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
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 선여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한다. ‘나는 일체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일체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지만
실제로 열반을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인상·중
생상·수자상이 있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보리여! 아뇩다라삼먁삼보
리의 마음을 낸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
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은 따로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은
실로 없다. 수보리여!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
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석가모니라고 부르는 부처가 될 것이
다’라고 수기를 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법이 없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석가모니라고 부르는 부처
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셨다. 왜냐하면,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있는 그대로
의 모습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
다’라고 말한다면, 수보리여! 부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그러한 법은
실로 없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일체법이
라 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아닌 까닭에 비로소 이름하여 일체법이라 한 것이다. 수보리
여!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
하여 큰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이 만약 ‘내가 반드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
리라’고 말한다면, 그는 곧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보살이라 이름
할 수 있는 법이 실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고 부처는 설한 것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내가 반드시 불국토를
장엄케 하리라’고 말한다면, 그를 이름하여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불국
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곧 장엄하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장엄하게
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비
로소 그를 진정한 보살이라 부를 것이다.”
금강경의 서막은 수보리가 부처님께 드린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원문은 이러합
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
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제17품에 이르러 수보리는 다시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원문은 이러합니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앞뒤 문맥을 비교해 보면 수보리는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고 부처님의 답변도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그러나 경전의 서두에서는 부처님은 전편을 통틀어 답변을 전개하셨습니다. 당시
제자 마음속에 깨뜨려야 할 상과 집착이 여전히 많았기에 한두 마디 가르침으로 그것을 다
깨뜨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17품에서의 답변은 앞서 설하신 모든 가르침 위에
세운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 제자들에게 아직 타파되지 않은 ‘본체’
즉 근본적인 ‘아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즉 공(空)과 유(有)를 논할 수 있는 ‘마음’, 여여부동하는 ‘마음’, 비공즉유(非空即有)의
‘마음’이 있어 이를 ‘여래’·‘진공’·‘자성’·‘부처’ 등으로 이름한다는 식의 ‘상’이 여전히 제자들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러한 본체에 대한 집착을 깨
뜨리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내는 그 어떤 존재’도 없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즉 여러분의 머릿속이나 경계 속에 있는 그 존재를 가아(假我)·진아(真我)·
범부·허공 또는 진공이라 부르든 상관없이 마음을 내는 그 존재는 사실 없다는 것을. 이 말
씀을 듣는 순간, 수보리와 제자들이 문득 내면을 돌이켜 보면 그 어디에도 머무는 데가 없
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금강경은 ‘금강반야회’에서 부처님
께서 설법하신 말씀의 단편들을 발췌하여 집대성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편찬자는 여
기에서 수보리가 다시 부처님께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는 식으로 텍스트를 구성했던 것입니
다. 이는 독자들이 제17품 이후 부처님 설법의 중점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한 조치입니다.
