속에서 연연하고 전전하며,
윤회하여 태어나고, 탐·진·치·만·의로 말미암아 심지어 삼악도의 업보마저 짓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단지 부처님의 원만한 인지와 지혜를 갖추지 못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원만한 경계와 원만한 깨달음의 지혜를 알아듣고 일념에 깨어
나면 자칫 삼악도에 떨어질 뻔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
를 것입니다. 그리고 방심하여 인간 세상에 갇힐 뻔했던 대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
어나면 자신의 무명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부처님을 따라 불법을 귀로 듣고 마음에 새겨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에 정
진하던 성문승 제자들은 홀연 ‘모든 법이 모두 공하며 모든 문자와 글귀가 모두 가명이므로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는 설법을 듣고, 만약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닫지 못한다면 마음속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만약 또 한 사람이 있어 이 경의 문자나 글귀를 듣고도 놀라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참으로 희유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이 말씀하신, 참으로 희유하다는 것은 일체 상을 여읜 대보살을 가리키는 것이지 아예 이를
알아듣지 못한 중생을 가리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제일바
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욕바라밀은 곧 인욕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인욕바
라밀인 것이다.”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은 여전히 제자들이 법상에 집착할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
다. 여래께서는 자신이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이치를 중생이 만약 깨달
으면 이것이 곧 윤회에서 해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므로 이 방법을 해탈의 모든 방법 중
첫 자리에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법을 진짜로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지혜를 깨달은 후에는 즉시 내려놓아 자신의 집착을 깨뜨림으로써 여래
의 지견에 안주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바라밀’은 실로 제일바라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중과의 의사소통
편의를 위해서 세운 방편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제일바라밀이라고 한다”라고 이야
기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또 대보살들이 항상 수행하는 ‘육바라밀’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보살도에서 대승보살이 닦는 ‘육바라밀다’를 ‘육도(六度)’라고도 칭합니다. 즉 보시·지계·
인욕·정진·선정·반야입니다. 매 바라밀다의 본래 뜻은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인공(人空), 법
공(法空)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욕바라밀을 수행할 때 가령 주변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여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이 많이 구겨졌다고 느껴진다면, 일반 범부 중생은 이로 인해 번민하거나 심지어 분노
하고 보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 보살은 ‘일체가 필경 공하다’는 정지견에 안주하
여 묵묵히 그것을 전환하는데 이렇게 행함을 인욕행이라고 합니다.
수행 초기에 수행자는 비록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지만 몸과 마음의 느낌은
여전히 아주 강렬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지견을 굳게 지켜 원망하지 않고 분노하
지 않으며 심신 안팎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면 이를 인욕바라밀이라고 부릅니다. 즉 인욕
행을 통해 일체 상이 허망함을 체험함으로써 심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
입니다.
수행자의 공덕이 점차 원만해지면 이런 인욕조차도 인욕이라 부르지 않게 됩니다. 불법의
근본 지혜 안에서 보면, 수행자와 타인 및 참는다는 그 일 자체가 본질적으로 단지 인연이
모여 나타난 하나의 가상일 뿐 실질적인 뜻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그들에게 어
떤 정의를 내리거나 혹은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하면 이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 갇히고 만
사 만물의 가상에 갇혀 해탈할 수 없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욕바라밀은 곧 인욕바라밀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인욕바라
밀인 것이다”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육도를 수행할 때 이런 정지견을 갖추어야 함을 알려주
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제자들을 위해 이 법문을 세우셔서 제자들이 인욕바라밀을
수행하는 것 같지만 여래의 원만한 경계에서는 모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상과 타상(他相)이 있을 때야만 비로소 모독이 있고 참을 인(忍)이 있는 것
입니다. 제자들이 또한 법상에 집착하여 ‘인욕 수행을 통해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 그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인욕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공덕은 이런 행위를 통해 마음을
진공 경계에 안주시켜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며 마음에 참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
껴져야만 비로소 모든 상으로부터 해탈되는 동시에 일체 상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인욕바라밀’은 단지 하나의 이름일 뿐 본질에서는 그러한 실
체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우리에게 당신이 과거 세상에서 겪었던 수행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과거 그 어느 한 생에 부처님께서는 산림의 한적한 곳에서 홀로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가
리왕이라 부르는 국왕이 있었는데, 그 어느 날 비빈과 시종을 데리고 산림에서 사냥하며 즐
기고 있었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고 계시는 부처님을 발견한 비빈은 마음속으로부터
공경심이 우러나와 부처님의 주위를 맴돌면서 찬탄과 함께 예를 올리고 법을 청했습니다.
