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을 배우는 것이 당신에게 중요한가요?

불법을 펼치는 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너는 끊임없이 말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바로 똑같은 이치다. 그 이치가 사실 그렇게 깊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딴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도무지…… 각자 앉아 법문을 듣지만, 그는 불법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여기 앉아 불법을 듣는 것은, 그저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려는 것이다. 인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세속법에 깊이, 그리고 단단하게 빠져 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그런 일,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불법이 아니라 집안의 칠정육욕이다. 그럴 때 모든 불법은 귀를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다. 그런 이치는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출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리심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에 속세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언제나 집안의 그런 일만 생각한다. 언제나 집안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여긴다.

집안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에서 그것에 집착하고, 마음에 걸어 두고, 곧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다른 것은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날, 너무 많은 것을 겪고, 다 겪어 넘기고 나면, 갑자기 그 속에서 벗어나게 된다. 갑자기 세속의 속세적인 것들, 먹고 마시고 누고 자는 일, 재물·여색·명예·음식·수면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이 문득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 곧 마음속에 있는 그런 것들을 그렇게 무겁게 여기지 않게 된다. 감정 같은 것들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여전히 얽매이고 얽히고설키지만, 네 마음속에서 그 위치는 더 이상 무겁지 않다. 이때가 되어서야 불법이 들어갈 수 있고, 그는 알아들을 수 있으며, 너는 이것이 이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고, 그래야 불법이 들어올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 마음속에 장애가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 더 큰 원인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이런 생활 환경 속에서 과학과 유물론에 대한 설명을 너무 많이 들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특히 중국에서 자란 우리 또래는, 이 영역을 전혀 접해 본 적이 없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전혀 신앙을 접해 보지 못했고, 신앙이라든가 생명의 의미 같은 것을 탐구해 본 적도 없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러니까 종교적 신앙과 불학에 대한 이해가 아주 얕다. 네가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에 올라 부처님께 절을 하고, 향을 피우는 정도다. 이런 수준을 접해서는 네가 감동받을 수 없다.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절하는 것만으로 네 마음을 직접 감동시키기는 어렵다. 너는 그 돌로 만든 불상이 냉랭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는 너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특히 네가 번뇌하고 괴로울 때, 죽을 듯이 괴로울 때, 그 보살은 그렇게 차가운데, 어떻게 너를 구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믿음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너는 모른다. 그가 너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지혜이지, 그 차가운 불상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그 향 하나를 꽂아 놓고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되겠지만, 괴로워 죽겠는데도 여전히 아무도 너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모른다. 거기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부처의 지혜다. 그것이 너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배움이 필요하고, 이런 유형의 스승을 만날 필요가 있다. 그는 네게 불학의 지혜를 말해 줄 뿐, 향을 피우러 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네가 괴로울 때 그는 네게 말해 준다. 괴로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네가 왜 괴로운지. 네가 무엇에 집착했는지. 이것이 지혜다.

네가 괴로울 때 절에 가서 향을 피우면 괴롭지 않아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너를 지켜 주실 거라는 것도 아니다. 돌아오면 너는 여전히 똑같이 괴롭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점차 신앙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 하나의 간극이 있다고 느낀다. 마치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너를 도와주지 못했으니까.

특정한 시간과 공간, 특정한 시공간이겠지. 왜냐하면 미래에 수십 년이 지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너희처럼 밖으로 나와 친구들이 함께 모였을 때,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모두 불법이라면 말이다.

만약 네가 어릴 때부터 집에 앉아 있을 때 부모님이 나누는 이야기가 모두 이런 것이고, 선생님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친구들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모두들 부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애가 없었을 것이다. 설령 네가 불법을 배우지 않는다 해도 장애가 없다. 네 입에서 나오는 것이 곧 부처의 지혜이고,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인데, 어떻게 장애가 있겠는가?

결국 환경이다. 우리는 지혜가 없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아주 세속적이고 물욕의 충족이 중심이 되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물질적 차원의 충족을 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빨리 배우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물질적 차원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계속, 계속, 계속 나아가 끝에 다다르면 이미 몹시 지쳐 있다. 마지막에는 일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가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은가? 너는 매일 불법을 이야기하는 그런 환경,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신앙의 전반적인 차원에서 보면, 사람들의 불학 지혜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그러니까 비교적 얕다. 이 신앙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믿는 데 머물러 있다. 경을 읽고, 불호를 염송하고, 향을 피우고, 윤회를 말하고, 인과를 말하는 정도다.

하지만 이것은, 내 생각에, 우리가 수십 년에 걸쳐 형성해 온 그 견고한 습기와 욕망을 놓고 보면, 여전히 우리를 흔들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한가할 때 불법을 배워 보자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리사욕에 닿는 일이 나타나면, 우리는 곧 부처님을 한쪽에 잊어버리고, 인과도 보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자기중심적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고, 얼마나 이기적이든 그 이기적인 대로 산다.

불법을 배우는 많은 사람들이 몹시 집착하고, 몹시 이기적이다. 이것은 나중에 불법을 배우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불법을 배워서 저런 꼴이 됐으니, 우리는 그만두자고들 한다. 바로 그런 것이다.

문제는, 네가 자기중심적일 때 마음속에 부처님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부처님이 있으면 괜찮다. 그러나 만약 네가 신통을 가져 네 모든 생각을 살필 수 있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마음속에 어느 순간 부처님이 있었는가? 너는 매 순간 생각할 뿐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떡하지.

그리고 설령 부처님을 떠올린다 해도, 나는 부처님과 어떻게 하겠다, 부처님과 조건을 흥정하겠다,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빌겠다, 아니면 나는 성불하고 싶다. 그렇지 않은가? 언제나 그 ‘나’가 거기 있다.

그러니 네가 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해도, 신앙도, 모든 것의 가장 큰 장애는 그 ‘나’다. 너는 한 순간이라도 ‘나’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보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나’를 생각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괜찮다. 이것도 아집을 깨고 보살도를 행하는 것이다. 너는 어딘가에 마음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남을 이롭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고, 공덕이다.

주: 이 글은 양닝 선생님의 가르침 영상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영상과 다른 부분이 있을 경우 영상을 기준으로 합니다. 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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