부처님의 앞뒤 답변 내용이 비록 엇비슷하기는 하나 그 역점 포인트는 다릅니다. 부처님
께서 금강법회에서 수보리와 반복적으로 이렇게 문답하신 것은 아닙니다. 또한, 어떤 이는
수보리의 이번 질문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후오백세의 중생을 위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만 텍스트 후반으로 가면서 부처님의 설법 중점이 상을 타파하는 데 있는 것을 보아 저 개
인적으로는 편찬자가 이를 강조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구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제17품의 대의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냈다면, 마땅히 어떻게 안주하고
어떻게 자신의 번뇌와 망심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무상정등정각을 구하고자 발심하였을 때는 마땅히 먼저 이와 같은 마음
을 내어야 한다. ‘나는 마땅히 삼계육도의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생사윤회의
고해에서 벗어나 열반의 고요한 여래 경계에 들게 하리라.’ 비록 이렇게 일체중생을 제도하
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사실 나에 의해 제도된 중생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지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자아·타인·중생·수명 등 온갖 상에 대한 분별
이 있다면 그는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의 문답에서 수보리의 질문과 부처님의 해답은 앞서 제2품의 내용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언급되는 부처님의 해답이야말로 이 품에서 깨뜨리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즉 “도대체 누가 무상정등정각을 구하는 마음을 냈는가? 변함없는 진실한 이런
마음, 이런 경계가 존재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마음을 내고 있는가? 어차피 무아·무인이라
면 누가 지금 마음을 내고 있는가? 혹은 ‘여여부동하는, 생멸이 없는, 형체가 없는’ 어떤 것
이 있어서, 그것이 원만해지기를 기다리고 불과 획득을 기다린단 말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원문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중의 ‘법’은 사람·마음·경계이거나 혹은 보이
거나 보이지 않는 물질 혹은 그대가 그렇다고 여기는 그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경문 서두에서 수보리는 지금 막 발심한 경우라면 어떻게 안주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는 불법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 모두가 보편적으로 주목하는 문제입니다. 즉 불과를 성취
하고 싶으나 내심은 번뇌로 어수선해서 보리도에 마음을 안주시킬 수 없을 때, 사람들의 초
점은 자연히 ‘어떤 수행 방식이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가에’에 맞춰집니다.
부처님께서 온갖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모든 상은 허망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하면 보시나 인욕 등의 보살행을 닦는 중에 공덕이 점차 공성으로 모여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화제를 돌려 제자들이 문제 자체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대가 무상정등정각을 얻고자 발심하였다고 하는데, 만약 ‘무아’라면 도대체
누가 발심하고 있냐고? 부처님은 확신에 차서 이런 중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긍정하셨습니
다.
만약 발심한 이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상과 중생상이 있어 미래에 불과와 부처의 모습을
보기 기다리게 되어 얻을 법이 있고 이룰 수 있는 과위가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
로 우리가 ‘발심’하여 불과를 구하고자 할 때 알아야 할 근본적인 견지입니다. 즉 마음을 내
는 그 순간이 곧 ‘무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 지혜’에 근거하여 화엄경에서는 “보살은
처음 마음을 낼 때 곧 정각(正覺)을 이룬 때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금강경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는 늘 선종의 이조(二祖) 혜가(慧可)가 달마대사에
게서 법을 구하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조가 팔을 자르는 고통을 참으면서 눈밭에 꿇어
앉아 조사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불안하니 부디 안심의 법을 일러주십시오.”
달마대사는 눈을 크게 뜨고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갖고 오라. 내가 그대를 위해 안심시켜 주리라.”
그때 이미 눈밭에서 사흘 동안 밤낮으로 꿇어앉아 있었던 데다가 방금 스스로 팔 하나를
절단한 이조였기에 달마의 호통에 순간 모든 마음의 생각이 다 떨어져 나가 몸과 마음은 마
치 온통 하얗고 텅 빈 대지와 같아졌을 것입니다.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마음을 찾았으나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낮은 소리는 하얗고 끝없이 텅 빈 몸과 마음의 세계에 울려 퍼져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
리처럼 생겨나는 곳도 사라지는 곳도 없이 맴 돌뿐 흔적도 없었습니다.
조사는 확신에 차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마음을 안온케 하였다.”
지금 부처님께서도 “누가 무상정등정각을 내었는가?” 묻는 것 또한 달마대사의 “그 마음
을 갖고 오라. 내가 그대를 위해 안심시켜 주리라.”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스스로 되돌아본다면, ‘자아’, 그리고 ‘마음을 내는 실체’를 찾기란 매
우 어려울 것입니다.
불교 역사상 금강경에 단락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던 소명태자가 이 품
의 이름을 ‘구경무아분’이라고 지었는데 꽤 탁월한 선택입니다. 앞서 부처님께서는 이미 수
보리와의 문답 과정에서 아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많이 다루셨지만, 여기에 이
르러서야 진정 궁극적으로 자아가 부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전생에 연등불 처소에서 불법을 배우던 사례를 들어 말씀하셨습니
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무상정등정각을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는가?”