비빈들의 부처님에 대한 태도에 가리왕은 마음속으로부터 질투와 원한을 품게 되었고, 부처
님이 인욕행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칼을 뽑아 비빈들이 보는 앞에서 차례로 이
수행자의 두 손, 두 발, 귀와 코 등을 베어냈습니다. 수행자의 전혀 변함이 없는 차분한 얼
굴을 본 그는 베어내면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도 그대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는다는 것을 난 믿지 못하
겠네.”
그때 아직 인욕을 수행 중이라 원만에는 이르지 못했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진짜로 그대에 대해 일말의 원한도 생기지 않았다면 이 절단된 몸은 원래대로
회복될 것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몸은 곧 완전히 원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과거 무량겁 전에 인욕행을 닦을 때의 이야기로, 불경 여러 곳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현우경에는 이 이야기 마지막에 가리왕이 부처님께 감화되어 지성으로 참회하
였다고 적혀있습니다. 당시 선인이었던 부처님께서 “그대가 여색으로 인해 칼로 나의 몸을
베었으나, 나는 대지처럼 참을 것이다. 훗날 내가 성불하면 우선 지혜의 칼로 그대의 삼독
(三毒)을 끊어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전의 기재에 따르면 후에 세존께서 성불
하신 후 처음으로 제도하신 이가 바로 가리왕인바 그가 곧 교진여존자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세에 일찍이 오백세 동안 인욕을 수행하여 인욕선인이 된 적이 있다. 그때에도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는 정지견을 굳게 지키고 있었기에 비로소 인욕바라밀 수행을 원만
하게 이룰 수 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무슨 느낌이 드십니까? 친구 몇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이 있어 인욕행을 수행할 때 가리왕
으로부터 사지가 절단되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으니 이는 범부 경계가 아님에 반해,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에 인욕행을 원만히 수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
다.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예를 드신 것은 여러분더러 극단적인 고행을 참을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상(相)이 없는 인욕을 행하면 곧 성취할 수 있음을 여러분에게 알려주시
는 것입니다.
평소에 사람들도 인욕바라밀을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닦습니다. 불
평과 원한, 서러움, 중생에 대한 실망, 심지어 절망한 가슴 가득 안고 닦습니다. 사실 이것
은 여러분이 여태 자아의 감수 속에 머물러 있기에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이라는 상을 마음
에 두고 있어서 ‘인욕상’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이 또한 인욕바라밀을 닦는다고 말할 수
없으며 다만 모독을 감당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정지견대로 수행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느 날 여러분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
는 것 외에는 다른 결과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반면 부처님은 인욕선인일 때 오백생 동안
심신이 여여부동하고 심신 안팎의 일체 경계에 휘둘리지 않았으며, 무인·무아·무중생으로 생
멸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행함이야말로 진정한 ‘인욕바라밀’입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각도에서 부처님의 이 이야기를 조망해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 세상의 시공간에서 본성이 공하다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온갖 상에 집착하고 온갖
경계에 휘둘리거나 하면 자아의 탐·진·치·만·의와 명예·이익·감정, 그리고 중생의 온갖 욕망
은 가리왕과 그의 손에 들려진 날카로운 칼과 같아 우리는 모두 조만간 몸이 갈기갈기 찢기
고,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삼계육도의 환상 속에 빠져 종래로 해탈한 적이 없으며, 갈 길도 없고 물러날 길
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회전하는 팽이처럼 윤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반야 지혜
는 우리가 모든 상의 환상 경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심신 내외의 일체 상이 허망하여 실체
가 없다는 것을 다시 똑똑히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의 원만한 자성여래가 드러나는데, 이는 늘지도 줄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
끗하지도 않으며, 까마득한 겁의 윤회에도 불구하고 반푼의 손해조차 없습니다. 이는 마치
인욕선인의 몸이 즉시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처럼, 가리왕 또한 진정으로 그를 해칠 수
없으며, 삼계육도의 환영 또한 우리 본유의 원만한 진공자성을 더럽히거나 해칠 수 없습니
다.