즉 여래가 과거에 어떤 ‘실체’가 있어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실체는
사람·마음·경계 혹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수보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무상정등정각을 얻을 만한 법은 따로 없었
습니다.”
이때는 수보리가 이미 형상도 없고 일념도 없는 여래의 진공 경계를 깨달은 상황이었기에
곧바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답변을 긍정하고 나서 말씀하셨
습니다.
“그렇다. 만약 내가 일찍이 연등부처님 그곳에서 아직 어떤 마음이나 한 생각, 혹은 어떤
경계가 있어 무상정등정각을 얻는 중이라고 여겼었다면 ‘여래 본유의 진공 경계’에 안주하
지 못한 것이기에, 연등부처님도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부처
가 되리라’고 수기를 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바로 내가 ‘일체법이 모두 공하다’는 경계에
안주하여 여여부동하며 정진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였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비로소 내가 어
느 세상에 반드시 성불하여 이름은 석가모니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과거 무량겁 동안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보살도를 수행하셨던
일을 언급하셨습니다. 연등부처님께서는 제자가 이미 부처의 지견도(知見道)에 안주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즉 ‘중생을 널리 제도하겠다고 서원을 세우되 내심에는 제도할 중생이 실
로 없고’, ‘아상·중생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을 수행하되 실로 참아야 할 욕됨이 없음을
알고 화를 내지 않고’, ‘보시를 수행하되 보시하는 자, 보시를 받는 자, 보시하는 물건이라는
상에 집착하지 않고 공덕의 상이나 법상, 불과상(佛果相)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이었던 것
입니다. 당신께서는 부처님의 정견을 적용하여 끊임없이 허망한, 그러나 자신을 미혹시키는
탐·진·치·만·의 그리고 습기·욕망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등부처님께서는 제자를
위해 미래 어느 세상에 불과를 원만히 이루리라고 수기를 내리셨던 것입니다(수기는 성불의
보증을 의미함).
물론, 만약 그 어떤 것이 있어 무상정등정각을 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대상도 연등
부처님의 수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만법은 무아라는 것, 이것이 바로 여래의 진정한 뜻
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즉 일체 만법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앞에서 경청한 모든 이치 즉 ‘모든 상은 허망하여 실체가 없기에 일체 상에 집
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인데 이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여래의 경계’에
안주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래의 경계”는 여러 제자가 아직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머릿속에 있는 환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은 ‘허공” 같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일체를 부정한 후에 남은 경계,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래의 진공
경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계속하여 제자들을 위해 ‘여래’의 경계를
설법하셨습니다. 이 지점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래와 같이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곧 일체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여래의 경계가 바로 만법 본래의 모습으로서, 원래부터 그러하고 원래부터 모두
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별과 집착을 타파하고 나면 드러나는 그 모습이 바로 여
래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이어가셨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래는 무상정등정각의 과위를 얻었다’라고 말한다면 수보리여, 실제로
거기에는 발심한 자도 없고 또한 과위를 얻은 자도 없다. 바로 이러하기에 부처는 무상정등
정각을 얻은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우리는 진정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발심한 자도
없고 얻을 과위도 없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하고,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했을 때, 비로소 무상정등정각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
든 유위법(有爲法) 공부를 보면 그 어떤 기능·이론·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있고 마지막에는
항상 눈에 보이는 최고의 성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 공부는 만법이 허망하다는 것을 완
전히 깨닫고 나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때 곧
최고의 원만한 깨달음과 지혜를 이루게 됩니다. 이때의 깨달음과 지혜에는 상(相)이 없습니
다.
계속해서 원문을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가 성취한 무상정등정각 이 일 자체에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누군가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였을 경우라면 모
든 상에서 벗어나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부재하기에 ‘실다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 모든 상에서 벗어나고 나면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적멸에 들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만법은 본래 원만하고 일체의 지혜와 공덕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음
을 알게 됩니다.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멈추는 모든 행위 속에 항하의 모래만큼이나 헤
아릴 수 없는 오묘한 작용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헛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일체법이라 하는 것도 곧 일체법이 아닌 까닭
에 비로소 이름하여 일체법이라 한 것이다.”
이 대목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나니 지난
많은 세월 동안 수행길에서 만났던 몇몇 도반들이 생각납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부처님께
서 말씀하신 공성의 이치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채 이 말씀만을 문맥에서 끌어내 기억해
두고 결국 이 말씀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만난 그 도반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외모를 가꾸지 않았으며 일상생활에서는
세속의 예의도 별로 지키지 않았고 풍류를 즐기고 방탕하며 절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정도 닦지 않았고 법문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해서 성불할 수 있겠는가 하
고 물어봤더니 그는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며, 여래의 경계에서는 모든 것이 청정하며 더럽혀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직 일체법이 허망함을 진정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여러 경계에 휘
둘리며 상에 미혹되고 끊임없이 자아의 몸과 마음의 느낌에 집착하고 이 세상의 칠정육욕에
매여 있으며,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강한 데다가 여전히 두렵고
갈구하는 것이 많아 이해득실에 밝고 평등심이 없다면, 이 세상의 일체법은 그를 해탈이 아
닌 모두 윤회 쪽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불법은 사람을 생사윤회에서 건져내기 위한 것인데
만약 부처님의 공성 이치를 깨닫지 못해 아집을 진정으로 내려놓지 못한다면, 일체법이 그
에게 있어서 불법이 될 법은 하나도 없고 모두 업을 짓고 윤회하게끔 작용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불교사를 보면 선종의 이조(二祖)는 만년에 기방을 드나들었습니다. 이조는 이미 공성을
증득한 조사이기에 일체법에서 공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공(濟公) 생불은 개고기를 품에
넣고 다니면서 “술과 고기는 창자를 지나가고, 부처님은 늘 마음속에 계신다.”라고 말씀했습
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를 배우는 자, 나를 비방하는 자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말
씀했습니다. 그것은 공성을 증득하지 못한 자는 그분을 따라 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논란이 많은 남여쌍운도(男女雙運道) 경우도, 이 법문에서 진정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양쪽 모두 공성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상에 집착하는 마음에다 정욕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법문에서 공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금강경의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라는 구절을 떠올릴 때, 그 뒤에 이어지는
“이른바 일체법이라 하는 것도 곧 일체법이 아닌 까닭에 비로소 이름하여 일체법이라 한 것
이다.”라는 구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체법이 모두 공하여 자성이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항상 이에 안주해야만 비로소 일체법에서 여래를 볼 수 기 때문입니다. 그때에야 비
로소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라고 말할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으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제10품입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으셨습
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왕 하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이 크다고 하
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몸은 몸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품에서 부처님께서는 공덕으로 이룬 몸의 형상에 대한 제자들의 집착을 파하려고 하셨
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부처님께서는 또 큰 몸을 언급하셨습니다. 원문은 이러합니다.
“수보리여,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과 같은 것이다.”
수보리가 곧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매우 큰 것은, 곧 큰 몸이 아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큰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미산왕처럼 큰 몸은 대보살이 수행 중에 얻은 장엄한 공덕의 상
을 가리킵니다. 이 몸은 법계에서 수미산왕만큼 클 수 있습니다(수미산을 불교에서는 우주
에서 가장 높고 가장 큰 산으로, 또한 우주의 중심으로 여김). 그러나 이렇게 공덕이 장엄
하기를 거대한 몸 같다고 하여도 그 안에 진실한 자아가 없으므로 사실은 장대한 몸인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이름을 붙여 장대한 몸이라 부를 뿐입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장대한 몸’을 논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수미산왕 같은 큰 공덕의 몸
또한 무아, 무심이기에 가명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부처
님께서 일체법이 모두 불법으로서 모두 자성이 없고, 무아라고 방금 언급하셨기에 이 공덕
의 상을 빌려 위 관점을 계속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어떤 제자들이 공덕으로 세워진 몸
의 형상에 경외심을 느껴 상에 집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보살이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멸도하리라’고 한다면 그는 진정한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진실로 그
어느 한 사람이나 마음, 혹은 경계를 이름하여 보살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
처는 말한다, 일체법이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라고.”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발심하여 보살도를 행하되 거기에는 보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 행위 모두 공한 이것이 바로 대보살
의 경계이며, 여래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고 부처는 설한 것이
다.”