이 이야기는 비록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한마디로 간략하게 언급하신 수준에 지나지 않지
만, 지금 우리가 듣는 부처님의 지혜는 모두 부처님께서 까마득히 먼 겁을 거쳐 행하기 어
려운 고행을 겪으시면서 얻으신 보물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선교 방편을 통해 아낌없이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정지견을 듣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미 부처님의 큰 보시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인도가 없다면 생명 회귀의 길에서
우리는 길을 잃을 것이며, 모든 상에 집착하여 겹겹이 쌓인 경계에 미혹될 것입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오백 생 동안 오직 인욕바라밀만을 수행하시고 또한
극단적인 고행도 겪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생활 중 사소한 시련을
겪어도 상심하고 실망하고 냉담해지며, 중생과 불법에 대해 믿음을 잃고 도심(道心)을 잃습
니다. 그러므로 도를 이루고자 뜻을 세운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보고 마땅히 반성해야 합니
다.
물론 부처님께서 여기서 과거세 수행 이야기를 꺼내신 것은, 제자들에게 “봐라, 내가 그
당시 얼마나 대단했는지” 하면서 자신을 자랑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또는 이를 빌어 자신
이 헤아릴 수 없는 고행을 겪고서야 오늘의 성취를 얻었지만 지금 아낌없이 너희들에게 전
수해 주고 있으니 너희들은 응당 감사해야 한다고 과시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부처님
께 이런 생각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부처님 역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한 것
이 되어 부처라 이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상술한 예를 드신 목적은 다만 제자들에게 나 또한 이런 견지(見地)를 통해
수행하여 성취했음을 알려줌으로써 제자들에게 생생한 예증과 본보기를 보여 그들이 수행을
행함에 있어서 그 믿음을 굳건히 하려고 하신 것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모든 상을 떠나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발해야 한다.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응당 머무는 데 없이 그 마음을 내
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머무는 데가 있다면, 그 머묾은 곧 머묾이 아니다.”
이 몇 구절은 무슨 뜻일까요? 금강경이 시작된 인연은 수보리가 부처님께 “선남자, 선
여인이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냈으면 어떻게 안주해야 하며 어떻게 번뇌와 망념을 항복시
켜야 합니까?”라고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부처님은 또다시 이 문제의 해답으로 되돌아가신 것입니다. 부처님께
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은 응당 일체 상을 떠나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는 마음을 내어야만 법을 구하는 길에
서 마음을 안주할 수 있어 번뇌가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중생이 육근과 육진의 경계에 집착하면서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는 마음을 내어 여래
의 진공 경계로 회귀하려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상에 집착하는 한 번뇌와 고통
이 끊이지 않으므로 중생이 일단 무상정등정각의 과위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냈다면 그 순
간부터 마땅히 모든 상을 여의어야 합니다. 즉 수행하고 증득하는 과정에서 여여부동하여
심신 안팎의 경계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며 견해에 있어서 시종일관 ‘일체 상은 허망하여 실
체가 없다’라는 정지견을 유지하면서 바라는 바도 없고 얻는 바도 없이 발심해야만 여래의
진공으로 회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지견으로 발심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안주되고 고민과 망념을 항복 받을 수 있습니
다. 만약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하여 불과를 이루겠다고 발심해 놓고도, 마
음은 오히려 이 세상의 온갖 상과 갖가지 인정세태에 얽매여 집착하면서 득실을 따지며 ‘얻
을 수 있는 법이 있다’고 여긴다면, 이런 발심은 정지견이 아니며 대보살의 몸과 마음을 안
주시킬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상은 본질에서 허망하므로 설령 마음이 그 어디에 머무
는 데가 있더라도 그것은 허망한 터전 위에 안주한 것이어서 실상을 보고 불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러한 이치 때문에 보살의 마음은 색에 머물면서 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제4품에서 이미 보살은 마땅히 머무는