이 구절은 여전히 앞에서 설하신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라는 말씀과 호응하므로 앞뒤
문맥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일체법은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으므로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다.”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보살이 ‘나는 반드시 불국토를 장엄케 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진정한 보살이
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케 하는 것은 곧 장엄케 하는 것이 아니
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장엄케 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상술한 이 단락 또한 제10품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원문은 이러합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것은 장엄하게 하는 것이 아
니므로 비로소 이름하여 장엄하게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단락을 비교해 보면, 부처님께서 상을 깨뜨리시는 그 중점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
게 됩니다. 제10품에서 부처님께서 깨뜨리려고 하신 것은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라는 이
행위 자체에 대한 중생 마음속의 집착입니다. 이에 반해 제17품에서는 보살의 ‘자아’를 깨뜨
리는 데 역점을 두셨습니다.
보살의 인지 가운데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보살이 보살
도를 행함에 있어 매 순간 남을 이롭게 하지만, 실상 아(我)도 없고, 인(人)도 없으며, 중생
도 없으므로 매 순간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며, 모든
공덕을 자신에게 회향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모든 공덕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자신 마음속의 불국토는 점점 장엄해지는 반면 자신의 자아는 점차 무아(無
我)의 경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만법은 장엄한 법계 일체 그 자체로 되어가니 이것
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법이 사실 무아이
므로 불국토를 장엄하게 한다는 이 일 또한 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보살이 이런 견지에 안주하지 못한 채 남을 위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다만 인간 세상
의 선업을 짓는 것일 뿐 진정한 보살행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본
품의 마지막에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느 한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비로소 그를 진정한 보살이라
부를 것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 그의 인지 속에는 두 가지 경계가 확립됩니다. 하나는 ‘나’, 다른 하
나는 ‘나’에 상대하여 구축된 만법인바 거기에는 타인과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궤도의 가지
각색의 유정 중생들, 그리고 자연계의 풀과 나무, 바위 같은 영(靈)은 있으나 정이 없는 무
정 중생들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평생 집착하고 분별하고 취하고 버리고 잃고 얻는
것은 사실 이런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과 사건 그리고 사물은 여러 인연이 모
여서 이뤄진 것일 뿐 거기에는 변하지 않는 진실한 자성이 없으므로 이러한 것 모두 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러한 모든 것들의 생멸과 득실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냐하면 이 일체의 생멸과 득실은 단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로 ‘무아법’이라고 부르
는데 불교에서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눠서 부릅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인무아(人無
我)만 증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적멸에 머물면서 그 적멸을 낙으로 삼아 윤회에서 도피할
뿐, 만법이 본래 비어 있다는 ‘만법본공(萬法本空)’의 이치는 증득하지 못했습니다. 괴로움
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 하지만 괴로움 또한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증득하지 못했음을
입증할 뿐이고, 정욕을 끊어내려 하지만 정욕 또한 공하다는 것을 증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법무아(法無我)를 증득하지 못했기에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수행과 증득
이 원만하거나 궁극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보살은 무아의 정견(正見)으로 삼계육도 만법에 자성이 없음을 증득하면 윤회
또한 가상(假相)이 됩니다. 그리하여 세세생생 육도윤회의 환상적인 경계를 드나들면서 고
해에서 여전히 해탈하지 못하는 중생을 제도하는데, 이것을 ‘유희는 필경 공하다[游戱畢竟
空]’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의 이 이치를 통달한 사람만이 비로소 참다운 보살이라
칭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