데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만 불도를 원만히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계십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라고 거듭 강조하시는데, 원문에서 “그러한 연
고로 부처가 설하셨다.”라고 하여 앞에서 이미 언급했음을 나타냈습니다. 대승 보살도에서는
보시를 첫 번째 자리에 놓습니다. 불교사를 보면, 대보살은 누세의 수행에서 법을 위해, 중
생을 이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머리와 골수,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보시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강조하시는 핵심은, 보살이 보시를 수행할 때 반드시 부처님
의 반야 지혜를 굳건히 지켜 언제 어디서나 공성을 보아, 자아가 공하고 보시한 모든 것이
공하며 받는 이가 공하고 중생이 공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보시
는 다만 인간 세상의 선한 업이 될 뿐이며, 보살이 행한 보시도 법과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단순한 헌신과 희생으로 변하고 맙니다. 부처님께서는 원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
다.
“수보리여! 보살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한다. 여래는
설하였다, 일체의 상은 곧 상이 아니라고. 여래는 또 설하였다, 모든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
라고.”
제자들의 신뢰와 기억을 깊게 하고, 당신의 말씀이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제자들이
알게 하려고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곡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는 참된 말을 하는 이며,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이며, 허황
한 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이는 여전히 의혹을 품고 있는 중생에게 여래는 속이지 않으니 의심하지 말라고 이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래는 진정으로 만법의 실상을, 만법의 본래 모습을 진실로 말해줄 수 있
는 분입니다. 여래는 종래로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여래는 이미
생명 실상의 종점에 도달했기에 설하는 법은 모두 대중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
는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어 대중이 도달하는 종착점이 달리 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얻은 법, 그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앞서 여러분이 부처님과 수보리 사이에 오고 간 법에 관한 문답을 여러 차례 들
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7품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여래가 설한 바의 법은 있는가?”
물으셨으며, 제10품에서는 “여래가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하고 물으시자 수보리는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실로 아무런 법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앞서 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응당 알아야 합니다, 불법은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는
양약이기에 중생이 길을 잃었을 때 부처님의 정지견이 없으면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바꿀 수
없으므로 진정 꿈속에서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러한 의미에서 불법은 진실하며, 허망하
지 않으며 실재하기에 중생은 이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생이 꿈에서 깨어난 후에는
수행했던 모든 법문과 해탈도(解脱道) 등은 꿈속의 세상과 같아 이것 역시 허망하여 진실하
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일체 상은 허망하다”라는 말을 듣고 불법 또한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고 여겨 계율을 지키거나 법을 닦을 필요가 없다고 여길까 봐 걱정되어 여기에
서 또 “여래가 얻은 법, 그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실
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생이 미혹되어
있을 때에 불법은 의지처이며 해탈의 등대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보시에 대해서 비유를 드셨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이 법에 머문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어둠 속에 들
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보살이 법에 머물지 않은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그
것은 마치 사람이 눈이 있어 햇빛이 밝게 비추면 온갖 형체를 보는 것과 같다.”
확실히 보살도에서 만약 수행자가 보시를 행할 때 부처님의 반야 정견을 깨닫고 그에 따
라 행한다면, 즉 보시하는 자도 공하고 보시한 물건도 공하며 받는 자도 공하여, 보시하는
전체 행위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얻고자 하는 것도 없으면, 수행자는 점차 이 세상
의 만법에서 벗어나 만법의 실상을 똑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은 부처님의 비유처
럼, 진짜로 반야 정견의 가르침을 따른 보시는 마치 햇살이 비추는 것과 같아 수행자 마음
속에 있는 무명과 어둠을 빠르게 타파해 줄 것입니다. 만약 구하는 바가 있고 집착하는 바
가 있어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시한다면 수행자가 설령 오랫동안 많이 보시하더라도 여전
히 무명의 어둠 속에 갇혀 지혜의 빛이 드러나지 못해 공성으로 증입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모든 불제자를 격려하시면서 미래의 세상을 언급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를 포함해서 모두가 이 경전을 열심히 읽고 외우고 이 경전의 지혜를 받아 지녀 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이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공덕을
거듭 언급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앞으로 오는 세상에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전을 읽고 외우며, 믿고
받아들여 받들어 행한다면, 여래는 부처의 무량한 지혜로써 분명히 말하건대, 이들 모두가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제15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여기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매일 오전에 항하의 모래 수량만큼의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또 점심에 항하의 모래 수량만큼의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다시 또 저녁
에 항하의 모래 수량만큼의 몸과 목숨을 보시한다고 하자. 그리고 또 이와 같이 매일 헤아
릴 수 없을 정도로 백천만억 겁의 시간 동안 몸과 목숨을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또 어
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듣고 절대적인 믿음을 내어 비방하지 않는다면, 그 복덕이 앞 사
람보다 뛰어넘을 것이다. 하물며 이 경전을 베껴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설해주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수보리여, 요약하여 말하건대, 이 경전은 가히 생각할 수도 없고 가히 헤아릴 수도 없이
가없는 공덕을 지니고 있다. 이 경은 본래 여래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발심한
대승 보살을 위해 설한 것이며, 부처의 가장 높고 가장 원만한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한 사
람을 위해 설한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능히 스스로 수지 독송하고 널리 사람들을 위해 설
한다면, 이 사람은 생각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가없는 공덕을 가히 성취할 것임을 여래
는 완전히 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바로 여래의 최상, 최고의 원만한 가르침을 짊어진 것
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수보리여, 만약 한 사람이 다만 최상도 아니고, 가장 원만하지도 않
은 교리를 배우기 즐기며 자아·타인·중생·수자 등 여러 지견에 집착하고 취하거나 버린다면
그는 반드시 이 경전의 교리를 듣고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니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해설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작은 법을 즐기는 자[樂小法者]”라는 개념을 언급하셨는데 “작은
법을 즐기는 자”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아상과 수자상에 집착하여 장생불로의 법을 추
구하거나 신통과 도술을 추구하는 자들이 바로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이며, 이들은 부처님
께서 말씀하시는 공성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비록 듣고 나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
하더라도 진공 지견에 안주하여 수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구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얻고자 하는 것도 없는 마음으로 보시하려 하지 않
을 것이며, 일체 상이 허망하다는 이치로 인욕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심 깊은 곳에
서는 늘 자아를 아껴 자아가 서러울까,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법술
을 배우거나 심지어 선정을 닦는 것조차도 자아를 과시하고, 자신의 남다름을 보여주며, 개
성을 뽐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작은 법을 즐기는
자는 이 경전의 최고 반야 지혜를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공성의 정견에 안주할 수 없는가? 그 이유
는, 이런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이미 자아·타인·중생·수자의 상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부 궁극적이지 않은 작은 법을 배우고 받아들이기를 좋아하기에 대승의 공
성 정견을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할 수 없다.”
“수보리여! 어느 곳에든지 이 경전이 있게 되면 바로 그곳을 일체 세간의 인간과 천인,
아수라가 기꺼이 공양해야 한다. 이곳에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하며,
모두 마땅히 공경하고 예배하고 주위를 돌면서 온갖 꽃과 향을 그곳에 흩뿌려야 한다.”
제16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보리여,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믿고 받아들여 수행하고 독송함으로써 사
람들에게 경시당하고 모독과 조소를 받는다면, 가령 이 사람이 전생에 지은 악업과 과보로
삼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하나, 현생에 이 경전을 지녀 사람들로부터 경시와 천대를 받은 연
고로 말미암아 전생의 죄업이 없어질 것이며 게다가 가장 높고 가장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이 경전의 지혜가 악업을 없앨 수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가령 어
떤 사람이 죄업으로 말미암아 응당 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한데 이 경전의 지혜를 받아 지녀
닦은 까닭에 세상 사람들의 경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그 전생의 악업은 그로 인해 없어진다
는 것입니다. 이는 큰 과보를 작게, 혹은 사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본래 삼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한데 사람들에게 경시와 천시당하는 과보만을 받고, 놀랍게도 악업의 형체가 사라질 뿐
만 아니라 반드시 무상정등정각의 원만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확언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의 이 말씀을 듣고 저는 말법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고무적인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
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나니 그때 금강경을 받아 지니면서 실천했던 한 친구가 생각납니
다. 그는 이 구절을 읽고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분명 세세생생 많은 악업을 쌓았을 거야. 이번 생에 지난 수십 년만 봐도 잘한 게
별로 없거든. 부처님 말씀에 내가 금강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할 때 누군가가 나를 천시하
기만 하면 나의 악한 업보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어. 지금 나를 천시하
는 사람을 못 찾아 고민이야. 네가 내 친구니까 나를 도와 나를 좀 경멸해줘.”
물론 이것은 농담입니다. 사실, 만약 그대가 진정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아·무중생의 도
리를 이해하였다면 그대의 앞선 생각은 바로 경전을 독송하는, 일찍이 악업을 쌓아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야 할 그 사람이고, 그대의 다음 생각은 바로 앞선 생각을 경멸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무아, 무인을 깨닫고 난 뒤라면 그대의 악업은 분명 이미 끝났고 또한 무상정등
정각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그대가 반야 공성의 이치를 수행하고 증득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의
천시와 비난을 받는다면, 응당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성내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게 예
배하고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대의 악업을 소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
다. 사실 이 세상에서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만약 다른 사람을 위해 반야 공성의 이치를
해설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대가 미신에 빠져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혹은 그저 금강경 이름만 언급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천대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받
아 지녀 읽고 외움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생
명의 실상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무지로 인한 이런 천대와 비난은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거의 헤아릴 수도 없는 기나긴 세월에 내가 연등부처님
의 처소에서 이미 팔백사천만억 나유타의 많은 부처님을 만나 성심성의껏 공양하고 받들어
섬겨 결코 단 한 번의 귀한 만남도 헛되지 보낸 적이 없다. 만약 다시 어떤 한 사람이 있어
내가 열반에 든 후의 그 말법 시대에 능히 이 경전을 믿고 받아 지녀 독송한다면, 그가 얻
게 될 공덕을 내가 과거세에서 모든 부처님을 믿고 받들어 공양했던 그 공덕과 비교할 때,
나의 그 공덕은 그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 천만억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
며 나아가 숫자의 비유로도 도저히 닿지 못한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열반한 후의 말법 시대에 능히 이 경전을 믿고 받
아 지녀 독송하여 얻게 될 복과 공덕을 내가 만약 하나하나 자세히 말한다면, 아마 어떤 사
람들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미친 듯이 어지러워져 반신반의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경이 설하는 이치는 불가사의하며, 이 경을 닦아 얻는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비단 이 경전을 받아 지녀 독송하는 공덕을 찬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다고 하셨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불법은 인과를 이야기합
니다. 어떤 원인을 심으면 어떤 결과를 얻으므로 선에는 선한 과보가 있고 악에는 악한 과
보가 따른다고 합니다.
지금 금강경을 읽어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아는 것, 이 또한 하나의 원인입니다. 그런
데 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과보는 그야말로 모든 상상을 초월하여 불가사의하다는
것입니다. 반야 지혜가 가져다주는 일체 공덕의 상을 부처님께서 “내가 만약 자세히 다 말
한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듣고 마음이 미쳐 흐트러지거나, 반신반의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 스스로는 과학이 이미 아주 많이 발달하였다고 자부하지만
모든 생명의 진실에 대해서는 아직 다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비록 오늘날 부처님께서
반야 지혜가 가져다주는 공덕을 다 말씀하신다고 하여도 비단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여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심이 깊은 불자라도 내심이 흐트러질 것입니다. 왜
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인간의 의식과 인지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